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미추왕릉 지구가 1960, 70년대에 이목을 끌게되면서 대대적 학술발굴이 이루워져 '대릉원' 이라는 고분공원으로 정리된 것이고, 이곳에는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검총 등 20여기의 신라 고분이 밀집해 있다.
대릉원 안의 고분들은 신라 왕과 귀족들의 능묘로 추정되고 있고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봉토분(圓形封土憤)으로 되어있으나, 표형분(瓢形憤)인 부부 합장의 쌍분(皇南大塚)도 있으며, 내부구조는 몇몇 고분의 발굴 결과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재지】 인왕동 첨성대 옆
【교통편】 (→:버스이동 ↘:하차 ↗:승차 ⇒:도보)
☞시외/고속버스 터미널
▶70번(17분간격)
고속터미널(건너편)→경주공고→황남초등↘대릉원(천마총)
1. 사리원: 분황사, 시내지구)
2. 청산솔잎냉면 (백률사) 낚지 전골의 전수
3. 왕성회관(쿠폰20%/대릉원,첨성대,천마총 옆)
4. 요석궁 : 반월성 뒤에 위치한 한정식집...
【인근 잠자리】
1. 대명장 : 고속버스 터미널 뒷편... 시외버스 터미널 옆에 있어요..
2. 다래장 : 시외/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도보로 8분 거리(협성호텔을 물어서 가시면
첨성대
첨성대(瞻星臺)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A.D 632-646)때에 이룩된 천문대로서 천기(天氣)를 관측하고 별자리를 살피려고 쌓았다. 현재 동양에 남아 있는 최고의 천문대일 뿐만 아니라 직선과 곡선이 간결하게 조화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기도 하다.
밑에서 13단과 15단에 걸쳐, 남쪽으로 네모난 출입구를 마련하였는데, 그 아랫돌 양쪽에 사다리를 걸었으리라 추측되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몸체 안쪽 제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제19단, 제20단과 제25단, 26단의 두 곳에 "井"자 모양으로 2단이 놓여 있다.
1단의 높이는 약30cm이고, 전체높이는 9.17m이며, 밑받침 돌 1변의 길이가 5.35m로 되어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첨성대를 구축(構築)할 때 쓰인 돌의 수가 362개라 하는데 이것은 1년을 음력으로 계산해서 잡은 것이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천문을 관측하였는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일식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떨어졌다는 이야기들이 옛 기록에 많이 적혀 있고 날이 가물고 장마 때문에 흉년이 들려할 때 임금님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 드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천기에 대하여 관심이 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소재지】 인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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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
계림(鷄林)은 교동(校洞)에 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의 발상지이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건국 초부터 있던 숲으로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태양이 제일 처음 비추어 주는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始林)이라 하던 것을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된 김알지(金閼智) 탄생의 상서(祥瑞)가 있은 뒤로 계림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나라 이름까지도 되었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65년(탈해왕 9)에 왕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신하를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사자(使者)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빛으로 된 조그만 궤짝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그 사실을 아뢰니 왕이 친히 행차하여 그 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얼굴이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력이 많았는데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시림을 고쳐 닭이 운 곳이라 하여 계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라이름도 계림국(鷄林國)으로 삼았다고 한다.
석탈해왕(昔脫解王)이 돌아가고 김알지는 3대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고 그후에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가 신라 제13대왕이 되었는데 김씨로서 처음 임금이 되었고 17대 내물왕부터 신라가 끝날 무렵까지 모두 김씨 자손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졌다. 그리하여 이 계림은 신라 김씨 임금의 시조가 태어난 숲이라 하여 신성지로써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지금 숲 속에는 비각이 있고 그 안에는 조선순조(朝鮮純祖) 3년에 세운 비석이 있다. 계림 뒤쪽으로 몇 기(基)의 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내물왕릉이다.
