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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의 교육적 가치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서정시와 ‘두 장의 거울’
서정시는 동서와 고금을 통해 사람들의 심신 수양과 인격적 교양을 위한 방편은 물론, 삶의 구체성과 미세한 정서를 표상하고 전달하는 양식으로 널리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서정시는 인간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개별화된 인식과 정서를 가장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전달하여 수용자들로 하여금 보다 더 풍요롭고 심미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서정시를 ‘소통 구조의 하나’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경우, 그것은 “시인․작품․독자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하나의 담론(談論)을 구성하는 것”인데, 그러한 시각에서 서정시라는 양식적 특성을 검토하면 더더욱 발화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이 중요해진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교육(敎育)’이라는 쌍방향 행위를 염두에 둘 경우, 이러한 담론 구조와 교육 방식은 매우 강렬한 상동성(相同性)을 띠게 된다. 곧 ‘교육자/피교육자’의 관계가 ‘발화/수용’의 양식과 근본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시 교육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소박한 대로, 발화자의 자기표현 욕망보다는 수용자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이른바 실용 이론적(M. H. Abrams) 측면을 강조할 필요와 마주치게 된다. 문학의 기능적 구실을 강조하는 이러한 안목이야말로 문학교육의 정서적 차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시의 전통적 자산 중 수용자들이 자신의 삶에 받아들여 자신의 깊이와 품을 심화하고 확대해갈 수 있는 지층을 탐색하여, 그것의 의미를 교육 현장에서 확산해갈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점에서 서정시는 발화자와 수용자의 정서적 소통이 가장 직접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양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좋은 서정시는 비유컨대 ‘두 장의 거울’을 만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모든 시 창작의 욕망에 원초적으로 나르시시즘(자기 확인/자기도취)의 충동이 깔려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비춘 거울을 보고 스스로 감격하는 것이겠지만, 좋은 서정시는 그 반대편에 또 한 장의 거울을 준비하여 ‘두 장의 거울’로 자신의 뒷모습까지 응시할 줄 안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두 장의 거울’을 준비해야만 하지 않는가? 생전 처음 보는 자신의 왜소하고 찌그러진 뒤통수와 잘 빗지 못한 뒷머리가 애처롭게 보일 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뒷모습을 정직한 투명성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기 성찰의 품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뒷모습을 은폐하거나 모른 체하거나 극소화하지 않고 그것을 언어 표면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온몸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 바로 자기도 모르게 내부에 확산되어가는 속물 의식에 대한 자계(自戒)의 힘을 띠게끔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정시의 중핵적 성질이 시 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발화자의 생애나 당대 현실보다는 작품 자체가 끼치는 본질적 작용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작품 역시 역사적으로 구축된 형성물이자 시인의 관념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정서적 차원의 소통 곧 발화자와 수용자의 정서적 교호는 여전히 중요한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우리의 현대 시사를 통틀어 이러한 ‘두 장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기 성찰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보여준 시인으로 우리는 윤동주(尹東柱, 1917∼1945)를 떠올릴 수 있게 되고, 그를 매개로 하여 서정시의 교육적 가치를 수용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저항 텍스트를 넘어서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 8․15 해방은 도적과도 같이 찾아왔다. 을유(乙酉) 해방은 그렇게 홀연히, 오랜 식민지 시대를 경험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충만하게 부여하면서 다가왔다. 비록 분단과 전쟁이 곧바로 이어지면서 우리 역사가 또 다른 미궁으로 빠져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방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의 정점을 한껏 경험케 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날을 일러 지금도 ‘광복(光復)’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신생’에 대한 흔치 않은 감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둠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의 회복’, 이는 해방을 맞은 이들의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이자, 앞으로의 역사가 밝게 전개되기를 희망했던 이들이 명명한 낭만적 수사였을 것이다. 