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추워서 돌아다니기가 싫지만, 두꺼운 예쁜 옷들을 많이 겹쳐 입을 수 있어서 좋고, 레드와인에 젖은 얼근함이 배가되어 따뜻하다.
여름은 덥고 눅눅해서 돌아다니기 싫지만, 헐벗은 불우한 아가씨들이 많이 보여서 가슴속에 숨겨둔 박애정신이 샘솟아 뿌듯하다.ㅎㅎ
그리고 또 하나 즐거운 것은.... 시원한 샴페인과 쇼비뇽 블랑이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해주기에 안성맞춤이라 좋다.
내 생에 가장 더웠던 여름. 94년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고3때라 에어콘도 없는 교실에서 보충수업을 하느라 갇혀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찌나 더웠던지 교복상의를 쉬는 시간마다 빨아서 물을 짜지 않고 그냥 입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가장 더운 여름. 바로 2012년의 여름이다. 사무실이나 자동차 안이나 집이나 에어콘을 풀가동. 정말 버텨내기에 힘이 부친다.
덕분에 뱀파이어들이 태양을 피하는 심정이나, 가정용 전기의 누진제가 어떤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는지 몸소 체험할 기회는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땀 흘릴 날이 많은 요즘. 벌겋게 익은 육고기와 빨간와인 보다는, 날것과 하얀와인에 더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가격 착하고 기대부응의 정도가 일정한 쇼비뇽 블랑 한잔 먹어보자.
이름 : Villa Maria, Cellar Selection Sauvignon Blanc 2011
품종 : Sauvignon Blanc 100%
수입 : 신동와인
생산국 :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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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와인을 생각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2종류의 포도. 샤도네이와 쇼비뇽 블랑.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역시 여름에는 쇼비뇽 블랑이 제격이다. 샤도네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차갑게 먹기에는 쇼블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부터(아마도 몽라쉐를 몇번 경험한 후로ㅎㅎ) 사도네이는 완전 시원할 때보다 살짝 미지근해질때부터 더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샤도네이가 차가움에서 온도가 점점 올라갈때마다 더 맛이있어지지는 않지만, 왠지 나의 개인적인 감흥은 쇼비뇽 블랑을 더 차갑게! 샤도네이는 조금 더 미지근하게!가 자리잡아버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쇼블(특히 뉴질랜드 쇼블은 스크류캡이니까~)은 셀러가 아닌 냉장고에 보관을 한다. 물론 나의 조그만 셀러에는 이미 다른 와인들이 들어차있어 자리가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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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비뇽 블랑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푸이휘메(Pouilly Fume)를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ㅎㅎ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쇼블의 주둔지는 역시 무조건 뉴질랜드의 말보로(Marlborough)라고 생각한다. 왜냐? 뉴질랜드 말보로 쇼비뇽 블랑 중에서 맛없는 게 드물었으니까~~ 그리고 생산량으로 봐도 그렇고, 뉴질랜드의 와인생산의 50%이상이 이 말보로의 쇼비뇽 블랑이라고들 하니까~
그러면 또 당연히 떼루아와 관련된 얘기가 나와야 할테고... 그럼 또 한결같이 되풀이되는 기후와 지형... 뭐 말보로도 마찬가지이다. 뉴질랜드를 크게 두동강으로 나누면, 호주와 좀 더 가까이 붙어 길게 펼쳐진 남섬과 동쪽으로 살짝 모나게 생긴 북섬으로 나뉜다. 그 중 말보로는 남섬의 북동쪽 끝부분. 이 동네의 날씨는 여느 유명 와인산지와 마찬가지 레퍼토리로..... 낮에는 강렬한 태양으로 무지하게 덥고, 밤에는 한국사람들이 사랑하는 등산용 아웃도어를 입어야 할 만큼 춥다고 한다. 게다가 고운 흙이 아닌 돌, 자갈 등이 많은 지형. 참 많이 들어본 얘기다. 프랑스 론의 샤또네프 뒤파쁘가 연상되기도 하고, 캘리포니아의 어디쯤... 혹은 이태리 볼게리의 어느 동네 등등 와인용 포도 재배하는 곳의 좋은 조건은 비슷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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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환경만 갖추어 진다고 다 좋은 와인을 양조하는 것은 물론 아닐테지. 그랬다면 뉴질랜드는 마오리족이 벌써 수백년전에 <클라우디베이 쇼비뇽 블랑>같은 건 꿈도 못 꿀만큼 더 좋은 와인을 만들었을 테고, 미국에서는 아파치족이 <할란 에스테이트>같은 와인을 먼저 마시고들 있었겠지..ㅎㅎ
그러고 보니 '떼루아'라는 단어가 갑자기 손자병법을 떠 올리게 한다. 중학교때 쯤 읽은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돌아가신 정비석 선생님의 <소설 손자병법>! 세월이 무수하게 지나서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인터넷으로 찾아보려해도 안나오네...ㅠ)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 대목.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바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시(人時). 어찌 이렇게 와인의 떼루아와 잘 들어맞는 말인가?!!! 공자가 손자병법을 읽어보고는 손무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나~?. 비록 전술에 관한 병법서이지만 인간의 처세와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 이론이 다 녹아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2500년도 넘은 이 책이 아직 베스트셀러인가보다.