【소재지】 교동
【교통편】 (→:버스이동 ↘:하차 ↗:승차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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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7분간격)
고속터미널(건너편)→경주공고→황남초등↘대릉원(천마총)⇒5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 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 /서무/전사청/내신문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 는 5성, 송조 6현 ,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6,7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반월성(반월성 내의 석빙고)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흙과 돌로 쌓 은 도성으로 둘레 2,400m이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내에 건물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 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년)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423보(步)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월성을 궁성으로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음 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때에는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일대가 편입,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다. 동서길이 900m, 남북길이 260m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19만8000㎡이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정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 인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290년(유례왕 7년)에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 져 이듬해에 보수하였으며, 487년 (소지왕 9년)에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신라의 제성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왕의 거성이었던 반월성을 왕의 거처지로 삼은 것은 탈해왕 때부터였다. 元素는 왜인(倭人)이라고 전하는 호공(瓠公)의 주거지였으나 그 땅이 명지(名地)임을 안 탈해가 계략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왕이 된 후 거기에 왕실을 조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왕을 축조하게 된 것은 제5대 파사왕(婆娑王) 22년(AD 101) 2월이며 7월부터는 왕도 여기로 옮겨오게 되었다.
사기의 기록과 월성에서 출토된 기와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월성의 중수중에는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태평을 누리던 문무왕 19년에 가장 대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하의 하례를 받던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과 정청(政廳)이었던 평의전(平議殿), 그리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베풀던 임해전(臨海殿)과 그밖에 강무전(講武殿), 동례전(同禮殿)등이 있었고 여러개의 누각도 있었다. 또한 여러궁전은 크고 작은 궁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 데 귀정문(歸正門), 임해문(臨海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준례문(遵禮門),남문(南門), 북문(北門)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소재지】인왕동
【교통편】( →:버스이동 ↘:하차 ↗:승차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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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번(7분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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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文武王) 14년(674) 2월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 (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 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 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정비한 것이다.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말까지 2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못의 둘레는 호암석(護岩石)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서암(西岩)과 남암 (南岩)은 직선으로, 북암(北岩)과 동암(東岩)은 곡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못 안에는 크고 작은 3개의 7섬이 있었고, 물은 동쪽 북천의 지류(支流)에서 끌어온 것 같으며, 넓이와 높이가 약 40㎝정도의 화강암으로 된 수로를 통하여 들어온 물은 2개의 큰 석조를 거쳐서 못에는 폭포와 같이 낙하하도록 만들어졌다.
출수구(出水口)는 북암 중간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마개가 있어서 수위(水位)를 조절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목관(木管)을 통해서 빠져나간 물은 당시의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못 주변에서 회랑지(廻廊址)를 포함하여 26개소의 크기가 다른 건물 터가 확인되어 그 중 서쪽 못가의 5개 건물 중 3개만 신라시대의 건물로 추정하여 복원했다.
초석(礎石)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모조하여 회랑지를 제외한 건물 터에만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안압지와 임해전 등 부속건물을 추정하여 50분의 1로 축소한 모형도를 만들어 원래의 임해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원지(苑池)는 동서길이 약 190 평방미터의 평면 속에 15,658㎡의 못을 조성하였다. 못가의 호(湖)안은 다음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 호안은 절묘한 굴곡의 곡선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쪽과 남쪽 호안은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을 이용하여 조성되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에 돌출시키기도 하였다. 못 속에는 삼신도(三神島)인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 가 배치되었다.
남쪽 섬은 1,090㎡, 중앙섬은 66㎡, 북쪽섬은 495㎡ . 못 호안 주변과 섬에는 괴석을 가득히 배치하였다. 못의 호안 높이는 동, 북, 남이 210㎝ 정도이고, 서쪽의 궁전 건물이 있는 호안은 540cm이다. 이는 못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보게 만든 높인 것이다. 이곳에서도 동양인은 원림(苑林)을 한 곳에 앉아 바라보는 습성을 보여 준다.