아무튼 광복은 우리에게 식민 체제 종언의 감격과 새로운 변혁 의지를 충만하게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은 연합국의 힘에 의해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때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는 새로운 ‘국민국가(nation state)’의 건설로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하지만 아직 내적 역량이 정비되지 못한 데다 곧바로 외세가 개입하면서 우리는 내부로부터 엄청난 갈등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정치 과잉의 시대가 전개되었고, 정파적 차이에 따른 격돌과 상충이 펼쳐졌으며, 궁극에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폭력이 뒤미처 따라왔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기에 가장 근원적으로 경험한 것은, 아무래도 전면적인 모어의 회복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모어를 철저하게 박탈당하고 살아온 이들에게 이것의 탈환과 회복은 새로운 정체성 탐색과 정립에 결정적 에너지를 선사하게 된다. 시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때도, 이 시기에는 식민지 시대에 타계했던 이육사, 윤동주, 심훈 같은 이들의 유고 시집이 잇달아 간행됨으로써 모어의 탈환과 회복이라는 차원을 매우 구체화하였다. 陸史詩集(1946),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948), 그날이 오면(1949) 등의 잇따른 간행은, 이 시인들로 하여금 후배 시인들에게 일종의 전범 역할을 하게끔 했고, 그들의 작품으로 하여금 한국 시의 한 표본으로 자리 잡게끔 해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에게 기억되어온 브랜드 가치는, 우리가 잘 알듯이, 저항(抵抗)시인의 몫을 근간으로 하는 경우였다. 이들의 중요 시편들은 저항의 정신사를 너무도 분명하게 수놓게 되었고,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국민국가적 상상력 안에서 폭 넓은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 심지어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까지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는 관행이 있었을 정도로, 우리 문학교육은 이들의 예술가로서의 위상이 아니라 역사에 헌신하는 일종의 정신적 표상에 의해서 구축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행해졌던 친일 행위에 대한 반성보다는, 역사의 암흑기를 빛낸 이 예외적 별들로 인한 일종의 윤리적 연속성을 확인하는 효과를 거둔다. 당연히 이 저항시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적 열정을 통합하고 확충하는 실물적 매개로 활용된다. 말하자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반성과 청산보다는 몇몇 예외적 개인들에 의해 우리의 정치적, 언어적, 윤리적 우월성의 근거를 마련하고 곧바로 그러한 속성을 이어받자는 문학적 기억의 캠페인이 제도적 틀을 통해 유통되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둘도 없는 ‘암흑기(暗黑期)’를 이들의 언어를 통해 견디고 치유하고 극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을 대표화함으로써 우리는 광복을 희구하며 싸워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광범위하게 일어난 친일을 들추느니보다는 이들의 정신을 기림으로써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빛’을 기억하자는 ‘망각-기억의 기획’이 교육적 실천 곳곳에 철저하게 반영되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윤동주의 경우가 가장 징후적인데, 가령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시세계의 본령에 대한 귀납보다는, 우리 역사의 윤리적 차원을 선명하게 증명해가는 방향에서 취해졌다. 그 결과 윤동주는 우리 근대사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의 표상으로 창안되고 유통된 것이다.
사실 ‘저항’이란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존엄성을 훼손하는 유형, 무형의 폭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값을 주장하는 일련의 사유와 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 안에는 어떤 힘에 대한 반작용 곧 역동성(逆動性)이 그 핵심 속성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형성된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힘으로서 정당방위적 일면을 필수적으로 띤다. 반면 협의로 규정할 때, 그것은 레지스탕스의 예에서처럼 정치적 투쟁과 해방을 목표로 삼는 실천적 움직임을 말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광의의 저항을 아름답게 보여준 윤동주는, 가장 실천적인 협의의 저항으로 유폐되어 재생산된다. 그 재생산의 결과가 집단적 기억으로 착근되고 소통되어온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윤동주를 그렇게 기억함으로써 그와는 전혀 다른 욕망의 체계로 움직였던 행태들에 대한 망각을 동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 윤동주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3. ‘부끄럼’과 ‘자기 성찰’의 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정음사, 1948)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이다. 그가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상 불온, 독립 운동’의 죄목으로 싸늘하게 옥사(獄死)한 후 친지들이 만들어서 헌정한 이 시집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애송된 시집일 뿐만 아니라 문학사적으로도 일제 말기의 어두움을 밝혀준 한 줄기 빛으로 은유, 기억되고 있는 작품집이다. 이 시집에 실린 윤동주의 가작(佳作)들 이를테면 「自畵像」, 「十字架」, 「또 다른 故鄕」,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詩」, 「懺悔錄」, 「肝」 등은 지금도 한국 현대 시사에서 서정과 인식 그리고 언어적 세련이 결합된 수준작으로 손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앤솔러지에도 빠짐없이 등재됨으로써 많은 이들의 기억과 체험의 소중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최근 일본에서는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라는 단행본이 나올 정도로 지성계를 중심으로 윤동주에 대한 추모 열기가 자못 뜨겁다. 