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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경향성을 비교하며. 생각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화두를 제시한다. 위 동영상에서 중반 이후 부터는. 언어의 사회성에 대한 내용으로. 청소년에게 지식을 제시하기 위한 다소 지엽적인 화두이다. 그러므로 런닝타임 14분을 끝까지 다 시청해도 좋겠지만. 7~8분 정도까지만 시청해도 충분히 무방하겠다.
도올은. 동서양의 철학이란 슬로건에서. 생각에 대한 차이를 동서양의 문명적 차이로 보았지만. 물론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문화. 역사. 언어. 사회. 등 총체적 관찰에서. 우리는 분명 동서양의 경향성을 충분히 비교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현대까지 진화한 보다 본질적인 의식 수준에서 바라보자면. 도올이 제시한 위 화두는. 동서東西라는 지역과 문명적인 기준 보다는. 소위 영성과 형상. 또는 형상과 형상 초월의 화두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본다.
위 강의에서 기본적인 설명이 잘 되어 있지만.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양에서는 나(=I)라는 실체가 있고. 그 나라고 하는 존재가 생각을 컨트롤. 창조. 주도 한다고 여겨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적 발상을 서양적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실제 서양 문명권의 언어 작동 방식은. 언제나 주어인 내가 등장한다. 내가 걸어간다. 내가 말한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실체인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주체인 내가 있고. 그 내가 생각하고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나라는 것이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걸어간다가 아니라. 그냥. 걸어간다. 말한다 식으로 말이다.
도올이 제시한 위 화두는. 실제로 매우 보편적이며 역사 철학적인. 또한 종교적인 화두이다. 도올은 실제로 위 강의에서 불교를 예로들며 동양적 사고방식을 서양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는 불교를 동양적인 범주에서 해석하고 예로 들고 있지만. 이미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사실 이는 동양과 서양적 사고방식 이전에. 보다 본질적으로 영성과 형상에 대한 관점 차이다.
하지만 대중매체인 공중파 방송에서. 영성이니 형상이니 하는 단어 자체는. 오히려 보편적 전달 기능을 저해할 소지가 높다. 무슨 쌩뚱맞은 영성이냐는 대중적 반응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어 선택은 도올이 잘 했다고 본다. 다만 동서양의 기준 이전에. 본래 위 화두는 이미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식에 대한 관점이며. 바로 영성과 형상에 대한 테마임을 우리는 반드시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진화. 성장 한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의 형상을 탈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탈피란 탈피의 대상과 싸우고 소멸 시키거나 박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포월(포함+초월). 즉 대상성을 포함하면서도 넘어선 자유로움을 뜻한다. 이는 표현상 초월이라고도 하며. 권능權能 이라고도 한다.
부연 하자면.. 나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언가를 원한다. 나는 ~한다와 같은. 생각과 관념에서의 주체가 되는 나. 라고 하는 형상적 정체성이. 실질적인 실체가 아닌. 형상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고. 깨닫고. 이를 또 다른 형상적 개념에서의 소멸이 아닌. 실질적으로 초월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과 진화라는 것이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제법무아諸法無我. 소위 불교 3법인의 궁극적 진리인.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제법무아). 라는 석가 부처의 깨달음은. 바로 위 대상성을 탈피한 궁극적 실체(=영성)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메세지이며. 진언眞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에 대한 자각과. 위 멘탈적 이해와 지식으로서 표현된 생각은. 형태상에서는 똑같은 것 같으나. 질적으로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영성은. 문화와 사회. 언어. 그 총체적 형상 속에서. 나라고 믿어온 형상적 정체성이. 궁극적으로 환상이라는 자각自覺을 의미한다. 하지만. 형상적 정체성이 환상이라는 내용물로서의 생각. 즉 위 문장에 대한 관념은 자각이 아니다. 그것은 형상적 정체성이 환상이라는. 또 하나의 개념이며 형상으로서. 영성(=형상 초월)을 상징하는 형상일 뿐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형상적 정체성을 탈피한 상태에서의 앎. 즉 자각과. 그 앎의 상태에 대한 형상적 표현과 서술. 예를들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라는 형상의 내용물을. 다시 형상적 정체성에서 아이덴티티파이Identify(=나와 같게 만듦). 즉 자기 동일시 하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비유컨대. 살아 있는 장미와. 즉 생화生花와. 장미의 모양새만 본따서 만든 조화造花의 차이가 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진언眞言은. 영성(=진리=형상초월)이라는 생화를 형상으로 본떠 놓은 조화인 것이다. 생화를 가지고 사진을 찍을 수는 있겠지만. 죽어 있는 조화를 생화인 것처럼 하거나. 생화가 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자는. 위 진실을 가리켜.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군가가 믿고 옳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형태 상에서는 물론 진리를 표현하는 말. 즉 진언이지만. 실질적으로. 질적으로 내면에 참다운 살아 있음의 자각이 없다면. 이는 곧 흉내내기식 관념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앵무새 염불이며. 생화가 아닌 조화. 모방된 그림이라는 뜻이다. 형태는 진짜를 그럴듯 하게 베껴서 이미지 관리를 하나. 정작 엑기스로의 살아 있음이 결여 되어 있는 짝퉁이라는 것이다.
