오늘~ 6/0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북한, 월드컵 기념우표 발행 [포토] 北, 월드컵 기념우표 제작 조선중앙통신은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회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고 1일 보도했다. 2010.6.1 http://news.msn.co.kr/article/read.html?cate_code=8000&article_id=201006012129128004
2008 -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생 로랑(Saint-Laurent, Yves) 사망 생 로랑 [Saint-Laurent, Yves(-Mathieu), 1936.8.1~2008.6.1] ‘패션혁명’ 디자인한 이브 생로랑 떠나 여성 바지정장·흑인모델 첫선 보인 ‘세기의 디자이너’ “여성에게 입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사랑하는 남자의 두 팔이다. 이 행복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내가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사진)이 전설 같았던 71년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오랜 친구인 피에르 베르제는 생로랑이 1일 밤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베르제는 사업동료이자, 한때 그의 동성 연인이었다. 생로랑은 현대 여성의 패션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지 형태의 여성 정장과 여성용 턱시도 ‘스모킹’을 처음 선보였다. 그가 ‘개척’한 여성용 피코트·트렌치코트·트라페즈드레스 등은 여전히 대중적인 사랑을 누리고 있다. 표범무늬나 사파리 웃옷 같은 선구적인 과감한 시도는, 패션쇼에 흑인 모델을 기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936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생로랑은 17살 때 파리의 한 디자인 대회에서 1등상을 따내면서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54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그를 만나자마자 곧 채용했다. 3년 뒤 디오르가 숨지자 불과 21살의 나이에 디오르 의상실을 떠맡은 생로랑은 디오르를 항상 “예술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으로 꼽아왔다. 굵은 검정 뿔테 안경으로 유명했던 생로랑은 62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의상실을 열어 60~70년대 파리를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 머릿글자를 딴 상표 ‘이브생로랑’(YSL)은 기성복·향수·화장품·액세서리 등으로 확장됐고, 카트린느 드뇌브나 모나코의 그레이스 공주 등 명사들을 고정 고객으로 사로잡았다. 83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살아 있는 패션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생로랑의 작품을 전시해 그를 예술가 반열에 올렸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생로랑을 60년대 이후 세계적 경제성장이 젊은층과 여성의 경제적 자유를 증대시킨 데 따른 수혜자였다고 평가했다. 99년 생로랑은 ‘YSL’을 7천만달러(약 710억원)에 패션그룹 구치에 넘겼다. 뒤이어 2002년 1월 고별 패션쇼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나는 공포와 끔찍한 고독에 익숙하다. 신경안정제와 마약같은 거짓 친구들, 우울증의 감옥과 병원, 이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패션계는 그를 크리스티앙 디오르, 코코 샤넬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로 평가한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2008-06-02 오후 06:33:47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291097.html
경복궁, 경회루 특별개방 문화재청 (청장 兪弘濬)은 국민들의 문화유산 접근성을 높여 문화체험 및 활용을 통한 목조건축 보존 효과를 극대화 하기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경복궁 경회루 (국보 제224호)를 오는 6월 1일부터 1일 3회 일반인에게 특별 개방한다. ◎ 경회루 특별관람 시행 개요 오형준 05-05-25 10:34 /궁궐길라잡이 커뮤니티 /KYC(한국청년연합) http://www.palaceguide.or.kr/gnuboard4/bbs/board.php?bo_table=gnu_news&wr_id=18&page=8
- 청계천 야경 (안양 유용상 님 자료제공)
2005 - 청계천 통수식
물 흐르는 청계천… 통수식 열려 (사진) 서울시는, 오는 10월1일 청계천 복원 완공을 4개월 가량 앞둔 1일 통수식을 가졌다. 오전 10시 30분 서울 광화문 머니투데이 본사 앞 청계광장서 열린 통수식은 장통교까지의 용수공급 점검을 위해 실시됐다. 김주동 기자 /머니투데이 2005.06.01 11:24 http://news.mt.co.kr/mtview.php?no=2005060111191169364&type=1
2005 - 안익태 선생 유품 한국온다…유족들, 여권등 기증 정부 관계자는 1일 “안 선생의 유족들이 선생 사망 40주년인 올해를 기리고, 탄생 100돌인 내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유품을 한국 정부에 기증하기로 했다”며 “<애국가>를 비롯해 <한국환상곡> 악보와 고인의 육성 테이프, 여권 등 남은 유품이 모두 들어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안 선생의 여권은 대한민국 이름으로 최초로 발급된 것이어서, 외교사료로도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족들은 최근 이들 유품을 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김형진)을 통해 한국 정부에 헌납한다는 데 동의하고, 서류 작업을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부인인 롤리타 안(90)은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최근 ‘경기 방문의 해’ 홍보대사로 방한해, <애국가> 저작권을 우리 정부에 무상으로 넘긴 바 있다. 유품은 오는 9월말 서울 용산에 새로 문을 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관계자는 “박물관에 안 선생을 기리는 영상자료실을 꾸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한겨레 2005-06-01 오후 07:07:00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8703.html
6월부터 정지선 안 지키면 범칙금 6월부터 과도하게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선 운전자는 범칙금 처분을 받는다. 경찰은 횡단보도 보행자 사고를 줄이기 위해 정지선 지키기 생활화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자동차생활, 2004년 06월호 /자동차뉴스 /자동차생활 04-06-03 09:44 http://www.carlife.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685&sfl= &stx=&sst=wr_hit&sod=asc&sop=and&page=11
