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 엡1:1. 3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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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에베소는 주보에 나온 대로 인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깊이 알 때까지 인내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흠모할 만한, 이오니아의 수도)
에베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데미 신상의 원산지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거대한 절이 있는 지역과 같다는 뜻입니다.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신흥사 구인사 등 대형 사찰이 있는 지역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고 거기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냅니다.
이때 편지는 대부분이 수신자가 정해지는데 아데미 신상을 제작하고 섬기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시도되었다는 뜻은 양면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사실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논리적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그래도 충성하고, 준비하고, 훈련받은 사람을 부르시는 게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바로 오늘 에베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부르심의 은혜이고 소명 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 군사로 모집하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양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할 때는 많은 사람이 사도에 대한 진정성을 제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자신이 사도라고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겠다는 의미이고, 이제부터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배우고 생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까지 예수님을 믿은 적도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곳에서 꺼꾸러진 후로는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잘 될 때는 아무나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는 반드시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내가 주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이 어려움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기대입니다.
신학생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학비 생활비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출발합니다.
갈 곳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후원자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는 곳에도 가야 합니다.
디도 목사의 그레데는 유명하지요. 항상 거짓말장이요, 자기 배만 위하는 곳, 디모데는 몸이 약한 가운데서도 가야하고, 고린도 지역은 분쟁이 있는 곳입니다. 로마는 박해가 있는 곳입니다. 추방도 있습니다.
빌레몬서의 오네시모 같은 경우는 종이고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수많은 시간 감옥과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기도 했고, 맞아서 죽을 뻔하고 배가 파선해서 고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의 가슴에는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입니다.
여러분도 어려울 때 가장 우선 적인 일은 인내하며 기다리셔야 합니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02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엡1:2 197장.
2016.11.13.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듯이, 원폭 피해 지역에도 쑥이 돋아나듯이 아데미 본산인 에베소에도 우리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는 기뻐하다, 행복하다. 유복하다. 안녕, 성공을 빌다. 문안하다. 환영하다 즐겁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간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우선은 자격을 따지게 됩니다. 무엇을 했기에 내가 은혜를 주어야 하는가? 질문하신다면 우리는 그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실까요? 나는 주님을 배반한 것밖에 없는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도 나를 찾아오시고, 나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찾아오셔서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오늘 현실의 모습을 따지지 아니하시고, 그저 사랑으로 품어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으로 꾹꾹 거기며 날개를 펴고 모으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나에게 못난 그대로, 못 배운 그대로, 가진 것 없는 초라한 모습 그대로 나를 품어주고 계십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론이 적립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함께 이어지고 연결하여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상에 찌든 초라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에베소 성도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주시고 거룩한 공동체로 불러주셨는데 우리는 그저 주님을 멍하니 바라보는 공허한 메아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잠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의 작고 추한 손을 내밀어 봅시다.
창 28장 야곱이 형 에서의 손길을 피해 갈 때 루스드라에서 돌베개하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누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내리락합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엄청난 약속을 해주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의 고백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접하는 하늘의 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사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받던 아들에서 천하에 고아처럼 홀로 빈들에 누워 있는 야곱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사라져도 야곱에게 하나님이 남아 계시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야곱은 12명의 아들과 네 명의 아내를 데리고 금의환향합니다. 오늘 우리가 빈 가슴이 되어도 우리는 든든함을 느낍니다.
(한나의 사무엘 얻은 기도의 결과+ 노아가 홍수에서 가족 구원한 은주(성경의 예화)
거룩하고 복된 음성으로 나는 너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허전하고 추잡했던 마음에 거룩한 주님의 체온을 담아봅니다. 주님은 따뜻한 가슴으로 나를 품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외롭고 허전한 가슴에 주님으로 충만하면 더 이상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새 가슴 같은 초라한 모습이라도 주님의 뜨거운 심장에 내 얼굴을 묻고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는 이 세상 모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채울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왔지만 허전하고 움츠렸던 마음에 이제 따뜻한 봄날을 기다립니다. 날씨는 차갑지만, 주님의 품은 너무 따뜻합니다.
이번 겨울은 주님의 품에서 은혜 가운데 맞이합시다. 죄지은 모습 그대로 부르셨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내 가슴에 뜨거운 생명의 불씨를 붙이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그저 얼굴을 묻고 감사와 아름다운 고백의 찬양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 은혜에 잠기고 싶습니다. 나를 불러주시고 길러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신 주님 품에 뛰어들고 싶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웁시다. 주님의 은혜는 오늘도 차가운 대지에 풍성하게 임합니다.
03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엡1:2. 095장.
2016.11.13.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원산지에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 평강을 선포하십니다. 은혜도 모르고 평강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도 평강도 알지 만 누리지 못하고 애타게 갈급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롬: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 등을 의미합니다. 전쟁에 시달린 이스라엘은 얼마나 평강을 사모하며 기다렸을까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솔로몬 시대에는 완전무결, 조화 완성이 그 개념에 더 가까웠습니다.
저들의 살롬은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셔서 늘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도망가면서 아무리 깊이 숨고 숨어도 그들 가슴에 평강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자신의 생명을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는 순간도 하나님은 책망보단 평강을 주시고,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 큰 재물도 주심으로 이제 가계를 이루고 민족을 이루는 기반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출애굽하는 과정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저들 가슴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평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론의 축도 민6:24-25 아론은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드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평강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손길 안에 있어야 우리에게 평강이 평강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휴식처-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도 저들은 평강합니다. 애굽왕 바로와 온 백성에게 재앙이 내리고, 생명의 위협으로 통곡하고 하소연할 때도 이스라엘은 그저 평강을 누렸습니다. 이 평강은 사람이 만드는 평강이 아니고, 사람이 지키는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시고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직전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깊은 평강을 주십니다.
구약의 평강은 안식처-안식일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일을 안 지키고 평강을 누릴 수 있다면 뭔가 비정상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주님 품에 안겨 있을 때만 누리게 되고 느끼게 되는 깊은 교감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 아주 깊은 평강을 누리듯이 우리는 주님 품에서 깊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안식처는 바로 주님이 머무는 그 자리입니다. 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도 느낄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 성도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에베소 성도들은 우상에 젖은 마음이 정리되지 못했고, 더구나 깊은 신앙, 올바른 신앙을 말하기는 너무 거리가 먼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평강을 선포하시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평강을 주시면 우리 마음은 평안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평강을 선포하시고 누리고 살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벽하신 모습을 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다면 바로 저에게도 평강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상에 찌들어 살았고, 아직도 뼛속 깊은 곳에 우상의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서 숨쉬는데 주님이 나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평강을 선포해 주십니다.
주님 나는 평강할 자격도 없고 누릴 수 있는 조건도 배경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선포하시니 그저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아멘하고 주님 품에 내 얼굴을 묻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자격, 조건, 따지지 않으십니다. 못났음에도, 아무런 공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저 나에게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기드온같이, 수문 앞 광장에서 나무 강단을 만든 에스라같이 한 손에 연장 들고, 한 손에 무기든 느헤미야같이 주님의 평강을 사모합니다. 주여, 주님 주시는 평강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깊이깊이 누리게 하옵소서.
04하나님은 내가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엡1:3 021장.
2016.11.14.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찬송은(야다) 던지다. 쏘다. 찬송하다. 감사하다.
할랄-밝게 비추다. 자랑하다. 찬양하다. 감사하다. 즐거이 노래하다. 외치다. 연주하다. 미치다. 칭찬하다. 옳게 여기다.
찬송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양면을 살펴봅시다. 우선 우리가 온전한 찬양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온전한 찬양은 아니더라도, 온전한 찬양으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결론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는 온전한 찬송을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전한 찬송으로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안민 교수의 소록도)
저는 실업자인 상태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이것저것 핑계하다가 직장 얻고 결혼하고 아들딸 놓고, 직장도 안정되고 아파트도 하나 마련하고 생활이 안정되려는 순간에 다시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저는 그때는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2절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이 찬송을 밤새도록 불렀습니다. 감격적이고 또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주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해 주시고, 귀한 사역으로 부르신다는 자부심 때문에 울면서 웃으며 주님 앞에 깊은 찬양을 불렀습니다.
지금도 음악성은 자랑할 수준이 못 되지만 그때는 자신감마저 없었던 시절이라 그냥 감동만 채운 채 무작정 불렀습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진로 문제입니다. 우선은 농촌교회를 서원했고, 정말로 내 평생을 바쳐 가장 어려운 곳에서 사역하는 엄청나게 위대한 사람처럼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거룩한 찬양을 음미하면서 가슴 부푼 감격과 사랑을 안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은 진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평해 본다면 하나님을 찬양한 게 아니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을 찬양하는 속속들이 변질 된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주의 종으로 결단한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직장 치우고 주님 앞에 서려는 자신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불확실한 장래 앞에 두려웠고, 자식 공부는 어떻게 감당할까요? 부모님은 어떻게 모시며, 신대원은 갈 수 있을지, 목사는 못 되면 전도사라도 평생을 바친다는 순수한 각오가 그처럼 불쌍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 시간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나 같은 인간에게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는 주님이 너무 딱해 보입니다. 정말 하나님도 예수님도 확실히 모르면서도 자신은 엄청나게 위대한 종인 것처럼 어깨에 힘주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어디 사람이 없으시면 나 같은 죄인에게 찬송하라고 하실까요?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에베소 성도들은 지금 예수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장래가 촉망되는 영적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상을 섬기다가 주님의 부르심 앞에 아멘하고 나섰지만, 이제는 우상 장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신앙인도 아닙니다. 주님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바울의 편지를 전해주게 하시고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초대받습니다.
