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이야기 (3) 미국에 한국의 전통 사찰 삼보사를 창건한 덕산 이한상 거사
1970년 9월 미국 변호사인 굿윈씨 부부가 내한하여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고 삼보법회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덕산 이한상 거사와 인연이 있었던 굿윈 씨는 “한국불교가 훌륭한 진리와 전통이 있지만 이것을 전체 인류에게 보급할 길이 없으니 딱한 일”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나 한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미국에 한국 사찰을 짓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다.(‘대한불교’, 1970. 9. 13.)
굿윈 씨는 자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지만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에 서양 사람들이 서양의 종교를 강요했던 역사”를 반성하면서 “내가 만약 불당만 지어 놓는다면 한국 교포들은 기독교 교회로 나가 예배를 하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재미교포들뿐만 아니라 장차 미국 문화의 발전에도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덕산과 굿윈 씨의 인연으로 시작된 미국의 한국 전통 사찰 창건은 1971년 7월 덕산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속도를 내게 되었고 조계선원과 혜능사(慧能寺)에 이어 세 번째로 캘리포니아주 카멜시 근교에 삼보사(三寶寺)를 준공하여 1973년 1월 28일 회향법회를 가졌다.
이 사진은 회향법회에 참석한 동국역경원장 운허 스님‧송광사 조실 구산 스님과 덕산이 교포 및 현지 신도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광동학원과 종립학원 연합회 등 여러 곳에서 덕산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운허 스님은 삼보사 주지 소임을 기꺼이 수락하고 이날 법어에서 덕산의 삼보사 건축을 기원정사를 건립했던 수닷타 장자에 비유하며 발전을 축원하였다.
당초 사찰 건축 비용을 내겠다고 했던 굿윈 씨가 빠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삼보사 창건은 현대 불교사 곳곳에 큰 자취를 남긴 덕산의 출연으로 이루어졌다. 본래 “대웅전만이라도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으로 지을 생각이었으나 자재 운송과 기술자 파견 등의 어려움 때문에 외형은 미국식으로 하고 내부만 고유 한국식으로 꾸몄으며, 불상은 송광사에서 모셔왔고 범종은 봉선사에서 기증하였다.(‘대한불교’, 1973. 2. 18.)
삼보사는 창건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탄탄하게 자리 잡아 불자들뿐 아니라 미국 교포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삼보사 회향과 개원 법회에 참석하러 운허 스님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던 구산 스님은 LA‧뉴욕‧시카고 등을 순방하고 귀국하는 길에 LA 최초 사원인 달마사(達磨寺)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설법하고 미국인 현조(昡照)를 첫 외국인 제자로 받아 귀국하였다. 이를 출발점으로 해서 그해 음력 4월15일 하안거 결제일에 송광사 조계총림에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로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을 개설하였다. 이 국제선원에서 구산 스님을 모시고 5년간 참선 수행을 체험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로버트 버스웰은 이때의 참선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파란 눈 스님의 한국 선 수행기’ 를 펴내기도 하였다.
재미교포 불자들의 신행 생활을 주요 목적으로 했던 덕산의 삼보사 창건은 구산 스님의 국제선원 개설과 외국인 제자 양성으로 ‘한국 불교의 세계화’라는 더 큰 목표를 이룩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된 것이다.
삼보사 창건 기념법 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간 구산 스님은 당시의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중에 덕산 거사를 매우 칭찬하고 있다.
1972년 12월 30일
30일 오후 5시 반에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일야(一夜)를 경과하여 익일 오전 7시 반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는데 일자는 도로 12월 30일 이라 한다. 동(東)으로 일광을 맞이하여 가니 하루가 길어진 감도 든다. 1시간 15분을 휴식하고 8시 15분에 출발하여 로스앤젤레스로 가다.
1972년 12월 31일. 청(晴). 만행의 날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니 오후 3시 반이었다. 덕산 거사의 조카가 나와 영접을 하여주니 반가웠다. 그러나 비행기가 없어서 ‘세라톤’ 호텔에서 일박하고 31일 오전 9시에 출발 ‘몬터레이’공항에 도착하여 덕산 거사 부부의 즐거운 영접을 받았다. 여장을 정돈하고 오찬을 마친 후에 삼보사에 가니 신축공사가 진행중이었다. 1만평이 넘는 기지(基地)에 불당 건물이 100평 이상의 규모요, 약사전은 소규모의 아담한 기도실(祈禱室)이요, 요사는 200여 평의 건물로서 여러 가지 조밀한 구조였다. 미국이란 대자본주의국가요, 여러 종교가 있는 나라이지만,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한 규모로 건설하고 있었다. 사찰 부지의 주위환경은 과연 동양의 종교 중 불교가 서양사회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할 만하였다.
허화(虛華)에 사로잡혀 인생의 본능을 망각하고, 끝없이 날뛰는 과학 만능의 자만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양식을 베풀어주고, 광만(狂慢)의 환몽(幻夢)에 속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삼보사가 명실상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내를 막론하고 그러한 원력 보살을 알 사람이 없지 않겠지만 누구나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덕산 거사 이한상씨 하면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이지만, 모든 환경을 헤져 떨어진 신찍처럼 버리고 태평양을 건너나 국내 생활과는 180도로 전환된 생활로, 작업복으로 불철주야하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불고생명(不顧生命)하고 있었다.
그중에도, 본국의 고학생을 도우려고 찾아오는 학생들을 이끌고 신기지의 정지작업을 하고 건축공사가 끝나도록 노력하는 성력(誠力)은 애국 애족 애교(愛敎)로부터 인류사회에 복음을 주려고 애쓰는 대보살심이었다.
거사님의 생활 방도를 살펴보면 자신은 단칸의 하꼬방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막힌 고행을 하여가며 백일기도를 하루같이 모시는 것은 무릉도원의 유발승이었다. 거사의 생애를 볼 때, 누구에게나 솔선수범이 아닐 수 없다.
공사 도중에 의외의 폭우가 쏟아져서 곤란도 막심하였거니와, 장마까지 이어지자 덕산 거사와 상품화 보살이 마주 앉아 울기까지 하였다는 경과의 애로를 들을 때에는 목석이 아니고서야 동정의 눈시울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몬터레이 공항에서도 큰길로 나왔을 때 택시를 부르는가 하였더니 두 내외가 각각 자가용차로 안내하여 자수(自手)로 운전하는 것을 볼 때 한국인으로서 놀랠 정도의 엉뚱한 인품이 되었다는 것을 절심히 감명하였다.
돌이겨 생각하면, 누구나 원력과 성력(誠力)과 근력(筋力)이 병행되면 난사(難事)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덕산거사는 장차 서양문명이 활용해야 할 주인공인 마음의 양식을 동양으로부터 전래하는 기반(基盤)의 개척자가 아닐 수 없다.
1973년 1월 24일 청(晴). 인욕의 날.