이와는 달리 서양인은 원림 속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여 동적으로 조성된 것이 많다. 연꽃잎이 부분적으로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못 바닥에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와 깔아서 물이 맑았던 것이며, 못 가운데쯤 '井'형 목조물(길이 134cm, 높이 101cm 정방형)을 못 바닥에 박아서 그 곳에 연(蓮)을 심어 연뿌리가 번져 나가지 못하게 하여 한정된 공간에 연꽃이 피게 만든 시설 때문이다.
못 물의 깊이는 약 18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못을 바다로 상징하여 넓게 보이고 자 한 것인데, 연꽃이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이기 때문에 못 바닥에 수초가 나지 못하게 강회나 자갈돌을 깔았던 것이다.
복원 전과 복원 후 얼마 정도에 제1건물과 제3건물 사이에는 버드나무와 큰 교목들이 서 있었다. 이것들은 이 정원을 망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큰 나무가 산 위에 서면 선산(先山)인 무산(巫山) 12봉(峯) 이 작은 무덤처럼 보이고, 숲에 가려져서 가산(假山)이 없어져 버린다. 현재에는 이런 버드나무와 큰 교목들은 없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 가의 5개 건물 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 1,3,5 건물) 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하여 재현한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1910년 경주시민의 요망에 따라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면서 신라의 문화 유적 보존을 위해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개설하여 신라 문화재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박물관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것을 경주박물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921년에는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시민들은 금관고라는 건물을 마련하여 여기에 출토품을 전시 보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되자 경주분관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편재가 다듬어졌다. 이때까지 동부동에 자리잡고 있던 옛 박물관은 1,200여평의 터에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박물관이었다.
그뒤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높아지면서 경주지역의 유적조사가 활발해져 많은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그 보존과 전시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현재의 자리인 인왕동에 2만여 평의 터를 마련하여 새 건물을 지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며, 1985년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제2별관을 개관하여 모두 세 채의 전시관을 갖추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의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개관이래 경주지역 문화유산의 발굴 수집 연구에 온갖 정성을 쏟으면서 전시내용도 보다 나은 쪽으로 꾸준히 고쳐 나아가고 있으며, 사회교육사업으로는 경주의 신라문화동인회와 함께 1954년부터 시작한 어린이박물관학교를 매주 토요일마다 열어 평생교육기관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 여름 겨울방학 동안에는 청소년 문화강좌가 열리며, 5월 18일 세계박물관의 날에는 해마다 어린이 문화재그리기 만들기대회를 열어 어려서부터 우리 문화재에 대해 사랑을 갖도록 하는 마당을 마련하고 있다.
전시실은 본관 제1별관 제2별관의 3개 전시관이 있으며 뜰에도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본관은 경주와 주변지역에서 수집한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한 선사 원삼국실 이양선박사가 기증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국은기념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금속공예등을 전시한 미술공예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별관은 고분관으로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일제시대에 발굴된 금관총 서봉총을 비롯하여 1970년대에 조사된 계림로고분, 미추왕릉지구고분, 천마총, 황남대총. 그리고 최근에 조사된 정래동고분 월성로고분 용강동고분 황성동고분 등에서 출토된 일괄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2별관은 안압지관으로 안압지에서 나온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을 선정하여 전시하고 있다.박물관 뜰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덕대왕신종을 비롯하여 고선사터 석탑 등 경주지역에서 수집한 많은 석조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유물은 약 2,500여점에 이르며 소장유물은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지금까지 각종 학술서와 기획전시도록, 교양강좌 교재 등 수십권의 간행물을 펴낸바 있다.
황룡사
대릉원을 지나 반월성의 동쪽을 바라보면 칠처가람지의 하나로서 그 규모나 사찰면에서 신라 최대이었음이 확실한 황룡사가 나타난다. 1976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담장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281m, 총면적 2만여 평으로 동양에서는 최대의 사찰이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밝혀졌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가람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원위치를 지키고 있다.