-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2003 - 팔미도 등대 점등 100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인천 팔미도 등대가 오는 6월1일로 점등 100주년을 맞는다. http://senior.khan.co.kr/kh_senior/khan_art_view.html?code=950202&artid=200305291832231
환경 파괴와 유적지 수몰 등 수많은 우려 속에 2003년 6월 1일 세계 최대의 수력댐인 중국 싼샤(三峽)댐이 저수를 시작했다. 이날 0시부터 물을 채우기 시작, 수위는 전날보다 8m 상승한 해발 106m에 달했다. 싼샤댐은 일일 수면 상승폭 5m 이하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을 채워나가 15일 최고 수위 135m에 이르자 저수 작업을 끝냈다. 저수가 끝난 다음날인 16일부터는 선박 통행이 시작되고 8월엔 발전기가 가동됨으로써 싼샤댐은 저수·통항(通航)·발전의 3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최종 완공은 최고 수위가 175m에 이르게 될 200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15일 저수가 끝난 후 댐 상류에 길이 약 400km, 폭 최고 3km의 거대한 저수지가 형성되어 중국 경제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그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나 주위의 수많은 유적들도 차례로 수몰되는 처지에 빠졌다. 1일 오전 이미 한(漢)대 건축물과 협곡 절벽의 잔교(棧橋)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또 유비가 숨진 백제성과 장비 사당인 장비묘, 절벽 누각 석보채, 굴원 기념관도 곧 수몰되거나 일부 피해를 입게 됐다.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 있는 백제성은 유비가 오(吳)의 군대에 쫓겨 피신했다 임종을 맞은 곳이며, 윈양(雲陽)현의 석보채는 이백(이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 등 수많은 시인들이 머물며 명작을 남겼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에 위치한 인근 신·구석기 유적지들은 지난달 본격적인 저수 준비를 위해 수위를 올리면서 이미 물속에 잠겼다. 일부 유적은 수중박물관으로 보호되거나 해체된 뒤 다른 장소로 옮겨졌지만 역사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싼샤댐 때문에 수몰되거나 이전되는 문물은 모두 1087곳에 달했다. /조선
- Crown Prince Dipendra(1988) and King Birendra(2000) 2001년 6월 1일 네팔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모인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야 왕비를 비롯, 왕자·공주 등 국왕 일가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사귀어 오던 애인과의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순간을 참지 못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범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네팔 국가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국왕의 섭정이었던 갸넨드라 공을 새 국왕에 추대한다고 선포했으나, 사고경위를 믿지 않는 국민들은 "정확한 사건 진상을 밝히라"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디펜드라 왕세자는 밤 9시쯤 나라얀히티궁 왕족 가족실에서 빠져나갔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M-16 소총과 우지(Uzi)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참석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디펜드라는 먼저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쏴 죽이고, 응접실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디펜드라는 자동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총구가 위아래로 향하며 천장과 바닥 양탄자에도 총탄이 박혔다. 이어 정원으로 나간 디펜드라는 뒤따라온 어머니와 남동생을 죽였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총질을 한 뒤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것이다. 목격자의 친척은 디펜드라가 살려달라는 숙모와 여자 사촌에게도 총을 쐈고, 15분여 총을 난사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모임에는 왕족 30여명이 참석해 있었는데, 왕세자의 총에 9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했다. /조선
2001 -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첨(Ketcham, Hank) 사망 케첨 [Ketcham, Hank, 1920.3.14~2001.6.1]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Dennis and Menace)`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트첨(81)이 2001년 6월 1일 심장병과 암으로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자택에서 숨졌다. 1951년 3월 처음 등장한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의 다섯 살 난 장난꾸러기로, 어른들도 깜짝 놀랄 기지를 발휘해 이웃의 성미 까다로운 윌슨 아저씨를 골려주는 역할로 5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개구쟁이였던 케트첨의 네살배기 아들 데니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만화가 히트를 치면서 지난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 CBS 방송에서 TV 연속극으로 만들어졌으며, 1993년에는 영화도 나왔다. `개구장이 데니스`는 케트첨이 숨진 순간에도 전세계 48개국 1000여개의 신문에 19개 언어로 연재되고 있었다. 케트첨은 1920년 3월 14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데니스`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개인적으로는 1959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부인 앨리스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두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 /조선
