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부 해방정국(11) – 북한 정치 상황①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43)
소련군의 진주와 정치적 개입
이제 해방 후 1945년 38선 이북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남 지역에 미군 선발대가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것은 9월 2일이고, 본대가 인천항에 상륙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반면 소련군이 한반도를 향해 진격작전을 개시한 것은 그 보다 한 달가량 빨랐던 8월 9일이었다. 진격작전에는 하바롭스크에 설치된 야영에서 조직된 ‘동북항일연군교도려’(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의 조선인 대원들도 참여하였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 북단으로 동시에 진격작전을 폈는데 조선인, 중국인, 소련인으로 이뤄진 국제연합부대인 ‘88여단’도 소련군과 함께 작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8월 10일 오전 소련군 제1극동방면군 소속 제25군 일부가 중국 훈춘을 거쳐 함경북도 경흥을 점령했다. 11일 소련군은 별 저항 없이 웅기항에 상륙했고, 11〜12일에는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 후 나진을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청진 점령에 나서자 일본군은 4천명의 수비대를 배치해 강력히 저항하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16일 청진을 점령했다. 소련군은 17일 나남을 점령하였고 19일에는 어대진, 21일에는 원산에 상륙하였다.(주1) 8월 21일 청진을 점령한 소련군은 함흥에 진주해 사령부를 설치했다. 함흥에 설치되었던 사령부는 그 뒤 평양으로 옮겨졌다. 8월 24일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행정권을 접수했다. 8월 24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낙하되었고, 8월 26일 오후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비행기로 평양에 도착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주2)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한 부대는 둘로 나뉘어 2개연대는 평양으로 향하고 1개 연대는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 진출했다. 25일 해주에 도착한 소련군 병력 일부는 사리원을 거쳐 개성까지 진출했다. 각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사시설을 해체하였다. 소련군 사령부는 8월 27일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 운행을 중지하고 38선에 인접한 금천, 신마, 연천, 평강, 양양 등지에 경비부대를 배치해 남과 북 사이의 인적‧물적 교류를 차단, 통제하였다.(주3) 소련이 한반도 분할점령 계획인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38선에 대한 통제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이북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군사시설을 해체하였으나 직접 행정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련군은 미군과 달리 직접통치 대신 간접통치 방식을 선택하였다. 소련군 각 도별 경무사령부가 설치되어 통제권을 장악한 가운데 각 지역의 인민자치조직들에게 행정권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소련군은 군정통치를 하지 않고 대신 ‘민정기관’을 설치해 조선인 자치조직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다. 소련군 최고사령관은 치스차코프 대장이었고, 민정부사령관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이었다. 초기부터 민정업무를 책임지던 로마넨코는 1945년 12월 3일 민정담당 부사령관에 임명되었고 50여명의 정치장교들을 통솔하며 북한의 행정기관과 정치사업을 지도했다. 1947년 5월에는 제25군 사령부 산하에 민정국이 만들어져 조직이 확대되었고, 제25군 군사회의 위원인 레베데프가 그 책임을 맡았다. 로마넨코와 레베데프를 지휘한 것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주4)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때까지 북한 정치를 배후에서 지휘한 인물이 바로 스티코프였던 것이다.
소련군의 진주. 초기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군은 규율이 문란하고 조선인에 대한 행패가 심해 지탄을 받았다. 9월 이후에야 규율이 강화되면서 범죄율이 줄어들었다.
1945년 8월 25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선발대를 시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이북지역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는 정치 열풍이 몰아쳤다. 서울에서 8월 15일 밤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한 것처럼 이북지역에서도 해방직후부터 인민들이 자치조직을 결성,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8월 16일 전국 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었고 8월 17일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북지역에서 처음 만든 조직이 여운형이 서울에서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동일한 명칭이었던 것은 이들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만식은 해방 전부터 여운형뿐만 아니라 송진우 등 우익민족주의자, 기독교계와 깊은 교류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서울로 가지 않고 평양에서 활동하면서 서북지역의 민족주의와 기독교세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서울에서 인공에 반대해 조직한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인 송진우와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었고 미군정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일제의 평안도 지사가 “행정권을 받으라”고 했으나 서울의 송진우와 전화로 연락해 의논한 끝에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평남 건준을 조직했던 것이다.(주5)
1945년 8월 26일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조만식과 만나 대화하고 있다.