끝없는 망언을 되풀이하는 일본 정치인들에 비해 문학인들의 가슴이 먼저 윤동주라는 희생양을 매개로 열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금 저널리즘적인 시각을 덧붙인다면,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詩碑)가 세워진 이래 그를 추모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과 국화꽃이 끊일 날이 없었다거나, 1970∼80년대의 웬만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그의 시편이 드물지 않게 낭송되었다거나 하는 일도 이러한 윤동주의 대중적 인지도와 애정을 잘 말해준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청소년들의 우상 자리를 독점하고 있지만, 그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외경과 관심을 동시에 받았던 이들이 바로 시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윤동주에게 쏟아진 그것은 매우 크고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윤동주의 시는 우리의 ‘근대(近代)’가 펼쳐지면서 비례적으로 커져간 속악성과 내면의 황폐함을 견디게 해준 치유와 위안의 시편들이었고, 나아가 그 안에 근대적 인간이 잃어버린 순결한 ‘그 무엇’을 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윤동주의 ‘그 무엇’이,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우리 인간이 상실한 어떤 원형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취할 것이 물론 많겠지만, ‘그 무엇’의 핵심에는 바로 시편 구석구석에서 고독하게 빛나고 있는 그의 ‘부끄럼’과 ‘자기 성찰’의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고 본다. 먼저 이 시집의 서시인 그의 대표작을 읽어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마도 우리가 서정시를 자기표현의 발화 양식으로 인정하는 한, 이 작품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하나의 정상 시편으로 그 위치를 굳건히 지켜갈 것이다. 어조(語調)와 시적 구성에서 이렇듯 치열하고도 단아하게 짜여진 자기 고백을 우리가 달리 들을 길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꽉 짜여진 자기 고백적 양식을 띠고 있는 이 시편은 윤동주의 시정신과 내적 치열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 ‘시 정신’이란 다름 아닌 신실한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적, 실존적 감각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데, 이 시편 역시 그런 면에서 어김없이 그의 실존 감각과 윤리적 의지가 결합하여 표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전체가 자연 현상의 이미지와 시인의 정서 또는 관념이 각각 대등하게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시제(時制)를 중심으로 볼 때, 과거(괴로와했다), 미래(걸어가야겠다), 현재(스치운다)의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편에 나타난 이러한 구조적 완결성과 시인의 도덕적 성실성 그리고 사물과 인간과 우주까지 넘나드는 시적 상상력의 활달함은 이미 여러 논자들에 의해 논증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도덕적 자아와 시적 자아의 통합, 그리고 창조적 상상력과 실존적 감각의 결합은 이 시편 외에도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한결같은 빛을 발한다.
이 작품에서 그가 노래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는 것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은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겠다는 윤리적 의지나 자존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성찰적 행위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양심의 가치는, 윤리적 완성을 이룬 자가 보이는 넉넉한 품과는 전혀 다른, 다시 말해서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순, 한계, 실존적 운명 같은 것을 “죽는 날까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모습을 가장 정직한 고백으로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운명애(運命愛)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는 삶의 불가항력적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간단없이 솟아나는 생의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그 시적 자아를 사이에 두고 “하늘과 바람과 별”은 둘째 연에서 서로 화창(和唱)하며 서로 갈등하면서 흔들리는 이 세계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집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것도 우연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인의 이러한 우주적 상상력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결국 이 작품에 나타난 그의 시정신은 자기 성찰과 운명애 그리고 세계와 마주서 있는 자신에 대한 실존적 의식 등으로 읽어낼 수 있다. ‘자기 연민’과 ‘자기 긍정(운명애)’이라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의식은 비극적 존재로서의 실존에 대한 승인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중적 태도를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自畵像」의 구조 곧 ‘자기 확인-자기혐오-자기 연민-궁극적 자기 긍정’이라는 회로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더욱 응축된 자연 형상으로 나타낸 절편(絶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시편들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빛과 그림자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부끄럼’과 ‘자기 성찰’의 힘과 아름다움이라고 말했거니와, 이제 그것이 어떤 각별한 의미를 주는가를 이야기해보자.