모세 승리의 노래. 드보라의 승전가를 부를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한 주부로서 훌륭한 인물을 키워낸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외교관이 되어서 국가의 위기를 멋지게 해결한 것도 또한 아닙니다.
찬양하라고 명령적 권고를 에베소 성도들에게 요청하십니다. 찬양에 젖어들게 하시고 찬양 때문에 위대한 교회를 이루고 생명의 환희 누림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양의 유일한 대상자요 내용이다. 이제 곡조는 조금 못해도 좋고, 음정은 조금 뒤틀리고 박자가 어긋나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적으로 주님 앞에 서 있다는 하나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이 찬양에 매달립시다.
오늘 새벽 우리는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내 비록 음악성은 미천하지만 이제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며, 내 가슴 깊은 곳을 흐르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높이고 싶습니다.
주여! 보옵소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로 다가서게 하옵소서. 예비된 신령한 복을 누리는 생명의 찬양 꾼이 되게 해주옵소서.
05하나님은 내가 신령한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엡1:3 026장.
2016.11.15. 기북교회 권시혁목사
여러분은 신령하다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고 엄청난 관심사인 신령한 복은 유대인들의 히브리식 정의는 예수의 피가 들어 있는 복을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장 신령한 것은 예언하고, 우리의 심령을 알아맞히면서 미래를 훤히 내다보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신비주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식 강의를 들어서 정의를 암기하고 나서도 예수의 피가 들어 있음을 의식하면서도 치유, 예언 투시나 환상이나, 은사 쪽으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못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앞에 설 수조차도 없는 죄인인데 주님이 피 흘리심으로 그 피가 우리 영혼을 적시고, 온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새로운 도약을 원하십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지금 신령한 복을 논할 위치가 못 됩니다. 저들은 우상에 찌들어 있고, 우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단단히 맹세하지만, 저들은 그냥 우상 섬기던 습관들이 배어 나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전통적인 샤머니즘이나 유교 불교의 관습이 묻어나오는 경우가 있듯이 에베소 성도들도 이제 하나님을 섬기지만 신령한 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육신의 안일이나 돈이나 지위를 생각하기 쉬운 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신령한 복과 우상의 습관은 공존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우상에 찌든 몸과 영혼에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면 우리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상을 계속 품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신령한 복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주님 품에 안깁시다. 주님이 우리를 안아 주시려고 두 팔 벌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가져야 합니다. 사사시대에 음란한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우상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리시던 애타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상의 관습에 젖어 들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기보다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기다리시는 순간을 포착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선택을 보세요. 마르다는 주님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손은 부족하고 시간을 급하니 마르다는 마리아가 도와주기를 요청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마리아가 잘 선택했다고 칭찬하셨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는 믿음에 덕을 쭉 나가다가 마지막 형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너무 우상시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진실로 신령한 사람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복을 가슴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알 수 있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 신령한 식물(고전10:3)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고전10: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우리는 다윗이 불렀던 신령한 노래들을 부르고 싶습니다. 내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우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내 모든 영혼의 힘을 쏟아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신령한 집에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신령한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내 가슴에 예수로 채우고 신령한 은혜로 자라나고 싶습니다. 내가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이 나의 삶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신령한 씨를 뿌리고 신령한 열매를 거두며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냥 감사하면서 은혜로 그 복을 누립시다.
06 하나님은 창세 전에 나를 택해주셨습니다. 엡1:4. 534장.
2022.06.16.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철없던 시절에 믿은 예수님이 이제 은퇴하고서 돌아보니 정말 은혜였구나 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어떤 조건도 자세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해 주심에 대해 무한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선택만 당한 사람과 선택 후 성장
그 많은 고통과 아픔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핍박자요 포행자인 바울을 선택해 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생계를 유지하는 에베소 성도들을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상의 본산지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안동지역 종가에서 예수를 믿는 일은 정말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내가 싸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으로 오염되고, 회개하며 엎드리기보다는 나름대로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저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칭찬과 격려, 사랑과 행복만이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 내고, 포기하려고 하고, 사람 원망하고 싸우고, 불평하고 자기 자신을 앞세우려 하고, 주님을 떠나 숨고, 높은 자리만 올라서기를 바랐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선택해 주심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도 하나님의 은혜였으면서도 우리는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고, 안하무인의 경지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지 못하고 우리 조상 마귀의 형상을 나타내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존재였습니다.
바울은 그토록 핍박과 고생, 생명의 위협도 참고 견디는데, 우리는 자신을 재판관의 자리에 앉히고, 남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짓밟고 마음 상하게 하면서 자신은 당당한 사람인 양 떠들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신지 우리는 가히 짐작도 못 한 채, 주님의 손길에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던 못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음에 이제 눈을 뜨려고 합니다.
선택함은 예리하게 살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소돔 성 앞에서 롯이 삼촌 아브라함의 요청에 따라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참 잘 선택했다고 안심하고, 자긍하면서 아무리 삼촌일지라도 자신이 좋은 쪽을 갖고 마는 야비한 롯의 모습을 봅니다.
평생을 좌우할 선택이었습니다. 현실에는 너무 좋아 보이고, 앞날은 아무런 염려 없이도 좋을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집을 짓더라도 원목과 각종 재료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말씀 듣기와 소화하기-흡수율을 높입시다.-음식은 먹는 자와 하나
엘리야 시대에는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머뭇머뭇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 아비멜렉은 스스로도 자평하기를 가시나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함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우리의 공로를 전혀 들어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탁월하신 선택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에베소가 하나님께 선택받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선택받기 위해서 힘쓰고 애쓸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탁월한 선택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우리가 그 선택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보여 드립시다.
여전히 못난 그대로,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그대로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방향을 같이 바라보면 됩니다.
하나님! 우리를 선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때로는 힘들 때가 오더라도 이 손을 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기쁘긴 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거룩한 뜻에 못 미치는 안타까운 순간이지만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양하며 주를 높여 드립시다. 하나님의 선택이 탁월합니다.
07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엡1:4. 08장.
2022년07월04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거룩함은 순전한, 완전한 하나님께 적합한, 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선지자에 대하여 천사들을 나타낼 때 그리스도를 나타낼 때 거룩함을 쓰게 됩니다.
거룩함은 청결하고 결백한, 신성하고 완전한, 순결하고 깨끗한 순진한 이란 의미입니다. 거룩함은 가장 기본적으로 분리의 개념입니다. 거룩함 신성함을 뜻합니다. 거룩함이란 두려운 신비적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거룩을 신비성과 관련 시킵니다. 전혀 악이 없는, 전혀 불경건이 없는 상태를 기대합니다.
소위 성결 법전이라는 것은 윤리적 색체가 강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모습을 반향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윤리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계시하면서, 하나님 자신을 닮은 거룩한 속성에로 인간을 부르고 계십니다(ISBE, "Holiness").
거룩함과 범속을 연관시키면 안 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거룩한 장소인 성소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지난번 우리는 거룩의 3가지 형태를 배웠지요? 사람이 거룩해 지고, 장소가 거룩해지고, 날이 거룩해 집니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날을 지키고 있다면 거룩은 온전하게 보존되는 겁니다.
에스겔 37장은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점점 크게 확장되었고 그 물은 나중에는 헤엄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큰 은혜의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시기 때문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무 선하시기 때문에 완전합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우상을 섬기는 본질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혼합은 하나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정말로 거룩한지 세어 보아야 합니다.
예배 의식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거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예배를 위해 따로 떼어 분리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모든 주위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제사하는 거룩한 향료가 바로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 거룩함을 유지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가장 추하고 어두운 사망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흠이 없게”란 희생 동물의 흠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종교적인 의미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킬 경우,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킬 경우에 흠이 없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죄의 유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과 시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다말과 모압 여인 룻,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의 반복된 오염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고 순결하게 해 주셨고 그 가문을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거룩함을 생각합시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완벽하게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순결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들의 불결한 피를 정케 하셔서 흠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죄로 절망하지 맙시다. 자신의 미약함에 좌절하지 맙시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고 완전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읍시다. 우리는 자신을 볼 때 거룩의 반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완전한 생명체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제 자신을 정죄하지 맙시다. 아무런 조건도 없으신 주님이 두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거룩은 인간의 속성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 붙을 때 비로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새로운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제 주님을 부르면서 주님 품에 다가섭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처럼 구제 불가능한 죄인인데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저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한 걸음 다가섭시다.
08 하나님은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엡1:5. 090장.
2022.07.05.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세상에 수많은 가짜가 있지만, 혈육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야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이강석이라는 양 아들이 있었는데 경무대를 나와서 많은 사건을 벌이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그런데 가짜 이강석 사건은 우리 역사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습니다. 자기가 이강석이라고 사기를 치지 않았는데도 이강석으로 오해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얼어버려 벌렸던 웃지 못할 해프닝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부끄럽지만 우리는 정말로 마귀에게서 났다는 사실은 주님의 말씀이라도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악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반역한 것도 아닌데 왜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실까?
