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남의 말
네이버블로그/ 국민 71% 로마자 약칭 대신 우리말 약칭 사용 원해
⑧ 로마자 머리글자, 이대로 좋은가?
나라 힘이 약하다 보니 힘센 나라 억지 부리는 일, 그런 나라와 밀고 당기는 일을 많이 겪는다. 요새 들리는 소식에는 국제관계에 얽힌 기구나 조약 이름이 자주 나온다. 싫든 좋든 그런 말들을 들으며 살다 보니 온 백성이 국제문제 전문가가 된 기분이다.
그런 ‘전문용어’ 가운데는 로마자 머리글자로 된 준말(줄임말)이 꽤 많다. ‘지소미아(GSOMIA)’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고, ‘소파(SOFA)’는 ‘주한미군지위협정’이며, ‘에스엠에이(SMA)’는 ‘한미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이다. 이런 말은 신문방송에 워낙 자주 나와서 귀에 설지 않다.
북한과 미국이 티격태격하면서 거기에 얽힌 이름도 심심찮게 신문방송에 오르내린다. ‘엔티피(NTP)’는 ‘핵확산 금지조약’이고, ‘아이에이이에이(IAEA)’는 ‘국제원자력기구’다. 그런가 하면 ‘아이시지(ICG)’는 ‘국제위기감시기구’이고, ‘시티비티오(CTBTO)’는 ‘포괄적핵실험 금지조약기구’다. 뭘 하는 덴지도 잘 모르는 국제기구 이름이 할아버지 이름보다 더 자주 우리 입에 오르내리니 시쳇말로 기분이 몹시 꿉꿉하구나.
로마자 머리글자를 주르르 이어 붙인 이런 말은 처음 들으면 무척 낯설고 알아듣기 힘들다. 혹시 이런 낯선 말을 대신할 우리말이 없나 찾아보다가 내 무식함에 혀를 찼다. 애당초 이런 말은 영어(를 비롯한 서양말)로 만들었고, 그래서 그걸 다 말하기 어려우면 로마자 머리글자로 줄여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싫으면 억지로 옮긴 듯한 우리말을 써야 하는데, 너무 길고 어수선해서 읽기조차 힘드니 말이다.
길고 어수선한 말을 줄이는 버릇은 우리말에도 있다. 예전에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사생’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이것은 ‘사회생활’의 준말이었다. 같은 이치로 ‘바른생활’은 ‘바생’이라고 하고, ‘슬기로운 생활’은 ‘슬생’이라고 한다. 또 ‘특별활동’은 ‘특활’이라고 하고 ‘창의적 체험 활동’은 ‘창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긴 말을 줄여서 짧게 만드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슬기롭다고 칭찬할지언정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요새 마른 풀밭에 불 번지듯 하는 로마자 머리글자로 만든 준말은 어떨까? ‘아이엠에프(IMF)’나 ‘에프티에이(FTA)’와 같은 말은 이미 ‘국민 낱말’이 되어서 새삼스럽게 준말입네 뭐네 하기도 무안할 지경이지만, 그게 무슨 말을 줄였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기야 그런 말밑을 따지다 보면 어려운 영어 낱말이 줄줄 나와야 하는데, 그러다가는 자칫 ‘국민 스트레스’가 될 법도 하니 아예 따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앞에 든 국제기구 말고도 로마자 머리글자로 만든 준말은 우리 둘레에 넘쳐난다. ‘시이오(CEO)’ 같은 말은 보통 기업에서 많이 쓴다. 회사 최고 책임자란 뜻인 것 같은데, 너도나도 이 말을 쓰니까 두루이름씨(보통명사)처럼 돼 버렸다. ‘시이오’가 유행을 타니까 요새는 ‘시에이오(CAO), 시아이오(CIO), 시에프오(CFO), 시티오(CTO)’까지 나와서 우리같이 영어 모르는 백성들을 몹시 헷갈리게 한다.