1992 - UN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UN, Brazil, 1-12 Jun 1992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1990년 6월1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에서 작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가 열렸다. KAIST 전길남 교수가 썬 스팍1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켜자 국내 HANA망(KAIST및 연구기관들끼리 연결 된 것)과 미국 하와이대학간에 설치된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했다. 국내 네트워크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돼 국제사회에 처음 출생신고를 하게된 것이다. 사실 국내 인터넷의 효시는 82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경북 구미)간 전용회선으로 연결한 SDN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인터넷 표준 규약인 TCP/IP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미국과는 연결되지 않는 국내 온라인망이었다. 미국은 군사적인 이유로 전용회선 접속을 불허했고 국제전화를 이용하는 이메일은 비용이 너무 비싸 인터넷 선구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KAIST와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약 1억5천만원을 각출, 해외 인터넷에 직접 접속하는 HANA망 구축 프로젝트를 계획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조선
- 정보문화의 달 기념, 1997.6.2 발행 - 정보문화의 달 기념, 1999.6.1 발행
1988 - 제1회 정보문화의 달 6월은 정보문화의 달 정책기자단 박미향 smilen@naver.com /공감코리아-다정다감 2009.06.17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1988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지난 1987년 12월 8일 조인한 유럽과 아시아지역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폐기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1985년 11월 첫 회담이 열린 후 2년 7개월 만이었다. 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 미국이 추진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답보상태에 빠졌던 군축회담의 전기는 19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난 데서 마련됐다. 이로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이 협정은 미소양국이 핵무기개발경쟁 이래 처음으로 핵감축시대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
1976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의 도쿄[東京]·교토[京都]·나라[奈良]에서 '한국미술 5천년전'을 개최하고, 1979년 5월부터 1981년 10월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애틀·시카고·보스턴·클리블랜드·뉴욕·캔자스시티·워싱턴 등에서 '한국미술 5천년전'을 가졌다. [카페] 일상탈출카페[국내여행 해외여행] 2005-05-25 20:50 http://k.daum.net/qna/view.html?qid=011dI
제11회 월드컵축구대회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축구대회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아래 열린 월드컵축구대회로,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78년 6월 1일부터 25일까지 25일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었다. 개최지 선정은 12년 전인 1966년 7월 6일 런던총회에서 이루어졌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 아르헨티나 국내 정세의 혼란으로 여러 국가가 개최국 변경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그대로 진행되었다. 전세계에서 106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아르헨티나와 전 대회 우승국인 서독(지금의 독일)을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대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코르도바·마르델플라타·멘도사·로사리오 5개도시의 6개 경기장에서 열렸으며, 경기방식은 4개팀씩 4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에서 1·2위를 차지한 8개팀이 2개조로 나누어 2차리그전을 벌인 후 각조 1위 2개팀은 결승에 진출하고 2위 2개팀은 3·4위전을 치러 우승을 가렸다.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폭력적인 경기내용과 심판의 불공정 판정 의혹 등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네덜란드가 준우승, 브라질이 3위를 차지하였다. 38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161만 215명, 평균관중은 4만 2374명, 총득점은 102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2.68점이다. 아르헨티나군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기 위하여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Johan Cruyff) 등 유명선수들이 불참하였고, 제2회 이탈리아대회(1934)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네이버
[초음속 여객기 TU-144 연혁] 1968-12-31 - 첫번째 시험비행 성공 1969-06-05 - 음속 돌파 1970-05-26 -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1970-06-15 - 시속 2,443km 기록 1971-07-01 - 양산형 TU-144S 첫 비행 1973-06-03 -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분해 사고 1975-12-26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화물과 우편물 수송) 1977-11-01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1978-06-01 - 추락사고 발생하여 여객기로 운항을 금지
- 발행일시 : 1977.06.01 - 발행중지 : 1993.05.12 - 도안 : 율곡 이이 초상, 오죽헌 - 표준영정 제작화가 : 이종상