최근 내가 비판했던 필명 목소리의. 소위 아침의 태양(=센트럴선+로키 마운틴 미스테리 스쿨+오라소마)이라고 하는. 영성 비즈니스 공간 역시. 위에서 언급한 영성의 진수. 영적 진리의 기초적 진실성에 대해서 부터. 전혀 빛이 흐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목소리 뿐만이 아니라. 영성계의 상당수. 어쩌면 대부분이 다 분별을 잘 못하고 있는. 존재의 기초 자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영성 공간이라는 슬로건만 있지. 실제로는 신앙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기존 종교의 신神이라는 추상적 믿음의 형상을. 신神이란 말 대신. 두리뭉실 제멋대로 입맛에 걸맞게 덧붙인 영성. 또는 나 라는 단어 정도로만 바꿔치기 했을 뿐인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나는 신神이고. 나는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무엇이든 창조 할 수 있다. 뭐 이 따위 기초도 안잡힌 관념의 목소리를 진리라며. 서로 사고 팔고 있더란 것이다.
대부분의 영성인. 또는 영적 추구자들은 현실적으로 어려움과 방황을 겪기도 하며. 이는 성주괴공. 생로병사. 생장염장 이라는 모든 형상의 숙명적인 길이다. 제법무아를 설파한 석가는. 일체개고 부터 깨닫지 아니 하였던가.
영적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도 발전하고. 부자도 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 성취하게 돕고 싶다며. 현실에서도 빛과 사랑으로 잘먹고 잘살고. 원하는대로 마술 뿅뿅 하는 초능력 같은 것을 주겠다며. 감언이설로 영성이란 이미지만 마구잡이로 가져다가 짬뽕 시켜 꼬득이는 비즈니스가. 과연 립서비스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면 말도 안한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까지 그렇게 고객의 자발적인 심리 유도에 성공 하였다고 하여. 좋다. 최소한 법적 문제야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심리적 갈취와 기만질임을 전혀 양심상 못 느끼는 것인가. 최소한 그따위 수준에 영성이니 빛이니를 갖다 붙여서 이미지 마케팅 하면. 그것이 영성이 되고 빛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안그래도 그런 부류의 공간은 이 땅에 차고 넘쳤다. 기복 신앙의 교회나 절에 가보라. 현대판 굿판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잘되게 해달라며 신神이라는 형상에 의존하고 기대하는 것과. 신神 대신 나 자신이 곧 신神이며 빛이라고 뇌까리며. 헛된 믿음과 건전한 이미지를 교묘히 조장한 혹세무민으로. 진정성이 결여된 심리적 믿음에 기대고 부흥하여 비즈니스 하는 것이. 과연 심리적 가치 판단의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서. 도대체 무엇이라고 보는 것인가.
물론.. I am that I am(=아이엠 댓 아이엠)이라는 의식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제법무아의 궁극적 진리성에 대한. 또 다른 언어 코드. 진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단어나. 단어들로 인해서 형상화된 이미지. 심리적 내용물들에 대한 지향과 추구는. 앵무새 염불일 뿐이다.
말장난과 언어도단도 유분수지. 내가 곧 신이니까. 내가 곧 빛과 사랑이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마인드의 표피적 신앙은. 단지 나라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천방지축 갖다 붙여서. 심리적 환상을 재생산하고 부풀려대는 환타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이들은 나. 또는 실체.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성 있는 접근은 아예 없다시피 한 노릇이다.
그저 교언영색과 값싼 친목질로 전도 사업을 하고 있을 뿐.. 이것을 강의라고 불러야겠는가. 사기질이라고 불러야겠는가. 아니면 멋진 비즈니스 라고 불러야겠는가. 각자 양심과 자각을 통해서 깨우치는 만큼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있을 일이겠지만. 비즈니스라고 불러 예의를 차릴 수는 있으되. 사기질임을 몰라서는 안되겠고. 사기질임은 알되. 심리적으로 단죄할 것만도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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