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때출사, 4대에 걸쳐 내외 문무현관을 지낸
나주김씨 중조, 가정대부 중군 총제 김정준(金廷雋 ?~1433)
공은 신라김씨 원조이신 대보공세조대왕알지(大甫公世祖大王閼智)의 46세손이고 나주김씨 관조이신 경순대왕의 계자황왕자(季子湟王子)의 장자이신 나주군 운발공(羅州君雲發公)의 17세손으로서 조부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과 창주하여 문명을 당대에 드높이고 덕망이 높으신 분으로 월당집을 지으시고 보문각 대제학에 까지 이르셨던 호는 월당이고 시호는 문충이신 김대경(金臺卿)이시고, 부친은 고려 29대 충목왕 3년(134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시고 고려말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신 가구(可久)공과 안동권씨(봉상대부사재부령 승도의 따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시었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로써 포천 신북 틀모시에 세거해온 명문거족인 한성좌윤조곤(趙琨)의 맛따님이며 공과 정부인은 슬하에 양(壤),증(增), 도(堵) 3형제를 두셨는데 장남 양은 청주목과 해주목 판관을 역임하시어 우리 후손들로부터 해판공이라고 불리우는 분이며, 차남 증은 세종 때 육진을 개척한 대호라는 별호까지 붙은 문무와 지용을 겸비한 명신 김종서의 사위이시고, 3남 도는 정난 공신으로 대장군이 되고 금성군에 군봉되신 분이다. 공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때부터 출사하여 정종 태종을 거쳐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문무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신 우리 나주김씨 중조(中祖)이시다.
공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나 공이 태어나 성장하고 출사할 당시는 중원대륙에는 풍운이 일고 원․명이 교체하는 대변혁시기이고 고려는 국운이 다하여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어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이르켜 조선을 개창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공의 부친인 가구(可久)공에 대한 기록은 나주김씨 세보와 고려충렬록등 일부에 기록된 것 이외에 특별한 내용이 아직 발견된 것은 없지만 가구공께서는 여말선초의 왕조가 바뀌는 격동의 시기, 대변혁의 시기에 상당한 고뇌와 갈등을 겪으셨을 것이다. 가구(可久)공께서는 여말에 고위직인 봉익대부 예의판서로 봉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34대 475년을 이어온 왕씨의 고려를 멸하고 이씨의 조선을 건국하는 역성혁명을 주도한 무인일파와 신진사류등과는 성향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고려조정에 대한 충성과 의리, 성리학적인 불사이군의 이념과 전통적인 명분과 대의 때문에 적지 않은 고뇌를 겪으시고 일부무인세력과 신진사류가 주도한 역성혁명에 합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총제공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기사된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총제공 김정준(金廷雋)은 조선조 개국당시인 태조 때부터 출사하신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총제공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태조때 2건, 태종때17건 세종때 5건등 총 24건이 등장하는데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399년(태조7년 음9.1)이다. 공과 관련된 실록의 최초 기사는 임금(태조)이 환후가 깊어 수정포도를 먹고 싶어 하여 환관 조순(曹恂)을 통하여 세자(정종)와 여러 왕자에게 교지를 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영자(影子)를 그려서 사모하게 되는데 내가 비록 쇠약하나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너희들은 다행한 편이다. 지금 병이 오래 낫지 아니하여 수정포도를 먹고자 한다.”