오전부터 삼보사 공사에 조력하고 오후 4시 반 경 귀가하여 피로를 풀기 위하여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하였다.
버클리대학의 박성배 교수가 내임(來臨)하여 낙성식 건을 상의하였다. 식순에 있어서 조계종단을 대표하여 축사를 요청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신문기자들이 낙성식을 취재차 내방하였다. 땅을 파고 콘크리트 하는 것을 사진도 찍어갔다.
우리 일행 여러 사람들은 일력( 日力, 하루종일 해야 하는 일)이 다 하도록 과로에 지친 태도였다.
1973년 1월 25일 청(晴). 정진의 날
오전부터 공사를 도우니 난공사(難工事)는 필(畢)하였다. 삼보사 기지가 명지(明地)임은 틀림없다. 앞으로 도인을 배출하여 미국사회에 큰 서광을 줄 것이 기대된다.
상품화 보살은 앞으로 삼보사 운영을 걱정하며 도움을 희망한다.
한국일보 미국 소식란에 운허화상과 나와 양인(兩人)이 포교를 담당하리라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1973년 1월 26일 청(晴). 선정의 날
오전 휴식. 오후에 민창기 보살 댁에서 공양청장(供養請狀, 공양을 요청하는 글)이 와서 운허화상과 동행했다.
내용인즉 현선덕화(玄善德華) 보살이 상항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차에 싣고 2백 마일이라는 거리를 왔다고 한다. 진수성찬이었다. 약간의 신심이 있다 하여도 수백 리 외(外)에서 준비하여 온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민보살 댁의 기지(基地)는 역시 카멜인데, 밀림 속에 건립된 가옥들이 요소요소에 위치하여 지상낙원을 이루고 있었다. 지붕은 목판으로 이었으나 내부구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사치였다. 생활이 외허내실(外虛內實)이라면 심신까지도 거화취실(去華取實) 한다면 필연코 복혜(福慧)가 구족한 초인간적 무위진인(無爲眞人)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정오에 문학박사 정경조씨가 상항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축하의 말씀을 하며 즐거워하였다.
1973년 1월 27일 청(晴). 지혜의 날
오전부터 삼보사 낙성식 준비에 분망하였다. 로스앤젤레스의 롱비치에서 이 반야행 보살이 찾아와서 수만 리 떨어진 서양에서 만났다고 무척 반가워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일보 기자 2명이 찾아와서 대단히 기뻐하고 동시에 기사 취재도 하였다. 상항에서 서경보 스님의 미국인 제자 대혜(大慧)스님이 찾아와서 대가사(大袈裟) 수(垂)하는 법을 배우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 날은 새벽 4시에 기침하여 석가여래불과 약사여래불 2위(二位)의 복장을 넣고 점안(點眼)하였다. 운허화상과 같이 증명을 하고, 정달수좌는 법주(法主)로서 행사하였으며, 이한상 거사는 백일기도 회항을 하여 마치니 오전 8시였다.
내빈은 350명 내지 400명으로 추산되었다. 교포 숫자보다 미국인 숫자가 3분의 2가 되는 것이 특색이었다. 앞으로 포교가 잘 될 것은 물론이겠거니와 과거와 동양철학을 기대하였고 기중(其中)에는 한국불교를 갈망하였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미국 신문 기사가 제1면에 대자특서(大字特書)로 동양과 서양이 한국사원에서 만났다고 하였으며, 반질반질한 바닥에 신발을 벗고 앉아 오찬은 한식과 양식이 병행이어서 양국의 국교와 친밀김을 도왔다고 하였다.
삼보사 개원 기념 축사
미국문화에 영원히 남을 삼보사 낙성식에 임하여 축사를 하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한상 거사는 한국 내에서 대학생불교연합회와 종립학원연합회와 달마회, 삼보법회 그리고 불교신문 등 여러 가지 불교운동을 통하여 쇠퇴한 한국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업주로서 수천 명 종업원을 영도하여 오다가, 뜻한 바 있어 이곳에 와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감수하며 삼보사를 창건한데 대하여 충심으로 경하하면서, 또한 관민 간에 존경하는 불제자 여러분도 한 자리에서 즐거워함을 경하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 절을 삼보사라 명칭한 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되니 깨달음이 첫째 보배요, 깨달은 사람이 말을 하면 올바른 법을 설하니 그 법이 둘째 보배요, 그 법을 배우고 깨친 스님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니 이것이 셋째 보배이니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삼보는 동양철학의 중추요 한국의 얼이었든 바, 이한상 거사가 이 마음의 양식을 전하여 주려고 하니, 서양문화에 큰 서광인지라 어찌 비단 위에 꽃을 수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방에 해가 뜨면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만물이 같이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이 삼보사에 오시어서, 이 부처님의 정법을 배우고 마음을 깨치어서 완전무결한 인격을 성취하고 나아가서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동시에 무한한 즐거움을 받으시기 바라며 이것으로 축사에 가름합니다.
1973년 1월 28일 九山 合掌
덕산 이한상 거사는 1917년 1월 19일,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에서 이태호 옹과 이희전 여사의 3형제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한상 거사는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국민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상경하여 1938년 경기 공업전문학교 전신인 경기 공립 공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일찍이 토건업에 투신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되었으며, 1946년에는 건설회사인 풍전사업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1년에는 대한 전력공사를 창립하였고, 정부종합청사, 팔당댐, 섬진강 댐, 풍전 상가 등 수많은 토건업으로 3000 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한국 현대 토목 건축업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964년에는 대한 건설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덕산거사는 남다른 신심으로 불교에 뜻을 두고 불교발전을 위한 불사와 포교, 자신의 수행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국불교계에서 그가 이룩한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우선 1962년는 당시 존폐 위기에 있던 대한불교신문사를 인수하여 10년간 사장을 맡으면서 오늘날 <불교신문>의 초석을 이룬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삼보법회, 삼보학회, 삼보장학회를 창립하여 불교를 대중화하고 불교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동국대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불자로서 서울대, 고려대 등 다른 전공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매월 봉은사에서 장학금 수혜자들이 참석하는 법회를 열었다. 또 1969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 대학생불교연합회 총재를 맡아 각 대학의 불교 학생회 결성을 후원하고 불자 교수 모임도 후원하였다. 대학생 불교연합회의 창립과 후원은 불교의 조직화와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대학불교연합회 출신들이 현재 불교계의 중진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대학생 불교연합회의 성과가 한국 불교의 대중화와 조직화, 현대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아래는 성철스님과 덕산거사 관계를 알려주는 이야기로 ‘성철스님 시봉 이야기’에 나오는 덕산거사 이야기 부분에 나오는 부분이다.