평남 건준은 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오윤선, 총무부장 이주연, 치안부장 최능진, 선전부장 한재덕, 교육부장, 홍기주, 산업부장 홍정모(이종현), 재정부장 박승환, 생활부장 이종현, 지방부장 이윤영, 외교(섭외)부장 정기수 등이었고, 무임소위원으로 김병연, 한근조(법조계), 김익진‧김주교(종교계), 지창규(유림), 박현숙(여성계), 김병서‧김동원(刀圭界), 김광진 등이었다. 공산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이주연, 김광진, 한재덕 뿐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과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공산주의자들은 현준혁, 김용범, 박정애 등이 중심이 되어 8월 17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조직,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세력이 미약하였다.(주6)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이 변화했다. 소련군의 기본 방침은 좌우세력의 균형을 맞추는 상태에서 인민자치조직의 결성을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자치조직이 좌우균형이 맞거나 좌익이 우세한 상황이면 그대로 인정하였으나 우익이 우세한 곳에서는 좌우연합을 통해 좌우 균형을 이루거나 좌익이 우세한 방향으로 재편하였다.(주7) 그 대표적인 경우가 평남지역이었다. 소련군은 조만식의 평남 건준과 현준혁의 평남 지구위원회에 합작을 종용하여 좌우 각각 16명씩으로 구성된 평남정치위원회(11월 24일 평남인민위원회로 개칭)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구성은 위원장 조만식(건준), 부위원장 오윤선(건준)/ 현준혁(공), 내무위원 이주연(공), 사법위원 장시우(공), 교육위원 장종식(공), 인사위원 이윤영(건준), 재정위원 김병연(건준), 치안위원 김익진(건준), 광공위원 김광진(건준), 농림위원 정기수(건준), 운수통신위원 이종현(건준), 보건위원 김병서(건준), 평양시장 한근조(건준), 평양부시장 허의순(건준), 평양치안서장 송창겸(건준), 서평양서장 윤무선(건준), 동평양서장 노기선(건준), 대동군인민정치위원장 홍기주(건준) 등이었다.(주8)
38 이북지역의 경우 평안도 지역은 민족주의‧기독교세력이 강세였고, 함경도 지역은 공산주의자들이 강세였으며, 황해도 지역은 좌우가 혼전을 이루고 있었다. 소련군 진주 후 이같은 정치세력의 우월이 확고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좌우합작 또는 좌익 우세 형태로 자치조직들이 재편되었고, 이러한 재편을 바탕으로 소련군은 행정권을 이들 조직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조직의 명칭도 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회, 자치위원회처럼 다양한 것에서 인민위원회로 통일되어 갔다.(주9) 이런 과정을 통해 9월 말까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8월 27일),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8월 31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9월 1일),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9월 2일, 9월 13 인민위원회로 개칭), 강원도 인민위원회(9월 15일), 함경북도 인민위원회(10월 26일)의 순으로 각 도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주10) 이어 11월 말까지 북한의 모든 시, 군, 면, 리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경기도 북부를 제외한 이북지역 6개도, 9개 시, 70개 군, 28개 읍, 564개 면과 그 아래의 리까지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했던 것이다.(주11)
미소의 분할 점령과 한반도 정치중심의 분열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해방이 곧 분단이 된 우리에게는 역사의 가정이라도 해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다. 만일 해방 후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후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좌익세력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컸고, 도덕적으로도 우월했다는 점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우익 가운데 해외에서 활동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독립운동세력이 없었다. 이승만의 경우 친일혐의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과연 그의 독립운동을 어떤 수준으로 봐 줄 수 있을지 의문되는 점이 없지 않다. 독립운동인지 기독교운동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또한 국내에 있었던 그의 지지세력 또는 지지기반은 부일혐의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민당의 경우 주류인 동아일보계는 거의 대부분 친일파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원세훈, 김병로, 안재홍 등 소수만이 친일에서 벗어나 있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중에도 전향서를 쓰거나 친일단체에 가담해 활동한 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 그룹을 비롯해 마지막까지 감옥에서 해방을 맞거나 지하에서 활동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해방까지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했던 여운형의 건국동맹 또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만주에서 총을 들고 싸웠던 항일 빨치산 세력과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그와 유사한 이념을 가진 이들이었다. 