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Spring, 샘)
인터넷에서 푼 사진.
이 다슬기 같이 (다슬기는 지방에 따라서 올갱이,도슬비, 대사리 또는 골삥이 라고도 한다)
생긴 조형물은 정식이름이 스프링으로 청계천 동아일보 앞 광장에 있다.
스웨덴 태생 미국 팝아트 조각가 올덴버그(Claes Thure Odenburg) 작품으로
인도양 조개로부터 (다슬기가 아니라) 모티브를 얻어 한복 옷고름과
보름달 형상을 반영했다고 한다. 또 디앤에이(DNA) 이중나선구조를
연상시켜 청계천이 가진 의미 ‘생명 복원’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이 다슬기 탑에 대하여 10월 20일 조선일보 독자편지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글 쓴 이는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김성균 교수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사원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0/2008102001593.html
…. 전략 (前略)
요즘 환경설계에선 풍수도 중시한다.
풍수상 청계천 광장에 세워진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 '스프링'이 문제다.
이 조형물은 끝이 뾰족하여 풍수에서 불(火)의 형상이다.
색채도 불의 색인 붉은색을 감고 있다.
그런데도 청계천의 한가운데 설치함으로써 조형물이 밤낮으로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중략 (中略)
조형물이란 주변과 조화를 이루면서 상징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사방이 네모난 건물인데 홀로 뾰족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조형물은 스스로의 독특함만 강조하고 있어 주변과 어울리지 못할 뿐 아니라
청계천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청계천이 자신의 상징인 것 같다.
조경 전문가로서 자기가 볼 때 아니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 논거로 든 내용 중에 좀 거시기 한 부분이 있다.
….. 풍수학상 서울에 불 기운이 강하고, 혈기가 들끓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조형물 설치 후 발생한 남대문 화재나 촛불시위 등이
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풍수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조선시대 관악산의 봉우리가 뾰족한 삼각형으로 불의 기운이 강해
화재가 많다 하여 광화문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런데 청계천 복원 후 국가 중심부인
청와대~광화문~남대문 중심축 가까이에 불의 형상을 세워 놓은 것이다.
오행에서 불은 물(水)과 상극이다.
이 조형물이 청계천 물의 기운을 누르고, 명당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청계천 기운을 막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북한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보다
더욱 직접적이며 치명적이라고 풍수가들은 주장한다.
선정 당시부터 공청회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하여 잡음이 많았고,
지금도 '먹고 버린 고둥 껍데기'란 야유를 받고 있다.
꼭 풍수를 고려해서가 아니래도 조형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강구하는 게 어떨까 싶다…….
이거 뭐 ….
저 다슬기 탑 때문에 남대문이 불타고 촛불 시위가 일어 났다는 말인가?
관악산 화기(火氣)
관악산이 화산이라는 것은 지질학 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풍수에서는 산 생김새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五行)으로 나눈다
금성(金星)은 산 윗부분이 둥글고 아랫부분이 넓은 모양이요,
목성(木星)은 나무와 같이 솟은 모양이며,
수성(水星)은 파도와 같은 모양,
화성(火星)은 불과 같이 뾰족한 모양,
토성(土星)이라 함은 넓고 편편한 모양이다.
관악산은 봉우리가 뾰족뾰족하여 화산이라는 것이다. (山之尖梢 曰 火)
사진: 한강 유람선에서 본 관악산. 봉우리가 날카롭다.
필자 사진 솜씨가 시원치 않으니 겸재 그림으로 다시 본다.
겸재 정선, 필운상화 (弼雲賞花), 영조 26년 (1750)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 x 18.5 cm
그림 중앙 선비들이 앉은 곳은 필운대(弼雲臺- 현 배화여대-여고)요,
상단에 남산의 마제잠두(馬蹄蠶頭)형 모습이 보이고
남산 자락이 오른 쪽으로 흐른 곳에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문루가 있고
그 위 멀리 원경으로 관악산 봉우리가 뾰족뾰족하다.
비보(裨補)
풍수적으로 완전한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금 모자란 대로 쓰지 않을 수 없으되,
그 약점을 보완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조선 왕조 시대 관악산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비보(裨補)적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내려 온다.
숭례문 글씨를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썼다던가
사진: 숭례문 현판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고 글씨를 마치 타오르는 불꽃 모양으로
만들기 위하여 세로로 썼다고 한다.
또 남대문 앞에 남지 (南池) 연못을 팠다던가…
사진 : 수선전도 중 남지
지금 이 남지는 없어지고 남대문(숭례문)에서 서울역을 바라보면
오른 쪽에 하겐다즈가 있는데 그 앞에 표석만 남아 있다.
그러면 동대문 앞에 있던 동지(東池), 서대문 앞 서지(西池)는 대체 뭔가?
동대문 밖 멀리 용마산, 서대문 밖 무악은 전혀 뾰족하지 않은데…
광화문 해태
관악산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웠다는 것은 재미있지만
fact 가 아니라 전설(傳說)이라고 필자가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다.
지금은 해태상이 광화문 바로 앞에 있지만 조선왕조 시대에는 얼마간 떨어져 있었다.
위는 19 세기 말 사진인데 해태는 광화문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해태가 앞에 놓인 건물은 육조거리에 있던 사헌부(司憲府)다.
그것은 조선시대 해태-해치가 헌부(憲府)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대사헌 흉배에는 해태가 있었고, 헌부 관리들은 해태관을 썼다.
사진: 대사헌의 흉배.
다른 관청 관원들이 흉배(胸背)에 학을 수 놓을 때 대사헌은 해태였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융화한다는 면에서 옛 풍수정신을 되 돌아 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화기가 어떻고 나오면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한 김성균 씨는 다슬기 탑이 보기 싫은 데다가
자기가 전공한 조경학 이론 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하면 될 일이지
풍수를 끌고 나올 일이 아니었다. 다슬기 탑 때문에 남대문이 불타고
촛불 시위가 일어 났다는 말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글/구룡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