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사장은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는 나누며 “수고했다”는 말로 지휘봉을 놓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구단의 CEO로 새출발을 하는 김응용 사장이 지나온 야구 인생, 구단 경영자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한국야구사가 씌어진다면 가장 많은 이야기가 거론될 ‘살아있는 전설’답게
털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도 만만치 않았다.
=구단 사장이 됐는데 실감이 나시는지.
▲사장 실감 안난다. 주위에서 벌써부터 사장 취급하길래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욕을 해줬다.
이제 양복입고 출퇴근할 게 걱정이다. 넥타이를 오래 매고 있으면 속이 메스껍다.
기껏해야 1년에 한 두번 매는 정도였는데 걱정된다. 양복도 3~4벌뿐이다.
그것도 삼성으로 옮기면서 맞춘 것이다.
=출퇴근하는 게 정말 오랜만일텐데.
▲20여년 만에 출퇴근을 하게 된다.
한일은행에 입단했을 때 서울 회현동 9평짜리 아파트에서 미도파 근처 한일은행 지점으로 출퇴근했다.
그때 와이프가 살 빼라고 아침으로 빵 한조각만 달랑 줬는데
남대문 시장을 지나면서 배가 고파 순대 돼지국밥집에서 꼭 국밥을 먹었다.
그러니 와이프는 왜 살이 안빠질까 의아해할 정도였다(껄껄).
그땐 돼지국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신입행원땐 오전에 은행에서 근무하고, 점심때 모여 운동했다. 그래서 지금도 돈을 잘 센다. 한일은행에서 마지막 차장때 월급이 38만원이었는데
프로야구에 들어와서 연봉을 2,000만원이나 받았다. 100만원씩 저축하고도 살 만할 정도였다.
=감독을 그만두시는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남을 텐데.
▲메이저리그에서도 경험을 중시한다. 그
래서 팀에선 60~70대 감독들을 필요로 하고, 여전히 현장에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데 어쩔 수 있나.
워낙 나이든 사람들이 밀려나는 분위기라 야구도 할 수 없이 따라가게 되는 것 아닌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감독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선수와 가장 기뻤던 순간은.
▲기억에 남는 선수들은 선동열, 이승엽, 이종범, 양준혁이다.
이 선수들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아서하기 때문에 따로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아쉬운 선수들도 많다. 아마추어때 재능 있던 선수들이 부상과 야구 외적인 일로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도 많아 아쉽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해태 감독 시절 첫 우승을 했을 때다.
그동안 우승한 것은 다 선수들이 잘 해서 된 것이다.
감독으로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한테 인복이 있는 것 같다.
=월남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1ㆍ4후퇴때 3일만 피해있으면 된다고 해서 구경가는 셈 치고 아버지 손잡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누이, 여동생 셋이 북한에 남았다.
그동안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대부분 사기 당했다.
=감독시절 선수들에게 선행을 베푼 일화도 유명한데.
▲해태 감독 시절 혼자 40평 아파트에서 사는 데 선수들은 30평 아파트에서 우글우글 모여 지냈다. 그게 보기 안쓰러워 신인들을 데려다 함께 생활했다.
한번은 모 대학팀이 광주로 훈련하러 오겠다고 해놓고 연락이 안 오더라.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여관비가 없어서 못 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선수들과 한달간 숙식하며 훈련하기도 했었다.
=야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부산 계성중) 1학년때다.
학급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글러브를 잡았다.
그 전엔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선수시절엔 투수, 1루수, 좌익수 등 여러 포지션에서 다 뛰었다.
=어릴적 어떤 꿈을 가졌나.
▲야구선수였을 때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대표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스 감독을 했던 박현식씨와 같은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릴때 배고프던 시절엔 배불리 먹는 게 꿈이었다. 61년쯤인가, 대표팀에서 합숙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배들한테는 밥을 주고 나한텐 안 주더라. 화가 나서 밥상을 뒤엎었다.
그랬더니 나중엔 내 밥상 아래 밥 두공기가 놓여져 있더라(웃음).
그땐 밥 한 그릇 더 준다고 하면 힘들다고 꺼려하는 배팅볼 던져주는 것도 신나서 했다.
=어떤 취미를 갖고 계신가.
▲ 산 타는 걸 좋아한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색깔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산에는 간섭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오로지 새 소리만 지저귄다.
몇 년 전 삼성으로 이적할 즈음 산을 오르다 넘어져 팔을 다쳤다.
할 수 없이 기자회견장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더니
기자들이 새로 팀을 옮기며 삼성?군기를 잡기 위해 일부러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고 써서 정말 난감했다.
=야구 외에 즐기는 운동이 있는지.
▲프로야구 감독하기 전까지는 테니스를 많이 쳤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무릎이 아파 테니스를 못 친다. 골프는 90개 정도 친다.
85년도엔 롱기스트 상을 받았을 정도다. 드라이브 샷이 250~260야드 정도 나간다.
=애주가로 소문이 나 있다
▲ 젊을 땐 술도 많이 먹었다.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마셨다.
막걸리에서 시작해 배가 좀 차면 소주, 나중엔 도라지 위스키까지 먹었다.
그때만해도 최고급은 정종 먹는 것이었다. 예전엔 경기에서 지면 잠을 못 잤다.
그래서 소주하고 맥주하고 ‘비벼서’ 먹은 뒤에야 잠이 왔다.
요즘은 맥주 한잔 정도씩만 먹는다. 소주를 먹으면 머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잔다.
=삼성이 서울로 연고를 옮긴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삼성 라이온즈는 대구에 있어야 한다. 대구가 서울보다 시장성은 떨어지겠지만 야구도시 아닌가.
=선동열 감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3년 동안 오라고 했다. 감독되기 전에 코치 경험을 해보라고 충고했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해보니 나보다 더 잘할 것 같다.
=애창곡은.
▲노래는 정말 못한다. 진짜 음치다.
해태 감독 시절 광주구장의 응원가였던 ‘목포의 눈물’을 하도 많이 들어서 유일한 애창곡이 됐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위해선
그 만큼의 뼈와 살을 깎는듯한 노력의 산실일것입니다.
김응룡 감독의 사장 취임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일에 얼마만큼의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는가 생각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자신이하고 있는일에 최선을 다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