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입니다.
원래 수업시간에 처음 만나면 하는
제 프로필도 소개해야 하고
이런 저런 공부방법도 이야기 해야 하죠?
올해부터는 이곳에다가 글을 올려놓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합니다.
김영에 있던 8년간은 대개 수업 첫 시간에 강의실에서 했던 이야기들인데
같은 이야기 반복하는 것도 쉽지는 않고
또 금쪽같은 수업시간이 한 시간이 훌쩍 날아가 버리는 것도 아깝고 해서요,,,
1972년 출생,,,류시원씨, 서태지씨 등이 동갑연예인이며,
특히 류시원과는 1981년도에 반포초등학교 3학년7반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다만, 저의 초등학교 시절 잦은 전학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확인은 불가합니다. ^^
1985년 창경초등학교 졸업 후 북악중학교 진학,,,
1988년 북악중학교 졸업 후 대일외고 진학
3월 첫 월말고사에서 900명중 112등을 했으니,,
동기 900명중 60~70 명이 '천하대'에 지원했슴을 상기한다면
그래도 당시는 꽤 촉망받는 재원이었습니다.
그런데,,,그때까지 였습니다. ^^
5월 중간고사에서 90명중 670등으로 내려않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ROTC 출신의 화학선생님이셨는데
주특기는 전교석차 떨어진만큼 패기셨고,,,
저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58대를 맞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지요,,,
1990년 결국 고3생활을 720등으로 마무리하며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첫해 학력고사에서 전기대를 떨어진 후 '등용문' 이라는 기숙학원에 가서 재수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 재수생활,,,참 즐거운 한해 였습니다.
저는 서울출생이라 그런 환경이 처음이었는데요,,
당시 등용문은 광주읍내에서 하루에 버스가 4번들어오는 깡촌이었고
바로 앞에는 경안천이 흐르고 바로 옆에는 딸기밭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밤 11시에 사감선생님들 주무신 후에 몇몇 뜻이 맞는 친구들과
마을에 가서 소주와 새우깡을 사서 경안천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주말에는 부모님께는 학원에 남아서 공부할건데 방해되니까 오지 말라고
학원에는 집에 다녀 온다고 사기치고 당시 강남역일대에서 잘 나가던
오딧세이, 바시아 등과 같은 '나이트'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재수결과는 전기대 불합격, 후기대 불합격, 명지전문대 합격,,,등록포기!!!
1992년 자연스레 3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3수할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시내 단과반에서 친구하나 사귀지 않고 새벽부터 수업을 들으면서 그날그날 복습하고,,,
성적도 많이 올랐었구요,,,
왜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했냐고요?
고1때 같은 반에서 만났던 여친과 삼수할때까지 만났었는데,,,
여친은 대학교2학년,,,나는 삼수생,,,쉽지 않더라구요,,,
여친 친구들 모임에 나가서 삼수생이라 밝히는 것도 쉽지 않고
점점 여친과 대화의 갭도 발생하고,,,
그런데,,성적이 오른다고 해서 시험에 다 붙는 것은 아니죠,,,
삼수결과는 전기대 불합격, 후기대 불합격,,,인덕전문대 영어과 진학!!!
제가 재벌집 아들은 아니지만 나름 유복한 가정환경이었고,
중학교때부터 과외를 받을 여력은 되었었거든요,,
특히, 삼수할때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부모님께서는 압구정동 과외방까지 보내주시면서 열과 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덕전문대 영어과에 진학했으니,,
저희 부모님의 심정은???
1993년 인덕전문대 영어과에 진학할 당시에는 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었죠,,
당시 대일외고를 나오고 인덕영어과를 진학한 케이스는 저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다시 전문대 특성상 직장생활을 하다가 진학한 형,누나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은 너무너무 만족하면서 학교생활을 하더라구요,,,
처음으로 여지껏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들이 있슴을 깨달았고
정말 열심히 학교생활에 임했습니다.
졸업한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덕 영어과 교수님들께서
저를 기억하시고 제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며
그중 일부 교수님들과는 아직까지도 술자리에서 뵐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열심히 학교에서 생활했는지는 짐작이 될것입니다.
그러다가 11월에 입대를 하게 되었고,,,
남들처럼 열심히 삽질하다가 1996년도에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두가지의 큰 변화가 생긴 해 입니다.