1973 - 가정의례준칙 발효 시대별 연표(현대사) 날짜 : 1973년 03월 03일 제목 : 國務會議, 가정의례준칙 개정법률 6월 1일 기해 발효키로 주제분류 : 사회·문화 國務會議, 가정의례준칙 개정법률 6월 1일 기해 발효키로 의결공포. HOI : NIKH.DB-tc_ct_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73_03_03_0030 http://db.history.go.kr/url.jsp?ID=tc_ct_1973_03_03_0030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1969-01-16 '가정의례준칙에관한법률' 제정(법률 제2079호) 1973-03-13 제명변경(가정의례에관한법률) 및 일부변경(법률 제2604호) 1980-12-31 '가정의례에관한법률' 일부개정(법률 제3319호) 1993-12-27 일부개정(법률 제4637호) 1997-12-13 일부개정(법률 제5453호) 1999-02-08 '가정의례에관한법률' 폐지 및 '건전가정의례의정착및지원에관한법률' 제정(법률 제5837호) 가정의례준칙 1969-03-05 '가정의례준칙' 제정 1973-05-17 전면개정(대통령령 제6680호) 1975-05-30 일부개정(대통령령 제7637호) 1973-06-01 '가정의례준칙' 발효 1985-03-30 일부개정(대통령령 11671호) 1988-08-31 일부개정(대통령령 제12555호) 1999-08-31 일부개정(대통령령 제16544호) /국정브리핑 블로그 blog.news.go.kr
- King Constantine II and Karamanlis 1973 - 그리스, 15년간의 왕제에 종지부 찍고 공화제 선언 제2차 세계대전 후, 왕제가 부활한 이래 입헌세습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발족하고, 콘스탄티노스 2세가 정권탈환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1973년 6월 군사정권은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할 것을 발표하여 공화제 이행의 헌법개정안이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얻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대통령 중심 의원내각제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대통령은 의원 2/3의 신임으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이라크의 주요한 광물자원은 석유와 천연가스이다. 석유매장량이 1000억 배럴로 세계 제2위이며 유전은 주로 북서부 지역에 분포해 있다. 석유의 채굴은 1927년 북부의 키르쿠크 유전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외에 모술 부근의 아인자라 유전, 바스라 근방의 즈바이르 유전이 개발되었다. 석유는 파이프라인으로 지중해 연안의 트리폴리(레바논), 비니아스(시리아)로 송유되는 외에 바스라에서도 수출된다. 석유개발에서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자본으로 이루어진 이라크석유회사(IPC)와 그 관련회사가 국토의 거의 전역의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1년에 이권지역의 99% 이상을 정부가 몰수하고, 1964년에는 이라크국영석유회사(INOC)를 설립하는 등 자주적인 개발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다시 1972년에는 이라크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2000년 11월 현재 1일 생산량은 230만 배럴이다. /naver
1971 -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경매 1971년 오늘,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진귀한 물건이 나왔다.
1970 - 소련, 2인승 소유즈 9호 우주선 발사 니콜라예프[ Andriyan Grigoryevich Nikolayev ]
(발췌) 1970년 6월 1일 그는 세바스티야노프와 함께 소유스 9호를 타고 궤도에서 거의 18일을 보내 우주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기록을 세웠다. 이 비행은 6월 19일에 끝났으며, 그 임무는 주로 장기간의 우주비행에서 발생하는 영향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브리태니커
1968 - 미국의 저술가,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Keller, Helen) 사망 켈러 [Keller, Helen (Adams), 1880.6.27~1968.6.1]
[어제의 오늘]1968년 헬렌 켈러 타계 ㆍ사회적 약자의 ‘영원한 파랑새’ 인간의 강인한 의지, 긍정적 사고의 힘을 이야기할 때 그는 자주 거론된다.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강조할 때도 늘 그가 언급된다. 1880년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나 1968년 6월1일 눈 감을 때까지 헬렌 켈러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고부터 귀는 막히고, 눈은 멀어졌다. 세상은 온통 암흑과 침묵뿐. 자서전에서 밝혔듯 그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살아가는 유령’이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헬렌 켈러는 마침내 특수교사 앤 설리번을 만난다. 일곱살 때 만난 설리번은 이후 40여년간 그의 지주가 되고, 지금도 이상적인 스승의 표상으로 평가받는다. 한 손엔 물, 다른 손에도 물이란 단어를 수백번 반복해 써주면서 촉각을 통해 그를 세상과 소통시켰다. 재탄생시킨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며 유명인사가 된 헬렌 켈러는 장애인 학교나 도서관 건립기금 마련 등 장애인을 위한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강연을 했고, 글을 쓰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당시 청각장애인을 정신병원에 수용하는 반인권적 행태를 철폐시키기도 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데 전력을 다했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5-31 17:35:56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보병 제9사단(백마)사단은 1950년 10월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에 의거, 서울에서 창설, 예하부대로서는 제 28연대가 대전, 제29연대가 공주, 제30연대가 청주에서 각각 창설 되었으며, 이듬 해 1월 포병사령부가 광주에서 편성되었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1966년 8월27일 중앙청 광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는 사단장 이소동 소장의 지휘하에 1966년 9월16일 부산 3부두를 통해 출진,1966년 9월22일 월남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에 주둔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대한민국 해병대
이번에는 6월 1일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오늘의 역사를 더듬어 봐야겠습니다. 1270년 오늘은 이별초, 저별초, 야별초 삼별초의 난이 발생한 날이며 목화씨를 거시기한 문익점의 후손이며, 재야 운동가 문익환 목사가 별세한 날입니다.(1944년) 근데 목사님이 무슨 운동을 하셨기에 이름을 날렸지? 종목이 뭐래?..
