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 (4): 모용선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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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4) : 모용선비의 등장

2. 소용돌이치는 동북아

서기 3세기, 동북아 전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남북한 및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대분열의 정세가 서서히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군현들을 지속적으로 공략하였고 백제는 주위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다음 세기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 또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열국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황하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은 동한(東漢)이래 계속된 분열이 서진(西晉) 정권에 의해 진정되는 듯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의 조짐이 뚜렷해졌다.

중국의 정세

동한(東漢)은 거듭된 어린 황제의 즉위로 인한 외척의 간섭, 환관의 횡포 등으로 조정의 권위는 갈수록 위축되었다. 이에 민중의 봉기가 잇따르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출현하였다.

원소(袁紹), 조조(曹操), 유비(劉備), 손견(孫堅) 등의 군벌들은 처음에는 조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났으나 점차 패권경쟁으로 치달았다. 거듭된 무력충돌로 생산기반은 와해되고 인구는 격감하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부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 강화를 위해 오환(烏丸) 등 북방의 이민족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이전에 동한 정권에 투항하여 남부 지역으로 이주해 있던 흉노(匈奴) 등의 이민족들과 더불어 장기적인 불안요소가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군벌의 난립은 위(魏), 오(吳), 촉(蜀) 세 정권으로 정리되었고 결국 위가 촉을 먼저 무너뜨리고 통일 정부 수립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위의 승리도 오래가지 않았다.

위의 정복 전쟁에 큰 공을 세운 권신 사마(司馬)씨는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위의 조(曹)씨를 무너뜨리고 서진(西晉) 정권을 세웠다. 서진은 오마저 무너뜨리고 통일정권을 수립하였지만 초반의 활력을 곧 잃어버렸으며 지배층은 권력 투쟁에 골몰하기 시작하였다.

서진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음을 감지한 각지의 이민족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의 위협적인 적 모용선비(慕容鮮卑)가 있었다.

선비족의 등장

선비(鮮卑)는 본래 동호(東胡)의 한 구성원이었다. 동호는 대체로 요하 서쪽의 노로아호산 (努魯兒虎山)북쪽에 자리하였고 그 서쪽에 흉노(匈奴)가 있었다.

동호는 한때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공격을 받아 천리를 후퇴하기도 하였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여 진(秦)이 전국의 7웅을 병합할 즈음에는 흉노를 압박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하지만 당시 흉노는 모돈(冒頓)이라는 뛰어난 선우(單于)가 출현하여 급속히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모돈은 그의 아버지 두만(頭曼)이 자신이 아닌 아들을 다음 선우로 삼으려 하자 두만을 살해하고 선우가 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동호는 모돈 선우에게 멸망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처음에는 오히려 동호가 흉노에게 공물을 요구하였다. 동호는 모돈이 이 요구를 모두 순순히 들어주자 흉노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모돈의 계략이었다. 동호의 임금은 마지막으로 흉노와의 사이에 있는 영토를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요구라는 명분을 내세워 갑자기 동호를 기습하여 멸하였다¹⁾.

동호의 멸망과 함께 그 속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비였다. 선비라는 이름의 유래는 처음 그 세력이 모여든 곳이 선비산이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비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기 1980년 선비의 일파인 탁발선비의 초기 유적지가 알선동(嘎仙洞)이라는 자연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대흥안령(大興安嶺)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선비족의 성장

선비는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동호에서 같이 떨어져 나온 오환과 더불어 흉노에게 복속되었다. 선비는 자신을 틀어쥔 흉노와 더불어 서한(西漢)의 변군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서기 48), 일축왕(日逐王) 비(比)라는 자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라 칭하면서 흉노가 남북으로 나누어지자 선비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선비는 그 이듬해에 독자적으로 동한(東漢)에 사신을 파견, 우호 관계를 맺고 동한에게 자신들의 무력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역사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동한에 의한 북흉노 공격이 성공하자 선비가 그 땅과 남은 무리를 차지함으로써 세력을 크게 떨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선비의 영웅 대인(大人) 단석괴(檀石槐)가 출현하였다. 서기 2세기 중엽 단석괴는 흩어져 있던 선비의 여러 부를 통합하여 동북아의 북방을 휩쓸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부여, 서로는 오손(烏孫)에 이르렀으며 그 넓이는 무려 1만 수천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²⁾.

