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기 드라마 중 <버피, 뱀파이어를 죽이는 자(Buffy the Vampire Slayer)>라는 6년째 장수하는 드라마가 있다. 우스운 이름과는 달리, 이 드라마는 청소년의 성장에 관한 가장 재치 있으면서 통찰력이 있는 드라마이다. 판타지 호러라는 싸구려 장르에다가 청소년의 성과 사랑 그리고 성장의 고통을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매년 방송하는 22편의 시리즈 중에서도 특이한 것이 하나 끼어 있는 것도 특징인데, 최근에 방송한 것으로 <Once more with feeling(느낌을 가지고 한 번 더)>라는 에피소드는 뮤지컬이다.
주인공들이 사는 마을에 춤추는 악마가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춤추고 노래하게 만드는 일화이다. 그런데 그냥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마음에 감추고 있던 것, 억누르고 있던 것이 마술에 의해 춤으로 노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감정에 복받치면 미친 듯이 춤을 추다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들도 이 악마와 맞서지만 어느새 자신의 숨겨진 감정들, 고통들이 드러나서 결국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음악과 함께 자신의 감정이 터져 나와 결국 미친 듯 춤을 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춤과 음악은 자신이 이성으로 또는 사회 관습으로 억눌러 온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사실 사람이 춤을 추는 동기는 이 드라마의 마술과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오랜 동안 남녀가 같이 추는 행위 소위 '커플댄스'라는 것을 퇴폐적인 행위라고 인식해 왔었다. 사교춤이라고 보통 부르며 카바레나 비밀 댄스 교습소에서 바람난 가정주부들과 그런 여자들의 돈을 노리며 놀고 먹는 제비들의 춤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의 인식에는 이중성이 있다. 외국인들의 파티에서 추는 춤은, 고급 서양 문화의 산물이고, 귀족문화의 상징이며. 외국 젊은이들의 춤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로맨티시즘의 표현이라고 선망하는 인식 말이다.
그래서 가끔 한국에서 댄스를 변호하는 수단으로, 외국에서는 춤을 배워야 외교나 사업 등의 고급 사회 모임에 끼어 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인 사실일 수는 없다. 귀족들의 무도회는 사실 구세대의 유물이고, 그런 댄스 파티에 참가할 기회는 그다지 흔한 것도 아니다. 만약 가본다면, 외국에도 춤을 출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라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댄스의 붐이 일고 있다. 처음에는 '댄스스포츠'가 등장했다. 퇴폐적인 춤이 아닌 건전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국제 연맹도 있고, 국제 대회도 있으며 규정집까지 있는 엄연한 스포츠라는 얘기다.
그리고 대학생 동호회를 시작으로 인터넷에 기반을 둔 댄스 동호회들이 시작되고, 남의 눈을 꺼리던 댄스를 배우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드디어 떳떳하게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의 인식이 한국 춤문화에 끼친 영향은 댄스스포츠 자체의 보급보다는 다른 춤들에게 막힌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일단 정열적인 중미 카리브 섬의 커플댄스인 '살사Salsa'와 '메렝게Merengue'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춤을 출 장소가 없던 한국에서 '라틴바'라는, 항상 와서 춤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생기고, 인터넷 카페에 폭발적으로 라틴댄스 동호회가 생겼다.
그리고 미국의 오랜 클럽댄스인 '스윙Swing'이 한국에 보급되었고, 다시 아르헨티나의 오래된 춤인 '아르헨틴 탱고Argentina Tango'가 보급되었다. 비록 살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스윙과 아르헨틴 탱고도 순식간에 인구를 넓혀가며 하나의 춤문화로서 한국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럼 왜 처음에 건전한 커플댄스의 인식을 연 댄스스포츠에 비해서 규정도 대회도 없는 이런 춤들이 나중에 들어와서 더 인기 있게 퍼지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원초적인 이유가 있다.
댄스스포츠 하는 분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커플댄스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렇다고 춤이 퇴폐적인 일탈 행위도 아닌 것이다. 춤은 처음에 말한 대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기 마음속에 감춰진 생각들을 음악이 이끄는 대로 피부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교육과 사회적인 마모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화석처럼 감추어온 감정들, 열정, 사랑, 고통, 슬픔, 이런 것들이 거기 맞는 음악을 만나서 몸짓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혼잣말이 아니라 자기의 댄스 파트너와 자신의 생각을 원형 그대로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커플 댄스인 것이다. 커플댄스, 둘이 추는 춤, 이 춤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거기에는 스포츠도 귀족성도 건전함도 없었다. 춤은 삶의 고통을 덜기 위한 방편으로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내밀한 숨겨진 감정들을 피부 바깥으로 내보내는 몸짓 언어로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의 경우를 보자. 130년 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변두리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온 가난한 유럽의 청년 노무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거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춤의 기초가 된 것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춤 '칸돔베Candombe'였다. 역시 고향을 잃은 노예들은 자신들만이 춤추는 장소 '탐보(혹자는 탕고라고 한다)'에 모여서 춤을 췄다.