그게 바로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우리는 불순종한 아담의 피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감히 제 입술로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 같은 인간은 아들로 삼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 세상에 똑똑하고,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으시겠지요!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삼아주심은 한 마디로 은혜라고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면(더워지면) 어르신들이 사랑방에 모여서 노시다가 밖에서 누가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그 방에 계신 분들은 다 아버지입니다. 그렇지만 문을 열지 않고도 이놈이 내 아들이다. 내 딸인지를 분별해 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분들의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노아 시절부터 아들을 낳고 손자를 낳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온전히 모신 분들은 성경의 기적을 맛보았고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그야말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품어주지 않았고 자신들도 더 이상 주님의 자녀로 주장하거나 들어가려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는 문자 그대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완전한 은혜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들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든든하게 해 드리기보다는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된 적이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하실 수 없으시고,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실 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는 공존하기를 바라고, 죄는 있는 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 싶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들답게 주님을 누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을 보답한다는 의미보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젖어 들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과 기쁨의 감격, 또 주님 만난 사람의 벅찬 감격을 누리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부모가 준비하시는데 우리는 그저 주님 품에 얼굴을 묻고 오직 주님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열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나의 구원과 기쁨 때문에 더욱 주님께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 되려는 몸부림을 멈추고, 이제는 아들로서 당당하게 겸손하게 그 책임과 의무에 눈을 뜨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에 오늘 하루를 온전하게 영광 돌리면서 아들이 무엇이며, 아들로서 당당하게, 그리고 침착하면서도 온전한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09 하나님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엡1:6. 288장.
2022년07월06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우리 삶은 아무리 해도 빛이 안 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은 참여만 해도 영광되고 보람 있고, 가슴 뿌듯한 일도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영광을 찬송하는 일이야말로 말씀만 들어도 가슴 벅찬 감격이 치밀어 오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전문가는 스랍 천사입니다. 천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하는 일이 찬양인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컥하고 우리도 끓어오르는 열정을 마음껏 찬양으로 올려드리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맥추감사주일 순복음 찬양단.
우리의 의식이 전혀 필요 없는 아름다운 찬양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식과 감정을 동원해야 하는 찬양도 있고 오직 눈을 뜨고 믿음이 발동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찬양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임명운목사님-영을 건드리는 찬양.
우리는 에덴의 완벽한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모든 나무와 과실과 모든 요건이 엄청나게 잘 맞게 설계된 에덴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노래 –뼈중의 뼈, 살중의 살
우리도 이 땅에서 엄청난 기적이나 성공을 거두고, 칭찬받고 상 받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감격하는 거야 훈련할 필요도 없고 연습할 가치도 없이 그대로 나오는 순수한 감정 자체가 찬양이 되고도 남습니다.
온 세상이 수장되고 자신의 가족만 구원받은 노아의 찬양은 어떠할까요? 애굽 왕 바로에게 바로를 심판하고 출애굽을 시작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기분일까요? 모든 백성이 일시에 떠나면서 하나님이 은금 폐물을 구하라고 하실 때 반신반의 했지만, 종살이하는 히브리 민족에게 풍성한 베풂이 있을 때 저들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출발하고, 그들 가슴 속에 찬양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7바퀴를 돌면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소리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저들이 진군하면서 소리 지르는 함성이야말로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감격하면서 주님 앞에 목이 메어 소리칠 백성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찬양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조성하신 그 찬양에 온 백성들이 함께 모여 뜨거운 감격으로 소리치며 외치는 영광의 찬송을 생각해 봅니다. 엘리야의 승천을 바라보는 엘리사와 제자들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제자들, 승천을 보는 제자들
에베소 성도들, 그중에서도 신실한 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서서히 온 성도들 가슴에 스며들고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려고 준비하고, 모든 악기가 동원되고, 찬양할 사람들이 제 자리에서 파트를 준비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전주가 시작되고 연주와 찬양이 본격적인 음률을 내려고 합니다.
우상에 물든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야 했던 에베소 성도들의 절박한 심령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느 부분을 맡아야 할까요? 우리는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을 생각해 봅니다. 남자지만 여사사 밑에서 출정 명령에도 나가지 못하고 떨고 있는 바락의 처참한 모습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적들을 이기고 마지막 승리의 노래까지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주님의 손끝에 관심을 집중시켜 봅니다.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은 오늘도 따뜻하고 생명수가 넘치면서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거저 줄 것은 뭘까요? 가치 없는 것은 줘도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가치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너무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있고, 내가 보기에는 정말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사실 하나님 나라에는 무한의 가치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찬양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자기가 받은 은혜대로 가치가 있고 우리의 찬양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중심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가장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눅11:13
지금 제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살아계신 주님 앞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안고 있습니다. 주님 품에 달려들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무조건 달려가려는 자세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더위(추위)를 해치고 나오신 성도 여러분, 우리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이건 우리의 준비와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예비해 두셨습니다. 마음껏 외칩시다.
10하나님은 우리를 죄 사함 받게 하셨습니다. 엡1:7. 283장.
2022.07.07.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인생에 가장 큰 약점은 죄를 사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조심하여 죄를 안 짓고 살 수도 없지만 이미 지은 죄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여기 사함받다 용서받다 는 표현은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사람은 용서하거나 사함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죄를 이해하고 허용하는 범위에서는 이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용서의 본질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단정적인 말씀입니다. 구약의 용서는 절대적이지 못했고 마치 효과가 없는 것처럼 히브리서가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 응답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무지몽매한 순간에 저지른 두 가지 죄, 즉 금송아지 사건과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평 때에도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친히 선언하십니다(출 34:9, 민 14:19-20)
하나님께 도전적이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구약에서도 온전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속죄될 때 죄인이 용서받았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에서도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올려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나 아모스처럼 공개적으로 죄 용서를 청원하는 것을 볼 때 때로는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지 못함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가리워지고, 덮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의 용서 청원을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지는 호의이며, 왕이 백성들에게 가지는 호의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완전히 치워졌습니다. 우리 죄가 말갛게 치워지고 순수하고 거룩한 주님의 품을 향하여 엄숙하고 고요한 발길을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떤 죄라도 다 덮을 수 있고 사 할 수 있음에 의심치 않습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진하고 흉하고 더러운 죄라도 예수님의 피가 씻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피는 오랜 세월 동안 어린 양의 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내려올 때는 희미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적으로 믿고 또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말씀 통해서 분명히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한순간도 우리에게 오는 길에서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자랑할 것이 있어서 대속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사함이 이미 선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에 있어서 못된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주셨고 모든 것을 덮어 주셨고 우리의 죄를 가려주셨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가라앉은 구정물을 휘젓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또다시 들추어내어 정죄하고 단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못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면 우리는 그저 주님 품에 안기면 됩니다. 주님의 보혈은 멈추는 법이 없고, 주님의 보혈은 대상을 가리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서로의 죄를 휘젓지 맙시다. 주님이 이미 용서하신 죄를 우리가 심판 주처럼 정죄하지 맙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말씀으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악한 마귀는 종교 개혁하려는 루터를 정죄했습니다. 종교 개혁을 하기 전에 너 자신이나 개혁하라고 비난조로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사실적으로 루터가 지은 죄목이었습니다.
루터는 잉크병을 마귀를 향해 던지면서 이미 예수의 피로 용서받은 죄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만 생각합시다. 주님의 말씀만 따라갑시다. 주님이 용서하시기 위하여 피 흘리셨다면 우리가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 새벽에 주님이 용서하심에 감사하며 주님 품 안에 뛰어듭시다. 주님은 우리보다 넓은 가슴으로 용서하셨고, 지치고 피곤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사랑으로 덮으십니다.
잠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1하나님은 나에게 지혜를 넘치게 해 주십니다. 엡1:8 453장.
2022년07월08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구약에서 지혜는 전쟁에서의 전략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전문적인 작업 기술에서, 나무나 금속을 다루는 기술에서, 이방 나라와 외교 전략에서 지혜가 요구됩니다. 국가 지도자와 정부 관리들까지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유혈사태를 막는가 하면 시간을 아끼는 사소한 문제까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둔한 자의 처신과 결정은 늘 부족함을 초래했습니다. 생활의 실제적 사건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전달됩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공명정대하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의 지혜로 하나님은 구름을 세시고(욥 38:37) 땅을 세우시며(잠 3:19) 세상을 만드셨다(렘 10:12).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는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된다.(욥 12:13).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지혜를 알고 계신다. (욥 28:20, 욥 28:23).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사고로는 발견되지 않으며 하나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최상의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이러한 지혜를 제공해 주실 수 있다(잠 2:6, 욥 11:6)
우리는 늘 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의 작은 두뇌로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해 주셨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결정하는 일입니다. 세상 지혜로서는 믿음의 대상을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섬기며,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만 보더라도 자신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공의회 회원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발견하고 섬기기는커녕, 예수 믿는 사람들을 때리고 가두고 죽이는 일에 증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접근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언제 어느 곳에든지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지혜가 부족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 됩니다.
참된 지혜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적 지혜는 실제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죄를 피하는 삶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우주의 질서 속에 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게 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를 품으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혜의 본질을 찾는 것이 급선무지만 가장 기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얼마든지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비밀을 열어가야 합니다. 그토록 중요하고 생명력 넘치는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게 하십니다. 우리는 늘 예수+나입니다. 나는 늘 미련하고 약하지만, 예수가 나에게 더해질 때 우리는 더없이 지혜로울 수 있게 됩니다.
