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에 노을지다
주말 셋째딸과 함께 남양주시청에서 하는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고종의 뒤에서 국정을 조종하는 배우의 우렁찬 목소리가 귀에 쩌렁 쩌렁한 울림으로 남아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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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국태봉
그 분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뒤돌아 봅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으로 병인,신묘양요 싸움에서 외세를 몰아낸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그리고 명성왕후와의 권력 대결에서 느꼈던 감정은 무엇일까 궁금해 지는 아침입니다.
흥선대원군묘
○지정번호: 기념물 제48호
○소재지: 화도 가구단지중앙길 108-19
조선 말기에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묘이다. 그는 고종황제의 아버지로서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1863년 제25대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정왕후 조씨(헌종의 모)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대원군에 봉해졌고, 그 후 섭정(攝政)을 하였으며 1907년 대원왕에 봉해졌다.
대원군은 국내외로 과감한 국정개혁에 착수하여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으며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애는데 노력하였다.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여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다.
또 세제 개혁 등을 통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꾀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경복궁 중건 사업을 무리하게 펼치면서 오히려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천주교 탄압과 함께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면서 1866년 프랑스군의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군의 신미양요에 맞서 격퇴시켰고, 일본의 국교 교섭 요구도 거부하는 등 강력한 대외정책을 폈다.
섭권 10년 만에 명성황후(明星皇后)와의 대립으로 1873년에 물러났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천진(天津)에 4년간 갇혀 있기도 하였다. 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장사지냈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移葬)되었으며 다시 1966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능제는 조선의 능 · 원 제도에 따른 듯하나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며 봉분 주위에 석양, 석호가 놓여져 있고 그 앞에는 장명등을 비롯해 망주석과 문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 : 남양주시청 문화관광과
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마석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지역을 많이 돌아다니면서 그 앞까지는 가 보았으나 한 번도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마음먹고 들어가 보려고 시간을 내었습니다.
롯데마트 가는 길에서 우회전 한다음 다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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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 들어서자 초라한 듯한 입구가 눈에 보입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 한 나라의 권력을 10년간 움켜쥐었던 그 분의 강직한 모습의 끝이 이렇게 보여지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에 그 힘을 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흥선대원군묘를 찾아 가는 길
드디어 정문으로 들어섰습니다.
운현궁에 노을지다에서 던져주던 메시지가 아직도 가슴에 맴돕니다.
마음의 화가 건강을 헤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쥐었던 권력에 대한 미련이 결국 자신을 병들게 만든다는 것이 아직도 가슴을 후벼들며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생각만 해도 그 위엄이 넘치는 분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입구에서 보여지는 권력의 정점에 있을때의 화려함보다는 그 초라함이 가져다 주는 흐느낌이 오히려 역사를 배우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게 합니다.
봄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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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태봉을 만나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이 길로 가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생각될 정도입니다. 길이 길다는 것은 만남을 더 간절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상에서 밥먹는 것과 같이 쉽다면 우리는 사랑을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무관심한 영역이 없는지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 그 이유이겠죠. 나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내가 살아가야 할 마을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지요? 나는 당신이 하는 일에 관심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 조금도 애정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저도 말조심 하고 다닙니다. "나는 관심없다" 이 말처럼 상대방을 조롱하는 말도 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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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 군데 시멘트로 덧칠해 놓은 비문이 정면에 보입니다. 물론 문화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기초 지자체 중 후순위에 있는 남양주시의 문화재 관리가 제대로 될리 없다 생각해 봅니다. 상처난 모서리를 바라보며 권력의 무상함도 느껴봅니다. 그리고 남양주시의 문화재 허술한 관리가 무척 아쉬움으로 남겨집니다. 이런 좋은 역사적 체험 장소를 이렇게 무관심하게 놓아두는 행정에 적잖은 실망감도 몰려옵니다.
16개 읍면동에 체육문화센터,도서관,주민자치센터를 짓느라 투입되는 예산을 문화와 교육컨텐츠로 채웠다면 남양주는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세입이 가능할텐데...어차피 개발제한지역으로 많은 땅이 묶여있고, 공장이나 기업들이 많아 세금을 잘 내는 것도 아니라면 이런 역사문화유적지를 묶어 전국최고의 체험도시로 만들어 가는 것이 지금의 재정자립도 40% 미만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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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묘의 오른쪽으로는 그 후손들의 합장묘가 있더군요.
지세로 보아서는 흥선대원군의 묘와 잘 이루어진 한쌍의 봉분입니다. 멀리 보이는 창현리 영남아파트와 46번 자동차전용도로가 희미하게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흥선대원군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나오다가 쓰러져 가는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또 한번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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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게 뻗어 자라는 곧은 저 소나무도 언젠가는 바람에 꺽이듯이 마음속에 품은 강직한 결심 또한 언젠가는 현재와 타협하며 사는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옆에 여전히 강직하고 곧게 뻗어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선비정신을 배웁니다. 역사는 늘 기록된 자의 입맛에 맞게 적혀지겠지만 제 개인의 역사는 제 개인의 기록으로 써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제 역사는 제가 기록하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
타자의 시각으로 보는 나와
자신의 시각으로 보는 나는
무척 다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제가 살아 온 기록을 남겨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 노력합니다.
제 생각의 나눔과 공유의 철학
평생 실천해야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