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학선진국 진입 가능한가?
기과협, ‘2022 UN 세계기초과학의 해’ 기념 포럼 개최
2022년은 유엔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지정한 ‘세계기초과학의 해(International Year of Basic Sciences for Sustainable Development, IYBSSD)’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포럼이 11일 한국과학기술회관 대회의실에서 기초과학학회협의체(회장 금종해) 주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회장 이우일) 후원으로 개최됐다. ‘과학선진국 진입 가능한가’를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에서는 기초과학의 역할과 중요성,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정책, 학문 후속세대 육성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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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럼 참여자 전체 사진 (대한 수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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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과 대한민국의 현주소
기조강연을 맡은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먼저 “기초과학이란 영리 활동 등을 목적으로 두지 않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기반한 과학 연구이며, 자연 현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위해 행해지는 이론적, 실험적 과학 연구이고 통상적으로 수학과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연구를 일컫는다”며 기초과학의 정의를 설명했다.
오 총장은 기초과학과 유사한 개념으로 자주 언급되는 '기초연구'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정의를 정확히 짚으며 발제를 이어나갔다. 그는 "기초연구란, 경제적, 사회적 이익에 대한 기대 없이 특정한 응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식의 진보를 위해 수행하는 연구 활동을 뜻하며, 이는 응용연구, 개발연구와 대비되는 개념이다"라고 정의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과학기술에 관한 유일한 조항으로 127조 1항에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면서 "이러한 유물론적 인식은 국가연구 개발 투자에서도 비쳐진다"라고 지적했다.
2020년도 연구 개발 활동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국가 총연구개발비는 절대액 기준 세계 5위 수준이며 GDP 대비 4.8%의 연구개발비를 차지하며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기초연구 개발비 비중은 그중 14.4%로,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오 총장은 "기초과학 연구 지원에 대해 정책 결의 및 집행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우주의 기원과 같은 Blue Sky 연구는 선진국에서 해야지, 왜 개발도상국인 우리나라가 해야 하는가? 기초과학 연구의 결과는 논문으로 공개되는데, 굳이 우리나라가 직접 투자를 해야 하는가?'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우리나라가 굳이 직접 기초과학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이제 대한민국은 더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인류의 지식 창출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며 주장을 펼쳤다.
아울러 기초과학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며 오 총장은 "특히 코로나 백신 개발의 일례를 봐도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개발연구의 사이클이 빨라지거나 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세계 기술 개발의 선두주자인 IBM이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까닭도 세계적인 첨단 지식을 보다 빨리 접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또한 지금 우리나라 기초과학자들에게 남겨진 숙제는 바로 노벨 과학상 수상이라며 오 총장은 “한국인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가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것처럼, 대한민국이 노벨과학상을 수상하고 과학선진국에 진입하여 기초과학 강국이 될 때까지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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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 발제자 오세정 총장 발표 모습 (대한 수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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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YBSSD 2022의 의의와 기초과학의 미래
두 번째 기조 강연 연사로 나선 진정일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UNESCO 기초과학의 해 2022년의 의의와 기초과학의 미래’를 주제로 발제했다. 진 교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기초과학의 해’의 메인 주제에는 교육 및 과학 훈련 강화, 기초과학 연구비 지원, 과학의 대중화 등이 들어 있다”라며 “이는 기초학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대학이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연구기반을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대학 중심의 연내 연속 기획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UN은 ∆2005년 세계 물리학의 해, ∆2009년 세계 천문학의 해, ∆2011년 세계 화학의 해, ∆2014년 세계 결정학의 해, ∆2015년 세계 빛의 해, ∆2019년 세계 원소주기율표의 해 등에 이어 2022년을 세계기초과학의 해로 지정했다. 이처럼 유엔은 모든 교육이 지속 가능한 개발을 기반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며, 진 교수는 “IYBSSD 2022의 메인 테마로 여성과 기초과학, 세계적인 공공재로서의 과학, 혁신 및 경제 개발, 교육과 인간개발, 글로벌 과제 해결 등으로 잡았다”라고 소개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기초연구, 개발연구, 응용연구 등으로 연구를 세분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분류는 좋지 않다는 것이 진 교수의 주장이다. 그가 인용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설리 틸만 총장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 경제 성장의 40% 이상은 기초과학이 이바지했다는 것. 즉 지식을 위한 기초과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기초과학이 기술혁신 내지는 신제품 개발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일까? 