성철스님은 해인사에 정규 승가대학, 말하자면 해인사 강원을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정규 대학으로 만들고자 남다른 노력을 했다. 때문에 청담스님과 더불어 여기저기 대학을 둘러보고 나름대로 연구도 했었다. 춘천 성심여대도 함께 다녀오며 불교가 발전하려면 강원의 격을 높여 정규 대학으로 만들어야 인재 양성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덕산 이한상 거사를 만나게 됐는데, 덕산거사는 풍전건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금의 정부종합청사를 건설할 만큼 당대는 실적 좋은 사업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마침 중앙 신도회 회장 선출이 있었는데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 조계종 전국 신도회장을 하고 싶다하여 출마를 했다. 덕산거사도 마침 신도회장에 뜻을 두고 있었으니 만만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덕산거사를 조용히 불렀다.
“덕산 거사가 아무리 신심 있고 나를 따른다 하지만 사람이 설자리, 앉을 자리를 살펴야 합니더. 이번 전국신도회장은 이 실장 주고 덕산거사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큰스님! 아닙니다. 제가 이만할 때 신도회장 해서 승가대학 세우시려는 큰스님 뜻도 따르고 불교신도회의 면목을 일신해 보고 싶습니다.”
“덕산거사 뜻이야 알지만 이 실장하고 겨루어서 좋을 것 뭐 있겠나? 대통령 비서실장 하는 사람이 뭐가 모자라 신도회장 할라 하겠어요. 다 우리 모르는 뜻이 있을 것이니 덕산거사는 이번 신도회장에 출마는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
그토록 큰스님의 당부가 있었는데도 기어이 신도회장에 출마해 결국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밀려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덕산 거사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업이 기울게 되고 몸도 쇠약해져 국내에 있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안마해 드릴 때마다 성철스님은 덕산거사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강원을 정규대학으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을 늘 비추었다.
“그때 내 말 듣고 신도회장 출마 안 했으면 사업은 안 망했지! 덕산 거사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때는 영 본디 사람이 아닌 기라! 그 후 이후락 신도회장이 ‘큰스님, 덕산 거사와 추진하시던 강원의 정규 대학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릴 테니 저하고 일합시더’ 하길래 ‘나는 덕산 거사와 일했지, 이 실장하고는 일 안 했으니 그만둡시다’하고 말았지!”
간간이 성철 스님으로부터 덕산거사 이한상 씨의 이름을 자주 들었었는데, 미국에서 한국에 잠깐 들른 사이에 백련암으로 스님을 친견하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그때는 찻길이 없던 때라 산길 오솔길과 돌팍길을 힘들게 올라와야 했다. 성철스님 방에서 두어 시간 말씀을 나누고 다시 하산을 하는데 산길 아래까지 배웅을 했다. 가는 사이에 덕산 거사는 몇 번이나 말꼬리를 흐리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스님! 스님은 내가 얼굴을 모르는 분이네요. 그때 내가 사업을 정리하면서 정신이 없어 동생에게 ‘인천 월미도 땅을 큰스님께 드려 원하시는 정규 대학 만들도록 해드리라’하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는데 이제 와서 보니 큰스님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구만요. 내가 그때 큰스님 말씀 듣고 앞뒤 잘 살폈더라면 지금 해인사 강원이 정규 대학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지금쯤 우리 조계종 승풍이 큰스님 뜻대로 달라졌을 텐데......”
그 말끝 마디엔 탄식과 회한, 그리고 성철스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이 절절히 묻어 나왔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고 몇 해 안 돼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전해졌다.
한번은 불광사로 광덕 큰스님께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광덕 사부님은 성철스님이 의지하는 사제로서 종단과 해인사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유일한 사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덕 사부님은 큰스님의 근황을 이것저것 묻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사형님께서 추진하시던 강원의 정규 대학 승격 문제는 사형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지금 와서 보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일을 추진했던 것 같애. 지금쯤만 됐어도 사회의 이것저것 살펴서 승가대학 되도록 했을 터인데 그때는 그만큼 사회에 대해서 사형님이나 나나 너무 몰랐어.....”
아마 1960년대 초반부터 강원을 정규 대학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앞서갔기 때문일 것이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여러 가지 두드러진 사회적 업적으로 1967년에는 5.16 민족상을 수상하였고, 상금과 사재를 보태어 동년에 장충공원에 사명대사 동상을 건립하여 불교인의 긍지를 높였다. 그는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간 세계불교도우의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세계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으며, 1971년 당시 한국 최대의 건설회사였던 풍전 기업의 회장이었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한국에서의 불사 원력이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되자, 당년 56세의 나이로 물질만능의 미국에 정신만능의 불교를 심겠다는 의지로 전 재산을 청산하여 도미하였다.
1971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멜에 대지 약 7에이커(약 8000평)의 땅을 매입하고 삼보사 설계를 시작, 72년 3월 14일 건축허가를 받고, 5월 공사를 착공, 1973년 1월 28일 공사 착공 8개월만에 준공 기념 개창 법회를 개최함에 따라 미주 최초의 한국 사찰인 삼보사가 창건이 되었다.
덕산 이한상 거사와 그 가족들이 미국에 와서 페블 비치 근처에서 살기 위한 집을 찾고 수행하기 좋은 조용한 부지를 찾아 삼보사를 건립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유색인종이 그 지역에서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현금으로 일시불을 지급하고서야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으며, 삼보사의 법당 건축과 사찰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인근 주민들을 일일이 직접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간청하여서 동의를 얻어내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삼보사 건립비용은 페블 비치 집을 판 돈과 개인 이 거사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과 카멜 주변 한국불자들이 헌금 한 돈 약간을 모아 하였다. 당시 삼보사 공사 때는 버클리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도시계획학 전공하던 김씨가 이 한상거사를 도와 통역을 하면서 보좌하였다. 삼보사 건축비용은 당시 가격으로 40만 달러 정도가 들어갔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삼보사 법당이 완공되었고, 삼보사 개창 법회에는 초대주지로 운허 스님이 취임하셨으며, 송광사 조실 구산 스님, 전 총무원 교무국장 정달 스님, 홍법원장 숭산 스님이 참석 축하 법문을 하였고, 카멜 시장 에델 엔더슨 부부, 루이스 랭커스터 버클리대학 주임교수, 부파불교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에스 자이나 박사, 중미불교총회 부주석 석항정, 윤찬 샌프란 시스코 총영사 등이 축사를 하였으며, 신도 400여명이 참석하였다.
