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8.4.
참석자: 통통한토끼, 통통한토끼+배키님
투어목적지(경로): 이번 투어는 이주간에 걸쳐 봄꽃구경다닌 후기를 몽땅 같이 올려본다. 첫주 투어 경로는
대전> 피반령> 대청호> 청풍정> 옥천> 금산 신안사> 대청호> 찬샘정> 신탄진> 화폐박물관
두번째 투어는 대전> 청주> 괴산> 연풍> 이화령> 문경읍, 활공장> 농암> 속리산> 보은>
대청호코스
세번째 투어는 대전> 신채호 생가> 금산 홍도마을> 부남면> 용담댐> 주천면> 대둔산>
논산 벌곡> 대전 코스로 달려 봤다.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따뜻한 봄날 봄꽃까지 피었으니 어딘들 안이쁘랴~~~ 바이크가 있다면 4월 한달은
무조건 기름채우고 나가야할 시기이다. 앞뒤가릴것 없이 나가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2018년
4월을 느끼고 즐겨라......뉴스의 정치면이나 사회면에는 각종 암울한 소식들뿐이지만 우리네
인생을 그렇게 우울하게 만 보내기에는 특히 4월은 너무나 짧다. 달리고 느껴라. 어디에도 봄이 있다~!!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대전 유성의 숨은 벚꽃명소.....화폐박물관 앞 탄동천 주변>
<탄동천 주변의 산책길......>
<부지런한 벚꽃잎은 이미 바닦에 떨어지고......>
<수원에서 달려온 베키형님과 피반령에서 6시 반에 조인해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호젓하게 대청호의 벚꽃을 줄긴다.> ` < 한꽃잎 같이 하실레예?!!!> <37번 국도의 백미인 옥천 막지리 구간> <아침 햇살과 벚꽃길...그리고 완만한 벗꽃 가로수~~~ 개선장군이 달릴법한 길이다.> <대청호의 청풍정 모습> [청풍정] * 김옥균과 명월이의 이야기가 있는 곳, 청풍정 * 김옥균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풍정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다. 물이 굽이쳐 흐르는 절벽 위에 정자 하나, 청풍정에는 김옥균과 명월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당상이 되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정변을 막는 바람에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이곳 청풍정에 내려와 은거했다. 이때 김옥균은 명월이라는 기생과 함께 청풍정으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정변에 실패한 후 김옥균은 청풍정에서 울분을 달래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며 세월을 보냈다. 함께 소일하고 있던 세월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김옥균이 이 사실을 알고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룬 뒤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츨처] 청풍정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발아래 물이 만수라서 명월암이라는 글자는 물속에 묻혀버렸다.> <청풍정 인근은 바위가 많아서 루어낚시 포인트라는 사실.....> <대청호를 뒤로 하고 금산 신안사로 달려온다.> <부처님 오신날 준비가 한참이다.> <대청호의 전망좋은 곳> <물대기를 준비하는 논바닥과 대청호 뚝방, 그리고 라이더...그뒤로 물오른 버드나무가 병풍을 만들어준다.> <화폐박물관 앞에 핀 개나리와 벛꽃> <길가의 목련도 질세라 한껏 자랑중이다.> <대청호의 흔한 벛꽃길> <괴산 연풍의 풍락헌> <연풍초의 연륜이 묻어나는 운동장 전경> <연풍 중앙교회의 낡은 건물....스타일로 봐선 아마도 일제시대나 625쯤 지어진듯 하다.> 1791년(정조 15) 신해교난(辛亥敎難)으로 연풍지역에 은거하던 가톨릭 교인 추순옥(秋順玉)·이윤일(李尹一)·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이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형당한 자리이다. 괴산읍에서 연풍, 문경 방면으로 20km 정도 떨어져 있고, 문경새재 서쪽 기슭의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연풍면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여서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찾는 순교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어 일찍이 신도촌이 형성되어 왔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향청 건물을 구입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헌병주재소, 경찰지서 등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논과 집터 정리 작업을 하면서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를 발견하였고, 1968년에는 한국천주교 103성인(聖人)에 속하는 황석두(黃錫斗:1811~1866)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황석두는 1813년(순조 13) 연풍면 병방(兵房)골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 충청남도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하였다. 연풍향청 건물과 높이 8.5m의 십자가상, 황석두의 입상과 묘가 있다. 십자가상 왼쪽에는 역시 갈매못성지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순교현양비(殉敎顯楊碑)가 서 있다. 문 앞에는 처형석(處刑石)을 전시하고 있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이 있다. 