- 공군창설 20주년 기념(1969)
공군비행단,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1951.8.1) 1949년 10월 1일, 항공인의 오랜 염원이자 숙원이었던 공군독립이 실현되자 육군항공군사령부 비행부대는 공군비행단으로 승격되었고 1951년 8월 1일부로 공군비행단은 사천기지에서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되었다. 제1전투비행단은 예하에 제10전투비행전대(12/F-51, 1/T-6)를 포함하여 46대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였으나, 1952년을 기점으로 항공기 보유대수가 F-51 39대를 합하여 전년대비 2배 가까이 증가하자 전투작전 전담 비행단과 조종사 양성을 위한 훈련비행단 창설의 필요성 때문에 1953년 2월 15일부로 제1전투비행단은 제1훈련비행단으로, 예하 10전투비행전대는 제10전투비행단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1959년 7월 1일 대구로 이동한 제1훈련비행단은 1963년 9월 10일 제1전투훈련비행단으로 개편되었다가 1964년 6월 1일에는 재차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칭되었으며 국제표준형의 현대적 전술항공작전기지인 광주기지가 완공되자 서남부지역 영공방위의 중추를 담당하기 위하여 1966년 2월 15일 현재의 터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재 제1전투비행단은 우리 항공史의 쾌거이자 자부심인 T-50 Golden Eagle을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고등비행훈련 및 CRT(Combat Readiness Training) 과정의 운영 등을 통하여 정예 공군력 건설의 주춧돌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http://kr.blog.yahoo.com/ckk3711/20422
1959 - 제5차 아시아 민족 반공 대회, 서울서 개최
제 5차 아시아 민족 반공 대회 * 제작연도 : 1958-11-30 * 상영시간 : 20분 56초 * 출처 : 제 5차 아시아민족 반공 대회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프랑스는 전쟁의 위기를 잘 극복해 재빨리 민주적인 새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전후를 주도하면서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한 후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를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조하여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파리해방과 함께 파리에 돌아온 그는 전후 프랑스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전후체제의 향방을 둘러싸고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당과 대립, 총리직에서 물러나 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했다가 해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알제리 재류군(在留軍)등의 반란 위기에 즈음해 다시 등장하여 1958년 6월 1일 내각을 결성,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1952 - 미국의 철학자, 교육학자 듀이(Dewey, John) 사망 듀이 [Dewey, John, 1859.10.20~1952.6.1] 버몬트주(州) 벌링턴 출생. 버몬트대학교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30년 이후에는 컬럼비아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차 W.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에 끌려, 이것을 발전시킴으로써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또는 인스트루멘털리즘(도구주의)의 입장을 확립하였다. 그의 《논리학적 이론의 연구》(1903) 《실험적 논리학 논문집》(1916) 《사고의 방법》(1933) 등에 의하면, 모든 사고(思考)는 혼탁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개조(改造)하는 노력, 다시 말하면 ‘탐구(探求)’인 것이다. 관념이란 이를 위한 실험적인 가설(假說)이며 도구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이것은 오렌지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잘라 보고 맛봄으로써 오렌지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실험적인 가설로서의 관념은 상황을 개조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의 좋고 나쁨이 잘 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듯이, 관념의 좋고 나쁨(진위)은 상황을 개조할 수 있는지의 유효성(有效性)에 의하여 판정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논리학은 모든 분야에서의 탐구 규범과 생차를 분명히 함으로서 앞으로의 탐구를 보다 더 유효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학―탐구의 이론》(1938)을 저술하였다. 또한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에 의하면, 경험은 인식(認識)의 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반성이 가미되기 전에 느껴지며 살아 있는 것으로서 널리 해석된다. 인간생활은 혼탁하고 불확정(不確定)한 경험에서 통일적인 경험으로 이행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의해서 성립되었다. 전자에서 후자에 이를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와 충족감이 주어진다. 이러한 이행(移行)의 달성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적인 작용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는 《학교와 사회》(1899)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 의해서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改造)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自發性)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으로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92세라는 그의 생애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고, 미국이 최대강국으로 부상한 시대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무너져가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제퍼슨과 링컨의 고전적인 이상을 새로이 개조하고, 서민의 경험을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소화하여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하여 세계 사상계에 기여하였다. 1932년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 1939년 중국에서 제이드 훈장, 1949년 칠레에서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터키·러시아 등을 방문하여 교육혁명을 지도하였다. 1946년 87세에 42세인 로버타와 재혼, 1952년에는 뉴욕주(州) 자유당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그의 이상을 배반하고 힘과 금력으로 전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여기에 그의 사상의 비극적인 성향이 있다. /naver
- Werner von Braun and Hermann Oberth 1942 - 독일, V2 로켓 시험 발사 세계 탄도 무기및 우주로켓의 아버지, 독일의 V2로켓
◆ CCTV =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 ‘V2 로켓’ 시험발사 과정을 중계하기 위해 개발됐다. 주로 군사용으로 활용되다 민간에서 처음 쓰인 곳은 은행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말이다. 90년대 초·중반까지는 흑백 카메라가 주류였다. 90년대 후반 들어 컬러 카메라가 확산됐다. 특히 줌인 기능이 강화돼 최근에는 400~500배 수준까지 향상됐다.