윤동주는 우리에게 ‘쪽팔림’과 ‘부끄럼’의 차이를 온몸과 언어로 각인시켜준 시인이다. 여기서 ‘쪽팔림’이란, 자신의 윤리적 결함이나 치부가 타인의 시선에 적발되었을 때 초래되는 수세적인 수치심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결함이나 치부가 어떻게 인식될까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의식에서 생겨나는 정서적 결과를 함의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내적 성찰보다는 외적 규율이나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게 된다. 그러니 쪽팔림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외적 수치심은 있을지언정, 내적 ‘부끄럼’은 더없이 빈곤하게 된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의 ‘부끄럼’은, 타인의 시선보다는 스스로의 눈높이에 다다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포함하는 정서요, 스스로 설정해놓은 삶의 기율이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자발적인 반성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남이 어떻게 여길까 하는 것은 부차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쪽팔림’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철저히 계산된 정서라면, ‘부끄럼’은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는 반성적 정서인 것이다.
윤동주는 이 치열하고도 충실한 그리고 정직한 자기 응시와 자기 입법으로서의 ‘부끄럼’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준 시인이다. 이러한 윤동주만의 속성은 우리 시사에서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으로 완료되었다. 소월이나 지용이나 이상이나 백석이나 미당에게는 계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윤동주에게만은 ‘계보’라는 것이 없는 까닭도 그의 시적 지향이 모방 불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확인이나 자기 성찰이 얼마나 성실한 내적 변증을 이루면서 한 사람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가, 그리고 그러한 개입이 삶을 얼마나 순결하게 만드는가를 우리에게 거의 배타적 유일성으로 보여준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만이 남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는 것, 당연히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정서도 ‘쪽팔림’이 아니라 ‘부끄럼’이라는 것을 그와 그의 시는 이처럼 잘 보여준 것이다. 그의 ‘부끄럼’을 소녀 취향의 유약한 정서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거니와, 그것은 섬약한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부정-자기 긍정’이라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소산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럼’은 “無花果 잎사귀로”(「또 太初의 아침」) 가리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적 ‘부끄럼’으로, 또는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길」) 생겨나는 생래적인 ‘부끄럼’으로, 또는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씌어진 詩」)에서 나타나는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탐구로, 또는 “그때 그 젊은 나이에/웨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든가”(「懺悔錄」) 하는 인생론적 되새김질로 변형되어 간단없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끄러워’하는 자아가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서시에 나타나는 ‘두 장의 거울’에 비친 자아의 뒷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 ‘부끄럼’과 ‘괴로움’이 그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러움’으로 거듭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별 헤는 밤」 중에서
윤동주에게 ‘부끄럼/괴로움/자랑스러움’은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정서의 안팎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그가 노래하는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는 대목이,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상태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의 발상 구조는 ‘흙으로 덮어버림-봄의 도래-풀(잔디)의 재생’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자연의 순환과 섭리에 그대로 대응되는 은유적 상관물이 바로 “(부끄러운) 내 이름자”이다. 윤동주는 이 시편에서 흙 속에 피어나는 잔디를 통해 재생과 부활을 꿈꾼다. 그 재생과 부활은, 물을 것도 없이, 수난과 영광이라는 기독교적 보상 심리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체적, 민족적 갱생이라는 두 층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현실적 시련을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이며 견디겠다는 자세를 무덤 위에 돋아나는 봄풀의 이미지, 서러움과 생명력을 동반한 소망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내 이름자를 써서 흙으로 덮어버린 위에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는 의미는 부끄럼 그 자체를 순결한 자신에 대한 긍지로 삼고 있는 시인의 의식의 한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자랑처럼 무성한 풀’ 이미지는 기독교적 부활의식과 동양적 윤회사상을 하나로 결합시켜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법(讀法)의 결과를 토대로 우리는, 때늦은 ‘후회’만 있고 ‘반성’은 없는 우리 시대에, 윤동주의 시가 우리의 반성 불감증을 치유하는 역설적 항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자기완성을 향한 간단없는 반성적 인식이야말로 윤동주의 시가 자기 회귀성이 강한 전형적인 서정 양식으로, 모어의 아름다움을 높은 수준에서 재현한 민족문학의 보고(寶庫)로, 그리고 어두운 민족사를 외적 싸움이 아닌 내면의 싸움으로 대응했던 첨예하고도 이색적인 ‘저항시’의 하나로 기억되게끔 작용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내면을 일상에서 되찾으면서도 그를 문학적으로 감싸안고 또 그를 문학사적으로 넘어서는 몇 겹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지점이 윤동주 스스로 건너간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또 다른 故鄕」)이자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새로운 길」) 나아가야 할 우리의 ‘새로운 길’이기도 할 것이다.