세자와 왕자들이 모두 소리 높여 울면서 즉시 상림원사(上林園史) 한간에게 명하여 유후사(留後司)와 기내좌도(畿內左道)에 널리 구하였는데 경력(經歷종4품) 김정준(金廷雋)이 산포도가 서리를 맞아 반쯤 익은 것을 한상자 가지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기록과 김정준을 승진시켜 전농판사(典農判事, 정3품)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1집 136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후 공께서는 태종2년(1402)회양부사를 역임하시었고, 태종4년(1404)에 상호군(2군5위의 최고 지휘관), 태종6년(1406)에 광주목사(廣州牧使), 태종11년에 제주목사, 태종12년(1412) 제주도 안무사, 태종13년(1413)호조참의와경차관, 태종14년(1414) 전라도 관찰사, 태종15년(1415)해주목사, 태종18(1418) 함길도도관찰사, 세종1년(1418)함길도 병마도절제사겸길주목사 세종4년(1421)전주부윤을 임명받아 역임하시는 등 조선을 개국한 태조때부터 정종, 태종을 거쳐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시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면려정진하신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외에 나주김씨 세보에 수록된 내용과 묘지 비갈등에 기각된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의 벼슬은 가정대부 중군총제이며 1433년 영면하신후 공의 평생의 공적을 기려 예장을 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장은 종친, 공신, 종1품이상의 관원이 서거하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던 것으로 태종5년(1405)에 제정된 예장중시법에는 “종1품이상의 관원을 예장 증시한다. 정2품은 증시치부한다. 종2품은 치부만 한다. 공덕이 있으면서도 벼슬이 이에 해당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때는 사헌부에서 품신하여 의정부의 의논을 거쳐 왕명을 받아서 시행한다.”고 밝히고 있어 공께서는 상당한 대우를 받으신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총제공께서는 조선초기, 태조 때부터 시작하여 세종조에 이르기 까지 조정의 현관으로서 또는 지방의 목민관으로서 이에 상당한 벼슬이나 공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고 조정에서 예장을 사하면서 총제공께서 묻히신 포천 기을산 산소 인근 일대의 산지는 물론이고 전지등이 조정에서 산소를 관리수호하라고 하사한 사패지 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의 산소는 세보에 포천 기을산 서향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으나 일시실전되었다가 1925년 대동합보 편찬을 기하여 기환(33세,무안), 영구(34세,홍성), 승구(34세,공주)등 3인의 문중 어른들께서 묘도를 갖고 현지 일대를 정밀 답사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찾게 된 것은 우리나주김문의 크나큰 홍복이라 하겠다. 공의 유택이 모셔져 있는 모역에는 공의 산소 50여보 아래 공의 배위이신 정부인 평양조씨, 약간 떨어져 이어서 장자부(長子婦)인 해판공의 배위 숙부인 전주이씨 산소가 모셔져 있다.
공의 산소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기을산(천주산)을 진산으로 하여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쓰여져 입지와 좌향이 주변에 있는 어떤 묘소보다도 훌륭한 풍수지리 조건을 갖춘 산소이다. 연전에 우리나주김씨의 시조 나주군 운발공의 산소가 개성근교 오룡산록에 모셔져 있는 관계로 시조에 대한 성묘와 향화를 받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 때문에 시조의 제향단을 총제공과 정부인 산소 묘역에 설단하고저 잠정(暫定)하고 이의 타당성을 최종 점검하기 위하여 2006.3.18 비인(鄙人)이 민속사학자인 이해준 박사(공주대교수,전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와 풍수지리에 높은 식견이 있는 김대희 종친(38세,공주), 공의 배위 정부인 매씨 자손인 양영찬 포천농협조합장(청주양씨종친회감사), 중앙종친회 부회장 김인형(36세), 김성숙 부회장(37세)을 동반하고 묘역을 심방 답사하였는바 “총제공의 산소는 기을산 일대는 물론 주변지역에 있는 어떤성씨나 문중의 묘소보다도 훌륭한 명당으로서 조건을 갖추고 있고, 조정에서 장례를 지내준 예장묘인데 만일 이곳에 시조의 제향단을 설단한다면 500여년 보존되어 왔던 전통이 있는 묘역의 원형이 훼손 될 뿐 아니라 우리나주김씨의 관향조께서 17대후손의 만년유택을 차지하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질 수 있다”라고 의견이 뫃아져 부득이 나주군의 제향단 설단은 시간이 걸리지만 다른 방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시조님의 제향단 설단도 중요하고 시급하지만 총제공의 산소는 현존하는 우리김문의 산소중에서 가장 오래된 산소이고 예장묘로서 우리 문중의 문화유산이고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묘소 이다. 따라서 우리후손 모두는 총제공 산소를 영구히 잘 가꾸고 보존하고 향화가 끊이지 않도록 특단의 배려를 하여야 할 것이다.