상해임시정부 내에도 김원봉 등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좌파세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외세의 개입 없이 정치투쟁이 벌어졌다면 좌익이 우세한 정치지형이 만들어질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우익의 경우는 임시정부가 대표주자가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한민당 등이 가세했을 것이지만 이승만이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장 강력했던 공산주의 세력의 경우는 재건파, 장안파, 연안파, 빨치산파, 소련파 등 다양한 파벌이 존재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통합력을 발휘하는 가에 따라 정치적 영향력에서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1국1당 원칙을 감안할 때 내부적 분쟁이 있더라도 통합은 이뤄졌을 것이다. 해방 직후에 가장 큰 대중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여운형은 공산당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명망성이나 대중성, 인지도 등을 감안할 때 좌익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부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좌우 분쟁이나 친일파의 준동 등 일정한 혼란과 분쟁이 불가피했을 것이지만, 아마도 세력 관계를 감안할 때 내전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부 분쟁이 있더라도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에 의한 연립정권이 세워졌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순전히 한반도 내부의 정치세력 간의 관계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정치 상황은 불가능하였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부터 강대국의 흥정대상이었던 한반도를 단독으로 점령했던 일제가 패배하는 순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재현되고 말았다. 내부 정치세력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외부의 강력한 영향력이 내부 정치에도 고스란히 작용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38선은 마을을 가로 질러 그어졌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면서 남과 북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조성되었고, 한반도 전체의 정치지형 또한 분할 점령에 의해 근본적으로 제약되었다. 한반도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서울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분할 점령된 상황에서 38선 이북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38선 이남 지역에는 정치적 수도이자 경제적 중심이었던 서울을 포함해 인구의 3분의 2가 살고 있었고 해방 후 가장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던 공산주의자들 다수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순간 한반도 인구의 3분의 1이 살고 있던 이북지역에 대해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한국민 다수는 38선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당시 서울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나뉘어 주둔해 양쪽에 전혀 다른 정치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너무 쉽게 간과했던 것이다. 여전히 서울은 한반도 전체의 중심이었고, 서울이 중앙이었으며, 서울에서 결정되는 상황이 남과 북 모두에 유효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평양이 남다른 의미가 있는 지역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500년 동안 한반도의 중심은 한양(서울)이었고 서북지역이나 동북지역, 삼남지역 모두 한반도의 한 변방, 외곽에 불과했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미소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되면서 이같은 오래된 지리적 문화적 통념과 관습, 정치적 사고를 바꾸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 평양이 한반도에서 서울과 함께 또 다른 정치적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치중심의 분열이기도 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의 귀국
이북의 정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인 항일빨치산 세력의 움직임을 살펴보아야 한다.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7월 하바롭스크 외곽 야영에 근거를 두고 훈련과 만주 등에 대한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일명 ‘88독립보병여단’)는 중공동북당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들로 ‘조선공작단’을 조직하였다. 단장은 김일성, 당서기는 최용건이었으며 김책, 안길, 서철, 박덕산(김일), 최현 등이 당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공작단의 구성은 해방을 앞둔 상황에서 항일빨치산 세력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조선해방과 중국혁명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조선해방, 조선혁명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해방과 함께 최용건은 중공당 중앙에서 파견한 동북국 서기 펑전에게 정세 보고를 위해 만주로 갔고, 김일성은 조선인 대원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귀국하여 건당, 건국, 건준 등의 정치 활동을 총지휘하였다.