바울에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시려던 지혜는 오늘 내게도 주시기를 원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내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지혜로 초청하시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오는 중요한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저 멀리 계시는 분으로 정의하지 마시고 나에게 지혜를 주시고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눈길 속에서 고정된 시각을 갖여 봅시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 목말라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보며 거룩하고 복된 하나님의 지혜로 나아갑시다. 주님의 일을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비록 지혜가 부족하더라도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에 젖어 들고 우리를 품어주시려는 주님 품에 안기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도 주님 품으로 나갑시다. (솔로몬 재판, 세금 논쟁)
주님은 오늘도 주님이 준비하신 지혜를 받아 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순간도 주님의 지혜를 찾으며 주님이 주시는 총명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우리는 평생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2하나님은 그 뜻의 비밀을 나에게 알려 주십니다. 엡1:9 461장.
2022.07.11.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지금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아모스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의 구원이나 심판이나, 국가의 멸망이나 일어섬을 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고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비유로, 어떤 때는 숨겨진 채로 말씀하실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모두 선지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능동적으로-주체적으로-충동적으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의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뜻은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생각해서 그쪽으로 기울어지고, 결정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한두 번 말씀을 선포해 보니, 반응이 아주 싸늘하고, 형편없는 보복이 닥쳐옵니다.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해도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아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집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낳은 것도 아닌 이 모든 백성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어찌 나에게 맡기시냐고 했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고, 모세는 또다시 그들의 인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밀은 입을 다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밀, 교훈 신비, mystery의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만 말 못 하는 게 비밀입니다. 거북과 뽕나무의 비밀을 아십니까? 토사구팽. 兎死狗烹
거북을 아무리 삶아도 삶아지지 않지만, 뽕나무로 삶으면 그대로 푹 삶깁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발설한 뽕나무도 결국은 베어지고, 거북을 삶는데 사용되고 맙니다. 토끼를 잡은 사냥개는 토끼 사냥이 끝나면 주인이 사냥개마져 삶아먹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숨은 사건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바알의 본산지 이세벨의 고향에 엘리야를 숨게 하십니다. 거기가 과연 안전한 곳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도망을 갔는데 원래의 뜻은 숨다는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도망은 어디로 가야 도망이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체포하고 십자가에 달려는 세력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피해 있을 뿐입니다.
엘리사의 생도들도 국을 끓였으나 야등 열매가 독이 있어서 쓰게 되어 못 먹게 되었을 때 엘리사가 독을 해독하는 비밀을 알았고, 국을 먹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이고 살리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 세를 내는 문제로 고민할 때 낚시를 던지면 고기가 동전 하나를 물고 나오는데 반 세겔 내는 성전 세를 베드로와 주님의 몫으로 내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비밀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엄격한 십일조를 드리고, 율례를 완전하게 지켜야 구원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비밀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비록 할례는 받지 못해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비밀이 저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비밀을 깨닫고,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급을 깨닫고, 거룩한 은혜의 자리로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를 원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무슨 비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면, 무슨 일을 하기 원하시는가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 갑시다.
13하나님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여 주셨습니다. 엡1:9. 412장.
2022.07.12.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원하시는 말씀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언제나 사람 편에 겉으로 유익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고통이 따르고, 때로는 정말로 죽을 것 같은 고생을 지나야 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달은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환희와 기쁨을 맛보는 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탈출이 생명을 건 위험한 일이고, 탈출까지 성공했더라도 그 고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기에 누구나 선뜻 달려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개인의 영달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 가기도 어렵지만,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오더라도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적극적인 반대자가 있고, 모반으로 몰고 가려는 악의 세력이 거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jm'v;(8055, 사마흐)=몸과 마음과 영혼의 기쁨. 강조능동. 우리는 어떻게 알까요? 하나님의 기쁨은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근거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기쁨은 사역하는 모든 종들이 기꺼이 고생과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적인 해답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위험하고,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저들은 기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고통과 헌신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기뻐함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심은 가장 절대적인 원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ejn (1722, 엔) ~안에, ~에, 위에, ~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어떤 사역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기쁨도 하나님의 기쁨도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때는 하나님의 때와 인간의 때로 나눌 수 있습니다. 때는 시점, 기간 시기, 달가운 때, 어려운 때, 열매 맺는 때, 정규적으로,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 기회와 같이
소위 말하는 시간(time)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때는 늘 불확실합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그대로 순수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문제입니다.
특별한 경우-하나님의 때-카이로스 kairov" (2540 카이로스) (crovno", 5550) 사람이 정해 놓은 시간-사람의 불확실한 때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때가 찬 경륜-경륜은 청지기, 관리인, 신적 업무를 맡은 자, 일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구약 4천 년을 예비하시고, 공생애 30년을 또 더하시고, 40일 금식과 3년 공생애를 거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정하신 것입니다. 예정은 protivqhmi(4388, 프로티데미) 앞에 놓다. 전시하다. 제시하다 결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 놓으십니다. 예수님 앞에 십자가를 놓으셨지만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정의 수레바퀴에서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예정하시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주님의 손길에서 새로운 삶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결국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절대 순종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고 따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우리 모든 행동과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부르고 양육하는데 우리가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거룩한 손길들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를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때가 찬 경륜을 생각합시다. 요셉의 인생 과정이 고난이지만 그 끝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고 구원의 길로 나오기를 예정하고 기다십니다.
14하나님은 통일되게 하십니다. 엡1:10. 292장.
2022.07.13.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가치관과 미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우열을 가리기는 매우 힘들고,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통일 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상에 물드는 일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지만, 영적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하늘은-천상, 하나님의 처소로 행복, 권능, 영원, 특히 복음, 공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높다,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하늘은 별들이 있는 하늘을 의미하며, 때로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이 머무는 공간을 말하며,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은 –흙, 지구의 딱딱한 부분이나 혹은 지구 전체를 땅이라고 부르며, 나라, 세상, 육지를 의미합니다. 땅은 대지, 지구 영토를 의미합니다.
바벨론 전설은 에뉴마 엘리쉬는 땅은 쓰러져 죽은 티아맛 송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성경은 분명히 땅도 하늘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배하에 주권이 미치는 곳으로서 여호와의 것입니다.
땅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선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악한 것, 어떤 조물주의 작품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현실 도피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땅은 수없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악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죄가 관영 할 때 땅을 멸하시기를 작정하셨습니다. 창9:11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땅을 단순하게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멸하신 것이 아니라 악한 자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심으로 땅과 인간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순종하는 이상 풍성한 열매를 보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옴으로 인간과 땅의 조화는 깨어지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게 됩니다. 아담이 낙원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결국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흙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땅의 소산물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담은 땅에서 생명 대신에 저주받았습니다. 죽음을 향해 죽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시고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의 수여자, 곧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아담 때문에 아다마-흙-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8:21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순종 여부에 따라서 땅을 주시기도 하시고, 뺏기도 하셨습니다. 땅의 열매의 풍성함은 순종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다마의 영원한 소유, 에덴동산으로 귀환을 보증하시기 위해 아담을 내적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땅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통일-유래, 요약하다. 간단히 이해하다. 하나로 함께 모으다 는 의미입니다. 저들이 지각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통일 되게 하십니다. 원어에서는 다시 통일 되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 모든 것이 다 원래는 통일되어 있다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분열되고, 흩어져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 통일되는 과정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가장 먼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흩어지고 갈라지면서 다른 사람이 하나 되기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먼저 통일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남북통일을 먼저 생각하는 분단국가이기에 이 통일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북통일 이전에 동서가 하나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노소가 하나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도농이 하나 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통일을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1하나님과 나, 2나와 나의 통일을 먼저 질문합시다.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우리가 너무 절실하게 느낍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말씀 안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과 내가, 가정이 하나 되고, 우리 교회가 하나 되며, 영적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과정을 꿈꾸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분열의 최첨단에서 서 있습니다. 남북이 민족 분단의 고통 속에 처해 있습니다. 종교와 이념 분쟁의 현실 속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통일을 꿈꿉시다. 작은 부분에서 통일을 이루어 갑시다. 하나님은 내가 원수 같이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슥11:7 은총+연합, 엡2:14-19.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주심
15하나님은 우리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엡1:11. 435장.
2022년07월14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하나님은 바울을 선택해 주시고, 에베소 성도들을 선택해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시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은혜의 찬송을 하게 하십니다. 죄 사함을 선포해 주십니다.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정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십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계획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결정하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뜻과 지식과 계획대로 우리가 예정을 입었습니다. 예정은 미리, 앞에 둔다는 의미지요.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습니다.
바울 신학의 아주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예수 안에 입니다. 예수 안에는 우리말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가 중복될 때 해석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연계형-예수 안에,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하여
(요 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 내가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너희가-독자들이 내 안에-예수 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라고 하십니다.
여기 안에는 바로 머리로 해석하시면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머리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마음이 오직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간단하게 점검하면 예수님이 나의 머리로 계시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이 확실합니다.
내 삶의 모든 시간을, 모든 생각을 주관하지 못하시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못됩니다. 내 주인이 예수님이 맞아야 내가 종이고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고생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순교의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즐거운 자리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하시고, 완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우리는 전적으로 믿어도 손해될 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통일-하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뜻의 결정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고속도로를 내어주시고, 산업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하나님의 제안 의향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업이 되게 하십니다. 이게 우리의 공로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이고, 그대로 선택입니다.
기업이 되게 하심은-할당하다, 특권을 배당하다. 기업을 얻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사위를 뽑는 것처럼 우리 몫을 배당하십니다. 기업은 계속적인 수확, 획득이 가능함을 말씀하십니다.
땅에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내년에도 또 농사가 가능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농사가 가능합니다. 이게 기업입니다. 우리가 쌀 한 가마를 받았다면 그걸 먹으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벼를 받았다면 그 일부를 먹어도 씨앗을 남겨두면 또 다른 파종과 수확이 연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업이 되신 줄 분명히 믿읍시다. 우리는 아무리 많은 수확이라도 주님 앞에 또다시 받을 소망과 믿음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우상에 찌들고, 주님을 배반했던 과거를 안고 살지만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기업입니다.