떼루아는 단순히 날씨나 토양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포도가 길러져서 와인으로 변하고 병속에 담겨서 내 앞에 나타나기 까지의 모든 과정과 그 과정속에 각종 역할을 하는 모든 요소들을 합쳐서 떼루아라고 부를 것이다. 하늘의 기운(天文)도 좋아야하고, 땅의 이로움(地理)도 있어야 하며, 그 속에서 움직임을 하는 와인메이커들의 때(人時)도 맞아야만.... 천,지,인이 제 역할을 해야만 좋은 와인이 탄생한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의 개체수도 늘어가고, 따라서 人時의 타이밍을 제대로 보는 눈들은 많아졌을 것이고, 天文과 地理는 상대적으로 한정적이니까, 가능한 환경에서는 당연히 적당한 와인의 산지로 탈바꿈 했으리라. 그래서 이 말보로에도 무수히 많은 쇼비뇽 블랑이 심어졌겠지?!! (물론 포도가 자라기 적당한 환경이라도, 그곳에 유전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면 다른 문제이기도 하겠지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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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빌라 마리아>라는 와이너리는 탄생한지 50년 정도 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세계 최초로 뭔가를 시작한 와이너리이긴하다. 바로 코르크가 아닌 스크류캡으로 모든 와인을 출시한 첫번째 와이너리라는 얘기이다. 단지 스크류캡으로 마감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만은, 그 또한 코르크 마개를 완벽히 대체하기 위해 여러 연구와 투자가 있었단다. 구대륙에서는 아직 데일리급의 와인들에만 스크류캡을 적용하는 편인데, 요즘 호주나 뉴질랜드 와인들을 보면, 꾀나 가격이 나가는 와인들도 이 스크류캡으로 마무리를 한 와인들이 많다. 코르크의 컨디션을 기준으로 보관상태나 와인의 누주와 관련된 트러블들을 사전에 방지하자는 장점도 있긴 하겠지만, 일단 오프너가 없어도 어디서나 쉽게 따서 먹을 수가 있다는 편리함도 있다.
스크류캡을 도입한 연구자들은 스크류캡과 코르크마개를 사용한 와인과의 숙성 상태를 비교해 볼 때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마도 함정은 '큰 차이가 나이 않는다.'에 있지 않을까? '큰 차이'는 없더라도 '작은 차이'는 있을테지??ㅎㅎ 결국 우리가 좀 더 비싼고 좀 더 이름있는 와인을 갈구하는 데는 바로 그 '작은 차이'때문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빌라 마리아 쇼블이 그 '작은 차이'때문에 맛이 덜 하리라는 실망 따위는 미리 하지마라! 충분히 맛있다. 그리고 어차피 쇼비뇽 블랑이 그리 장기간 숙성을 요하는 와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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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이놈을 마시기 일주일 전 쯤에 참치집에서 먹으려 들고 갔다가 사고를 쳤다. 들고있던 가방을 떨어뜨려 가방안에서 와인잔과 빌라 마리아 셀러 셀랙션 쇼블이 함께 산산조각.....ㅠ,ㅠ 매우 아깝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했으나 방안에 퍼치는 향긋한 풋사과향이 너무나도 좋아서 순간 모든 걸 잊어버리고 얼굴에 미소가 돌았던것 같다.(그 향이 나의 오래된 가죽가방에서 아직도 나고있다.ㅎㅎ) 순간 향에만 취해 즐거웠으나, 몇초만에 정신을 차리니 역시나 아깝고 부끄러운 상황. 그래서 그 날은 다른 와인 한병과 함께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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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시원하고 청량한 와인이 갑자기 땡기는 밤. 다시 빌라 마리아 쇼블을 손에 잡았다. 늦은 시간인데다 주변에서 마땅히 화이트 와인을 마실만한 곳은 없었고... 해서 그닥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끄러운 조개구이집을 찾아갔다. '오늘은 깨먹지 말아야지~!'하면서 와인병을 손에 꼭 쥐고. 콜키지 대신 먹지도 않을 소주 한병 시켜놓고는 스크류캡을 돌렸다. 다시 그 향이 난다. 