첫번째,,,알바에서의 변화입니다.
93년도에 제가 인덕에 진학할 당시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첫학기 등록금과 3월 한달간의 용돈을 주시면서
앞으로의 등록금과 용돈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르바이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드림랜드 음료수 판매, 인터컨티네탈호텔접시닦이, 태양수출포장에서 수출용원단포장,,,등의 알바를 하다가
운전면허증을 딴 다음에는
낙산가든 주차관리, 택시도급운전, 2.5톤 탑차 운전 등의 알바를 하였습니다.
96년에 복학하면서 회기역 SDA 에 학생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회화 파트너 누나에게 알바구한다고 했더니,,
마침 그 누나가 조그만 보습학원 원장이었고,
제게 자기 학원에 와서 중학생들 영어를 가르쳐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금 보시는 것처럼 직업으로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구요,,,
두번째,,,편입제도의 활성화 입니다.
90년대 중반부터 편입이 활성화 되기를 시작했었는데,,
저는 편입시험 제도를 딱 보는 순간 나를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편입시험을 볼때만 해도
서울시내학교들 대부분이 문과는 영어와 논술, 이과는 영어과 수학을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수학이 절대 안되는 부류이거든요,,
고2때 수학시간에 담임선생님이기도 하셨던 수학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졸고있던 저에게 갑자기 log 를 읽어보라고 하셨고
저는 이것을 10 g 이라고 읽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저야 어차피 이과에 진학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문과편입시험을 치르면 되는 것인데,,,
논술,,,썰 푸는 것은 자신이 있었고
영어,,,
아무리 720등으로 졸업했더라도 그래도 주당 영어를 12시간씩 하던 외고출신인데다
고3때부터 삼수할때까지 그래도 영어는 55점 만점에 50점 이상은 받았었고
인덕에서 다니던 4학기중 그래도 3학기를 장학금을 받고 다녔고
지금이야 토익 900점이 발에 걸리는 시대이지만
아직 국내에서 토익이 활성화 되지 않았던 96년도에 그래도 토익이 902점정도 나왔었고
그래서 장장 7군데 원서를 쓰고 편입학 시험에 임하게 됩니다.
편입학원은 다니지 않고,
학교에서는 대표활동한다고 설레발치고 다니고,
주3일 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 상대로 강의를 하면서,,,,
1997년1월20일 국민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 낙방(23:1)
1월21일 동국대학교 인문학부 3학년 낙방(74:1)
1월22일 연세대학교 인문학부 2학년 낙방(124:1)
1월23일 숭실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 낙방(134:1)
1월24일 세종대학교 인문학부 3학년 낙방(76:1)
1월25일 한국외대 영어과 3학년 낙방(209:1)
1월27일 명지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 낙방(25:1)
놀랍지 않습니까? ^^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이미 학력고사에서 3수를 하는동안
불합격5번, 전문대 합격2번의 기록을 가지고 있던 저로써는
편입학시험에서 7번의 불합격을 맞아하게 되었을때,
정말 내가 잘하는게 뭐지?
난 왜 살지?
와 같은 의문속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공부의 길을 포기하고 취업을 하기도 했었지만
다시 여름학기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여름학기 편입도 있었거든요,,,
취업한 회사에서 4년제 나온 동기들와의 벽을 느끼기도 했고,,,
또 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과 생활하는 동안
이것이 내가 참 잘할수 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고,,,
2002년도에 무슨 일이 있어서 제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사본을 떼어 보았을때,,,
첫 페이지에 표가 하나 나오는데,,,
고1때 학생희망 교사,,부모희망 의사,,,(그때까지는 촉망받았다니까요,,,)
고2때 학생희망 교사,,부모희망 경영인,,,(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문과로 갔거든요,,,)
고3때 학생희만 교사,,,부모희망 없슴,,,,(놀랍죠? 제 공식서류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요,,삼수를 하고 전문대에 진학하면서 저 자신조차 잊어먹었던것인데,,,
제가 교사가 되기를 원했었더라구요,,,원래는 사회는 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답니다.
