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만춘 : 조선 순조때의 명창이며, 충남 해미 출신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던 명창입니다. 11세 때 해미의 일락사에 들어가 10년 동안 판소리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목이 상하여 절망한 나머지 절의 기둥을 부등켜안고 전신의 힘을 다하여 소리를 지르니, 절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특히 잘부르는 노래로는, <적벽가>, <심청가>이며 아귀성음으로도 유명한 명창입니다.
김성옥 : 충남 강경 출신으로 당시 대명창이었지만 관절염을 앓아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습니다. 앓아 누워있는 동안 진양조를 개발하였는데, 처남 송흥록이 이를 오랫동안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메나리조를 개발하였는데, 이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가리키며 산유화조라고도 합니다. 그의 소리는 아들 김정근을 통해 이어져 중고제 소리가 되었습니다.
주덕기 : 전남 창평 사람이라고도 하고, 전주 출생이라고도 합니다. 송흥록과 모흥록의 고수로 오랫동안 따라다니다가, 고수에 대한 멸시를 참지 못하여, 피나는 노력 끝에 명창이 된 사람입니다. 산 속에 들어가 소나무 밑둥지를 베어놓고 주야로 제사를 지내면서 수련을 했는데, 수천그루으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벌목정정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였습니다. <적벽가>를 특히 잘 불렀으며, 그의 더늠으로는 적벽가 중에서 자룡이 활 쏘는 대목입니다.
박만순 : 조선 헌종, 철종, 고종 등 3조에 걸친 명창으로 전북 고부 출신입니다. 가왕이란 칭호를 받던 송흥록의 직계 명창입니다. 세도가인 김병기의 총애를 받다가 김병기가 실권되자 홍선대원군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잘 부른 노래로는 <춘향전> 그 중에도 <옥중가>를 잘 불렀다 합니다.
김세종 : 조선 헌종, 철종, 고종 등 3조에 걸친 명창입니다. 전남 담양 출신으로서 서편제의 거장입니다. 박유전의 직계로서 성량이 거대하고 기법이 출중하여 당대 제 1인자였으며 <춘향가>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합니다. 송우룡 , 박만순과 동배이며, 이조 말의 가인 신재효의 문하에서 다년간 연마한 관계로 다른 명창들에 비해 학식이 뛰어났고, 특히 창극에 대한 이론은 당세에 있어 독보적이었다고 합니다.
정춘풍 : 조선 철종. 고종 때의 명창으로 충청도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진사과에도 급제한 인텔리 소리꾼이었습니다. 특히 단가를 잘 불렀으며 판소리 문장을 다듬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명창입니다.
진채선(陳彩仙) 1847- ? : 전북 고창출생. 한국 최초의 여성 판소리 명창입니다. 음률과 가무에 능했으며 신재효에게서 판소리를 익혀 명창이 되었습니다. 고종 때 경회루 낙성연 (落城宴)에서 뛰어난 기예를 보여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요. <춘향가>, <심청가>를 잘 불렀으며 동편제의 '기생점고' (妓生點考) 대목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신재효의 <도리화가 桃李花歌>의 주인공이구요.
정창업 : 조선 철종, 고종 때의 명창으로 전남 함평 출신입니다.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의 스승이기도 하구요. 특히 잘 부르는 노래는 <흥보가>, <심청가>였으며 더늠으로는 <심청가>중 몽운사 화주승이 권선시주를 얻으러 산에서 내려오는 대목입니다.
박녹주(朴綠珠) 1906-1979 : 경북 선산생 판소리 명창. 본명은 명이 (命伊)입니다. 12세에 명창 박기홍 (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적벽가>는 송만갑 (宋萬甲), <춘향가>는 정정렬 (丁貞烈), <심청가>, <흥보가>는 김정문 (金正文), <수궁가>는 유성준 (劉成俊)에게 전수받았죠. 1928년 콜롬비아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빅터레코드사, 오케이레코드사, 태평양레코드사 등에서 많은 음반을 취입했습니다. 춘향역으로 인기가 높았고, 1937년 송만갑, 이동백 (李東伯), 오태석 (吳太石) 등과 함께 창극좌에 들어가 활약했어요. 8. 15 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 국극사를 조직해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했구요. 특히 동편제 (東便制) <흥보가>가 특기이며,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박봉술 : 1922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여 순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려서 형들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에게 잠깐 배웠는데, '아이 명창'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소리를 잘하였습니다. 변성기 때 소리를 너무 심하게 닦다가 목이 상해 좌절하였으나 계속 노력하여 명창이 되었습니다. 잘 부르는 노래로는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입니다. 1973년 중요 무형 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정권진 : 1927년 전남 보성 회천면 회천리 출생입니다. 보성은 민속 음악의 여러 명인, 명창들이 태어난 고장으로 이름 높은데, 회천리와 고개 하나를 둔 같은 군의 강산리는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이 살던 곳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때와 해방된 바로 뒤에는 명창 정응민이 살던 회천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판소리를 공부하였습니다.
정권진은 명창 정응민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들어 익숙했으나 정응민은 아들이 소리꾼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권진이 원하고 간청하여 결국 명창이 되었습니다. 1970년 무형문화재 제 5호 <심청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임방울 : 1904년 전남 송정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4세 때 광주에서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고, 후에 구례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6년간 배웠습니다. 25세 때 상경하여 김창준, 송만갑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가 <춘향가> 중 '쑥대머리' 대목을 불러 관중들을 열광시키며 그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만주 등에서 100만 장이나 팔렸다고 하며, 지금도 그가 취입한 레코드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리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맑고 아름다운 성음에 성량이 풍부하여 막힌 데가 없는 통성이었다고 합니다. 창극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창극운동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고 판소리의 전통을 지킨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판소리 5마당에 모두 정통하나 특히 <춘향가>중 '쑥대머리'와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을 잘 불렀습니다. 단가인 <호남가>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961년에 작고하셨구요.
이날치 : 조선 헌종, 철종, 고종 등 3대에 걸친 명창으로 고향은 전남 담양입니다. 박유전의 소리를 이어받아 서편제의 거장입니다. 동편제의 명창 박만순의 소리를 배우기 위해 그의 수행 고수가 되어 떠돌다가 그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떠나왔습니다. 10살이나 어린 그의 경멸이 큰 자극이 되어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피나는 수련 끝에 마침내 득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느끼고 더욱 정진한 후에 드디어 서편제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는 성량이 거대하고 기법이 출중하여 나팔소리와 새소리가 특기였다고 합니다. 그가 특히 잘 부른 노래는 <심청가>입니다.
이화중선 : 1898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전북 남원 수지면의 박씨 문중으로 출가했는데, 어느 날 그 곳을 찾은 협률사의 <춘향전> 공연에 감명을 받아 소리를 배우겠다는 결심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그 후 남원으로 가, 자기를 가르쳐줄 명창을 찾던 중 소리 잘하는 무당을 만나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남원의 명창 장득주를 만나 그에게 소리를 배우려 했으나, 무당이 방해하자 소리공부를 위해 장득주의 동생 혁주와 결혼하고 득주로부터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를 배웠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조선권번에 기적을 두고 공부를 하는 한편 송만갑, 이동백의 소리지도를 받아 명창이 되었습니다. 1940년대에는 선배들과 합동하여 대동가극단을 조직하고 지방공연을 가졌습니다.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으로 죽었습니다. 특히 잘부르는 곡은 <심청가>의 '추월만정'과 <춘향가>의 '사랑가'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