4. ‘자기 성찰’의 확산과 변용
이제 윤동주 시의 실존적 감각인 ‘부끄럼’과 윤리적 양식인 ‘자기 성찰’의 시적 에너지가 구체적으로 확산되는 두 가지 양상을 더 검토해보자. 물론 그것이 아무리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하더라도 궁극에서는 이러한 ‘두 장의 거울’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원래 서정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예술로서 발화를 전제로 한다. 이때 시적 화자는 시작품 속에 존재하여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 속에 있는 화자는 사물에 대한 태도와 목소리를 가지는데, 이때 사물에 대한 태도는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시의 화자가 시의 내용에 대해 가지는 견해나 청자에 대한 자세, 화자 그 자신에 대한 인식이 곧 화자의 ‘태도’인데, 윤동주의 경우 이러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시인의 표정이나 목소리와 그대로 겹칠 정도로 실물감이 높다. 곧 자연인으로서의 시인과 거의 유사한 화자가 시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해 시의 표면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는 실제 자연인인 ‘시인’과 전혀 같지 않다. 김소월 시의 여성 화자라든가 정지용 초기시에 나타나는 유년 화자 등이 그 시인과 같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의 시에는 시가 구현하려고 하는 주제 또는 내용에 따라 그에 걸맞은 일종의 ‘퍼스나(persona)’가 방법적으로 설정된 것뿐이다. 그런데 윤동주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시인 자체가 직접 화자가 되어버리는 속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윤동주 시의 특성은 강한 ‘자기 고백성’에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시를 하나의 발표 양식으로 생각하거나 전문적 독자를 의식하고 창작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제일의적(第一義的) 독자가 되어 시를 썼기 때문에 나타난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편들은 그러한 ‘고백’과 ‘자기 성찰[自省]’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의 이러한 ‘자기 성찰’의 힘은, 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원죄 의식, 낙원 상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럼, 고통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함(「또 太初의 아침」)에 대한 지속적인 윤리적 준거로 작용하게 된다. 그 윤리적 준거가 윤동주에게 ‘자기희생’의 이미지라는 ‘자기 성찰’의 변용된 에너지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의 자기 성찰이 일정 부분 신앙과 종교적 상상력에 빚지고 있는 것도 그러한 측면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十字架」 전문
이 작품에 나타난 ‘십자가’ 이미지는 기독교의 상징적 의미를 넉넉히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윤동주 시의 저항 의식은 ‘부끄럼’과 ‘괴로움’을 주조로 하는 소극적, 자책적 저항 의식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자책감이 가장 높은 정신적 경지로 승화했을 때, 그것은 이 작품에서와 같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으로 나타나게 된다. ‘십자가’는 그러한 기독교의 수난 의식과 속죄양 의식의 익숙한 상징이다. 1, 2연에서 ‘십자가’는 구원에 다다르는 길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첨탑’의 날카롭고 높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좀처럼 다다르기 힘든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구원의 희망을 잃고 단지 서성거릴 뿐이다. 그러나 4연에서 화자는 ‘십자가’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인류의 괴로움을 지고 괴로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기꺼이 그리스도와 같은 속죄양이 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속에 담긴 신(神)의 의지와 그에 대한 순응 의식은 바로 그러한 ‘자기희생’의 불가피성과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시적 화자의 결의를 담고 있다. 5연은 그 수난과 희생의 장면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작품에서 윤동주의 ‘자기 성찰’의 힘이 ‘자기희생’의 역사적, 실존적 결단에까지 이어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성찰’의 힘은 다음 시편에서 독특한 ‘자기 견인’에 가 닿는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든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龍宮의 誘惑에 안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肝」 전문
이 시편은 윤동주 시의 일반적 주제인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라는 문제를 설화를 빌려 파고들어간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두 개의 설화, 곧 프로메테우스와 구토 설화(龜兎說話)가 뒤섞여 있다. 이 둘은 ‘肝’이라는 공통 요소를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토끼 설화는, 현실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꿈꾸지만 자신이 바라던 이상 세계(용궁)가 오히려 삶의 포기를 요구하자 자신의 삶의 터전은 이 갈등의 현세라는 자각을 담은 이야기로 해석된다.