공의 휘(諱)는 조선왕조실록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나주김씨족보인 병오보(1786)와 그이후 발간된 임진보(1832), 정해보(1887), 을묘보(1915)까지는 廷雋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병인보(1926년)이후부터는 廷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한때 실전되었던 공의 산소를 1925년다시 찾았을 당시 퇴와(頹臥)되어 이토(泥土)에 매착(埋着)되었던 석비를 파서 보니 전면에 가정대부 중군 총제 금성 김정준 묘(嘉靖大夫中軍摠制錦城金廷儁墓)라 하고, 음기(陰記) 선덕8년(1433) 계축 6월 초3일 이라 되어 있고 제2행에 장자 계공랑 장훈고 직장 양(壤), 제3행에 차유자 웅산(雄山) 이라고 기각(記刻)되어 있는 것을 본 이후부터 공의 휘(諱)를 廷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 묘비문 전면에 금성김정준(錦城金廷儁)의 금성(錦城)은 나주의 고호(古號)이며 나주김씨를 일운 금성김씨로라고 한예가 보책에 산견되고 있다. 보책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나주군 11세 이신 득장(得章)을 “난공신으로 금성 안노현주를 봉하다”라고 하였고, 18세 도(堵)선조는 “정난공신으로 대장군을 봉하고 금성군을 봉하다”라고 기록이 있다. 후손 중에 일부는 족보에는 나주김씨로 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금성김씨로 등재되어 있어 정정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오고 있다.
그러나 40여년간 내외관직을 역임 하시고 절충장군 행위호위 호군을 하시다가 80세에 서거하신후 증직으로 병조참판에 제수된 공의 효증손(孝曾孫) 봉서(鳳瑞, 19세 참의공 경근의 외아들 1454-1533)의 묘비문을 조선초중기의 유명한 학자이며 경세가이고 영의정을 지내신 사재 김정국(思齋金正國)공께서 1533년에 봉서공이 서거하신 후 찬한 내용이 기각(記刻) 된 비석이 벽제 선영에 원형 보존되어 있는 바 그 묘비문에 공의 휘는 봉서(鳳瑞)이고 자는 저성(著聖)이며 나주인으로 증조(曾祖)의 휘는 廷雋이고 관은 도총부 부총제로 되어 있다. (公諱鳳瑞字著聖羅州人曾祖諱廷雋都摠府副摠制)
조선시대 경국대전에 의하여 3품관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하도록한 제례규정으로 보아 명망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제례를 직접 집례했고, 증손으로 총제공께서 관직이 바뀔때 마다 받으신 수많은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당시에는 후손들이 과거를 응시할 때는 물론이고, 특히 음서로 출사할 경우 조상들의 사조단자(四祖單子, 친가 처가쪽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과 외조부의 성명, 생년월일, 벼슬 등을 적던 단자)가 출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문벌사회이고 신분사회에서 비문을 지어 기각(記刻) 할 때 증조부의 휘를 잘못 기재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다고 보여지고,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최고(最古)의 나주김씨 족보, 그리고 참판공 봉서 선조의 행장을 비롯한 선조님들의 행장을 지을시 집안에 전승되어 온 가승, 문적 등을 적극 참고 하여 찬하였을 것으로 보아 공의 휘는 廷雋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공께서 영면하신지 500여년 지나 세월은 아득하나 공은 조선조에 들어 처음으로 출사하신 우리나주 김문의 중시조로서 우리나주 김문 종인의 80-90%가 총제공의 후손으로서 전국에 산거하고 있어 길이 기억하고 기려야 할 훌륭한 선조 이시다.
공의 혈손들은 조선 500년 동안에 문무현관이 수없이 배출되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근현대사에서도 정계 관계, 법조계, 교육계, 실업계, 등 각 분야에서 많은 후손들이 활약하고 있다.
2008.1.16
(총제공19세손 只常 謹鶴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