로마자 머리글자는 특히 요새 온 나라를 주름잡는 ‘아이시티(ICT)’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피시(PC)’에 관련된 ‘오에스(OS)’니 ‘시피유(CPU)’니 ‘디브이디(DVD)’니 하는 말은 워낙 귀에 익어서 거의 우리말처럼 들리고, ‘유에스비(USB)’ 저장장치나 ‘피디에이(PDA)’에 쓰이는 ‘에스디(SD)’ 또는 ‘엠엠시(MMC)’ 카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엘시디(LCD)’나 ‘피디피(PDP)’ 화면으로 ‘티브이(TV)’ 방송을 보는 사람은 ‘엠시(MC), 피디(PD), 시에프(CF)’ 같은 말은 거의 못 듣는 날이 없을 정도이고, ‘디엠비(DMB)’, ‘피엠피(PMP)’ 같은 말도 얼른 따라잡지 못하면 태곳적 사람이란 소리를 듣게 됐다. 인터넷에서는 어떤 모임이나 들어가려면 ‘아이디(ID)’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거의 자기 이름을 로마자 머리글자로 만드는 판국이니 말 그대로 머리글자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로마자 머리글자의 가당찮음은 그것이 본디 뜻을 헤아리기조차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말 머리글자는 아무리 줄여 놓아도 본딧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농협’이라고 하면 누구나 ‘농업협동조합’을 줄인 말이구나 하고 그 뜻을 알아차리지 않나. ‘민변’이나 ‘전교조’ 같은 말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본딧말을 알 수 있다. 요사이 인터넷에 떠도는, 새로 만든 준말도 마찬가지다. ‘급질(급하게 질문한다), 즐감(즐겁게 감상한다), 깜놀(깜짝 놀란다)’과 같은 말은, 생뚱맞긴 해도 본디 뜻을 짐작하기가 그다지 어렵진 않다.
그런데 이와 달리 로마자로 된 머리글자들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앞서 보기를 든 흔한 로마자 머리글자들도 그게 다 무슨 말을 줄인 건 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할 뿐이지, 무슨 말이 줄어든 것인지 헤아리기는 힘들다. 뭐 어차피 이름일 뿐이니까 뜻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쯤 되고 보면 머리글자의 본디 쓸모도 사라지고 그저 앙상한 로마자 몇 개가 꼬치에 꿰인 산적처럼 엉거주춤 남아 있는 꼴이다.
게다가 세상이 빠르게 바뀌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로마자 머리글자가 나오는 판인데, 그럴 일일이 따라잡으려면 참 바쁘게 되었다. 오늘도 신문에는 ‘엠오유(MOU)’라는 알쏭달쏭한 머리글자가 보인다. 뭔가 했더니 친절하게도 뒤에 묶음표를 치고 ‘양해각서’라고 설명을 달아 놓았더라.
후유, 읽다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런 걸 다 우리말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말에 없는 낯선 머리글자가 들어온다면 새로 말 만들기가 힘드니까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고 치자. (이때도 우리말로 새말을 만들어 쓰는 것이 나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우리말이 엄연히 있는데도 남의 말을, 그것도 머리글자 몇 개를 주르르 늘어놓아 만든 멋없는 말을 꼭 써야 할 까닭이 있을까.
말을 줄이는 건 좋다. 그렇더라도 같은 값이면 우리말로 줄여 쓰는 게 좋지 않겠나. 모든 말을 다 그럴 것까지는 없을 터이다. ‘티브이’나 ‘시디’ 같은 말은 워낙 널리 쓰이는 데다가 굳이 본딧말을 찾아 쓰는 것이 되레 성가실 것 같기도 하다. 또 이건 마땅히 바꿔 쓸 만한 우리말이 없는 경우이기도 하다. 이런 건 그냥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떨까. 이를테면 ‘아이씨(IC)’ 같은 건 ‘나들목’으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지 않겠나. ‘엠티(MT)’를 ‘모꼬지’로, ‘오티(OT)’를 ‘예비교육’으로, ‘에스에프(SF)’를 ‘공상과학’으로 쓰는 일도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말은 들온말이라도 줄이지 말고 본딧말로 그대로 쓰는 게 낫겠다 싶은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개인용컴퓨터를 가리키는 ‘피씨(PC)’는 그냥 ‘컴퓨터’라 해서 안 될 까닭이 없어 보이고, ‘시지(CG)’는 ‘컴퓨터그림’ 또는 ‘컴퓨터그래픽’이라고 본딧말을 살려 쓰는 게 더 알아듣기 쉬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들어온, 억지로 만든 영어 머리글자는 듣기에 거북스러운 것도 있는데, 예컨대 ‘에이에스(AS)’는 ‘에프터서비스’라는 일본식 영어를 다시 머리글자만 따서 줄인 것이다. 이건 그냥 ‘사후 봉사’라고 해도 좋겠지만 ‘뒷수쇄’라는 감칠맛 나는 우리말을 써도 괜찮을 듯하다. ‘디시(DC)’도 ‘디스카운트’라는 영어를 머리글자만 따서 줄인 억지스러운 말인데, 왜 ‘에누리’라는 좋은 우리말을 두고 이런 멋대가리 없는 말을 쓰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 ‘누구나 쉽게 쓰는 우리말(서정오, 도서출판 보리, 2020)’에서 옮겨 적음. (2023. 9.20. 화룡이) >
첫댓글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어려운 말을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이 참 좋은 말이 많이도 있는데요.
그러게요.
배운 티 내는 사람은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