(주12)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와 대원들. 1945년 7월 동북항일연군 내 조선인들로 조선공작단을 결성, 해방 후 귀국에 대비하였다.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 1진이 귀국을 위해 하바롭스크 북야영에서 출발한 것은 9월 5일 아침이었다. 일부 여성대원들과 노약들은 남아 있다가 11월 말경 함경북도 웅기항을 거쳐 청진으로 귀국하였다. 김일성 일행은 처음 육로를 통해 귀국할 계획이었고, 하바롭스크에서 우수리스크를 거쳐 소만국경을 넘어 무단장(牡丹江)으로 갔다. 그러나 닝안(寧安)으로 가는 철로가 끊겨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된 김일성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소련 우수리스크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9월 16일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9월 18일 소련 태평양함대의 함선을 타고 바닷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9월 19일 김일성 일행은 원산에 상륙하였고,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태성수, 정률 등이 이들을 맞이했다.(주13)
항일 빨치산 대원들. 이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속에서 다진 동지애와 의리를 바탕으로 굳게 단결해 해방 후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일성과 일행은 9월 20일 원산을 떠나 기차 사고가 나서 지체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9월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김일성 장군’의 귀국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고, 김일성은 김영환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다수의 대원들은 지방공작을 위해 각지로 파견되었다.(주14) 빨치산 대원들은 귀국 전 과거 항일시기 자신이 공작하던 지구, 또는 고향지방의 위수사령부 부책임자로 부임해 활동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김일성도 평양의 소련군위수사령부 부사령 직함으로 북한에 돌아왔으며, 김일성과 최용건은 평양, 김책은 함경남도, 박성철은 함격북도 등에 배치되었다. 그 외에도 전창철‧강상호(평양), 리을설(함흥), 김일(신의주), 안길(청진), 김경석‧리재운(진남포), 최용진‧김좌혁(정주), 오진우‧최민철(안주), 서철‧김룡연(원산), 림춘추‧김증동(사리원), 최현(강계), 리영호‧최인덕(개성), 태병렬(철원), 류경수‧리두익(혜산), 전문섭‧조정철(갑산) 등이 각지에 파견되어 활동을 시작했다.(주15)
항일빨치산 대원들은 각 지방에서 소련군 위수부사령관의 직책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소련군의 협조 아래 국내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를 맺고 각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이북지역에는 공산당 세력이 함경도를 제외하고는 미약했고, 그 마저도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일부는 박헌영의 중앙을 따르고 있었으나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당수 공산주의자들은 통일된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항일빨치산세력은 지역에서 토착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맺으며 활동을 했으나 당조직 사업보다는 주로 치안조직인 보안대 등에 관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군 창설을 주도하였다.(주16)
항일빨치산 출신 공작원들은 지방에서 보안대 사업 등을 주도하는 한편, 기층 당조직 사업도 함께 진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제시기 ‘김일성 장군’과 항일빨치산 활동에 대한 선전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는 활동도 진행하였다. 해방 후 젊은 김일성이 짧은 기간에 북한에서 민족 지도자로 부각되고 공산당의 최고 책임자로 선출된 것은 김일성의 항일 활동이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지만 해방 후 항일유격대원들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방공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그 어떤 공산주의 세력보다도 단일화된 집단이었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었다.(주17)
만주 각지에서 흩어져 활동했던 조선인 항일빨치산 세력은 1940년 전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하바롭스크 야영에서 모두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소련 야영 생활 4, 5년여 동안 교육과 학습, 소부대 및 당조직 활동 등을 통해 동지적 유대를 한층 돈독히 하고 사상적‧이론적 무장도 강화할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들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한 내부의 조직 체계를 확립하고 단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형성된 끈끈한 동지애와 의리가 이들을 하나로 형제 이상으로 강한 유대감으로 뭉치게 하였고, 그것은 그 어떤 다른 집단과 차별되는 가장 큰 힘이었다. 항일빨치산세력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야영에서 해방 후에 대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외 세력으로서는 가장 빠르게 귀국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 및 주도권 확보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