삼보사의 창립은 미주 한국불교 포교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지난 해(2002년) ‘삼보사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버클리 대학의 루이스 랑카스터(Lewis Lancaster)교수는 삼보사의 창립은 한국불교 해외포교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그는 삼보사의 건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불교가 세계화하는 데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몇몇 다른 한국 스님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포교활동을 하였지만, 독립된 수도원이나 사찰이 아니라 스님들이 기거하는 셋방이나 주택을 모임 장소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별도의 독립된 사찰로서 수도원 체제를 갖춘 법당의 건립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우선 이한상 거사는 시내 중심 가에서 벗어난 조용한 수도도량의 환경을 갖춘 부지를 찾았고, 둘째는 한국 불교의 정신을 실제로 담보해 낼 수 있는 건물의 구조를 갖추고자 했고,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한국 선원 건물을 고집하지 않고 미국 현지 실정에 맞는 현대적 법당 건물을 디자인하여 신축하였다. 그것은 미국 현지인 들이 선호하는 레드우드를 소재로 법당을 건립한 데서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랑카스터 교수는 이한상 거사가 한국 불교 역사를 기록하는데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고 했다. 그는 이한상 거사가 1860년부터 1960년까지의 한국 불교 최근 백년의 자료를 수집하여 자신에게 넘겨주었다고 했다. 덕산거사는 한국의 여러 불교학자들에게 경비를 지원하여 자료를 수집케 하고, 자신도 직접 백년간의 잡지, 신문, 책, 논문, 사찰 기록, 회보는 물론 구전되는 내용들을 직접 기록하여 9000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자신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랑카스터 교수는 이 원고를 컴퓨터 파일로 저장하고 CDROM으로 제작하였다. 원고의 복사본은 지금 버클리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덕산거사는 한국불교 최근세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기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덕산거사 스스로는 “삼보사의 설립 목적은 단순히 불교 신앙을 전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삼보사를 찾는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참선 수행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수행의 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참 마음을 찾아 완전한 자유인이 되고 완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1983년 1월 23일, 창건 10주년 기념 법회에서 몬트레이 지역의 영자 신문인 The Sunday Peninsula Herald와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덕산 거사는 삼보사 창립이후 삼보사에서 주석하면서 삼보사 수도원장으로 삼보사 운영과 법회를 직접 주관하며 1975년에는 11명의 신도들에게 5계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는 스스로 수행자라고 하길 좋아했으며, 수행자로서 삶을 살았다.
큰아들 석주씨는 덕산거사는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다 포용을 했다고 한다. 덕산거사는 방문자들이 질문을 하면 가이드를 제시했지만 사람들을 일부러 모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각자의 수행과 자각을 통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석주 씨는 덕산거사의 첫 번째 신조는 “말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함께 생활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설법과 강의를 강조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 수행이 따르지 못하는 상황에 다소 실망한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참으로 깨달음을 원한다면,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덕산거사의 견해였다. 또 덕산거사는 가족들에게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는 강조하곤 했다고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라. 정직하라. 헌신하라.”
덕산 이한상 거사는 생애 마지막 10 여 년은 거의 출가자와 다름없는 수행자로서 삶을 살았다. 매일 새벽 예불을 직접 올리고 108배를 거르지 않았으며, 하루 8시간 씩 참선 정진을 하였다고 한다. 미국 땅에 한국불교를 뿌리내리겠다는 원력은 어떤 출가 스님 못지 않았다. 단순히 삼보사라는 사찰의 건물을 건립한 시주자가 아니라 몸소 수행자로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의 포교는 억지로 남을 가르치거나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수행의 삶을 실천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깨달음의 삶을 생활 속에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생전에 미국 땅에 불교를 포교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삼보사를 건립하고 이후 줄곧 그곳에 주석하면서 포교와 정진에 매진하던 덕산거사는 1984년 8월 23일 정오 자신이 세운 삼보사에서 정원수를 돌보다가 67세를 일기로 세연을 마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장례는 대한불교 조계종 미주 불교도장으로 거행이 되었으며, 장례위원회에는 성철, 고암, 혜암, 관응, 법안, 월주 스님 등 당시 큰 스님들이 고문으로, 장의위원장에는 숭산스님이 위촉되고 그 외 부위원장과 장의위원, 집행위원에 미주와 한국 불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망라된 것만을 보더라도 덕산거사가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9월 1일 영결식에는 200 여명의 회중이 모인 가운데, 숭산스님이 영결 법어를 하였고, 월주 스님과 감리교의 송정렬 목사가 조사를 하였다.
“덕산 이한상 거사는 사(私)보다 공(公)에 살으셨고 안일보다 중생을 위한 고통을 달게 받으시고 정직, 근면의 일상 생활 또한 철저한 구도 정진의 모범된 불자의 행을 보여 주었으며, 불교의 대중화, 불교문화 진흥에 헌신하면서 한국불교 해외 포교역사에 한 장을 마련하였다(LA 지역 신도회장이었던 최동수 씨의 덕산 이한상 거사 일주기 추도사에서).”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17~1984)이 우리 불교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었던 때는 대략 1963년부터 1972년까지 10년 정도로 볼 수 있다.1)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현대불교사에 남을 만한 여러 중요한 일을 해냈다.
지금 이한상의 생애를 되짚어보며 그가 보여준 불교적 삶의 의미를 말하려는 것은 우리 불교계가 누리는 기름진 토양의 바탕에는 그가 흘린 땀과 노력이 아주 깊고 넓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애써 거름 뿌려준 사람의 노고를 기억하는 것은 훗날 그 곡식의 풍요를 누리는 이들의 미덕이자 의무일 것이다. 먼저 그가 이룬 불교 관련 공적을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며 글을 시작하겠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수백 단어의 현란한 말보다 때론 무채색의 한 줄이 훨씬 뚜렷하게 다가갈 수 있다.