나의 머리가 온전히 주님이라면 우리는 떳떳이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머리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 머리로는 주님의 기업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부족해도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라면 우리는 영원하신 기업이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이 영원한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소망이 있고, 주님의 기업입니다.
세상 것은 소망을 두지 맙시다. 영원한 기업이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영원하신 기업입니다. 주님의 기업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열매로 보답합시다.
16하나님은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엡1:12. 597장.
2022년07월15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6절에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고, 12절에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찬송=이야기하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에베소 성도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주님의 바라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뜨거운 사랑과 은혜가 묻어있고 젖어있는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악보나 음악성에 매이는 찬송이 아닌, 뜨거운 감격과 주님을 향한 서러운 충성이 묻어나는 생명 있는 찬송이, 오늘 이 순간 우리의 가슴에 폭포수 같이 쏟아지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 앞에 엄청난 감격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자신을 이방에까지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주심에 날마다 순간마다 감격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 많은 세상적 기득권을 포기한데 대해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바울의 개종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리새인, 서기관, 공회의원으로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있을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버릴 수 있었을까요?
자신은 국가가 인정하는 공회원인데, 주님의 복음 전하다가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도망쳐야 하는 모습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옛날 같으면 저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매 맞고 굶주렸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서, 서기관으로서의 모든 직무를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면서 주의 복음을 위하여 겸손히 낮아진 자신을 세상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볼까요?
에베소 성도들도,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섬기며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계의 막연함과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할 때 두려움과 주님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던 긴장된 몸짓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지만 아무런 공로도 없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찬양하는 삶이 아니라 은근히 불평하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늘 1인칭 복수로 예수+나로 이해하시면 좋고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머리로 해석하면 좋다고 말씀드렸지요? 예수가 나의 머리이면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고, 내가 머리이고 예수가 몸이면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이 나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을 오직 주님이 나의 주인임이 고백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 향수가 늘 있습니다. 사시사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주님과 아무런 막힌 담이 없이 영적으로 완전 소통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게 바로 전부터 바라던 에베소 성도들과 바울, 그리고 오늘 이 순간 우리가 바라던 소망이 아닐까요?
나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완전한 순종과 완벽한 헌신으로 주님의 영광을 높여 드리는 삶이 되고 싶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은혜를 담고,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을 담고, 내 가슴 중심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송을 부르고 싶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순종하고, 불평하며 원망을 달고 살았던 가슴 아픈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끝도 없이 무조건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감사의 삶을 간구했지만, 또다시 실패하고 좌절하는 처절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내 모습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사하며, 뜨거운 찬양이 같이 솟구칠까요? 그토록 꿈꾸던 감격과 은혜의 순간을 찬양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가슴에 주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불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은 결국 악의 구렁텅이를 열어젖히고 우리를 삼키려 하지만 우리는 주님 품에 안겨 거룩한 찬양을 올려드리면서 내 중심에 주님의 사랑을 담고 싶습니다. 우리가 전부터 바라던 그 모든 순간을 내 기도와 찬양에 실어보고 싶습니다.
주여 뜨겁고 감격스러운 찬양이 우리 가슴에 솟구치게 하옵소서. 거룩한 천사와 우리 입술이 주님의 보좌를 향해 영광의 찬송으로 올려지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하늘의 영광이 이 땅에 부어지게 하시고, 은혜받은 내 영혼이 감격하게 합소서.
내 비록 완전한 찬양을 올려드리지 못해도, 주님이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시니 주님의 거룩한 품에 내 얼굴을 묻고서 말 못 하는 흐느낌으로라도 주님 영광의 찬송이 되고 싶습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로 가득 차게 해주시옵소서.
17하나님은 나에게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십니다. 엡1:13. 521장.
2022년07월26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바울의 구원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을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때리고 죽이려는 사람의 구원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에베소 성도들의 구원은 어떻습니까?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그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우상에게 드린 제물로 연명하던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아울러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우상을 섬기며, 샤머니즘에 젖어 있었는데 어떻게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들였을까요?
오늘 우리는 새신자들이 구원받는 상상 못 할 일들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구원을 그리면서 생각해 봅니다. 구원의 복음이 어느 순간에 진지하게 들려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가 그저 귓가를 흘러 지나갔는데, 어느 한순간에 주님의 역사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관심을 우리는 구원의 열매로 드리게 됩니다. 바울의 구원과 에베소 성도들의 구원과 우리의 구원을 늘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인 줄 알고 그저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던 어리석은 고집쟁이들이 이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은 그 말씀이 흘러 지나갔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생명의 복음에 목마른 사람처럼 그저 복음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은혜의 시간을 지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주체하지 못할 은혜의 도가니에서 몸부림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로로 예수를 믿었습니까? 우리는 포항에서도 아주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남다르게 뒤늦게 영접한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감동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 손에 붙들려 이제 세상적인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오직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애끓는 심정으로 주님 품에 안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기쁨과 감격, 그리고 구원에 안도하는 평온한 감사를 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찬양하며 서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6대 7대 신앙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6대 목회자, 5대 장로 가정들이 생기면서 소위 말하는 신앙 명문 가정이 생겨납니다. 그런데도 아직 일부 성도들 가정에서는 불신자들이 돌아오지 못해서 애태우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 집안도 극소수만 믿는 집도 있고, 또 반대로 극소수만 안 믿는 집도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남다르게 착하지만,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고,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세상에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다녔던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구원받은 사람과 아직도 몸부림치면서 도망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습니다. 내가 만약 구원의 진리를 듣고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경력을 쌓아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탈락자가 많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2천 년 전에 이미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시고, 선교사님과 믿는 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습니다.
내가 구원을 찾아다니고, 구원을 베풀어줄 사람에게 사정하고 배워서 나를 수련하고 도를 닦고 구원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속이 탈까요?
주님의 구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합시다. 복음이 글자로 보관되었다가 어느 순간에 성경책에서 걸어 나와 내 가슴에 불을 붙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인생 전체를 장악해서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시고, 주님의 손길로 붙들어주시고, 고난의 시간에도 우리를 응원해 주시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회의 은퇴 지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정말 애절함을 느낍니다. 평생을 목회하면서 구원의 확신 없이 목회하고, 설교하고 생활했다면 얼마나 절망과 고독과 아픔을 견뎌야 했을까요?
바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에베소 성도들에 구원을 선포하시고 구원의 감격을 주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시고, 확신 가운데 살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새벽에 구원의 감격을 마음껏 찬양하며 감사합시다.
18하나님은 약속의 성령으로 나를 인쳐 주십니다. 엡1:13. 426장.
2022년 07월27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하나님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 안에서 믿게 하시고, 약속의 성령으로 우리는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보증을 기다리고 검증 재검증을 거듭하시는 주님의 지극한 보살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구원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데도 성령이 주도하시고, 우리가 믿음을 태동하고 성장시키고, 확신으로 나가는 모든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어느 순간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리로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공부하고 노력하여 구원의 자리로 나가는 것 같아도 영적 생명과 성장은 오직 성령님이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을 부르신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도 불러주셨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인치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께서 같은 모습으로 인 쳐 주시고 새로운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도장은 항상 신뢰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왕이 가지고 있는 옥쇄는 엄청난 위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령이든 광고이든, 요청이든 간에 왕의 도장이 찍히면 무조건 우리가 생명 바쳐 실행해야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 인을 치시면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를 떠나서 흔들림 없이 믿게 되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눈을 여시고, 생명을 열어 구원을 맛보게 하시고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구원을 의심할 때도 있고 비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아니라, 일점일획도 변함없으신 성령님의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영접,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확신, 어쩌면 그 이후까지 성령님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은 후회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완전무결하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 침은 비밀스럽게 봉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때로는 별들을 봉했고, 허물을 봉했고, 때로는 제자들의 가르침을 봉할 때도 있었습니다. 비밀을 지킬 때 쓰고 때로는 순결한 여인을 비유할 때 봉했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사람이 구원받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하여 전혀 예측 못 할 사람이 구원의 길로 나오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손을 봉해서 아무 일도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반지를 인장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그 인을 쓰는 사람에 따라 그 문서와 명령의 가치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를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십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하고 미혹의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악, 모든 허물을 가려주시고,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십니다.
구원의 복음은 오늘도 영혼을 소생시키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합니다. 구원의 복음으로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으로서의 효력을 발휘하려면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어루만져 주셔야 합니다.
바울의 구원과 에베소 성도들의 구원과 오늘 우리의 구원까지 어느 누구도 성령의 인치심이 없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는 중간에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접이 안 된 것이고,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인치심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과 손길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의 길, 사망의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 품에 안기는 행복한 눈물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 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수많은 세력이 달려들어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단호하고 완벽한 인 치심을 믿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지칠 때가 있어도,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보증의 인을 쳐주십니다. 때로는 이마에, 때로는 내 심령 속에 확실한 인을.
19속량으로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십니다. 엡1:14절. 315장.
2022년08월02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침을 받았습니다. 들음도 믿음도 인침도 모두 성령의 주도적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누리기만 하고, 감사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인치심으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기업은 상속권, 세습재산, 또는 소유물, 유업을 의미합니다. 며칠 전, 말씀드린 것처럼 제비뽑기에 이긴 자, 기업 무를 자, 후사를 말합니다. 우리는 채소전에서 나물을 사듯이 어느 것을 고르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을 뽑게 하십니다.
