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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f News[자료실] 스크랩 대한민국 골프 기네스
Dr.love(박하사탕) 추천 0 조회 46 10.02.19 07: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골프 기네스


최초의 골프장
1900년 함경남도 원산에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인에 의해 건설된 이 골프장은 일본 최초의 골프장보다 1년 앞서 건설되었다.

당시 영국인들이 어떤 플레이를 했고 또 코스사정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단지 세관 구내에 6홀 코스가 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최초의 골프잡지
정확한 연도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30년대 한국 최초의 골프잡지 [클럽.라이프]가 발간되었다.

시사문제를 비롯해서 골프기술의 해설, 각계 명사들이 기고한 글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실한 내용이

수록되었다고 한다.단돈 30전이라는 싼값에 팔리던 이 잡지는 시즌때만 나와야 하는 사정으로 인하여

몇회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 되었다.

 

 

 

최초의 간이 퍼블릭 코스
1968년 6월 뚝섬 경마장내에 골프장 형식을 갖춘 3홀 규모의 간이 골프장이 개장 되었다.

골프연습자를 위해 2백 80야드까지 공이 나갈 수 있도록 드라이빙레인지도 갖춘 마사골프클럽은

나이트 시설까지 설치, 밤 10시30분까지 개장했으며 겨울에는 4백미터 국제규격에 맞는 스케이트링크로

개방하기도 했다. 인도어에서 레슨이 끝나면 이곳을 거쳐 필드로 나가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늘 많은 골퍼들로 붐비는 명소가 되었다.

 

최초의 골퍼(남)-1920년대 경성구락부를 즐겨 찾던 박용균
한국 최초의 골퍼는 세브란스병원 의약품부 책임자로 일하던 박용균씨로 전해지고 있다.

박씨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서양의사들과 빈번한 접촉이 계기가 되어 골프를 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윤치호,윤치왕 등이 당시 몇 안되던 골퍼로 기록에 남아있다.

 

 

최초의 여자골퍼(여)
여자들의 바깥 출입까지 규제했을 1930년대 당시 여자로서는 선구자격인 배귀자씨가 최초로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당대의 여걸이요 멋쟁이었던 그녀는 골프말고도 우니나라 악극계의 창시자였으며

훌륭한 경영자였다. 당시 동양극장과 배귀자는 떼어놓을레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는데 그만큼

그녀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최초의 민간오픈경기-1976년 창설된 오란씨 오픈선수권대회
 내셔널 경기인 한국오픈과 한국아마추어경기만이 치루어지던 70년대 중반 최초의 민간 스폰서경기인

오란씨 오픈이 창설되었다.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의 용단으로 창설된 이 경기는

또다른 민간스폰서경기 창설을 유도했다는 의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1987년 경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대회를 통하여 조태운, 최상호 등이 스타플레이어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시즌 최다승 아마골퍼
1988년 아마추어 상비군 한영근은 4월 매경오픈 아마부 우승을 필두로 그해 열린 공식경기 아마부를

모두 휩쓰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이같은 기록은 한국골프사 90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최초의 프로골퍼
1916년생인 연덕춘이 골프를 시작한 것은 그가 17세 되던해이다.

집근처의 군자리코스를 자주 놀러간 것이 인연이 되어 골프를 치게된 그는

1937년 전일본오픈 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8위를 기록한다.

국내에 프로골퍼가 제도화 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나 전일본 오픈선구권에 프로의 자격으로 출전,

비공식이긴 하나 최초의 프로골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여자프로골퍼
남자에 비해 여자프로의 탄생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70년 후반까지도 이땅엔 공식 여성프로가 존재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골프협회내에 여자프로부가 설치되면서 실기전형을 거친 4명의 여성골퍼를 프로골퍼로 등록 시켰다.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가 프로입문 동기생이나

강춘자가 등록번호 1번을 기록하여 최초의 공식 여자프로골퍼가 되었다.

 

 

 

한국골프계의 효시
미국인 코스 설계가 '댄트'에 의해서 경성에 최초의 골프장이 탄생되었다.

우선 6홀이 만들어지고 그후 9홀로 확장 되었으나 코스손질이 힘들어 결국

7홀만 플레이가 가능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원산 세간구역내 코스가 프라이비트한 코스에 불과했으므로

1921년 6월 오픈한 [경성골프구락부]야 말로 한국 골프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최초의 드라이빙 레인지
1965년 5월 자유센타의 1만 7천평 대지위에 40타석의 한국 최초 드라이빙레인지를 개장했다.

당시 흥화공업사 이석기 사장의 착안에 의해 탄생된 드라이빙 레인지는 처음 우려와는 달리

붐비는 인파로 타석이 늘 혼잡을 이루었다. 연습비용은 24개 1박스당 80원씩 했고

 여성골퍼들에게는 반액으로 우대해주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최악 스코어 우승기록(남자프로)
1958년부터 실시된 프로골프선수권대회의 원년 경기에서 연덕춘 프로는 306타로 우승을 차지하여

이부문의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1965년 제 8회 경기에선 홍덕산이 302타로 우승했는데

전년도 경기의 우승자 한 장상의 282타 우승기록과는 20타 차이가 나는 황당한 스코어였다.