덕산 거사의 행적
1964~1972년: 대한불교신문사 사장
1964~1970년: 삼보법회 · 삼보학회 · 삼보장학회 창립
1964~1974년: 세계불교도우의회 부회장
1966~1972년: 광동학원 인수후 이사장, 불교종립학원연합회 부회장
1966년: 5 · 16민족상 수상
1967년: 5 · 16민족상 상금 50만 원과 사재를 포함해 500여만 원을 희사해 서울 장충단공원에 사명대사 동상 건립
1968~1970년: 동국학원 감사
1968~1971년: 대한불교달마회 회장
1969~1972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재
1972년: 미국으로 이주
1973년 1월 28일: 미국 최초의 한국사찰 삼보사 창건
1984년 8월 23일: 삼보사에서 67세로 입적
이한상이 불교계에 이룬 공적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자면, 1964년 당시 폐간 위기까지 몰렸던 불교계 최대 언론사인 《대한불교》(현 〈불교신문〉) 사장을 맡아 신문을 정상화 시키고 주간지로 거듭나게 했던 일을 가장 먼저 꼽게 된다. 이어서 재가 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삼보학회 및 삼보법회 창립, 불자 대학생 장학금 지급과 같은 젊은 인재 육성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미완의 업적인 되고 말았지만, 현대불교 100년사 집대성을 위한 한국불교백년사 편찬사업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한국 현대불교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여러 가지 일 중 상당수가 그의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그의 삶을 이 정도로만 요약해 봐도 지금 이한상의 불교적 생애를 되짚어보려는 까닭은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이한상은 본관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이고 태사공(太師公) 31대손이다. 시조의 종묘(宗墓)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는데 1968년 3월 3일 문중에서 ‘종인한상송덕비(宗人漢相頌德碑)’라는 송덕비를 세웠을 만큼 이한상은 문중의 주요 인물로도 꼽히고 있다. 이는 그가 문중에서 단순히 부유한 실업가 정도로만 인식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품과 사회에 대한 공헌이 남달라 문중을 빛냈다고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국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짓는 부모의 만류를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용산구 용문동에서 지냈으며, 1938년 경기공립공업학교를 졸업했다. 경기공립공업학교는 1910년 개교한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를 모체로 한다. 1944년 경성공립공업학교, 1946년 6년제 경기공업중학교, 1974년 경기공업전문학교, 1979년 경기공업전문대학, 1988년 서울산업대학 등의 개편 과정을 거쳐 2010년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되었다. 1938년 경기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동안 사업 실무를 익힌 이한상은 1946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29세에 풍전산업주식회사를 창립,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이한상의 삶에서 불교를 떼어놓고 보면 그는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 사업가로 기억되어야 한다. 풍전산업주식회사가 번창하자 1961년 대한전척공사를 창업하여 직원 3,000명이 넘는 한국 최대의 토목건축회사로 키웠다. 이후 그는 사업가로서 전성기를 맞아 각종 건설사업을 성사시켰다. 광화문 네거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해, 서울 광교 옛 조흥은행 본점, 서울 인현동 풍전상가 같은 건물과 섬진강댐, 팔당댐, 경부고속도로 등의 건설이 대한전척공사가 시행한 건설사업이었다.
이 중 풍전호텔(현 호텔 PJ)을 포함한 풍전상가는 10층 건물로 세운상가 8개 동의 일부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부근의 인현상가 등과 함께 서울 중구의 역사문화자료가 되어 있다. 그는 이 같은 성과와 건설업계에서 얻은 신망을 바탕으로 1964~1968년까지 대한건설협회 회장을 맡았고, 사업 공적이 인정되어 1966년 정부로부터 5 · 16 민족상(산업 부문), 1970년 고속도로 건설 유공자로서 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이한상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서울에 와서 고학할 때 송광사의 구산수련(1910~1983) 스님을 알게 되면서부터라고 나온다. 그런데 구산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때가 1937년,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때가 1939년이므로, 구산 스님이 출가 후 한창 공부에 정진하던 이 무렵에 당시 20대 초반의 이한상이 구산 스님과 잦은 교류를 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뭔가 정확한 정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보다는 구산 스님이 안거 등 오랜 수행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교단정화 운동 등 불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인 1954년 여름 이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여하튼 이후 이한상은 오랫동안 구산 스님과 가까이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 달마회의 지도법사 행원 스님 등과의 친교를 통해서도 불교 공부를 착실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한상이 재가불자로서 불교계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점은 1964년 《대한불교》 사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대한불교》는 1960년 월간으로 창간되었으나 처음부터 재정난이 심했고, 5년도 되지 않아 폐간이 논의될 만큼 사정이 악화되자 종단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한상이 직접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신문사 인수 조건으로 기자의 인사 및 논설 방향 같은 회사의 핵심 방침은 종단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가가 왜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적자 신문사의 경영을 맡았던 것일까? 성공한 기업인으로서의 자만인가, 언론사 사주가 되어보겠다는 명예욕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을까? 그는 사장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입이 있고 마음속 뜻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말씀을 가졌다는 것은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새로운 법운이 싹터 교계가 활발한 발 디딤을 걷는 때를 맞이하여 우리 종단의 입이 될 수 있는 불교신문도 없을 수 없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총의외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제가 이 어려운 임무를 짊어지게 된 것은 한편 교계에 복전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다행함과 분에 넘치는 광영으로 생각하오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희 역량을 스스로 돌아볼 때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경영 인수의 각오를 취임사답게 다분히 겸양 되고 수사적(修辭的) 표현들을 써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포교와 교단의 발전에 신문이란 꼭 필요한 존재인데, 교단에 하나뿐인 신문사의 존속이 어려워진 현실을 보고 고민 끝에 참여하게 되었던 심정이 행간에서 읽힌다. 그가 신문사 인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동기는 《대한불교》 1965년 7월 15일 자 지령 100호 기념사에서 좀 더 솔직한 언어로 구사되고 있다.
본인은 원래 신문에 대해서는 너무도 거리가 먼 위치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종단의 기숙대덕(嗜宿大德)들이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이 위기에 봉착한 본지 간행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경영보다는 하나의 불사로 알고 흔연히 이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이 맡아 유지해온 지 1주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본지는 종단 내에 뻗어진 뿌리가 깊지 못한 것을 볼 때 오직 별만 바라보고 사막을 걷는 낙타의 심경을 가히 짐작할 수도 있다.
취 임사와 비교하면 문장으로서는 오히려 더 투박해졌지만 그의 본심은 더 솔직히 드러나 있다. 아마도 주변의 윤색을 사양하고 자신의 육성을 담아 《대한불교》의 경영을 맡았을 때의 심정과 속마음을 직접 전하려 한 것 같다.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대한불교》는 우리나라 불교계 유일무이한 보도기관이고 공기(公器)임을 자부”하며, 그가 신문사를 맡은 것도 “궁극으로는 종단 3대 사업의 하나인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여 신문사 경영을 맡게 되었던 목적을 분명히 했다.
《대한불교》는 이한상이 취임한 직후 열악한 취재진을 보강하고 보급망을 일신하여 서울 본사 외에 부산 등 주요 도시에 지국과 지사를 설치했다. 또 기자 외에 국내 12명의 특파원과 14명의 통신원을 별도로 둘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하며 빠른 속도로 신문사로서의 골격을 갖춰 나갔다. 해외에도 3명의 기자를 특파하여 보도 기능도 대폭 강화했다(1967년 당시). 극심한 경영난으로 존폐의 갈림길에 섰던 신문사를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명실상부한 신문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정비하여 《대한불교》는 불교계 최대 신문사로서 위상이 확립되었다. 이렇게 지면 혁신을 단행하며 일간지 못지않은 양질의 편집과 신문사 체계를 갖춰 50여 년의 불교신문 사사(社史) 중 가장 안정되고 알찬 신문을 발행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이 나중에 오늘날 교계 최대의 신문사로 꼽히는 〈불교신문〉이 되었으니, 이런 비약적 발전도 그때 이한상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1972년 3월 26일 자 제447호를 끝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며 신문사 지분은 조계종단으로 돌려놓았다.