매년 2만여 명이 순례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출처] 연풍성지[延豊聖地] (두산백과) <이화령 전경> <문경 활공장에서> <문경활공장에서 본 백두대간 능선> <문경읍에서 집으로 가는길에도 벚꽃이 만발이다.> < 집가는 길에 가은역에서 잠쉬 커피 한잔> [다방] 다방이 등장하게 된 근본이유는 다도문화(茶道文化)를 들 수 있는데, 대체로 동양 3국에서는 8∼9세기에 본격적인 다도문화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원래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동양문화권에 비하여 다도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 서민 차원의 다방은 없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다도에 대한 제도적 배려가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다연원(茶淵院)이라 하여 차 마시는 장소가 있었으며, 고려시대는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도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다방은 차와 술·과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국가기관이었으며, 조선시대는 이것이 이조(吏曹)에 속하는 관사로서 차례(茶禮)라는 명목으로 외국사신들의 접대를 맡아 보았다. 특히 고려시대는 팔관재(八關齋)나 공덕재(功德齋) 등의 불교의식과 관련하여 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사찰에서는 차촌(茶村)을 두어 차를 재배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차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고, 일반적으로 손님 접대용으로 차보다 술을 많이 사용한 까닭에 다방 대신 술집이 발달하였다. 결국 전통시대는 다방이나 다도문화가 일부 계층의 향유물 또는 지방적·종교적 특성에 입각한 것으로 일반 민중에게 대중화되지는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말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고 커피와 홍차 등이 보급되면서 우리의 다도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커피는 가배차·가비차 (加比茶) 또는 양탕(洋湯)이라고 불렸는데, 이와 더불어 홍차도 수입, 보급됨에 따라 근대 형태의 다방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근대적인 기능과 형태를 갖춘 다방이 등장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지만, 개항 직후 외국인에 의하여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과 슈트워드호텔의 부속다방이 우리 나라 다방의 선구가 되었다. 1902년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孫澤, Antoinette Sontag)이 정동에 지은 손탁호텔에는 서울 최초의 호텔식 다방을 두었다. 일제 강점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명동의 진고개에 깃사텐(끽다점, 喫茶店)을 지어 놓고 커피 장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청목당(靑木堂)’이라는 2층의 살롱이 서울에 생겨났고, 1914년조선호텔이 지어져 일제강점기의 최고급 호텔 겸 다방의 기능을 하였다. 이때쯤 이미 서양문물이 많이 보급되었고, 일본이나 서구로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나름의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다방이 본격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1923년을 전후하여 근대적 의미의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명동의 '후타미(二見)’와 충무로의 ‘금강산’이라는 일본인 소유의 다방이 그 최초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후타미는 식당과 겸업이 아닌 다방을 전업으로 하는 근대적 다방의 원조였다. 그 뒤 1927년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 입구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개업하였는데, 이경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으로 「춘희」·「장한몽」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그가 직접 차를 끓여 더욱 유명하였다. 카카듀는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한 최초의 다방으로 볼 수 있다. 1929년종로2가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 근처에 ‘멕시코다방’이 개업했는데, 주인은 배우 김용규(金龍圭)와 심영(沈影)이었다. 의자와 테이블 등 실내장식을 화가·사진작가·무대장치가 등이 합작함으로써 문화인들의 종합작품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소공동에 ‘낙랑파라’가 등장하면서 초기 동호인의 문화애호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영리면에도 신경을 쓰는 본격적 다방의 면모를 갖추었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도 다방사업에 많이 관여하였는데, 실내시공만 하였다가 팔아넘긴 ‘식스나인(6·9)’, 1933년종로에서 부인과 함께 개업한 ‘제비’, 인사동의 ‘쓰루(鶴)’, 1935년 직접 설계하여 개업 직전에 양도한 ‘무기(麥)’ 등이 그것이다. 