1연에서 토끼는 바닷가 바위 위에 간을 말리고 있으며, 2연에서는 그 둘레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킨다. 그러면서 시상(詩想)은 코카사스의 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罰)을 묵묵히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여기에서 간은 인간의 실존적 본질로서 매일 쪼아 먹히면서도 새로 돋아나는 인간적 고통의 핵심이 된다. 토끼와 독수리는 인간의 양면 곧 두 개의 자아를 표상한다. 곧 독수리는 화자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쪼아내며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내부의 예리한 의식이다. 곧 이것은 현실적 자아를 반성하는 반성적 자아이다. 화자는 이 고통을 통해 반성적 의식이 살질 것을 기대하며, 다시는 용궁의 유혹을 좇아 세계의 갈등을 벗어나보겠다는 덧없는 환상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어떤 초월적 희망에 대한 환상도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는, 고통스런 ‘자기 응시’ 혹은 ‘자기 견인’의 긴장을 가까스로 선택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고통과 결연한 의지로 맞서는 비극적 인간 곧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으로서 「十字架」의 속죄양 의식과 적극 상통한다. 결국 이 시편은 윤동주 시에서 가장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자아상이 등장하는 작품이 된다. 풍자적인 설화의 상상적 변용에 의해 시인은 설화의 주인공과 암울한 현실 속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이상적 자아의 모습을 동일화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그만큼 윤동주는 설화적 차용의 모티프뿐만 아니라 ‘견인’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이 시편을 통해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十字架」와 「肝」에서, 궁극의 자기 긍정을 위한 ‘자기희생’과 ‘자기 견인’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두 장의 거울’로부터 얻은 그의 ‘자기 성찰’의 힘으로부터 흘러나와 ‘자기완성’으로 나아가는 그의 내면적 힘임을 알 수 있게 된다.
5. 윤동주를 매개로 한 현대시 교육의 의미
올해는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탄생 100주년’이라는 표현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근대사를 살아온 우리에게 어떤 숙연함을 가지게 한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100년 전에 태어난 그 문학인이 우리 문학사의 긍정적 모형으로 남은 인물이건 반면교사로 남은 인물이건, 우리는 그들의 시대와 언어에 대해 먹먹한 눈길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일정하게 민족주의적 감상성을 동반할 위험을 내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새삼 정중하게 불러들여 우리의 문학사를 다시 한 번 응시하는 일은,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부실한지에 대해 서늘한 자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동경과 경도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감옥에서 1945년 2월 16일 젊은 날을 마감하였다. 불과 27년 1개월 남짓의 삶이었다. 이러한 짧은 생애를 산 윤동주는 우리 문학사에서 시와 삶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 실례일 것이다. 그의 순결한 언어와 비극적 죽음이 이러한 결과를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그는 이렇듯 불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결정(結晶)인 시편들을 남기고 그의 ‘또 다른 고향’으로 서둘러 떠났다.
