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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3,1-10.19-20>
그 무렵
1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
2 어느 날 엘리는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이미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
3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20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 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는 구절입니다.
곧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며, 그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고 그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이는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뼛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감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하러 가서는>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마르코 1,34, 35, 3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 아니 일생에 대한 요약입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은 매일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탁 드는 느낌은 불꽃 같은 삶이셨습니다.
그 다음 드는 느낌은 ‘나는?’입니다.
‘나는 이중 무엇을 얼마만큼 잘 따르고 있나?’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어제 봤듯이 예수님은 책상받이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십니다.
대부분 시간을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 가운데서 보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는 식사를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노상 아픈 사람들과 상대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면 아픔이 전이되고 우울한 사람과 만나면 우울함이 전이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살려면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이돼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든지, 전이되는 것을 아예 잘 차단하든지.
많은 사람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없기에 전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도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통을 많이 겪는 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분들로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 겁니다.
역시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의 문제인데, 더 능동적이기 위해서입니다.
찾아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안주하고 수동적이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오늘 주님은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분들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 고통이 전이되는 걸 차단하게 된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 부족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고 제가 말할 때 그것은 기도 시간이 짧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 시간은 짧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 시간은 충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도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제가 풍덩 잠기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잠기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물을 긷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바쁜 중에도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무엇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계획을 하지 말고, 자책을 하지 말고, 명상이나 심지어 묵상도 말고, 오직 사랑에 잠겨 있다가 나와야 할 겁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이란? 사랑의 봉사자가 되는 사랑뿐>
오늘도 예수님은 밤낮없이 온종일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된 이들이 따라야 하는 삶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데 사람들이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예수님은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열이 그녀에게서 떠나갔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이 짧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해 오신 모든 복음 선포의 사역을 한순간에 다 설명해줍니다.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몸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제자들을 당신 복음 선포 사역에 초대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당신 사랑의 실천에 ‘초대’하셨을까요?
그들 나름대로 하느님을 섬기면 안 됐을까요?
사람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명확한 어떤 ‘부르심’에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우리 본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미무라는 36세의 건축 디자이너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상담하러 온 이유는 자신은 9개월밖에 안 된 신혼부부인데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는 편지만 한 통 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29세이고 이름은 아야였습니다.
아야가 워낙 이혼에 대해 굳은 결심을 하고 있어서 간신히 이혼을 전제로 3번만 함께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매일 거의 새벽 1시에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결혼을 했는데도 줄곧 외롭기만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계속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진이 났는데도 집에 바로 오지 않았어요.
남편은 배려가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어요.”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남편이 3년 동안 사귀던 약혼녀인 직장 동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약혼까지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야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집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도 그녀 밑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녀가 자신보다 훨씬 멋지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 관해 관심이 1%도 남아 있지 않았었습니다.
이 둘이 합치면 잘 살까요?
당연히 이런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아야는 ‘나를 위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잘하는 것은 없지만, 어쨌건 사랑을 내가 하려고 하면 상대에게 ‘보상’을 요구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이거야 결국?’이라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잃은 원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더 타락시킵니다.
[출처: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시이 마레히사, 밀라그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제삼자 때문에 그 대상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한 자살하려던 귀부인을 자신에게 오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돕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녀도 분명 사랑이 삶의 의미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의 봉사자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체적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해도 우울하기만 한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러려면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때문에’가 아닌 ‘사랑이신 주님이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같은 이들 때문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그들에게 시중들었다’라고 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시중들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식탁의 봉사자’라 불리는 ‘부제’(디아코노스)에서 나온 ‘디아코네오’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식탁의 봉사자들에게 퍼서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부제’(디아코노스)들입니다.
곧 사랑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서 포도주의 본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우리 사랑은 그 사랑의 흐름에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아의 이기심에서 해방되어 나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미국 동해안 메릴랜드에 병원을 개업한 맥칼리스터 박사는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의사로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아내를 보내야 했던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이 그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중풍을 앓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며 먹고 입고 눕는 것조차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자살할 생각만 했습니다.
세 명의 간호사가 항상 붙어있어야 했는데 그는 죽지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그 간호사들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해변가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간호사들도 별생각 없이 그를 바닷가로 데려갔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며 간호사들보고 수영을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수영을 즐길 때 자신은 벼랑으로 뛰어내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 하나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녀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맥칼리스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맥칼리스터를 구조원이라 여겼습니다.
