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날의 하루 / 정호순
크리스마스 이브겸 일요일 날인데도 특정한 일정 없이
아침 10시까지 내리 자고 있었지요.
전화가 울립니다.
학교 갈 때는 깨워줘야 일어나던 막내둥이 아들녀석이
일찍 일어났나 봅니다.
아까부터 이 방 저 방 왔다갔다하면서 잠자는데 방해를
하더니 전화를 받습니다.
엄마를 바꾸라고 하나봅니다.
아내가 받더니 잠결에 몇 마디 소리가 들립니다.
'응, 싫어. 안 갈래.'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상대방이 어디 가자고 하는 것 같은데
싫다고 하더니 도로 누워버립니다.
누우면서 퉁명스럽게 나보고 전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전화를 받으니 이웃집 아줌맙니다.
다짜고짜 망월사 가겠냐고 합니다.
얼결에 전화를 받아 비몽사몽 판단이 잘 안 서는데
갈 건지 안 갈 건지 확실한 성격처럼 확실히 대답을 하라고
재촉을 합니다.
아니 집에 잠자면 무엇하냐고 거의 강제로 가자는 투입니다.
"가지 뭐"
의정부에서 올라가는 망월사는 단풍 고운 가을 날 홀로 한번
가보기는 했었습니다.
그 때는 망월사 -->포대능선--> 오봉으로 해서 우이암, 원통사,
육모정매표소, 우리 동네로 내려오는 긴 코스를 잡아서 마음이 급해
망월사에서 20분간밖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절 구경을 제대로 못했는데 잘 됐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애들 아빠도 가니까 애들 엄마도 데리고
나오라며 끊어버립니다.
에구 어쩌나.
애들 엄마하고는 겉보기에는 평온해도 며칠 전부터 막내 때문에
한바탕 설전을 벌여 꼭 필요한 말 외에 잘 하지도 않고 있었지요.
에라 모르겠다.
듣던지 말던지 '30분에 후에 출발한데. 빨리 준비해' 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나와보니 안 갈 것 같은 사람이 주섬주섬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때로는 계획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서 수시로 일정이
바뀌기도 하지요.
참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산행은 겨울날씨답지 않게 바람도 없고
마치 봄날 같았습니다.
등산은 계절마다 저마다의 운치를 가지고 있지만 겨울산행을
하다보면 싫은 것이 하나 있는데 쉬다보면 찬바람이 몸 속
을 쏙쏙 파고들지요.
그렇다고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마냥 걸을 수만도 없는데
오늘은 바람도 막아주고 바닥도 따뜻한 절 안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네요.
계획된 산행이 아니었기에 물만 배낭에 챙겨 넣고 먹을 것은
하나도 준비를 안 했지요.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지난 번 산행 때 보니까 망월사매표소
올라가는 양쪽에 김밥 파는 곳이 많기에 가다가 몇 줄 사서
가려고 했더니 걸어서 올라가면 지루하고 먼 포장길인데
차를 타고 가다보니 김밥 집을 다 지나쳐 버렸네요.
우리가 잠을 자서 아침도 안 먹은 줄 알고 일행이 컵라며
과 밥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절에서 나오는 국수와 맛있게
먹었네요.
사실은 국수가 팅팅 불어서 맛이 없었지만 절에서 주는 음식
은 감사히 먹어야지요.
그런데 음식을 남기는 순간 복이 사라진다고 했는데 좀 남기고
말았지요.
부처님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남기지 않겠습니다.
속으로 복이 달아나지 않기를 빌면서 복전에 거금 아닌
소금?을 넣었지요.
망월사 절은 1,360여 년전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혜호선사께서
왕명을 받아 국태민안과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도량으로 흙을 빗기
시작하였고 또한 월성(경주)를 바라보면서 신라왕실의 융성을 기원
한다고 해서 망월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명산에 명찰 없는 곳이 없듯이 도봉산 아늑한 품안에 자리잡은
망월사 역시 중랑천을 굽어보며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요.
이 절은 이 근방에 있는 다른 절보다 크기도 크기지만 들어가는
출입구마다 적혀있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니 오신 듯,
다녀 가시옵소서'
옛날에 '없으면 간 줄 알아' 라는 말이 일시적으로 유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운수납자(돌아다니는 중을 무상한 구름과 물에 비유하는 말)
의 행적처럼 선문답 같은 말이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니 오신 듯 다녀가라는 구절이 무척 마음에 들고
제 마음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래야지요.
어디 가서든 불필요하게 티를 내는 사람은 꼴불견이죠.
산꾼은 아니지만 산에 가면은 저녁이 되어야 내려오는데
오늘은 망월사만 보고 내려오니까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널널합니다.