한편 1933년 ‘제비’ 개업을 전후하여 영화연극인·화가·음악가·문인 등에 의하여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은 각자 특색을 자랑하며 종로·충무로·명동·소공동 등에 다방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명동의 러시아식 다방 ‘트로이카’, 음악감상 전문의 ‘에리사’, 프랑스풍의 ‘미모사’, 독일풍의 ‘윈’, 매주 정규음악회를 열어 유명하였던 ‘휘가로’, 서울역 앞 이별의 장소로 애용되던 ‘돌체’ 등이 다방문화의 선도자였다. 이후 다방은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 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쇠퇴 일로를 걸어 2차대전 말기에는 거의 폐업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앞서의 멋은 점차 사라지고 상업다방으로 변화하는데, 6·25전쟁 직후 전쟁으로 문화시설이 부족해지자 다방이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에서 더 나아가 종합예술의 장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문화활동은 다양하여 그림 전시회·문학의 밤·영화의 밤·출판기념회·환영회·송별회·추모회·동창회·강습회 등이 다방에서 열렸다. 1950년대의 다방은 당시 사회문제였던 고등실업자, 즉 룸펜의 온상구실을 하여 사회적 지탄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기개 높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아 낭만의 거리가 되었던 명동거리는 당시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이 때 명동의 대표적인 다방으로는 봉선화·리버티·삼일·에덴·마돈나·미네르바·오아시스·낙랑·비엔나·고향·휘가로·돌체·금붕어·동방싸롱· 신한·올림피아 등이 있었다. 종로거리는 보수성이 강한 상업지역으로 카카듀 이래 한가람·아세아·경성·남궁·신사·국제·제일·단성사·학림 등 많은 다방이 있었으며, 명동과 마찬가지로 문화다방에서 상업다방으로의 변천과정을 밟았다. 1960년대 이후 다방은 그 전과 달리 지식인계층의 남자 주인 대신에 여자 주인이 얼굴마담과 레지·카운터·주방장 등을 데리고 경영하는 체제로 변모하였으며, 이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1970년대 이후 다방이 화려하게 실내장식을 하면서 손님도 분위기나 차 맛보다는 상거래를 비롯한 교제의 편의성 때문에 자주 다방을 찾게 되었다. 심지어 사무실과 사원이 없는 업주가 다방전화를 이용하고 레지를 비서삼아 사업을 하는 예도 나타났다. 특히 1970년동서식품의 인스턴트 커피 생산으로 집에서도 커피를 마시게 되면서 다방은 점점 디럭스화,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는 젊은층 위주의 DJ가 있는 음악 전문 다방이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차 값의 자율화와 함께 차 종류가 다양해지고 값도 비싸졌으며 분위기 좋은 실내장식을 갖춘 다방이 많이 등장하였다. ‘난다랑(蘭茶廊)’을 필두로 체인점을 갖춘 다방이 등장하는가 하면 ‘○○화랑’이라는 상호명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야간 통행금지제도가 폐지되자 심야다방이 대도시에 많이 나타났다. 1990년대에 다방은 커피자판기의 보급, 음료의 고급화, 고급스러운 분위기 커피전문점 증가 등으로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97년 2월 ‘대한다방업중앙회’는 ‘대한휴게실업중앙회’로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커피가 개화기 외교사절을 통해 유행되기 시작한 지 약 1세기 만에 한국만의 독특한 영업형태로 자리 잡은 ‘다방’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일부 다방들은 ‘다방’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또한 출장 매춘 등을 일삼는 소위 ‘티켓다방’이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면서부터는 다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출처] 다방 [coffee shop, coffee house, 茶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금산 홍도마을의 애마...이제 시작이라 다음주면 절정일듯하다> <언제나 한적하고 아담하고 포근한 용담호> <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운일암반일암이다.> <봄의 산비탈을 보면 벚꽃과 각종 꽃들로 폭격 맞은듯 하다.> 봄이고 개화가 되는 이시절 뭔 말로 그 느낌을 다 표현하랴~~ 모란이 피기까지는... [출처] 모란이 피기까지는 ... 영랑생가|작성자 samchi92
'청풍정'은 산수가 좋고 바람이 맑아 고려시대 때부터 선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조선말기 갑신정변의 주역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김옥균은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사대당 거두들을 죽인 뒤 신정부를 조직하고
그러던 어느 날 명월이가 절벽 아래 물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한다. 명월이는 짧은 글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유서에는 ‘김옥균과
1974년 천주교회에서 이곳을 성역화하였고, 1982년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의 유해를 이장해왔다. 성지 내에는 옛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첫댓글 봄이 슬그느머니 지나가네요~~~^
빠른 댓글..감사 합니다..ㅋ
우와~
겁나게 멋쪄부네융
즐감 융~
감사 합니다..ㅋ
활공장을 투어러로 올라 가다니...
대단하십니다.^^
힐링이 되네요.
활공장은 길 이 좋던데요..ㅋㅋ. 평일이라 호젓하게 꽁수로 차단기 열고..구경해봤습니다
떠나고 싶게 만드는 사진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