맥칼리스터는 간호사를 이른 시간에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중풍으로 인한 후유증과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진정 우리 본성을 변화시키는 사랑은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맥칼리스터가 중풍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라면!’, 혹은 ‘의사라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어떤 참사랑 때문에 그것에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따르는 것만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병으로부터 회복되는 사랑은 이전에 자기를 위해 아내를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죽기만을 원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방향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포도주가 그 여인에게로 행했고 맬칼리스터는 그저 그 포도주가 그녀에게 향하는 데 봉사한 것뿐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우리 본성을 회복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실천을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랑하는 데 우리도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사랑은 다 나의 본성을 더 타락시키는 이기적인 애착에 머물게 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그리스도와 교회에 시중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랑을 위한 봉사자들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외딴 곳으로 가라>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좇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보십시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5)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우리도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체 조배를 통해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의 성장 그 이면에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넉넉한 여유와 공간을 제공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시몬의 장모가 출현합니다.
갑자기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님이신 시몬 베드로 사도에게 장모님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당연히 부인도 계셨겠네?
자녀들도 줄줄이...?
그러나 복음서는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그게 전부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아마도 열불이 나서 걸린 화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병의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딸을 책임져야 할 사위 시몬이 갑자기 달라진 것입니다.
배도 그물도 던져버리고 예수란 사람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장모인 자신은 물론이고 애지중지 키워 시집보낸 딸도 갑자기 개밥에 도토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위가 그길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차라리 좋았을 뻔했습니다.
사위는 틈만 나면 장정들을 우르르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장모와 딸은 그 장정들 밥해대느라 허리가 다 휠 지경이었습니다.
당연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고, 그로 인해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그런 마음 상태를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미안한 마음, 송구한 마음을 담아 장모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장모님!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해주세요.”
그러면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니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스무 살의 나이로 꽃 같은 젊음을 활활 불사른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의 배은심 여사의 장례식이 엄수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아들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밥숟가락을 드는 일입니다.
금쪽같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머님은 마냥 슬픔에 잠겨 있지 않으셨습니다.
아드님의 장례식에서 당당한 투사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위로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이제 제가 아들 대신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으로 지켜내셨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활짝 펼쳐 또 다른 아들들, 열사들을 기꺼이 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후 35년 세월을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따뜻한 의지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이 땅의 민주화의 어머니로 찬란한 별이 되셨습니다.
분신과도 같은 사랑스런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아들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배은심 어머님의 영혼을 자비하신 주님께서 따뜻이 안아주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병고>
‘열이 가셨다.’라는 말의 원문은 ‘열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다.’입니다.
이 말은 그 ‘열이라는 것’이 떠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처럼 ‘열이라는 것’을 쫓아내셨다는 표현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39)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나중에 어떤 백인대장이 직접 고백하게 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7ㄴ-8)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과 같습니다.
하느님만이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열이 가신 부인이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유가 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시중’이라는 말은, 이웃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많은 병자들이 모여드는데, 예나 지금이나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고통입니다.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못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만나야 할 분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마귀들은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 진실을(진리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항상 교묘하게 예수님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아니고, 당신 안에 ‘힘’이 없어서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내기 위한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은 처음부터 예수님 자신의 것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1,1-3)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만 보다가 예수님의 ‘신성’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예수님께서 한곳에 계속 머물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기를 바란 것이고,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한 것이고, ‘몸의 치유’만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그곳에서도’인데,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한 일도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씀 없이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만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함께 하셨을 것입니다(루카 9,11).
그리고 사실 병자 치유 자체가 복음 선포이기도 합니다.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 자체를 없애신 것은 아니고 인간은 여전히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구원’은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이 지금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공허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질병들과 전염병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고통도 ‘신비’(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합니다.
병자 자신이든지 병자의 가족이나 이웃이든지 간에, 지금 앓고 있는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로마 14,7-8) 신앙인의 기본자세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외딴곳 - 예수님의 기도와 삶>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치열했던 하루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 삶의 요약같은 하루하루입니다.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하느님의 전사로서의 예수님 삶이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루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하루 삶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의 자리, 외딴곳이요 더불어 떠오른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이란 시입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면서도 때로는 고독과 침묵의 외딴곳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구체적으로 외딴곳이 있습니까?