여기 보증은 구매 대금의 일부 또는 잔금의 보증으로 미리 주는 돈이나 물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 공세는 처음부터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더욱 신이 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천국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미리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놀라운 손길입니다.
억만 죄악 가운데 저주받고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불러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한데 우리를 기업의 보증으로 삼아주십니다.
속량은 노예나 포로를 다시 사거나 혹은 속물을 받고 자유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풀어 놓음, 해방을 뜻하며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을 선포하는 것이고, 구속받은 상태에서 속량해 주심의 선포입니다.
보통은 우리가 작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구하는 게 정상입니다. 임금이나 높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낮은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 희생되는 게 일반적인 공식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속량은 정말 너무도 뜻밖의 거래입니다.
모든 가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한 채 어둠과 죄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임금을 희생하여 종을 구하는 아주 이상한 사랑의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도 어떤 조건이나 약속을 받지도 않으신 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우리 죄의 굴레를 벗겨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합법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거래는 주님께서 완전히 깨끗하고 완벽하게 청산하시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을 명시하셨습니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입술을 벌려서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할랄에 대해서 몇 번 말씀드렸는데요. 할랄은 가슴 깊은 데서 솟구치는 뜨거운 찬양을 말합니다. 여기 찬양은 이야기하다. 하루에 몇 번 이야기합니까?
찬양을 시작했는데 물밀듯이 솟구치는 뜨거운 감격 때문에 중지할 수 없는 완전히 하늘 보좌와 연결된 너무 감격적이고 은혜가 풍성하게 쏟아지는 찬양,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너무 엄청난 감격으로 누르는 설명할 수 없는, 주체하기 어려운 생명의 전이를 느끼는 그런 찬양을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한 번도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애들이 가수를 보면 실신할 정도로 감격하는 그런 모습에 그저 미쳤구나. 그렇게 측은하게 바라보았지만 이제 할랄을 배우고 나서는 나도 주님 만났을 때 지금 젊은이들이 마음에 사모하는 가수를 만나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감격처럼 정말로 주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천년을 갚아도, 만년을 갚아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가장 작은 죄마저도 우리 힘과 기술과 능력과 돈과 빽으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흐르는 완벽한 씻음을 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천국의 아름다운 동산을 거닐 것을 생각하니 가슴 벅차고 무슨 찬양을 어떻게 부를까 보다는 그저 주님 품에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부푼 가슴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토록 찬양하라고 해도 온전한 찬양을 올려드리지 못했고, 그토록 감사하라고 해도 우리는 진실한 감사에 젖어 들지 못했지만 이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깊은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에 그저 달려들고 싶습니다.
이 죄인을 어떻게 씻으셨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이 원망과 불평을 토하던 입술이 주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움켜쥐던 욕심에 가득한 손으로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아들로는 양심이 찔려 품꾼의 하나라도 받아주기를 기대하던 탕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상처에 찌들고 아픈 가슴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여! 이 죄인을 속량하심에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겠습니다. 갈함도 없고 다함도 없는 거룩하고 순결한 찬양을 이 새벽에 시작하겠습니다. 천사와 함께 감격적 찬양을 올립니다.
20하나님은 성도에 대한 사랑을 나도 듣게 하십니다. 엡1:15. 314장.
2022년08월09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소문이 널리 퍼지니까 이 사람도 듣고, 저 사람도 듣습니다. 그건 너무 좋은 현상이 틀림없습니다.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구원에 복음을 듣고 예수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을 받고 기업의 보증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량을 받게 되었습니다.
듣고=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서 들음.
속량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보증하기 위하여 미리 주는 돈이나 물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속량은 하나님이 보증이 되셨으니 너무 확실하고 또 너무도 귀하고 완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바울까지 들었습니다. 위의 일들로 말미암아 좋은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에 대한 소문을 에베소에서 들었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에베소서는 옥중 서신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데도 좋은 소문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좋은 소문은 높은 담을 넘어서, 또 엄중한 국경을 넘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이윽고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에까지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은 좋은 곳입니까? 나쁜 곳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가기를 원하시는 곳입니까? 아니면 꿈에라도 가기를 꺼리는 곳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감옥 안에 안 가기를 원하지만, 부득이 감옥에 갔다면 좋은 소식을 듣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나쁜 소식을 듣기 원하십니까? 누구나 좋은 소식에 목말라 있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최소한의 위로와 감사가 덮여지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는 머리를 점검하라고 했지요? 이제 몇 번 들으시니 기억에 못이 박히지요? 예수가 내 머리면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머리이고 예수님이 노예이면 이건 예수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주인이 되시는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 보면서 예수가 주인이십니까? 질문해 보세요. 답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가 주인이라고 하시면 잘 사는 것이고, 만약에 내가 주인이라고 하신다면 시급히 방향을 전환해야 할 순간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언제든지 왕좌는 주님께 내어드려야 내 인생이 바른길을 가게 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앉으실 수 있도록 비워드리고 초청해야 합니다.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들었다고 합니다. 여기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받기를 원하고 실천하기를 원하는 최고 지고지순의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간에게는 없는 요소라고 해서 이것을 신적인 사랑이라고까지 합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바로 아가페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도 아가페입니다.
사랑의 잔치 초대도 아가페입니다. 서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강조하고 장려하는 이들이 아가페입니다.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예배에 이어 가진 공동 식사, 애찬이 아가페입니다. 너무 많이 쓰는 영어의 LOVE가 바로 아가페입니다.
바울이 들은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이 아가페임을 무엇으로 확신했을까요? 여기서는 별다른 이론과 추측이 필요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법칙이 아가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지금 갇혀 있지만, 아데미 신상을 섬기던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아가페 사랑을 나누고 있음을 생각하고, 자기의 소망을 담은 말이라고 보여집니다. 내가(바울이) 가르친 것이 사랑이고, 내가 실제로 모범을 보여 준 것이 아가페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보지 못하고 말로만 들었지만, 그것이 바로 아가페라고 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떤 소문이 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의 언어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좋은 말로 들려줬다면 아름답고 좋은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만약에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의 말을 했다면 그 말 그대로 전달되고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우리에게도 그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메아리는 정직합니다. 내가 외친 그 말을 그대로 울리고 퍼지고 먼 산에 부딪혀 내 귀에 천사와 같이 선하고 아름다운 말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으로 배우고 이해해 왔습니다. 내가 말한 그대로 갚아주시고 이루어주시고, 만들어 주십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들었고 그 말을 배웠고 쓰고 있으니 그 소문이 바울까지 들렸습니다.
21감사를 그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엡1:16. 436장.
2022년08월10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고 에베소 성도들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며, 잊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가 나오게 됩니까? 기도:하나님과(가까이서-정면으로-최상의-쪽에서),
1. 집중 2. 합심 3. 정시기도 proseuchv(4335, 프로슈케) 명사 속격 여성 복수,
기도는 소원하다. 하나님께 기도하다. 하고 싶어 하다. 원하다. 간청하다. 예배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 기도도 마찬가지겠지만 예배 기도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기도 시간보다는 대상이 폭넓어지고, 제목이 객관적이 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제약을 받기도 합니다.
기억은 회상, 마음의 집중, 정신적 이해의 개념으로 마음에서 나오다. 보상하다. 벌주다. 생각하다. 기억하다. 어떤 기대를 가지고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기대 속에 계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 좋은 것만 기억합시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세월이 흘러도 만날 때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늘 반복되는 단골 화제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할 때 무엇이 진정으로 감사하며, 무엇 때문에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감사가 그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에베소는 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 중 첫 번째 교회입니다.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2년3개월 이상을 전도했고, 초기 교회로서 사랑을 실천했던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특별히 서로 사랑함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전도한 곳인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선교 결과를 거둔 곳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누가가 말한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더라”는 행19:20절 이 말씀이 바로 에베소를 지칭한 말로 보면 좋습니다.
에베소는 이교적이고 세속적인 면모가 강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변화하는 능력을 힘입으면 주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스스로는 물론 자신이 처한 모든 공동체를 성령의 능력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신속한 건설에 이바지하는 자들이 되어 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기도할 때 이름을 말했습니다. 저는 대연제일교회 1대 원로 목사님이셨던 이희선 목사님이 성도들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저의 뇌리에 아주 깊이 쌓여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새벽기도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출근할 때 만나거나, 사적인 자리에서 만날 때마다 “권집사를 위해서 오늘 새벽도 기도했다”하시던 말씀이 생생합니다. 말투는 북한 말투셨고, 나이가 많이 차이 나니까, 90%는 반말투셨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가 완전한 기도가 아니듯이 기도가 없는 감사 또한 완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바울처럼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감사할 때마다 기도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함께 해야 합니다. 감사에서 기도, 기도에서 감사는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감사=능동태-은혜를 표현하다. 감사를 말하다. 매우 큰, 함축적인.
우리 권사님들은 기도 담당이 있으시지요! 이건 수년이 지나도 거의 바꾸지 않습니다. 그건 평생을 같이 가야 할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기도 배정을 받으시고 열심히 하시는 분이 대부분이겠지만, 아예 자신의 기도마저 충실하지 못하시는 분들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연결해 두었습니다. 이게 우리 교회의 강점이고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지나온 교회의 권사님들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기북교회를 은퇴하는 날까지 기북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영혼을 살피는 목자이기 때문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거기는 제 목회를 닫는 시간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복이 임하는 순간은 어떤 것일까요? 주의 종이 강단에 엎드렸을 때 하나님! 이런 사람 복 주셔야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려 하십니까? 이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는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데.......이런 느낌이 드는 경우는 참으로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말을 그치지 않음을 배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도 감사가 그치지 않게........