정말 예쁘게 퍼지는 풋사과향. 그리고 쇼비뇽 블랑에서 느껴지는 코를 살짝 간지럽히는 특유의 후추향 비스무리한 것이 살살 나를 자극한다. 조금 기다리니 망고스틴과 비슷한 느낌의 향도 나고, 그외 섞여있는... 내가 인지는 가능하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몇가지 향들이 나를 궁금하고 즐겁게 만들어 준다.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입에 머금고 좀 있어보려 했는데, 입안 어디엔가 구멍이 난 것처럼 어디론가 스르르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매력적이고 우아한 산도와 함께 침이 고여서 모인다. 다시 한번 입안에 오래 머물러 두게 하려고 한 모금 더 흡입. 스파클은 없는데도 입안에 약간의 청량함이 맴돈다. 여전히 이름은 모르는 또 다른 향도 코 뒤로 넘어오고, 그리고 이번에는 깔끔하고 시원하게 목으로 넘겨보자. 분명 목으로 다 넘겼는데도 아랫턱 주위로 침과 함께 남은 와인들이 고이는 것 같다. 이쁘다. 맛있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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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가 한단계 아랫등급 Villa Maria, Private Bin Sauvignon Blanc >
셀러 셀랙션 쇼블을 가장 많이 마시긴 했지만, 빌라 마리아의 쇼블은 다 맛있었던 것 같다. 문득 2년전 여름에 먹었던, 요놈보다 한 단계 아랫등급인 <빌라 마리아 프라이빗 빈 쇼비뇽 블랑>이 생각났다. 오래되서 어렴풋하지만 그때도 맛있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친구네 신혼집에서 주먹만한 꼬막과 함께 먹었던 기억이.... 그리고 몇일전 아는 동생들과(정말 웃기게도 남자 4명이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ㅋㅋ) 빌라 마리아의 또 다른 쇼비뇽 블랑을 먹어봤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2253E5024E0A90B)
< 이 아이는 탄산이 들어간 Villa Maria, Private Bin Lightly Sparkling Sauvignon Blanc >
<빌라 마리아 라이틀리 스파클링 쇼비뇽 블랑> 특이하게도 스파클이 첨가된 쇼비뇽 블랑. 가볍게 올라오는 탄산 속에 쇼비뇽 블랑 특유의 향과 느낌은 다 전달해주고 마무리를 더 예쁘게 만들어주는 특이한 맛. 병목에 씌여있듯이 강하진 않지만 약간의 스파클링이 쇼비뇽 블랑의 청량감과 시원함을 더해 주는것 같아서 무척이나 재밌고 기분 좋게, 그리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가격이라 참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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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형만한 아우 없다.' 아무래도 셀러 셀랙션이 좀 더 짙은 여러가지 향과 우아한 기품이 있고, 고상함을 떨어주기에 이왕이면 아주 조금만 더 투자해서 셀러 셀랙션을 강추하는 바이다. 내가 이런는 동안 어디선가는 '그래봤자 싸구려 쇼비뇽 블랑 아니더냐?'라고 비웃을 부르주아들의 빈정거림 따위는 뒤로하고 열심히 먹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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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구이집의 옆 테이블들.... 주변의 시끌벅적한 소주테이블에서 나를 향한 따끔거리는 눈초리.... 열심히 스월링하며 미소를 띄고 있는 나를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고있지만,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너희가 쇼비뇽 블랑을 아느냐? 역시 여름에는 쇼블이야!"를 속으로 외치며 열심히 와인잔을 휘젓고 있었다.ㅎㅎㅎ
첫댓글 옷, 이번엔 혼자가 아니고 맞은 편에 아리따운 아가씨의 술잔이 보이는 듯 ㅎ
참 그랬으면 좋겠다~~
역쉬 쇼블은 뉴질랜드 말보로가 갑이라능ㅋ
요놈은 아직 못먹어봤는데
더위가 물러나기전에 함 시도해봐야겠네욧
더위가 물러나도 맛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