하루 중 어느 때, 어떤 곳에서의 외딴곳인지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했습니다.
나름대로 참으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 기도의 자리, 외딴곳은 필수가 되었습니다.
오래전 써놨던 제 '메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워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
누구나의 내면에는 이런 메꽃처럼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내재해 있는 법입니다.
이런 갈망이야말로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하루의 전 삶이 마치 한 곳으로 향하는 듯한 구절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분명 하늘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친교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앞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자 그녀는 곧장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라 있는 건강이요 몸임을 깨닫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섬김의 배움터’라 정의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삶도 섬김의 삶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어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예수님이 계신 곳은 문전성시를 이룬 듯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로 가득했고, 예수님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런 번아웃 상태에서 새벽 캄캄할 때 곧장 외딴곳의 기도처를 찾은 예수님이십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바로 여기 위험이 있습니다.
군중의 인기에 현혹되어 떠나야 할 자리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외딴곳의 자리에서 영육을 새롭게 충전시키면서 분별력의 지혜를 새로이 했음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기도와 삶,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영성생활의 필수 조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섬김의 전사로서의 하루의 전 삶을 떠받쳐 준 외딴곳에서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의 관상기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대화보다는 깨어 침묵 중에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침묵을 통해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귀 기울여 경청했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참으로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깊고 넓고 긴 영적 시야를 확보한 주님이요,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어느 사람이나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유로이 강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며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며 병들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 주신 하느님 사랑의 전사,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모두가 외딴곳에서의 기도의 힘이었음을 봅니다.
모든 수행이 훈련이지만 침묵의 경청 또한 훈련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경청의 훈련이요 일상화되고 습관화되어야 할 경청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외딴곳에서의 기도시 깨어 온전히 경청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참으로 경청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스승 엘리의 부르심으로 착각한 사무엘은 잠자는 중에도 즉시 일어나 스승 엘리를 찾아 묻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얼마나 아름다운 제자와 스승의 장면인지요!
잠자는 중에도 영혼은 환히 깨어 있던 사무엘이었습니다.
세 번째 반복되자 엘리는 친절히 주님의 부르심임을 일깨워 주었고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사무엘을 신뢰하고 사랑하셨는지 참 정답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주님과 사무엘의 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필시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의 장면도 이와 흡사했을 것입니다.
“예수야, 예수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늘 깨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합니다.
바로 사무엘이 한 말은 다 이루어 주셨다라는 참 은혜로운 말씀으로 경청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사무엘이나 예수님처럼 거룩한 침묵 중에 들려 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외딴곳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의 침묵의 시간과 장소가 마련되면 깨어 귀 기울이는 습관을 지니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시복된 하느님의 종 도로시 데이가 그랬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거룩한 침묵을 사랑한 언젠가 시성될 현대판 미국의 성녀 도로시 데이입니다.
어제 집무실에 써 붙여 놓은 영어 글귀입니다.
‘거룩한 침묵(Holy Silence)!’
주님은 외딴곳 거룩한 침묵의 성전에서의 날마다 미사 은총으로 하루하루 충만한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다음같은 자세로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1사무 3,10)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매칭 전문 기업 ‘이음 소시어스’는 미혼 남녀 1,145명을 대상으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1위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그마치 33%가 대답한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돈’이었습니다.
그 뒤를 ‘자기 계발이나 취미에 쓰는 돈’, ‘식비’가 차지했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위해 쓰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지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그중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먼 미래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절대 이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쓸데없는 낭비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할 일 없으면 그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보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일과가 얼마나 바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내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전에 회당에서 설교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모든 유다인이 안식일을 자기 집에서 지내는 관습대로 시몬 베드로의 집에, 저녁 후에는 베드로 집 문전에 모인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 다음 다른 이웃 고을에 가십니다.
하루 내내 바쁘고 지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새벽에 먼저 기도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피곤하면 기도를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또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첫 번째 원칙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인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의 힘이 곧바로 다른 이웃 고을로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 그곳에서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바쁘고 지친 가운데에서도 절대로 놓치지 않았던 기도를 우리 역시 놓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다 마친 후에 할 일이 없어야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일의 시작에 두어야 하는 기도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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