한편, 이한상의 불교계 활동은 1968년 8월 29일 대한불교달마회(이하 ‘달마회’) 회장 취임을 계기로 더욱 힘을 얻었다. 달마회는 그 10년 전인 1958년 7월 8일 보문동 미타사에서 창립된 재가불교 수행 단체다. 회장은 초대 이창호 이후 이한상, 조병일 등으로 이어졌고, 지도법사는 행원 스님에 이어 혜암, 대은, 법인 스님 등이 맡았다. 달마회는 이한상이 회장을 맡은 이후 각종 불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때로는 핵심 추진 주체로서 때로는 외곽 지원 단체로서 그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한상은 회장을 맡기 이전부터 행원 스님의 지도하에 이 단체의 참선수행에 매진하여 이미 ‘한소식’ 터득한 재가불자로서 명성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한상과 불교계와의 인연을 얘기할 때 달마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결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1966년 문경 김룡사에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원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서경수 교수, 성철 스님, 숭산 스님, 이한상 거사, 박성배 교수.
이한상은 평소 불교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60~1970년대 이한상과 함께 불교운동을 했던 이들 중에는 그의 다양한 불교계 활동 이력 중에서도 젊은 불교학도들을 지원한 것을 가장 으뜸으로 놓으면서 오늘날 중고교 및 대학 불교학생 활동의 기반은 그로부터 마련되었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1965년 5월 5일 전국 각급 불교학교들의 협의체 불교종립학원연합회(이하 ‘연합회’)를 창립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광동학원 이사장으로서 이 연합회의 창설과 활동을 주도했다. 전국 31개 종립학교 교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회는 초대 회장은 당시 동국대 총장 조명기가 맡았고, 이한상은 행원 스님과 함께 공동 부회장으로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연합회는 불교교육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교육계의 함의를 도출하자는 게 기본 목적이었다. 그 실제적 목표로 각급 종립학교의 종단학교로서 위상 재정립, 교법사 제도의 현대적 개선 및 활성화, 중고교 불교 교재 편찬 계획 수립 등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효과적 포교를 위해서는 청소년들에게 먼저 통합적이고 체계적 불교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한상의 지론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단학교로서 위상 재정립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각급 학교가 범종파적으로 단합하여 불교의 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을 도모하자는 기본적 목표 아래 추진되었다. 그 결과 불교교재 편찬이라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사상 특기할 만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불교교재 편찬의 과정을 살펴보면, 연합회는 1965년 불교지도교사연구회와 함께 교재편찬위원회를 구성해 각 종립학교에서 사용할 중고교용 불교교재를 학년별로 1권씩 총 6권을 제작해 1967년부터 채택되도록 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불교교재로 사용하던 《밝은 생활》은 내용이 어려워 중등교육의 교재로서는 적당치 못하다는 게 일선 교사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연합회는 이러한 의견들을 적극 반영하여 새로운 교재 제작에 착수한 것이다. 편찬위원으로 대학 측에서 동국대의 조명기 · 김준열 · 서경수 · 박성배 · 김영태 교수, 일선 실무교사로 김윤주(해동고) · 이광현(해동중) · 이인홍(해인종합고) · 라상문(능인고) · 한철수(보문고) 교사 등이 참여해 교재 출판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했다. 이 작업은 말할 것도 없이 이한상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고, 예정대로 1967년 드디어 출판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기에 이르렀다. 3월 10일 동국대 대학선원에서 출판 고불식을 하고 일반에 선보인 이 책들은 중1 《부처님의 생애》 중2 《밝은생활》 중3 《바른길》 고1 《진리의 생활》 고2 《대승의 길》 고3 《불교와 인생》 등이다. 종전의 교재에 비해 청소년의 감각에 맞는 문장과 종교 일반, 인생, 사회, 과학, 예술 등을 불교와 연관 지어 포괄적으로 기술한 불교계 최초의 현대적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당시 문교부 검인정의 중고등 각종 교과서에서 도외시되다시피 했던 한국 고승의 전기(傳記) 및 사상을 대폭 수록한 점도 특기할 만했다. 여기다가 내용 역시 참신하여, 당시의 일반적 교재가 답습한 것처럼 페이지 전체를 오로지 텍스트로만 채운 게 아니라, 보다 빠른 이해를 위해 군데군데 요긴하게 삽화를 배치하는 편집을 구사하는 등 현대적 교과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 등으로 인해 이 새로운 불교교재들은 우리나라 교육사의 관점에서도 앞으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1,600년 한국불교 사상 불교교육을 위한 중등교육 교재를 출판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연합회는 이 같은 괄목할 만한 사업을 펼치며 1970년까지 총회를 정례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1972년 이한상의 갑작스러운 도미 이후 동력을 잃고 중단되었고, 그 결과 우리 불교교육 추진의 큰 주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불교교육계의 답보가 한동안 이어진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학을 ‘상아탑’에 빗대어서 ‘우골탑’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부를 정도로 대학 등록금은 대학생을 둔 가정이나 당사자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학금이란 지금으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소중한 혜택이었다. 자칫 학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은 그야말로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개울을 건너게 해주는 굵은 동아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해 나중에 사회의 동량이 되었다는 얘기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미담으로 신문에 자주 소개되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의 장학사업으로는 조계종단에서 동국대 불교 관련 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종단 장학사업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커다란 규모의 장학사업을 이한상이 주도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년 인재의 체계적 육성이야말로 이한상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불교계 최초로 오늘날의 장학재단에 해당하는 삼보장학회를 세워 체계적으로 장학사업을 펼쳤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익명의 개인 자격으로 여러 차례 장학금을 희사하곤 했다.
《대한불교》 1965년 3월 14일 자에 “65년도 종비생(宗費生) 10명, 익명의 독지가 희사로 전원 진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계종은 1964년부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재학생 중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종비생이라 한다. 첫해 16명에 선발되었고 이듬해인 1965년에는 처음 10명을 뽑기로 했으나, 예산 문제로 5명으로 줄이기로 종회에서 의결되었다. 예정되었던 대상자 10명 중 5명은 갑작스러운 변경으로 장학 혜택을 받지 못해 학업을 잇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한 독지가가 4명분의 장학금을 익명으로 총무원에 기증했고, 이어서 당시 개인으로서 유일한 장학기관을 운영하던 ‘마야부인회’의 장대보화 보살도 힘을 보태 총 5명분의 장학금이 더 조성되어 애초대로 최종 10명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기사였다. 나중에 그 익명의 독지가는 이한상으로 밝혀졌는데, 그는 그해 5월 2일 삼보장학회를 세워서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삼보장학회는 공정한 선발을 위해 공개시험으로 장학생을 뽑았다. 9월 19일 총무원에서 치러진 첫 시험에는 지원자 17명 중 8명이 합격해 등록금 전액이 지급되었다. 이 중에는 서윤길, 고익진, 김선근 등 훗날 우리 불교학계의 중진 학자로 성장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한상의 장학사업이 불교계에 훗날 어떤 결실을 보게 해주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삼보장학회는 1965년 후반기부터 대상자 범위를 대학원생에게까지 넓혀 연 2회 연구보조비를 지원했다. 이민용 전 한국불교연구원장, 송재근 ・ 오형근 전 동국대 교수 등이 이때 선발된 장학생들이다. ‘현대에 생명같이 될 불교를 책임질 젊은 구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이한상의 삼보장학회는 충분히 그 목적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삼보장학회는 수혜 혜택의 범위를 더욱 넓혀 대학원생 및 학부생을 포함하여 1966년 25명, 1967년 27명, 1968년 21명, 1969년 28명 등을 지원했다. 이 삼보장학금은 동국대를 비롯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전국 20여 대학 연인원 115명에게 등록금, 연구보조비, 생활보조비 등 3종으로 지급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 젊은 인재들이 더욱 힘을 얻고 우리 불교계가 더욱 발전되었음은 물론이다.