원래 산에 있는 가람은 산이 배경이 되어 아늑한 느낌이 드는데,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황룡사는 아늑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수를 늘려 절 안으로 들어 설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는 아늑한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신라삼보(新羅三寶)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이 《普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의 하는 백고좌강회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장은 634년(선덕여왕 12년)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여적, 예맥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부터 침략을 막을 수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년)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25)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현재 목탑의 각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이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들에 의하여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도난 당하였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는데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의 아쇼카왕이 철 5만 7000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로 실어와서 574년진흥왕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 병화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소재지】 구황동(황룡사지 남편 100m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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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모전석탑
이 석탑은 전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로 쌓아서 전탑을 모방하였으므로 모전 석탑이라고 부른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분황사 창건 때인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으로 보고 있다.
현재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15년조선 총독부에서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꺼냈는데, 함 안에서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 주화가 발견되었다.
이 화폐로 보아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은 높고 넓으며 4각형인데, 1층 탑신 4면 가운데 감실을 파고 문을 달았다. 문틀은 화강암 석재로 만들었는데, 문설주에는 입체 조각에 가깝게 도드라진 인왕상을 새겼다. 이 인왕상은 힘차고 부드러운 표현으로 신라불교조각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소재지】구황동
【교통편】(→:버스이동 ↘:하차 ↗:승차 ⇒:도보)
☞ 시외/고속버스 터미널, 경주역
▶10번(00:10간격)
↗시외터미널(건너편)→고속터미널(건너편)→경주역(건너편)→팔우정→월성동소 (대릉원 입구 ↘분황사
흥륜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에 위치하는 신라최초 의 사찰인 흥륜사의 절터, 지정면적 1만 683㎡, 사적 제 15호. 흥륜사는 법흥왕이 528년 불교를 공인한 뒤 최초로 세워진 절로서, 진흥왕때인 544년에 완성되었다.
이 절이 완성된 뒤 진흥왕은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 며, 진흥왕 자신도 승이 되어 이 절의 주지가 되 기도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불법의 시초가 이곳에서 시 작되었기 때문에 신라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시 되었던 사찰이었으며, 왕실의 비원을 간직한 사찰이기도 하였다.《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에는 선덕여왕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타삼존상이 있었다 고 하며,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표훈·자장등 시라십성의 초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조 각을 모셨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1980년대에 새로 세운 흥륜사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왓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때 창건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 의 경주공업고등학교 터를 닦을 때 학교부지가 큰 절터임이 밝혀져 이곳을 흥륜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읍성
경주시 북부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읍성 으로 사적 제 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는 신라이래 지방통치의 중심지로서 읍성이 존재 하였으리라 추측되나, 이 읍성의 정확한 측성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를 거쳐 그 이후에 도 경주를 중시하여 왔으므로 읍성이 축조되었 을 것으로 보이나, 축성연대는 불확실하다.
고려 우왕 4년(1378)에 개축하였다는 것과 조 선 영조 22년(1746)에 개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쪽에 향일문(向日門), 서쪽에 망미문(望美門), 남쪽에 미례문, 북쪽에 공신문(拱辰門)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대부분 헐리고 황성공원(隍城公園)으로 가는 큰길 좌측의 민가 뒤에 동쪽 성벽 약 40~50m 가량만 남아 있다. 그리고 성벽에서 간혹 탑재(塔材)가 발견되는데 이는 개축할 때 부근의 절에서 옮겨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때는 왜군과 이 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아군은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주위 1.22m의 석성으로 높이는 3.6m이며 성벽은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잘 다 듬은 돌이다.
오릉
시내 중심에서 남으로 뻗은 포석로(鮑石路) 좌 측에 위치하는 오릉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 (朴赫居世王)과 남해왕(南解王), 유리왕(儒理 王), 파사왕(婆娑王) 등 신라 초기의 네 박씨왕 과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閼英王妃)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능의 주인공에 관한 설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삼국사기」 초기 왕들의 장지 기록에 의거하여 상술한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박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만에 승천 하였는데, 그 7일 뒤 유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고, 이 때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흩어진 유체를 모아서 장사 지내려 하였으나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다섯 유체를 각각 장사 지내고 오릉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사릉이라고도 하였다는 설이며, 현재는 대개 전자설을 인정하고 있다.