22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니다. 엡1:17. 208장.
2022년08월11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감춰 두셨습니다. 개역 성경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었는데 개정에서는 영으로 바로 번역되어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지혜는 깨끗한 현명한, 꾀 있는, 기술 있는, 지혜 있는, 유식한 경험 있는, 신적인 성질이나 기원을 가지고 있는 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실질적인 기술이나 예리함을 표현하고 오히려 지성이나 정신적인 인식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정서적인 인식을 가리키기도 하고 나쁜 관점에서는 자만을 표하기도 합니다.
지혜는 세상적인 지혜-이 세상에 속한 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지혜, 인격화된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한이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면 지혜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탄을 멸하시며 우리를 속량하시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 이해하지 못했고, 사탄마저도 예수만 죽이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줄 알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계시는 드러냄, 계시, 벗겨냄이란 뜻으로 일반적인 진리의 계시,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주시는 특별한 종류의 계시, 마지막 날에 비밀의 계시로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1. 말씀 계시, 2. 환상 계시, 3. 몽상 계시.
여기 영은 바로 우리가 늘 쓰는 프뉴마로서 숨, 바람, 목숨 기운, 생명 영혼, 의지의 원천,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구별 짓는 참된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있고 악령, 유령이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의 역사와 특별하신 방법으로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이해력을 나타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나타내 보이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알게 하신다는 의미는 이해하다. 인식하다는 의미로서 위에 것을 안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거나 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정확히 알아야 하고,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피상적 생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경험된 지식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얻게 되는 구체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구속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 지혜와 계시의 영은 우리가 평생 기도할 기도 제목으로 아주 깊고 의미 있는 우리 삶을 오직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위에 것을 찾게 되는 놀라운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우리가 단기적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장기적인 내용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땅에서도 효과가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더 깊은 비중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의구심을 갖는 게 있습니다. 흔히들 정치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을 때는 가까이 두고 사용하다가, 타버린 부지깽이가 되었을 때는 버리고 태우는 것이 일반이라면 전번 사건은 최순실이 대통령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아래 사람을 이용해 먹고 버리거나 취하는 게 아니고 아래 사람이 위에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엄청난 요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거나 사용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억대 수표로 아이스크림을 사거나 눈깔사탕을 살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출세하거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쓸 수 없음을 미리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돈을 벌거나 남을 속이거나, 자신의 치부를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전2:9이하 하나님의 깊은 것 통달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지시고 구원하신 은혜를 나도 깨달아 갑시다.
23 하나님은 나의 마음눈을 밝혀 주십니다. 엡1:18. 453, 524장.
2022년08월12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주셨고 그 약속은 바로 오늘 나에게도 유효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게=ejn(1722, 엔) 안에, 위에,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비밀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바로 알고 충분히 알아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바로 나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니다.(완료 수동) 마음의 눈은 내 생명이 위치한 그곳에 내 마음이(여성 단수=세밀하게) 머무는 그곳이며 내부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배속의 마음 판입니다. 내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십니다.
눈은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눈을 가리키며 환상이나 부러워함을 뜻하기도 하고 곁눈질도 바로 눈이 의미하는 뜻입니다. 밝힘은 광선을 발하다. 빛나다. 밝히다. 비추다. 빛을 만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미암아 나의 마음 눈이 밝아지고 빛을 발하고, 하나님을 바로 향하여 나아가며 어둠을 물리치고 마음 중심에 주님이 계시는 자리를 확보하는 차분한 모습을 선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어둡고 깜깜하던 내 마음에, (중심부)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비춰지고, 내 마음의 눈이 오랜 침묵을 깨고 이제 꿈틀거리며 주님을 향하여 바로 나아가고, 찾고 있습니다. 이건 역사의 태동이며 생명의 태동이고, 수많은 새 질서의 창조를 뜻합니다. 눈=남성 복수, 근본적인 뿌리와 줄기를 보고, 함께 보고.
죄에 물든 마음은 어둠을 좋아하고, 밝은 곳을 피하여 살았고, 생명의 환희가 있는 곳을 싫어하고 미워하던 내가, 이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여지고 거룩함을 갈망하면서 생명을 가슴에 채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 직접 채우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통해 얻은 중생과 구원과 영생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고, 주님이 나를 부르신 그 목적에 내 마음을 쏟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부르는 부름과 같지 않았습니다. 바로 나를 살리고 기업의 영광이 풍성함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향해서 눈을 고정시킵니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그곳을 나도 바라보고 주님이 머무시는 그곳에 나의 발길도 마음도 머물면서 주님을 봅니다.
여기 밝히사는 완료 분사 수동형입니다. 이미 내 눈은 한없이 밝아졌습니다. 죄를 향하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충분히 아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살던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게 되고, 세상이 원하는 자리로 달려가던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손짓을 기다리고 평안함을 회복했습니다.
어두워진 마음에 예수님의 빛을 비추어 에베소 성도들이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했는데 이는 어두운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신 창1:3의 창조 사역과 비교하여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에 빛을 비취시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가까이서, 정면으로, 최상의, 편에서) 절대 기억
바울이 기도하고 에베소 성도들이 변화되는 목적지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우상으로 찌들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게 되고, 이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만물이 소생하고 모여지고 흩어지고 모든 질서가 새롭게 형성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기꺼이 말하다.
부르심=여성 단수. 세밀하게, 각각으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차지할 것이 바로 기업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므로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영광을 가슴에 그리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만약 예수를 안 믿었다면 어떤 생활을 할까? 생각해 보세요. 술과 담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세상 가치에 휩싸여 죄악을 즐기고 살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구원의 자리, 빛의 자리, 생명의 자리로 나아간 우리의 삶이 감사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과 또 우리의 전도를 받고 구원과 빛, 생명의 자리로 나아올 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우리가 전할 생명의 말씀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리고 나아올 그 날을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한 가지 스스로 평가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눈이 밝은가? 어두운가? 어떤 사람은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과소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눈=남성 복수
지금 비록 완전하진 못해도 성령님께서 내 마음눈을 점차적으로 밝히는 과정을 부인하진 맙시다. 이제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손짓에 감동하면서 이제는 다른 곳 돌아보지 말고, 주님의 보좌로 바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하고(남성 단수) 우리의 소망은 가슴 벅찹니다. 오늘도 그 자리로 나갑시다.
24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신다.
엡1:19. 453장. 2022년08월23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사도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 성도들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이름은 사도 바울의 기도 때마다 늘 살아 있었고, 단골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충분히 아는 길로 나아갑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마음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늘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제비뽑아 나누게 하셨습니다. 어느 것을 뽑더라도 가장 좋은 것만 준비되어 있고, 내가 받을 상급은 너무 좋고 거룩하고 풍성한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 때 차지하는 기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여기 힘은 강력함, 능력, 권세, 권능, 힘을 가지다. 쓰다. 지키다 로 표현됩니다. 사로잡다. 붙잡다. 손에 쥐다. 제 마음대로 하다. 품다. 가지다. 동반하다. 생각하다. 그 힘의 위력과 권능이 상상외로 엄청나게 크다고 표현됩니다.
여기 역사하심은 효력, 작용, 강함을 뜻합니다. 그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는 믿음을 갖다. 신용하다. 그리스도에게 맡기다. 믿다. 위임하다. 신뢰하다로 표현됩니다.
베푸신 능력이 다시 반복됩니다. 힘과 위력, 역사하심,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힘은 분명한데, 표현이 어려운 경우를 보게 됩니다. 바울의 기도와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오늘 우리의 지식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에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소용돌이를 느끼면서 그 힘을 따라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함께 휩싸여서 굴러갑니다.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이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며, 바울은 본 절에서 동의어를 중첩하여 사용함으로 장엄하고도 강력한 표현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각각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힘-내적이고 본질적인 힘, 강력-정복하는 힘. 역사-신적이며, 초인간적인 힘이나 강력이 실제 역사하는 효과적인 힘, 능력-능력적 견지에서 본 힘
우리는 어느 순간은 너무 완벽한 힘의 조화와 균형을 보게 됩니다. 2중3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둘러싸고 겹겹이 우리를 강력하게 보존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이며, 새로운 도전입니다.
우리는 늘 모자람과 아쉬움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풍성하십니다. 모든 것을 충분히 쓰고도 남음이 있고, 또 여유롭고 시간적으로 무한한 기대와 충분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셨고, 거기 머물면서 더 크고 완전하며 순결하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속성을 속속들이 내보이십니다. 이제 에베소 성도들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은 사도 바울의 목회에 꽃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의 기대만큼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뜻입니까? 못 미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좌절 실망 낙심하지 아니하고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자기가 교육한 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순간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통해서 변화될 에베소 성도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새로운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고, 바로 알고 충분히 알게 하시기를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순간도 교만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바로 보게 됩니다.
우리도 강자라고 꿀릴 필요도 없고, 약자라고 강자처럼 군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을 통해서 사람을 보고, 사건을 해결하며, 하나님의 방법과 구체적 비법을 전수받으면 됩니다.
힘, 위력 역사, 능력, 크심을 반복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울이지만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기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순간의 형편과 처지 때문에 낙심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갑시다.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이고, 우리는 성령님의 손길에서 최고로 영화롭고 행복한 나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크심을 바로 알게 하소서.