- Dobrovolsky, Volkov and Patsayev
1928 -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Dobrovolsky, Georgy) 출생 도브로볼스키 [Dobrovolsky, Georgy (Timofeyevich), 1928.6.1~1971.6.29] 1946년 오데사의 공군학교, 1950년 추구예프 군사항공학교, 1961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71년 6월 6일 소유즈 11호 우주비행 대장이 되어 V.N.볼코프와 V.I.파자예프와 함께 우주에서 24일간 머물렀다. 그들은 2개월 전에 지구궤도에서 발사된 살류트 무인정거장과 도킹하여 최초로 유인정거장을 만들었다. 6월 30일 카자흐스탄에 완전하게 도착했으나 모두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유는 출입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캡슐 안의 공기가 새어나가 감압(減壓)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naver
1926 - 미국의 배우 마릴린 먼로(Monroe, Marilyn) 출생 먼로 [Monroe, Marilyn, 1926.6.1~1962.8.5] [어제의 오늘]1926년 마릴린 먼로 출생 ㆍ애정에 목마른 영원한 섹스 심벌 바람이 올라오는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펄럭이는 치마를 누르며 천진하게 웃는 금발 미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다. 영원한 섹스 심벌인 먼로는 백치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실제 먼로는 사회의 문제를 직시할 줄 아는, 지성을 갖춘 배우였다. 먼로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겨낸 에이브러햄 링컨을 좋아했고, 작가 링컨 스테펀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5312119545&code=100100&s_code=ap005
1922년 6월 1일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제는 한국 근대미술의 일본화를 꾀하며 조선미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려 했다. 1921년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전시회를 개최하자, 일제는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치했다. 1922년 제1회 전람회에서 출품작 403점 가운데 215점이 입선되었고, 이후 23회에 걸쳐 개최되면서 대규모의 미술전람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이 8·15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연결되면서 일제식민지 잔재를 온존시키고 바람직한 미술발달을 저해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서화협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고희동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협회가 결성되었다. /브리태니커
1910 -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탐험을 위해 영국 출발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1868~1912)는 1901∼1904년 디스커버리호(號)를 타고 남극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한(南限)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하였다. 1910년 테라 노바호(號)에 의한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웅도(雄圖)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의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 등은 1912년 11월 12일 발견되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naver
1907 - 영국의 비행사, 항공기술자 휘틀(Whittle, Frank) 출생 휘틀 [Whittle, Frank, 1907.6.1~1996.8.8] 코벤트리 태생. 레밍턴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관학교에서 조종훈련을 받은 다음 1928년 조종장교로 제111비행중대에 배속되었다. 1931∼1932년 해상항공시험소에서 실험비행에 종사하였다. 그 동안 제트 추진에 가스터빈을 이용하는 연구를 개발하여 30년에 최초의 특허를 얻고, 37년 그 기관의 운전에 성공하였다.