원래 이 춤은 커플댄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청년들은 이 춤의 스텝을 남녀가 추는 커플댄스에 응용하였다. 거기에 평원의 남자들인 가우초들의 춤과 음악 밀롱가를 보태서 탱고라는 춤이 등장한 것이다. 가우초는 원주민 인디오, 포르투갈의 탈영병, 도망친 노예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일종의 아르헨티나 유목민이다. 일설에 의하면 잡혀온 노예들 중 아프리카 드럼으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쇠사슬에 발이 묶여 있을 때 발을 굴러 친구들과 비밀리에 얘기를 나누던 것이 나중에 춤으로 발전해서, 이들이 가우초에 합류했을 때 '밀롱가Milonga'라는 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수십 년 간 빈민층의 오락이었다. 따라서 상류층의 멸시를 받았지만. 후일 이 탱고가 유럽에서 퍼지고 파리에서 인기를 얻자, 갑자기 상류층들도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볼룸댄스나 댄스스포츠의 탱고는 유럽에서 변형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춤이 되었다.
이런 원초적 춤의 또 다른 예가 스윙이다. 20세기 초 뉴올리언즈의 흑인들에 의해 재즈음악이 등장했고, 이 음악이 시카고 뉴욕 등으로 퍼지며, 음악에 맞는 흑인 춤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음악이 복잡하고 점점 더 예술적으로 변하며 뉴욕 할렘 등지에 거대한 댄스홀이 생기면서 멋진 음악에 어울리는 멋진 춤 '린디 홉Lindy Hop'이 등장했다.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스윙은 고통받는 미국 흑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내보일 수 있는 해방구였다. 흑인은 2등 인간이라고 주장하던 백인들이 자신들은 상상도 못했던 흑인 천재들의 등장에 충격을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루이스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등. 백인들은 애써 자신들의 예술적 열등함을 감추기 위해 흑인밴드에 비해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밴드였던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를 스윙의 제왕으로 추켜세웠지만. 사실 베니 굿맨은 흑인 밴드 리더 플레쳐 헨더슨의 편곡을 연주하기 전에는 인기가 전혀 없었으며, 글렌 밀러밴드의 연주실력은 흑인 밴드들 옆에서 연주하기도 힘든 수준이었었다.
억눌렸던 창작능력과 재능을 음악 속에 마음껏 쏟아놓은 미국 흑인 예술가들, 그 덕에 많은 흑인 젊은이들이 자신의 다양한 감정을 즉흥적이고 창조적인 스텝으로 마루 위에 새겨 넣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댄서들의 천국이었던 '사보이 볼룸'에는 당시 미래를 기대 할 수 없는 가난한 흑인 청소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해방시키고자 흑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용감히 흑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백인들도 환영을 받았었다. 그 곳은 진정한 해방구였다. 50년대 백인과 흑인이 어울리는 '퇴폐'장소로 낙인 찍혀 문을 내려야 했을 때까지 말이다.
살사는 처음 쿠바의 흑인들이 만들어 내었다. 역시 카리브해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신의 슬픔을 북과 춤으로 달래고는 했다. 그들은 많은 음악을 창조 해냈으며, 그게 후에 차차Chacha, 룸바Rumba, 살사Salsa, 맘보Mambo, 볼레로Bolero 등 현대의 춤과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20-30년대에 미국의 흑인음악 재즈가 쿠바의 흑인사회로 흘러 들어오고, 순식간에 공명을 느낀 이들은 여기에 화려한 리듬감을 입혀 손과 '단손danzon'이라는 음악을 만든다. 손Son의 신나는 리듬에 쿠바의 흑인들이 멋진 춤사위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이 순식간에 이웃나라로 번지면서 후일 '살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살사는 같은 음악에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춘다. 사실은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춘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볼룸댄스나 댄스스포츠처럼 정리된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살사도 지역별로 분류해 이름을 붙이는데 무의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원래 아르헨틴 탱고나 살사 그리고 스윙의 특징은 커플댄스이지만 모두 자기 나름대로 춘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음악에 실어 표현하기 때문에, 각자의 춤추는 스타일은 자신의 인간성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춤을 처음 배우게 된 동기는 건강한 취미를 찾아서도, 호기심에서도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음속에서 풀 수 없는 고통 때문이었다. 아르헨틴 탱고를 추는 사람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들의 표정에서 내가 찾던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추고 싶었던 춤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맞는 춤을 찾아서 3년 간 댄스스포츠와 미국 볼룸댄스를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그만두고, 아르헨틴 탱고, 살사, 스윙만 춘다. 내게 있어서 남이 추는 모양 그대로 흉내내는 춤은 진정한 춤이 아니다. 숫자에 맞춰 추면서 남이 하는 대로 표정 짓고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물론 그 춤은 좀 더 안전하고 건전한 춤일 수 있다.
댄스스포츠를 다룬 일본영화 <쉘 위 댄스>를 보면 평범한 직장인이며 가장인 스기야마씨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전혀 건전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댄서 마이에 대한 꿈을 꿨으며 그 환상이 그를 춤으로 이끈 것이다. 그리고 마이의 춤에 대한 결벽증. 완벽한 춤을 대회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그 이외의 이유로 춤추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 말이다. 그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한 것은 스포츠로서의 댄스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서로에게 전달 할 수 있었던. 대화로서의 춤을 통해서였다.
전에 어떤 남미인이 한 얘기가 있다. "춤이 건전하다고? 우리가 왜 춤을 추는지 알고 있나? 우리는 벗어나기 위해 춤을 추는 거야. 유혹하기 위해서 그리고 꿈을 꾸기 위해서. 진정한 춤은 절대 건전한 춤이 아니야."
춤을 추는 동안, 우리는 잠시동안 우리 자신에게서 탈출한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손끝에 아주 약간 엉뚱한 향기를 남긴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