윤동주가 나고 자란 북간도는 우리 근대사에서 수난과 저항의 이미지를 동시에 거느린 채 존재한다. 증조부 윤재옥이 북간도로 건너갔을 때는 우리 민족의 이주 초창기였는데, 그 초기 이주 세력 가운데 하나인 윤하현 장로의 외아들 윤영석과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목사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둘도 없는 ‘북간도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 안쪽에는 해란강과 일송정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풍경이 짙게 담겨 있었는데, 그 점에서 북간도는 윤동주를 낳고 길러낸, 양도할 수 없는 우리의 땅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그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숭실중학)과 남한(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입교대학, 동지사대학)에서 유학중 죽음을 맞아,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공간 편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한중일(韓中日)에 모두 시비(詩碑)가 세워진 유일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윤동주를 통해 ‘북간도-평양-서울-일본’이라는 공간 확장의 기억 단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의 현재성은 먼저 이러한 동아시아적 공간 확장성에서 온다. 이런 시인 흔치 않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70년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윤동주 시읽기 모임이 성행하고 있고,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같은 학자가 윤동주에 대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체계화하고 있을 정도로, 윤동주는 가해국이었던 일본에서도 깊이 기억되고 있다. 그야말로 적국(敵國)에서 역사의 ‘기념비(monument)’로 남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선배 시인 정지용이 시집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라고 기억했던 그 오롯한 고독이 윤동주를 이처럼 불멸의 시인으로 남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늘’과 ‘바람’과 ‘별’을 탈환하게끔 해주고 있다.
동지사대학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두 시인을 한꺼번에 만나게 해준다. 윤동주가 경험했을 망국과 유학과 죽음의 흐름이 한순간 압축적으로 전해져온다. 이처럼 오랜 젊음으로 살아남은 그만의 특권은, 비극적 생애를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시를 우리 문학사의 정전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윤동주는 좁은 의미의 저항 텍스트를 뛰어넘어, 더욱 넓은 예술적 차원에서 항구적인 매혹의 텍스트로 기억되어갈 것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그의 시가 여전히 생생한 현재형인 까닭이다.
이처럼 윤동주는 길지 않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남다른 개성과 문학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숨쉬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원초적으로 시와 삶의 분리불가능성 속에 있다. 어쩌면 시인의 삶 못지않게 그의 죽음 역시 그 극적인 성격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불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감동으로 살아 있다. 이른 나이에 운명한 이의 불가피한 미완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라도, 윤동주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시편들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회복시키고 탈환시키는 시의 보고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핀 그의 ‘부끄럼’과 ‘자기 성찰’의 의지는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성정(性情)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어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주어진 길’과 ‘허락된다면’에서 나타나는 수동적 감각 역시 그의 천성이 의지적이고 능동적이지 않고 운명론적이고 자성적인 일면을 드러내는 무의식적 언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자전적이고 시적 화자는 시적 자아와 거의 일치하고, 그래서 그의 ‘부끄럼’과 ‘자기 성찰’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것이 된다. 그 실존적 치열함은 부끄럼 자체가 부끄럼의 대상이 되는 「懺悔錄」이라는 작품에서 가장 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1938년 그의 대학 입학은 성년식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그런데 그는 줄곧 “늙은 敎授의 講義”(「쉽게 씌어진 詩」)와 늙은 의사의 진단(“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病院」)에, 다시 말하여 근대적 학문과 근대적 합리성의 체계에 자신의 실존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자발적 ‘疲勞’와 ‘沈澱’을 택한다. 이 또한 자기 인식의 위기(identity crisis)를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은 그의 투명한 성정과 시선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궤적은 그대로 자기 성찰보다는 자기 현시(顯示)나 자기도취로 종종 기울어지는 현대인의 영혼을 깨우치고 항체를 제공하는 맑은 자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교육의 전반적 문제이겠지만, 현대시 교육에서 시인의 생애와 의도를 중심으로 시를 해석하거나 텍스트에 대한 구조적 분석으로 해석을 확정짓는 양극의 편향은 학생들의 사고를 억제하는 일일 것이다. 그 점에서 윤동주 시에 대한 비평적 객관성과 수용자의 체험적 반응이라는 요소의 결합은 매우 중요한 균형감각의 요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독자를 “언제 어떤 텍스트가 주어지더라도 자신의 ‘독법’에 따라 이해하고 가치를 판단하며 그것들을 내면화할 수 있는 문학적 능력을 지닌 독자”로 규정할 경우, 우리는 수용자들에게 그러한 안목을 열어줄 수 있는 자료로 윤동주의 시의 기능을 한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사적 자산을 투명성과 서정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 분명히 수용자들에게 매개시킴으로써, 우리는 ‘자기 성찰’의 오롯한 실존적, 윤리적 의미를 오늘의 황폐한 정신사적 상황에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시적 형상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윤동주 시만의 교육적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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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7. 9 월 출간할 윤동주 추모 100년 특집 논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