능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외형은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분이다.
참고로 오릉의 남쪽에 위치한 숭덕전은 혁거세왕의 제향(祭享)을 받는 제전(祭殿)으로 본래 조선 세종 11년(1429)에 지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현존하는 건물은 선조 33 년(1600)에 재건한 것이다. 숙종 20년(1694)에 수리하였으며 경종 3년(1723)에 숭덕전으로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세긴 신도비가 있는데 영조 35년(1759) 에 세운 것 이다. 숭덕전 위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閼英井) 터가 있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眞平王)의 장녀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어 재위 16년간 후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 명장 김유신과 같은 영검을 거느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고 분황사, 첨성대 등을 세웠으며, 특히 신라 최대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 건축의 금자탑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곳에 능을 만든 것은 여왕의 유언에 따라 도리천에 장사지낸것으로 후대인 문무왕 때 능 아래로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세워지게 됨으로서 여왕의 예언이 증명되기도 했다.
능의 형태는 밑둘레가 73cm에 달하는 원형봉토분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를 2단으로 쌓아 보호석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능을 만들때 모두 여인들의 손으로만 만들어졌다고도 전한다.
태종무열왕릉(태종무열왕릉비)
서악동 선도산 아래의 나지막한 송림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능은 태종 무열왕릉의 능으로, 본명이 김춘추인 태종 무열왕은 신라 진자왕의 손자이자 아찬 벼슬을 하 였던 용춘의 아들로 탁월한 정치력과 뛰 어난 외교술로 삼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 었던 삼국 말 혼란의 와중에서 신라를 지 탱케 하였고 재위 기간동안 삼국 통일의 웅지를 품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서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 으나 통일의 완성은 그의 아들 문무왕때 에 이루어졌다.
능의 형태는 원형봉토분으로 둘레 110m,높이 11m이며 봉분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축대처 럼 쌓고 큰 돌을 드문드문 괴어 놓은 호석(護石)을 둘렸는데 지금은 괴어 놓은 큰 돌만 보인다. 이와 같은 호석구조는 경주 시내에 있는 삼국시대의 신라 고분의 호석구조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식이며 능 앞 비각에는 국보 제 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다. 이곳은 비교적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좋을 듯 하다.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
【교 통】 (→:버스이동 ↘:하차 ↗:승차 ⇒:도보)
김유신장군묘
경주시 충효동 송화상 김유신 장군은 금관 가야 국(가락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일명 김구형)의 손자이고 신라의 명장이었던 김서현 장군의 아들로서, 그의 나이 15세에 화랑이 되어 무예를 닦고 35세에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은 김춘추를 도와 태종무열왕이 되게 하고, 그와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7년 (660)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때에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문무왕 8년(668)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또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다.
이렇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장군은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기도하였다.
이러한 김유신 장군에게는 탄생과 관련된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아래와 같다.
금관가야 왕족인 기서현과 진흥왕의아우 숙글종의 딸인 만명부인 사이에서 무려 20개월만에 태어난 김유신은 태어나던 날 어디선가 학 한 마리가 날아와 아기의 울음소리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추었는가 하면, 아기의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어 이것을 본 사람들은 아기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는 것이다.
묘의 형태는 직경이 30m나 되는 큰무덤으로 봉분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護石)을 설치하였고 호석중간 중간에는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 (十二支神像)을 배치하여 방위신으로 삼았으며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돌렸다.
12지신상은 원성왕릉(괘릉),현덕왕릉, 성덕왕릉 등의 12지신상과 비교하여 그 중 가장 보존 상태가 뛰어나 눈으로도 12지신의 모습을 식별할수 있다. 묘의 앞에는 조선 시대에 세웠던 비석이 있고 석상은 최근 묘를 수리할때 세운 것이며 묘 주변 땅속에서 높이 약 30cm의 납석에 정교하게 새겨진 12지신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김유신 장군묘로 가는 길은 봄이면 아름다운 벚꽃이 만개해 찾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