1903 -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 점등 #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우리나라에 서양식 등대가 도입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03년 6월 1일 팔미도와 소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것이다. 봉화에 의존하던 항로표지시설 대신 서양식 등대를 도입한 것은 우리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로 진출하는 외국 선박의 보호를 위해 외국의 강압에 의해서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의 항해가 빈번하자, 일본은 1883년 6월과 7월에 걸쳐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제31관에 “조선정부는 종래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 초표를 설치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고 조선정부에 항구의 수리와 등대 초표의 설치를 요구했다. 일본은 우리나라 연안에 등대 설비가 없어 자국 함선의 운항이 어렵고 상선의 해난사고가 빈번하자 전 연안의 중요 지점에 등대 설치 위치와 설비, 등대의 종류 등에 관한 측량 및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요청했다. 미국 등 여러 나라도 자국 선박의 운항이 잦아지자 주요 항로와 항만의 수로측량을 실시하고 등대 건설을 요구했다. 일본은 1895년 3월 13일 다시 등대 건설을 촉구하고 등대 건립지 측량을 요청해 결국 1895년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우리나라 전 연안을 측량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등대 건립 예산이 없어 등대 건설 사업을 시행하지 못했다. 이에 일본이 1901년 4월 29일 외교문서로 등대건설비를 관세에서 충당할 것을 제의했고 1901년 5월 총세무사 브라운은 관세 수입 중 25만 원을 등대 건축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 팔미도 등대 점등 등대 건설비가 확보되자 정부는 1902년 3월 20일 인천해관에 등대국을 신설해 등대 건설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902년 5월 16일부터 인천항 팔미도 등대, 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 등표, 백암 등표의 건설에 착수해 1903년 4월 준공했다. 준공 후 당시로는 신식인 전기회전식 6등급 등명기를 마련해 6월 1일 점등됐다. 등명기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프랑스 회사의 기술을 도입했다. 등탑에 설치된 석유등 불빛은 10km 밖에서도 식별할 수 있었다.
문상범(인천고등학교 교사) /기호일보 2008년 01월 21일 (월) 15:06:39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963
1873 - 캐나다의 정치가, 신문발행인 하우(Howe, Joseph) 사망 하우 [Howe, Joseph, 1804.12.13~1873.6.1]
캐나다의 정치가, 신문발행인. 노바스코샤 총리(1860~63)를 지내면서 노바스코샤에 책임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으며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연방 성립에 반대했다. 1827년에 하우는 비정치적인 주간잡지 〈어캐이디언 Acadian〉을 창간했다. 이듬해 그는 〈노바 스코션 Nova Scotian〉을 인수했는데, 이 신문은 뒤에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에 통합되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유력지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1836년 하우는 노바스코샤 의회에 핼리팩스 대표로 선출되었고. 1840년부터 집행위원회에 참여했는데, 1943년에 사임했다. 그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노바스코샤에 내각책임제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총독대리인 포클런드 경을 비판했다. 1848년 포클런드를 사임시키는 데 큰 몫을 했으며, 그해에 마침내 내각책임제를 승인받았다. 1854년에 하우는 노바스코샤 철도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863년 노바스코샤 정치에서 물러나 영국 어로장관(1863~66)의 직책을 맡았다. 노바스코샤에서 연방 반대세력을 지도하고 1867년 영국에 가서는 캐나다 자치령의 법적 근거인 영국령 북미법을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기정사실을 받아들여 핸츠 대표로 캐나다 의회에 진출했다. 그는 존 맥도널드 경의 내각에 참가하여 국회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1873년 5월에 그는 노바스코샤 주의 총독대리로 임명되었다. /브리태니커
1868 -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뷰캐넌(Buchanan, James) 사망 뷰캐넌 [Buchanan, James, 1791.4.23~1868.6.1]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791년 4월 23일~1868년 6월 1일)은 미국의 제15대(1857년~1861년) 대통령이다. 생애 미국에서 유일한 독신 대통령으로, 1791년 4월 23일 펜실베이니아주 코브갭에서 태어나서 벌써 20세때 민주당에 들어가서 23세인 1814년 펜실베이니아주 의원이 되었으며, 그후 29세인 1820년에 연방 하원 의원이 되어서 5선이나 (1820년~ 1830년) 역임하고, 1832년 상원에 진출했다. 그후 한때 1844년과 185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됐으나, 제임스 k. 포크와프랭클린 피어스에게 패하고, 1856년에야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미국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1857년 일어난 드레스 스콧 사건과 백인이지만 노예 해방론자이었던 존 브라운의 1859년 폭동 등 흑인 노예에 관련된 사항으로 고통받다가 제선에 실패하고 1861년 퇴임해서 7년후 6월 1일 죽었다. /위키백과