1960~1970년대 청년 불교운동의 한 축이 바로 오늘날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였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감하고 있다. 대불련은 1963년 전국의 각 대학과 3군 사관학교의 불교학생회가 모여 결성된 단체다. 창립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젊은 바람을 일으켰는데, 대불련 산하 대학생수도원의 건립과 운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65년 대불련의 구도부(求道部)가 서울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건립했고, 그 구도부원 중 일부는 봉은사에 수도원을 두고 기거하면서 학업과 수행을 병행해갔다. 대불련은 대학생 불자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교수와 지도법사의 면면도 학계와 교계의 명망 높은 교수, 스님들이었다. 대불련이 창립된 이후 1969년까지 수도원의 운영과 재정 대부분을 총재인 이한상이 맡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대불련은 1970년 3월 27일 전국 지부를 대표하는 35명의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80개 대학에서 3,000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었다. 또 같은 해 7월 열린 여름수련회에도 100여 명이 참가했을 만큼 건실한 운영을 선보였다. 대학생들이 주요 구성원이라 재정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임에도 운영을 지속적으로 튼튼히 이어나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한상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실례로, 대불련이 공고한 전년도 회계 결산 공고를 보면 수입 총액 1,472,029원 중에서 90%가 넘는 1,332,980원이 이한상의 지원금이었다. 대불련 재정의 거의 절대를 그 혼자서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할 바 없이 좋은 사업이었지만 견실한 재정의 뒷받침이 없어 잠시 지나가는 일과 구호로만 그쳤던 예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도 불교 활동에 늘 든든한 재정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한상은 대불련 발전의 커다란 공로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가장 난공사로 꼽혔던 섬진강댐을 오로지 국내의 기술과 자재로 우리나라의 첫 수풍력(水風力) 댐을 건설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5월 제1회 5 · 16민족상(산업부문)을 받았다. 개인으로 볼 때 큰 영광이었을 텐데, 그는 이 영광을 고승 동상 건립불사로 회향함으로써 많은 불자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진 과정을 자세히 보면, 이한상은 5 · 16민족상 수상 직후 상금 50만 원 전액을 서울신문사에 기탁하며 애국선열 동상 건립을 제안했다. 당시 남대문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가도에 선열들의 상이 서 있기는 했으나 모두 석고로 제작되어 보기에 좋지 않았고 동상 주인공의 위의 면에서도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한상은 이 석고상들을 동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신문사에 상금 전액을 기탁한 것이다.
이 일은 신문사를 통해 사회에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애국선열 동상 건립 바람이 불게 되었다. 정부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이 운동을 지원하게 되면서 고고학계, 역사학계, 실업계, 예술계 등 각계각층이 망라된 애국선열조각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이 위원회의 총재를 맡은 것도 곧 이 운동에 범사회적 지지와 함께 국가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위원회는 10명의 선열을 선정했는데 그중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의 동상 제작을 먼저 착수하기로 했다. 사명대사가 선정된 것은 이 일을 처음 제안한 이한상의 의견이 적극 반영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의 동상이 먼저 1967년 9월 28일 광화문에 세워졌고, 사명대사 동상은 그보다 조금 더 늦은 1967년 11월 11일 수많은 불교계 인사들과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열었다.
이한상은 상금 50만 원과 사재 500여만 원을 희사했으니 동상 제작비용 거의 전체를 혼자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상의 조각은 송영수(서울대 미대 교수), 동상에 새긴 비문은 불교학자 이종익 · 서경수(동국대 교수)가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국어학자 이희승이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이 쓰는 등 사명대사의 위상에 걸맞게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다. 이로써 불교계와 불교도들의 자긍심도 함께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사진 왼쪽 끝)과 함께. 스님 바로 뒤가 이한상.
못이룬 꿈 '한국불교백년사' 편찬
우리 불교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전하는 일에 무척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문학이나 기행 또는 그 밖의 여러 생활 분야에서 다양한 문집과 저술이 전해지건만 유독 불교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관련 기록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일부 사찰의 사지(寺誌)나 스님들의 문집 등이 조금 전해지는 정도다. 불교계는 이런 과작(寡作)의 경향 아래 근현대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욱더 기록이나 문서가 일실(逸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진 태평양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 해방 그리고 6 · 25전쟁 등으로 사찰이 큰 피해를 입으며 그나마 전하던 문서들마저 더욱 보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불교계 정화 운동 등으로 인해 문서들의 인계인수도 불확실해져, 시간이 흐를수록 불교계의 사료들은 많은 숫자들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6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불교계 및 학계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대 한국불교 사료의 총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산일(散逸)되어 가는 문서들을 모으고, 이전 100년의 불교 역사를 집대성함으로써 우리 불교가 지나왔던 걸음들을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좌표를 살펴보아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겠다는 거창하고 의미 깊은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의기가 투합되었으나 워낙 큰일이라서 추진에 필요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이한상은 이 같은 상황을 전해 듣고 쾌히 적극적 후원을 자임했고 드디어 이 사업은 본격적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사업에 소요되는 일체 경비를 이한상이 전담하였으니, 이 사업은 재정 면에서 이한상의 독불사(獨佛事)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국불교 백년사》 편찬 작업은 1965년 9월 이한상이 회장으로 있는 삼보학회의 주관으로 풍전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일은 그 성격이 근대의 각종 신문과 잡지, 비문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방대한 사업이라 전에 없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다. 운허 · 청담 · 대은 · 남래 · 설호 · 운학 스님과 같은 불교계의 존경 받는 원로 스님들과 김동화 · 이재열 · 이종익 · 이재창 · 김영태 · 서경수 · 박성배 교수 등 명망 있는 학자들이 편찬위원으로서 꾸준히 의견을 개진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안진오(후일 전남대 교수), 정광호(후일 인하대 교수), 권기종(후일 동국대 교수) 등의 젊은 학자들이 실무를 맡아 차근차근 자료를 모았다.