진 교수는 “순수 과학적인 발견에서부터 혁신적인 기술 진화로까지 모두 연결이 된다”라며 “구태여 순수과학을 하는 사람에게 응용하거나 개발을 하라고 하지 않더라도 기초과학의 열매는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억지로 기초과학자들을 응용개발 쪽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럴 경우, 결코 창의적인 연구가 탄생할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는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식의 폭발적 증가와 학령인구의 변화 및 고학력화의 가속화, 교육의 개방화 등 교육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기술도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통신 수단의 발전과 컴퓨터의 개발 등으로 통신과 계산이 결합하여 ICT가 탄생했고, 정보와 통신 기술의 융합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빠른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에도 불구하고 공기와 물, 에너지, 천연자원, 인구, 교육 등 글로벌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있고, 인류는 여전히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진 교수는 “과학기술 정책 입안자나 과학자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고,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을 극대화하는 교육으로 사고력과 문제해결력을 높이고,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과 개별 학습을 고려한 맞춤형 교육, 정보 핵심 인재 양성 교육 등 미래 교육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과학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진 교수는 “우리나라의 과학선진국으로의 진입은 가능하다. 단 과학자와 교육, 사회가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라며 “한국이 세계 정상급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과학교육도 학생들의 창의력을 기를 수 있도록 재설계되어야 하고, 크로스-아이디어의 수정은 융합 시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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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 발제자 진정일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대한 수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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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토론, 과학선진국 진입 위한 방안 논의
기조강연 후에는 금종해 기초과학학회협의체 회장을 좌장으로 하고 노태원 한국물리학회 회장과 정옥상 대한화학회 전임회장, 이유 한국지구과학연합회 회장, 박병욱 한국통계학회 회장 등이 지정토론자로 나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기초과학의 해’가 지닌 의미와 우리나라가 과학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방안들에 대해 논의했다.
처음으로 노태원 회장은 “과학기술혁신의 프런티어(frontier)는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새로운 기술 발명과 끊임없는 기술혁신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으로 사회, 경제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졌다”라며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에너지와 자원 고갈, 팬데믹 등 ‘인류의 파멸인가?’ 아니면 ‘존속 가능한 미래인가?’라는 위기 극복과정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기초과학은 단기적인 평가가 어렵고, 이득이나 수혜가 연구자가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혁신적인 측정, 분석 시설이나 장비들과 함께 발전하면서 상당 과학 분야에서 과학지식 생산의 한계 비용이 증가하고 있다”라며 “과학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국가와 공공 부분으로부터의 투자를 증대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노 회장의 의견을 이어받은 정옥상 전임회장이 “우리의 기초과학은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왔지만, 다양성과 지속성, 창의성을 근간으로 하는 기초과학 전 분야가 현재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특히 선진 일류국가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수학·과학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실정이지만, 고등학교 기초과학교육이 지속해서 축소되고 있는 것이 현실적 위기가 아닐 수 없다”라며 “미시세계 이해를 위해서는 기초과학교육이 필수가 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또 “기초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본의 수출 규제와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에서도 절실히 느낀 바 있다. 하지만 현재도 국가연구개발비는 응용기술 쪽으로 더욱 편중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반도체, 우주, 인공지능, 바이오, 기후 문제 등의 국제적 과제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 투자 개념보다는 기초과학 연구에 초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아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다양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유 회장은 “지난 70년간 우리나라 산업의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서, 현재 첨단 산업 분야의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필수 산업 역군이 되었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 동안 BK사업*을 통해 많은 석 박사급 인재들을 양성했지만, 그들에게 연구자로서 살아갈 직업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학문 후속세대가 지속적으로 공급이 안 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며 “대학원생 양성 사업의 다음 단계로 박사급 연구자들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BK 산업 : 인적자원 강국 건설을 위한 우수 고등인력 양성 교육정책
아울러 “연구자 개인 차원에서는 학계든 산업계든 적극적으로 진출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즉 과학적 지적 유목민(Scientific intellectual Nomad) 문화가 장려되고 그런 연구가 지원이 되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제언하면서 “기초과학 연구 본연의 정의대로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 없이 호기심에 기반한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박병욱 회장은 “과학 연구는 관측을 통한 보편적인 이론의 정립과 검증의 반복 과정”이라며 “현대 통계학의 수립자 중 한 사람인 칼 피어슨의 저서 ‘The Grammar of Science’에 의하면 통계학은 관측에 기반한 귀납적 방법으로 검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 결론에 대한 불확실성 수준을 확률로 제시하는 것으로, 과학적 연구 방법에 대한 학문이다. 따라서 통계학은 본성적으로 기초연구이면서 동시에 응용연구이며, 융합을 추구하는 현대 과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방대한 데이터와 복잡한 현상, 실시간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적인 과제가 대두되고 있어 수학과 계산과학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이 필요하다”라며 “2022년 세계기초과학의 해를 맞아 우리가 과학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초‧중등 과학교육은 물론 대중 과학 교육에 데이터 문해력 교육까지 국민 문화로서의 과학교육이 중요하고, 기초과학 후속세대 양성과 기초연구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초과학 생태계 유지도 필수적”이라고 덧붙이며 이번 토론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