25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면? 엡1:20. 341장.
2022.09.20.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하나님의 힘, 위력, 역사, 능력의 지극히 크심. 이상 힘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가 중복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능력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그 힘의 위력을 한마디로 표현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말씀하시고, 다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에베소 성도를 향한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어떤 힘과 권능이 역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가 되시는가를 점검하면 쉽게 구분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힘과 권능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만천하에 증거하셨습니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의 다시 사는 역사는 사람의 지혜로서는 없는 영역입니다.
다시 살리심은 깨우다. 눈을 뜨게 하다. 올리다. 다시 일으켜 세우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다. 서다. 들어 올리다 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다시 살리심은 구체적인 장소에서 일어나는 다시 살리심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살리심은 성부 성자 성령의 권세에 의한 것이었으며 성령의 역사 결과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자 핵심 교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된 신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백성들의 미래 부활의 첫 열매인 동시에 현재의 삶 속에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들의 미래적 소망을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은 것과 같이 그와 함께 살아나 새 생명을 얻게 될 힘을 제공합니다. 기독교에 부활이 빠지면 아무것도 남지 못합니다. 부활의 소망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무서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그저 부활의 단계일 뿐입니다.
부활은 사실상 사람의 원리와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부활 터치를 배우면서 부활 신앙이 어려울 때는 어디로 가라고 했지요? 바로 창조신앙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소망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제자와 동시대 부활을 목격한 모든 성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중대한 원천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머리로 다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상이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 그대로의 사건이었습니다. 못 본 사람과 보고도 못 믿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상 일어난 현실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십니다. 사람의 자리는 모든 지위의 절대적인 보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우편에 자리 잡아 앉히시고, 정착하게 하시고, 계속해서 설치하고 체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단순한 자리의 의미보다 영생과 구원과 영원한 부활의 첫 열매에 따라오는 연속적 사건의 부활을 우리는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급은 결국 천국에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가 상급을 바라고 기다립니다. 믿는 자들은 다만 이 땅에서의 상급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앉을 자리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의 소망이 되게 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꿈에도 상상 못 할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그들은 하늘의 모형에서 천국을 맛보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이 시대에 믿는 사람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미래와 현실은 꿈과 이상 사이에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해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선 허다한 천군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자리를 확보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소망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그 날을 오늘도 기다립시다.
26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십니다. 엡1:21. 080장.
2022년09월21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기업의 풍성함을 알라고 하시면서 힘의 위력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말합니다. 자리는 모든 능력과 일과 권능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그런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을 언급합니다. 통치는 처음-시작, 모퉁이, 근원. 초보, 기본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 원래의 확신, 기원, 시작 태초 원인, 원천을 의미합니다.
권세는 특권, 힘 재능 능력, 자유 혹은 지배, 초능력 영향력 권위 권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중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권능과 권세를 집약해서 한 마디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어떤 것이든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겠느냐? 질문하시며 모든 의문을 마무리하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권을 주장하십니다.
여기 능력이 바로 뒤나미스-영어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능력, 세력-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권능 성령으로 힘을 얻음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역량은 어느 것에도 못 미칠 것이 없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엄청난 힘, 놀라운 행위 풍부하고 부요한 모든 것, 초자연적이나 영물의 힘, 천사의 능력, 힘을 주는 것을 능력으로 표현했습니다.
주권은 최고 통치자의 권한입니다. 주인,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통치자를 신으로 부를 때 그 권한을 가리켜서 주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 주권이 매우매우 긴 시간 지속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끝없는 시간에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앞으로 끝없는 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된 모든 시간이나 세상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성경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흐름을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아예 업적을 하나도 기록 안 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이름 자체를 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뛰어나게 하십니다. 바로 수동태이지요. 내가 뛰어나려고 광고하거나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뛰어나게 만드시고 선포하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빌2:5절 이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까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낮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한없이 낮아진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표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를 높여 주십니다. 자신의 교만을 꺾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높여 주실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억지로 낮아지거나 억지로 낮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게 복음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뛰어나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자 위에 뛰어나심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바로 자녀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그냥 그대로 높음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높이면 주님은 자연히 나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권능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구리가 새끼 밴 암소의 배를 표현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높여 주심은 사람이 높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높임으로 우리가 자연히 그 자리에 따라갑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한없이 주님을 높여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7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엡1:22. 370장.
2022년09월22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우리는 때로는 좁게, 때로는 넓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과 건강, 영성 등 지극히 사소한 것도 있고, 때로는 우주나 만물, 하나님의 나라, 보좌와 교회로 엄청나게 넓은 세상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만물을 언급할 때는 마음이 여유로움을 느끼고, 눈을 들어 주님을 보면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보좌 오른편에 앉히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을 때 온 우주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심을 믿었습니다.
만물은 늘 주님의 보좌에 명령과 뜻을 따랐지만, 인간의 타락 이후 자신도 예상 못 할 방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에덴동산에 가시와 엉겅퀴가 났을 때, 쑥과 쓴 뿌리가 뻗었을 때 탄식했음을 회상해 봅니다.
모든 만물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소가 일하는 모습을 생각하거나 들을 때 자연스럽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일하는 짐승으로 생각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가 논이나 밭을 갈거나 짐을 지고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금 어린이들이 크면 소가 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제가 늘 사용하지만 같은 논이라고 같이 사용되는 게 아님을 잘 압니다. 예를 들면 벼가 쌀이 되어 교회로 바쳐지고, 그것이 목사의 밥그릇에 담겨지더라도 만약에 남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장로님 권사님 가정에서 농사지어지고, 자라는 내내 찬송과 기도 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최종적인 쓰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세밀하게 알지는 못할지라도 결국은 큰 흐름 속에 우주 만물의 질서를 깨닫게 됩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결에도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과 섭리를 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싸늘한 바람이나, 때로는 궂은 날씨마저도 모든 만물을 성장하고 결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모든 만물은 결국은 하나님 거대한 섭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질서를 찾고 창조의 원상태를 간절히 회복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주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만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우주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결국 주님 발아래에서 자신의 모든 소명을 되찾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를 머리로 설명해 드렸지요? 반대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늘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하는 것이 예수가 나의 머리인가?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삼고, 모시고, 따르고 순종하고 섬기며 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모습에서 예수를 머리로 삼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당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지 못하고 사람이 머리가 되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뜻을 따르는 경우는 허다히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 궤도에 올라서야 합니다. 기차가 철길 위에서만 달릴 수 있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분의 명령과 생각과 뜻을 따라 자신의 모든 생각과 진로를 결정하고 결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가 머리인 모습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만 하는 삐뚤어진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설계도는 반드시 예수가 머리여야 합니다. 내가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고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좇아야 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우상에 젖어서 살았던 과거를 이제는 떨쳐버리고 이제는 분명한 모습을 취하면서 만물의 머리가 되신 주님의 발아래에서 완전하게 복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의 입술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눈짓을 보고 계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삼고 살고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충분히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만물을 복종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무한의 자유를 주님을 위해 다시 복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주님의 손짓을 따라 우리가 예수를 교회의 머리로 삼고 삽시다.
28 하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엡1:23. 095장.
2022년10월13일 항도교회 권시혁목사.
태양이 좋지만 거기서 살 수 없고 달이 좋아도 거기서 살지 못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만들고, 좋게 여겨줄 뿐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는 오늘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신상의 본산지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여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성을 변증해야 했습니다. (마17:변화산-내려가야 함)
10절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해야 한다는 말은 통일되어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베푸신 능력을 알기를 원한다는 뜻은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하거나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설명하시는 방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심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조건이 있음을 통해서 모든 것이 수월하거나 완벽하거나, 온전히 갖추지는 못했음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물을 발아래 두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복종하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클레시아가 아니고 호스티스를 썼는데 누구든지, 무엇에든지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입니다.
여기 몸은 신체 육체 그대로 몸, 때로는 시체까지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충만은 지정의로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맞추다. 불어넣다. 만족시키다. 확신시키다. 진실임을 증명하다. 온전하게 하다. 공급하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의하여 충만해집니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속적으로 거하십니다.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으로서 그의 몸인 교회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단순한 통치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연합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충만은 곧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여기에 교회와 성도 각자의 존엄성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서로를 충만케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야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충만해지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긍정의 자리로 올라섭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고 인간의 계획과 참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생명의 충만함을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을 향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이 늘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평생 기도 제목이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눈을 밝혀서 주님을 붙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생명의 구원과 환희를 맛보지만, 그리스도는 어느 인간을 선택하셔도 자연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충성하며 봉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심도 내가 최상이라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차선도 아니고, 그냥 어느 누구를 선택해도 기대할 것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저 죄스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탄핵정국의 마지막 날 새벽을 기억합니다. 제가 언젠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통령이 잘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물러나라고 해도 물러나봤자 또 그런 사람이 들어선다면 물러섬의 의미는 자체적으로 사라집니다. (또 다른 사울)
지금 대통령 물러나라고 외치는 자들이 진정으로 애국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말 한마디도 안 하고 가만있는 비겁자로 매도하지만,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리로 나오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일본 언론은 지금이 월남 패망 시기보다 더 심각하다. 좌익의 조정을 받는다.
그날 새벽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모든 백성도 다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또 다른 사울이 되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밝힐 뿐입니다. 물러가라고 외치는 그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라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정국은 급박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심을 분명히 믿읍시다. 또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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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셔요 목사님~^^ 고맙습니다.
늘 샬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