국사나 사회에서 살짝 바꾸어서 영어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간직하고
여름학기 편입에 도전할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서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지의 보습학원에 고등부 영어강사 자리를 구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와,,2월달에 봄비를 추적추적 맞아가면서 면접을 보러 다니는데
학벌이 있습니까,,경력이 많기를 합니까?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지다가 간신히 노원역에 있는 한 보습학원에서 고등부 영어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상위권학생들을 상대로
당시로써는 출판된지 얼마 안되었던 신경향아카데미토플을 가지고 강의를 하였는데
부모님들의 반응도 좋았고, 또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수업준비하느라 한번보고,
수업하러 가서 똑 같은거 4번 떠들고,
주중테스트 문제 내느라 한번 더 보고,
월말테스트 하느라 한번 더 보고
한 학기동안 신경향아카데미토플을 7번 보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는데
아마 내가 돈내고 토플학원 다녔었도 이렇게 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러다나 97년 여름에 편입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왠일로 6개 학교중 3개를 붙는 기적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붙은 학교중에는 등록은 안했지만 수도권의 학교도 있었습니다.
왜 이 학교를 지원했었는가,,,
특히 전문대를 졸업하셨거나 전문대에 진학중인 친구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의외로 우리사회에는 정규학사학위가 있어야 할수 있는 일이 참 많답니다.
특히, 당시 제가 꿈꾸었던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범대영교과를 가던가, 영문과에서 교직이수를 하던가,
아니면 영문과를 졸업한 다음에 교육대학원을 진학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미 편입시험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던 저로써는 정규영어영문학 학사학위가 너무나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원서를 쓰는 계절이 되면 꼭 '안전빵' 하나는 만들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어쨌건, 나머지 서울안의 두 학교중에서 고민좀 하다가
제가 꿈꾸었던 길로 가기 위해서 단국대로 편입을 결심하였고
단국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2000 년 대학원 시험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편입학 학교생활과 학원강사 생활을 병행하며 즐겁게~~~
1999년 역시,,즐겁게,,,
2000년 연대대학원,고대대학원, 성대대학원,외대대학원 영어교육 석사과정 응시,,,
결론은 모두 낙방,,,
도데체가 학교가는 시험을 제대로 붙어 본적이 없다니까요,,,
그런데 왠일로 성균관대대학원에서 추가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고
당당히 "축가합격자"로써 성균관대학교에서 영어교육 석사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2002년 김영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 학교교사가 꿈이었다면서 왜 학원으로 왔냐고요?
물론, 대학원에 진학할 당시는 교사가 되는 것이 절대적인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꼭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죠,,,
제가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동네 보습학원에서 잘나가던 정도였는데,,,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부터 일의 단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변두리 입시학원에서 월,수,금 저녁에 고2 재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일을 구했었는데
5월달즈음, 그 학원 원장님께서 재종반 수업을 소개해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2000년 겨우 29살의 나이에 재종반 수업을 하게 되었고,
또 나중에는 역시 그 학원 원장님의 소개로 목동, 대치동의 오피스텔에서 그룹과외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2002년도에 대학원을 마칠때가 되니,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학교로 갈것인가,,,학원으로 갈것인가,,,
뭐,,대학원 남자동기들중 학교를 원했던 친구들은 전원 학교 정교사로 취업된 것을 보니
저도 맘만 먹었으면 그렇게 할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사람인지라, 연봉같은 것도 무시할수 없었구요,,,
교사가 되려 했던 이유는 사람이 남는 삶을 살자는 취지였는데
학원에서도 매년 적지 않은 친구들이 제 인생에 남아주고 있는데
꼭 교사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그래서, 2002년도 여름에 그 많은 일을 다 그만두고 한달간 잠수함을 타다가
딱 두군데만 원서를 넣었었습니다.
강남권의 한 고등학교와 김영학원,,,
고등학교는 최종 이사장 면접에서 떨어졌고
김영학원은 같이 하자 해서 김영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10년 김영학원에서 8년간의 강사생활을 마무리하고
제법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제의를 받고 하이탑으로 옮겨 왔습니다.
2011년 하이탑이 메가스터디와 합병하여 메가편입학원으로 새 출발을 하면서
편입학원 강사만 10년째 하고 있습니다. ^^
2012년 학원강사의 길을 뒤로 하고 강화의 삼량친구들과 함께 학교선생님으로 새출발합니다.
제 고교시절 생활기록부 첫 장에 나와있던 어린시절의 꿈을 드디어 찾아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머싯어여
우와 멋있다
아빠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