단석괴 사후 선비족의 제국은 급속히 무너졌으나 중국 삼국시대 초 가비능(軻比能)이 출현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가비능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서기 231년 4번째 북벌을 하였을 때 제갈량과 연합하여 북지(北地)까지 출병하기도 하였으나 서기 235년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었다³⁾. 이후 선비족은 다시 분열하여 모용, 우문, 단, 탁발(拓跋), 독발(禿髮), 걸복(乞伏), 토욕혼(吐谷渾) 등으로 나누어졌는데 특히 모용선비는 여러 선비 세력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자리하였으므로 고구려와의 경쟁은 필연적이었다.

모용선비의 기원

모용선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온다. 선비는 본래 동호의 일부였음은 앞에서 설명하였는데 중국의 사서는 동호를 그들의 시조인 유웅씨(有熊氏) 곧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⁴⁾.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중국인 특유의 자민족중심주의의 산물인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주(周)나라 때까지도 주(周)의 가장 북변의 제후국인 연(燕)나라가 영정하(永定河) 곧 북경(北京)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물며 황제(黃帝)의 후손이 요하(遼河) 상류 지대에 거주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고대 한민족과 동호

고대 한민족과 동호는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동호는 고조선과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서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을 경계로 남북으로 접해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비교적 빈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호의 영토에서 고조선의 주요 유물로 평가되는 비파형동검의 영향을 받은 동검이 발견되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동호는 전국시기 후반 연(燕)나라에 의해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1천여 리를 후퇴하였는데 고조선도 이때 연(燕)의 공격으로 서방 2천여 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이 두 세력이 연나라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나아가 일정한 정책의 공조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동호의 사회발전단계나 동호를 구성한 제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기(史記)”의 ‘동호왕(東胡王)’이라는 표현을 볼 때 상당히 강력한 중앙권력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동호에 임금이(東胡王) 존재했다면 동호가 그 후계세력인 오환과 선비 등과는 달리 높은 수준의 사회였으므로 단순히 두 세력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오환이나 선비의 대인(大人)은 임금에 비해 권력이 매우 미약하였다. 대인의 지배권이 혈통에 의해 세습된 것도 단석괴(檀石槐)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⁵⁾.

동호가 고대 한민족의 한 갈래인 맥(貊)족이라는 주장도 있는데⁶⁾ 맥은 늦어도 이미 서기전 9세기 이전부터 오늘날 북경 (北京)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나타나고 있어서⁷⁾ 동호와 맥이 동일한 존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세력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동호는 고조선 및 맥과 같은 고대 한민족과 역사, 문화, 혈연에 있어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웃 세력이었다. 고구려와 선비의 교류는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와 선비

고구려는 2대 임금인 유리명왕(瑠璃明王) 시기에 선비의 일부를 복속시켜 대외 전쟁에 이용하였다. 태조(太祖) 임금 69년(서기 121)에는 선비 8천을 동원 요동군(遼東郡)을 침공하여 요동태수(遼東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동한(東漢) 건녕(建寧) 원년(서기 168)에는 예맥(濊貊)이 선비와 더불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를 공격하였다⁸⁾.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는 현도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태원군(太原郡), 하서군(河西郡) 등의 군이 속해 있으며 동한(東漢)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주이다.

특히 태원은 서울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주요 간선도로망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⁹⁾. 여기서 예맥은 곧 고구려라고 판단되는데 이는 모본(慕本) 임금 재위 시에 벌어진 고구려의 태원(太原) 공략을 상기시킨다. 선비는 기마전에 능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전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비가 흉노의 세력을 흡수하고 단석괴 등과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출현하여 점차 강성해짐으로 그 동쪽에 자리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모용선비의 시조 건라

모용선비가 동호의 후계세력인 선비의 한 구성원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원에 대한 것은 기록이 엉성하여 확실하지 않다. 모용선비의 계보가 비교적 상세해지는 것은 서기 3세기 이후의 일이다.

모용씨의 시조 전설에 따르면 모용외의 12세 조상인 건라(乾羅)는 금은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금은 안장이 놓인 하얀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¹⁰⁾.