사실 이런 면면은 당시 불교학계는 물론 일반 학계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폭넓은 진용의 규모여서 이한상이 이 사업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처럼 복사나 스캔이 쉽지 않은 때여서 실무진은 도서관에서 가 자료를 손으로 베껴 카드에 옮겨 쓰거나, 현장에 가서 자료를 보고 채록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국가사업에 필적할 만한 학술출판 사업이라고 할 만했다. 이런 종류 프로젝트의 성패는 대체로 안정적 재원의 확보에 달렸기 마련인데, 이한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질 없도록 모든 후원을 도맡았다. 이 편찬 사업은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1968년 7월 가제본 2권을 내놓음으로써 드디어 1차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한상은 이때의 감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우리 한국불교에서 가장 격동기였고 또 가장 큰 영향을 준 최근 백 년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한시라도 빨리 정리해 놓지 않으면 그나마 인멸되어 버릴 것 같아 지난 3년간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였습니다. 모쪼록 불교계에 큰 빛이 되고 후일에 유감이 없는 좋은 책이 만들어졌다는 평을 받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선을 보인 《한국불교 백년사》는 척불정책으로 수난의 대상이 된 불교가 산간불교로 법맥을 이어오던 1865년을 기점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서의 굴욕과 타락, 해방 뒤의 정파 파동을 거쳐 수습 단계에 접어든 1965년까지의 사료를 망라한 방대한 내용의 사료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완성본은 아니었다. 4년의 작업 끝에 1차로 선보일 당시 철필로 쓴 등사본이어서 정식 출판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다. 아마도 정식 출판에 앞서서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모아 분야별로 정리해서 가제본을 먼저 낸 다음, 감수위원회의 감수를 거쳐 보완과 수정을 마친 다음 정식으로 활자화하여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제본을 학계에 처음 선보인 이후 약 4달에 걸쳐 운허 · 이남채 스님, 김동화, 이종익, 이재열, 서경수 등이 참여한 감수위원회가 몇 차례 열려 향후 보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앞으로 나올 완성본에서는 객관화된 용어 사용, 정화분규 이후 자료에서 대처 측 제공 자료 보충,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정화유시 이전 통도사, 불국사에서 개최된 고승회(高僧會) 내용 보완, 조계종 외에 불교의 각 종파, 내력과 사건을 함께 수록할 것 등의 의견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렇게 막바지를 향해 달려나가던 백년사 출판 사업은 그러나 끝내 완결을 못 본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결국 활자화된 출판물이 아니라 가제본 형태의 책으로만 남은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그 길고 어려웠던 자료수집 과정도 다 마쳤으면서 왜 정작 활자화라는 마지막 관문을 못 넘겼는지 매우 의아하다. 사업에 절대적 영향과 후원을 도맡았던 이한상이 막판에 편찬 사업의 완결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의 완성에 뭔가 복잡한 이해가 걸린 부분이 있어서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일까? 후세에 전할 자료집이다 보니 객관적 자료수집은 거의 완결되었으나, 어떤 사건에 관련된 관계 종파나 기관 또는 개인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자료수집 기간만큼이나 완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길게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1972년 이한상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미국에 이민을 떠나면서 이 사업도 구심점을 잃고 중단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에 대해서는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우리 근대 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해보려는 프로젝트가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후 우리 불교계는 이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이 사업은 사실상 방치되어 버렸다. 우리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랭카스터 교수가 이 자료에 큰 관심을 보여 1980년대에 가제본에 실린 내용을 한글파일로 입력하며 출판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일 역시 완성되지 못했다. 최근 1960년대 젊은 대학생으로 이한상과 함께 불교운동에 앞장섰던 몇몇 뜻있는 인사들과 단체가 이 가제본을 출판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근대 한국불교사의 집대성이라는 이한상의 큰 뜻을 지금의 불교계가 이어서 완성한다면 이야말로 인연소기일 텐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1960년대 중반 이한상은 달마회와 《대한불교》를 맡아 이끌어나가며 불교계의 재가 저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시야를 국제무대로 넓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세계 불교계에서는 19세기 후반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와 인도의 암베드카르에 의해 시작된 불교부흥운동 단체인 대보리회(大菩提會, The Maha Bodhi Society)의 영향력이 컸다. 이한상은 1964년 이 단체의 회원국으로 가입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저명인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국제 교류를 갖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 덕택에 1967년 태국에 본부를 둔 ‘세계불교도 우의회(友誼會)’의 총재 푼 피스마이 디스쿨(Poon Pismai Diskul) 공주가 이한상을 공보지(誌) 자문위원에 지명함으로써 한국불교가 세계 불교회원국과 더욱 가까이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한상은 이어서 1968년 11월에 열린 총회에서도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1972년까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한국불교가 국제 불교계에서 점점 확고한 위상을 쌓아갈 수 있도록 했다.
사실 이런 활동은 단순히 외국과 불교교류를 했다는 상징적 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아직 미약했던 시절이었다. 여러 가지 국제 정세와 질서로 인해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외교는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권위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불교계가 이렇게 해외 불교국가와 잦은 교류를 갖게 된 것은 곧 민간외교의 역할도 톡톡히 한 것이어서 국가의 외교 발전 전반에도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 충분했다.
이처럼 국내 포교에만 머물지 않고 안목을 세계로 넓혀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던 이한상은 1971년 갑자기 국내 사업을 접고 신병을 정리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그리고 1973년 캘리포니아 카멜 시에 삼보사(三寶寺)를 창건하여 한국불교를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삼보사는 1만여 평의 대지에 대웅전 100평, 선방 200평, 관리사무실 등 4채의 건물을 갖추어 약 300명을 수용하는 넓은 사찰이었다. 미국에 우리 불교를 알리는 가람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끌었다. 창건에 소요된 경비는 13만 달러(당시 환율로 한화 약 5,200만 원)를 훌쩍 넘겼다고 한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 사정에 비춰보면 이 비용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한상이 이런 거금을 아끼지 않은 것은 미국에 한국불교를 심으려는 열정이 그만큼 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미국 이민의 배경은 정치적 문제 때문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런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알아보아야 확실히 말할 수 있겠으나, 그의 불교적 삶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의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한상은 국내 불교 발전과 함께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큰 힘을 쏟았는데, 만년에 자신이 직접 그 현장에 서게 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삶을 읽다가 그 끝자락에서 펼쳐진 이 대목을 보다 보면 사람이 맺는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 떠올려지며, 문득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첫댓글 _((()))_ _((()))_ _((()))_
카멜 삼보사가 있기까지 이거사님의 노고와 정성이 많았군요
마음이 짠합니다
삼보사에 대한 마음이 달라집니다
제가 존경하던 스님의 주석처라 가보고 싶었는데 깊은 내용과 역사를 알게되어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이한상거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미주 불교와 우리의 불교 해외포교운동의 선구자로서
이한상거사님의 불사와 수행을 알게되었습니다.
한번 방문해 보고샢습니다.
감사합니다. 참회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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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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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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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