남은 시간을 무얼 할까.
같이 간 일행은 이웃에 살기도 하지만 같은 볼링클럽에서
볼링을 치고 있으니까 볼링을 치자고 합니다.
내려오면서 여기저기 문자를 넣습니다.
한 게임하자고.
저녁 5시 볼링장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번개팅을 했는데도
회원 20명중에 11명이 모였습니다.
정식모임에는 10팀의 부부들이 5섯팀으로 편을 갈라서 치는데
비공식적인 모임 때는 번개팅이라 들쑥날쑥 짝이 맞지 않지요.
이럴 때는 부부 막 섞이어 스카치도 치고 어떻게든 맞추어서
진행을 합니다.
배드민턴을 하던지 족구를 하든지 무슨 놀이 게임을
하더라도 내기를 안 하면 재미가 반감되지요.
이런 내기를 많이 해 보아서 누구에게 텀태기를 씌우면
전체 분위기가 냉냉해 집니다.
지는 사람이 계속 질 때가 생기거든요.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기든 지든 이기는 것은 기분이고
나중에 보면은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금전적으로
별 차이가 없습니다.
모임을 즐겁게 이끌어가고 화합을 하면서 부담 없이 기분 안
나쁘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즐겁게 게임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술 한 잔 하는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영상 10도라는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데 경제가 어려운 탓
인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이브저녁 같지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캐롤송도 사라졌지요.
어린애들이 있는 집 부모들이 밤에 시청에 구경을 간다고 합니다.
나이는 비해 우리 집에도 아직 초등 6년인 막둥이가 있지요.
지금도 어디 가자고 하면 잘 안 따라 나서는데 내년에 중학생이
되면은 더 데리고 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같이 동참을 하기로 합니다.
낮에도 사대문에 나가보는 날이 일 년에 손꼽을 정도인데 서울 산지
수 십 년에 밤에 나가본 적은 정말 몇 번 없습니다.
월드컵 광풍? 이 몰아칠 때도 동네에서 응원을 했었고 지금 대학생이
된 큰딸이 초등학생 때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려고 종각에 나갔다가
파도처럼 사람의 물결에 밀려다니다 온 기억밖에는 없네요.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 하다가 버스를 탔는데 연휴라서 그런지
시내로 진입을 할수록 밤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탑니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 버스전용차선을 달릴 때는 좋았는데 종로로
들어서니 웬 차가 그렇게 많은지 걷는 것보다 시간이 더 지체
되는 것 같습니다.
목적지인 시청을 앞두고 광화문 거리를 지나는데 교보문고
정광판에
안도현님의 시 [너에게 묻는다] 시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보입니다.
머리 속으로 넣어와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한테
기꺼이 뜨거운 연탄이 되어 보았느냐'
안도현님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전문은 이렇지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 글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낮에 망월사 유리창에 붙여놓았던
유류비 보시에 관한 안내문이 떠오릅니다.
3월 14일까지 절에서 소요되는 난방비 보시를 받는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막아주는 따뜻한 방에서 국수를 얻어먹은 것도
어느 이름 모르는 불자님의 시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시청에 가서 보니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말로서는 설명이 잘 안되니 사진으로 보는 것이 좋겠지요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대형 아치들이 불빛으로 치장을
하여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입니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수많은 가족들, 연인들이 사진을 찍으며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못나가 보셨다구요?
그렇다면 시간을 내서 밤에 애들 손잡고 나가서 구경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두 달 그렇게 두었다가 철거를 한다고 하니 멋있는 장광을 즐겨
보시고 가족사진도 많이 찍어 오시면 좋겠지요.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첫댓글 흐르는 물 운영자님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에 글 봅니다 어제와 오늘 이브날 산행하기에 참 좋은날씨같아요 저는 어제 고등학교 1년생 막내아들 서점에 가서 책한권으로 선물했더니 좋아 하네요 우리님들 가족과 즐거운 성탄절 되십시요.
어느분의 글인가 하고 읽다보니 흐르는 물님이셨군요. 아무리 보아도 긴글임에는 틀림 없지만, 문맥의 흐름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 마음 편히 읽어보았습니다. 늘 건강하시지요? 메리크리스마스~!!
좋은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고맙게즐감하고 다녀갑니다....... 즐거운 성탄의밤 되시길.....
청계천???옆에서 울신랑..혹시..중국이냐...묻네요..어머..너무 멋지네요....ㅎㅎ 부산에는 바다가 풍경으로만으로도 멋있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청계천의 풍광이 멋지네요...미인님^랑님의 말씀처럼 중국느낌도 강하고...행복한 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