대부분의 시조 전설이 그렇듯이 건라(乾羅)의 이야기 또한 역사적 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다. 갑옷과 안장, 백마는 모용씨의 삶의 기반이었던 기마의 전통과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조 건라(乾羅)를 하늘과 연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혈통이 천상으로부터 유래한 신성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수 모용과 모용선비

모용씨의 등장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록은 대인 단석괴(檀石槐)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단석괴(檀石槐)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선비의 여러 부를 통합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단석괴(檀石槐)는 너른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흉노의 예를 본받아 동, 중, 서의 세 부로 나누어 각 부에 따로 대인을 두었다.

그런데 이 중부의 대인 가운데 모용(慕容)이라는 이름의 대수(大帥)가 보인다¹¹⁾. 중부 대수 모용은 가장 이른 시기에 보이는 모용 관련 기록이다. 우리는 건라와 모용 사이의 구체적인 계승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모용 대수와 모용외가 실제적 혈연관계가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모용선비의 유래가 모용 대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모용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사서에 전해오고 있다¹²⁾. 첫째는 모용외의 증조할아버지인 막호발(莫護跋)이 보요관(步搖冠)을 좋아하여 모용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요관이란 걸으면 흔들린다는 뜻으로 대략 신라의 금관과 같이 작은 장식물이 붙은 모자를 가리킨다. 이 보요관의 ‘보요’가 ‘모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모용선비인들이 보요관을 좋아했던 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유물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¹³⁾.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용이라는 말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막호발(莫護跋)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둘째는 모용이 ‘모이의지덕 계삼광지용(慕二儀之德 繼三光之容)’의 줄임말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二儀)의 덕을 생각한다거나 해와 달, 별(三光)의 모습을 이었다거나 하는 것은 모용의 이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결국 단석괴 이후 선비족 내부에서 분열되어 나온 일부 세력이 모용(慕容) 대수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 모용선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모용선비가 모용(慕容) 대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단석괴 시대의 대수의 이름을 내세웠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용선비 집단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용이라는 낱말 자체는 몽골말의 부유함을 뜻하는 바얀(Bayan)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¹⁴⁾. 하지만 모용선비가 ‘모용’을 선택한 것은 그 낱말의 의미보다는 그것이 과거 선비족의 대국을 이끌었던 유명한 대수의 이름이라는 점에 더 이끌렸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용선비는 과거 선비족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의 대수의 명성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핵으로 모용선비는 서서히 주변 강대국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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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史記>> 卷110 <匈奴列傳> 第50.

2) 池培善, 1977, <鮮卑族의 初期段階 氏族分裂에 대하여>, <<白山學報>>23, 76~85쪽.

3) 三崎良章 저 김영환 옮김, 2007, <<五胡十六國 -中國史上의 民族 大移動->>, 景仁文化社(서울), 9쪽.

4) <<晉書>> 卷108 <載記> 卷8 慕容廆.

5) 리지린, 1997, <<고조선연구>>, 백산자료원(서울), 29~31쪽.

6) 文定昌, 1993, <<古朝鮮史硏究>>, 뿌리(서울), 142쪽; <<山海經>> <海內西經>; <<史記>> 卷110 <匈奴列傳> 第50.

7) 王建新, 1999, <<東北アジアの靑銅器文化>>, 同成社(東京), 202쪽.

8) <<後漢書>> 卷8 <孝靈帝紀> 卷8 建寧 元年 12月.

9) 류제헌, 1999, <<서남동양학술총서 5 중국 역사 지리>>, 문학과지성사(서울), 214쪽.

10) 金俊秀, 2004, <모용선비의 초기성장과 한족(漢族)의 수용 - 유목제국 전통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1쪽.

11) 金俊秀, 2004, <모용선비의 초기성장과 한족(漢族)의 수용 - 유목제국 전통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22쪽.

12) <<晉書>> 卷108 <載記> 卷8 慕容廆.

13) 高靑山 等, 1992, <<東北文化叢書 東北古文化>>, 春風文藝出版社(沈陽), 185~186쪽.

14) <<동서문화 世界大百科事典>> 1991년판 <모용선비> 항목을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