 

 

최악스코어 우승기록(여자프로)
1978년 제 21회 PGA 선수권 대회부터 여자부가 창설되었다.

남자프로와 똑같이 나흘경기로 치루어진 경기에서 한명현은 83,77,79,78의 스코어를 보여

 결국 29오버파 317타 우승이라는 어이없는 기록을 남겼다.

여자프로 탄생 원년경기에서 보여준 이같은 기록에 관계자들은 실소를 참아야하기도 했다.

 

최초의 해외원정경기
1956년 영국 월드컵경기(당시 캐나다컵)출전이 한국프로골퍼 해외원정 첫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프로골프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인 까닭으로 공식프로골퍼가 전무했으나

일찍부터 프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연덕춘과 박명출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것이 조국광복후 그리고 정부수립후 국제경기에 출전한 첫 경기였다.

 

 

 

최초의 여성골프모임
1957년 8월 최초의 여성골프모임인 서울컨트리클럽부인회가 발족되었다.

남편을 따라 골프장을 찾던 부인들끼리 조직한 이 모임은 사업부, 교양강좌부, 프로그램부로

편성하여 골프이외에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인면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1년에 한번씩 골프대회를 마련하기도 했고

주 1회 정기모임을 가지며 회원간의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민간유도 골프장
1900년 원산코스가 창설된 이후 64년만에 새로운 차원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1964년 9월 한양컨트리클럽 오픈을 기점으로 사단법인체 획일의 골프장시대를 벗어나게 되었다.

사단체제에서 주식체제로 그리고 순수 민간유도체로 골프계가 발돋움하기 시작한때가

바로 한양컨트리클럽 이후 부터였다고 산출될 때

그것은 한국 골프사의 또하나 분수령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초의 36홀 골프장
밀려드는 골퍼를 수용하기 위해 한양컨트리클럽은 18홀 증설을 서두르게 되었다.

기존 코스옆에 18홀을 증설, 우리나라 최대의 54만평으로 늘어난 한양의 36홀은 1970년 9월 완공되었다.

신코스의 설계는 일본최고의 대성건설과 연덕춘의 공동설계로 이루어 졌는데

양코스의 이름을 '한코스' '양코스'로 명명하기도 했다.

최초의 대학 골프부
1969년 9월 동양에서는 일본체육대학에 이어 두번째의 시도로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에

최초의 대학골프부가 설치 되었다. 대학골프부 탄생은 주니어 골프의 태두였다는 뜻에서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대학교육이 직접골프계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니기도 했다.

이처럼 경희대학교의 골프부 교과 편입은 골프에 대한 가치관을 새로이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대해 당시 골프계 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최초의 아마추어 경기
1937년 경성, 대구, 평양, 부산, 원산 등 5개의 구락부를 회원클럽으로 하여 조선골프연맹이 창립되었다.

그해 9월 23일 대구코스에서 전조선아마추어경기가 개최되었는데

최초의 전국규모 아마추어경기로 기록되고 있다. 초대참피언은 일본인 선수가 차지했으나

40년대로 접어들면서 당시의 정상급 아마골퍼인 박용균.장병랑, 김흥조 등이 타이틀을 쟁취하였다.

 

최초의 외국경기 우승
경성골프구락부 유일의 프로로 활약하던 연덕춘이 1937년 일본무대 진출이후 4년만에

원정경기 첫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그의 우승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제패에 비유될 만큼

값진 기록으로 평가되었는데 일제하에 시달리던 한민족의 가슴에 긍지를 심어준

한국골프사에 길이 빛날 쾌거로 받아들여졌다.

 

 

 

최초의 한국골프협회 회장
1959년 발족된 한국골프협회는 7년 후인 1965년 9월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회장직에 박두병씨를 선출하였다. 그는 초대회장직에 오르면서 각골프장의 연합과

한국아마추어골프계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협회를 획일적이며 통합된 기구로 편성시켜

한국골프계의 행정을 도맡는 연합체로 부상시켜 나갔는데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최다 프로골퍼형제
5형제 모두가 프로골퍼로 활약하고 있는 김석봉형제는 국내 최다의 형제프로 골퍼가족이다.

맏형인 김석봉이 1968년에, 둘째 김석근이 1984년에, 막내인 김석노가 1986년,

김석종,김석합이 각각 1987,1988년에 등단하여 프로5형제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부산과 영남지역을 무대로 착실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국산볼 메이커
골프용품중 가장 먼저 국산화를 이룬 품목은 골프볼이다.

골프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1969년에 서울낫소의 전신인 서울화학공업사가 국산 골프볼을 탄생시켰다.

7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한 이 볼은

 연습장용으로 쓰여지는 원피스 볼이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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