오토 [Otto, 1815.6.1~1867.7.26] 근대 그리스의 첫번째 왕(1832~62 재위). 전제주의 통치를 했으나 1843년 강요에 의해 입헌군주가 되었고 투르크를 희생시켜 그리스의 영토 확장을 꾀하다 실패해 퇴위했다.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의 차남으로 1832년 5월 런던 회의에서 열강들에 의해 그리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스 국민의회는 1832년 8월에 그의 왕위를 인준했고 그는 1833년 2월 6일 바이에른의 몇몇 조언자들과 함께 그리스에 도착했다.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고 상비군을 조직했으나 바이에른식의 절대주의적 통치와 중과세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1837년 총리 요제프 루트비히 폰 아르만스페르크를 해임했다. 1841년 영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크레타 병합 시도가 실패한 뒤 1843년 그리스에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오토는 그리스 정교국가에서 자기 후계자를 정교신자로 세우도록 못박은 헌법을 마지못해 승인해야 했다. 이후 이전의 바이에른 출신 과두세력을 대신해 그리스 귀족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오토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옛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원대한 생각'에 집착했다. 그러나 크림 전쟁(1853~56)에서 투르크에 맞서 개입하다가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피라이오스 점령을 초래했을 뿐, 그리스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다. 1859년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함으로써 위신이 더욱 떨어진 그는 1862년 10월 23일 일어난 반란으로 결국 폐위되어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브리태니커
1804 - 러시아의 작곡가 글린카(Glinka, Mikhail) 출생 글린카 [Glinka, Mikhail Ivanovich, 1804.6.1~1857.2.15] 1804년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하였다. 대지주의 아들로 페테르부르크에서 F.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음악가가 될 마음이 없어 처음에는 교통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개시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썼는데,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1845) 《카마린 스카야》(1848) 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naver
1780 - 프로이센의 군인 클라우제비츠(Clausewitz, Carl von) 출생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 Carl (Philipp Gottlieb) von, 1780.6.1~1831.11.16] 부르크 출생. 중부 독일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12세 때 군대에 들어갔고, 1801∼1803년 사관학교에서 샤른호르스트에게서 병학(兵學)을 배웠다. 프랑스 혁명에의 간섭전쟁(干涉戰爭) 때는 프로이센군의 사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예나의 패전 후에 슈타인의 프로이센 개혁이 시작되자 샤른호르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군제개혁자 서클에 가입하였다. 1812년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에서 도망쳐서 동지와 함께 러시아군에 투항하여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解放戰爭)에 진력하였다. 1815년 프로이센왕으로부터 귀국을 허락받고 사관학교 교관과 군사행정관으로 활동하였다. 1818∼1830년 육군대학교장, 1830년 포병감(砲兵監)을 지낸 후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고, 콜레라에 걸려 급사(急死)하였다. 그의 사후에 간행된 저서 《전쟁론 Vom Kriege》은 이 시대의 전쟁경험에 기초를 둔 고전적인 전쟁철학으로 불후(不朽)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하다’고 한 유명한 말은 군사지도부에 대한 정치지도부의 우월성을 설파한 것이며, N.레닌 등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naver
1637 -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탐험가 마르케트(Marquette, Jacques) 출생 마르케트 [Marquette, Jacques, 1637.6.1~1675.5.18]
별칭은 마르케트 신부(Père Marquette).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탐험가. 루이 졸리에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행하고 그 수로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한 정보를 알렸다. 1666년 그는 퀘벡에 도착했다. 인디언 말을 배운 후 1668년 수세인트마리 운하(지금의 미시간 주에 속함)와 1671년 세인트이그나스(지금의 미시간 주에 속함)에 선교본부를 설립하는 일을 도왔다. 1673년 5월 중순 뉴프랑스 지방 총독 프롱테나크 백작의 의뢰를 받은 졸리에와 함께 미시시피 강의 수로와 하구를 찾기 위해 세인트이그나스를 떠났다. 그들은 서쪽으로 그린 만(지금의 위스콘신 주에 속함)까지 가서 폭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위스콘신 강을 가로지르는 연수(連水) 육로까지 갔으며, 6월 17일 프레리뒤시앵 부근에서 미시시피 강으로 들어갔다. 그 강을 따라 아칸소 강 입구에까지 다다랐을 때 그들은 미시시피 강이 적대적인 스페인 지배지역을 통과해서 흐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7월 중순 일리노이 강을 거쳐 귀향길에 올랐다. 마르케트는 그린 만에 도착했을 때 지쳐서 그곳에 남고, 졸리에는 캐나다 쪽으로 계속 여행했다. 1674년 마르케트는 일리노이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선교본부를 세우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겨울 날씨 때문에 발이 묶여 지금의 시카고 시 근처에서 2명의 동료와 함께 야영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생활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마르케트는 봄에 지금의 일리노이 주 유타카 근방의 인디언족 지역에 도착했으나 병으로 여행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세인트이그나스로 돌아오던 중 현재의 페르마르케트 강 어귀에서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