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동경제대 의학부 학생들 위생조사 위해 방문 ‘아틱 뮤지엄’ 조사원들도 자체 민속조사 영상촬영 일본서 보관중인 자료 이문웅 교수가 발견 재조명
▲ 1936년 달리 조사단 사진. 미야모토기념재단 소장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을 맞은 올해는 일제 강점기(1910~1945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시기 울산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1936년 여름에 있었던 농촌 위생조사가 관심을 끈다.
1936년 8월은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그 시기다. 이 기쁜 소식이 곧바로 울산까지 전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이때 울산 달리(達里, 현재 남구 달동)에서는 도쿄(東京)제국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중심이 돼 농촌 위생조사를 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최응석(崔應錫)을 포함한 의학부 학생 8명, 경제학부 학생 1명, 여자 의학전문 학생 3명 등 모두 12명이었다. 조사는 그해 7월 시작해 8월까지 진행됐다.
현재 달동은 확실한 도심으로 변했지만, 당시는 127호 농가가 있던 전형적 농촌마을이었다. 달리에서 위생조사를 하게 된 것은 울산 출신의 농업경제학자 강정택(1907~?) 때문이었다. 그는 해방 후 경성대학 경제학과 교수와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차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강정택은 1933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농학부 부수(副手)로 근무하면서 지도교수와 함께 농촌 사회경제 조사를 해왔다. 그런데 그가 울산 달리에서 조사하고 있을 때, 최응석이 자신의 후원자였던 시부사와 케이조(澁澤敬三, 1896~1963년)를 만나 농촌 위생조사를 하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이에 시부사와 케이조는 경비를 지원하게 되거니와, 최응석은 조사단을 구성해 울산으로 오게 되었다. 최응석은 평양 출신으로, 강정택의 도쿄 제일고등학교
▲ 달리 어느 집의 가족 사진. 미야모토기념재단 소장
후배였다. 두 사람은 시부사와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달리에 온 위생조사단은 세부적인 조사표를 만들어 마을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위생상태와 생활상을 조사하고 기록했다. 구체적으로 경제상황, 식량과 영양, 주택, 인구 구성, 부인 건강, 육아, 체격과 발육, 질병 등에 걸쳐 자세히 조사했다. 이 실증적 조사결과는 그후 3년간의 연구 분석작업을 거쳐 <조선의 농촌 위생-경상남도 울산읍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1940년 2월)로 간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울산 달리 농촌 위생조사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학자는 바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문웅 명예교수였다. 그는 1988년 일본 오사카의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우연히 자신의 고향인 울산의 민속품을 보게 되어, 왜 이곳에 울산 자료가 소장돼 있는지 의문을 갖고 추적을 벌여왔다. 그래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그 내용을 <울산문화10집>(1994년), 경상일보 칼럼(2007년), 단행본, 강연 등을 통해 소개했다. 선생의 연구 덕분에 울산 근대사의 일면이 새롭게 드러날 수 있었다.
이문웅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시부사와 케이조는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1921년 도쿄에 ‘아틱
▲ 달리 농민들 모습. 미야모토기념재단 소장
뮤지엄’(Attic Museum)을 창설해 민속자료 등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는 근대 일본 민속학 및 문화인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도쿄저축은행 회장, 제일은행 상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관동대지진(1923년) 후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 위생조사 기간 동안 ‘아틱 뮤지엄’ 조사원도 달리에 와서 자체적으로 민속조사를 하고 영상 촬영도 했다. 조사원은 조선 복식(服飾)을 전공한 미야모토 케타로(宮本馨太郞), 경제지리를 전공한 오가와 토오루(小川徹), 그리고 무라카미 기요부미(村上淸文)였다. 이들은 울산 여러 곳을 다니며 민속품을 수집했다. 강정택도 자료 수집하는 일을 도왔다. 수집품은 농기구·의복·생활용구 등 124점으로, ‘아틱 뮤지엄’에 소장되었다.
시부사와 케이조 자신도 이 조사에 관심이 많아 직접 울산까지 방문했다. 그는 8월14일 울산에 와서 16일까지 머물렀다. 달리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그는 마을사람들과 허물없이 사귈 수 있어 매우 기뻤다고 했다. 시부사와는 1933년 12월에도 달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강정택·최응석과 조사원은 조사를 끝내면서 마을에 위생적인 우물이 가장 필요한 것으로 판단해 두 곳에 우물을 만들었다. 우물 옆에는 ‘의학위생조사단 기념’이라 표시했다. 이후 1939년 여름, 가뭄이 심했을 때 한 곳은 말라 버렸으나, 다른 한 곳은 물이 충분하여 마을사람 모두 그 우물로 생활했다고 한다. 달리 사람들은 두고두고 조사원에 대해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러면 1936년의 각종 자료는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아틱 뮤지엄’에 있던 울산 민속품은 그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으로 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사 당시의 사진 수백 장은 현재 카나가와(神奈川)대학의 상민(常民)문화연구소와 미야모토(宮本)기념재단에 보관되고 있다. 강정택·최응석 등과 시부사와 케이조의 편지는 도쿄의 시부사와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미야모토 케타로가 찍은 영상은 13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복구되어 있다. 이 동영상 자료는 아직 한국에 전모가 공개되지 않았다. 울산문화방송과 최길성 교수가 쓴 <영상이 말하는 식민지 조선>(2009년)에 수록된 CD를 통해 일부 소개됐다. 여기서 고무신이나 영화필름을 리본처럼 사용한 밀짚모자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이렇게 1936년 달리에 대한 조사보고서와 사진·동영상, 그리고 실물 자료는 이문웅 교수의 지적처럼 1930년대 울산 농촌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또한 강정택이 쓴 달리의 인구배출에 대한 실증적 논문도 당시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조사 내용과 자료 성격에 대해 선입견을 갖거나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으나, 지난 시대의 한 마을에 대해 이렇게 종합적인 자료가 남아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울산은 최근 이들 자료로 인해 역사학·민속학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2008년은 전국적으로 울산이 관심을 받게 된 해로 기록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울산 민속품을 수록한 도록 <향수-1936년 울산 달리>를 발간했다. 위생조사보고서인 <조선의 농촌 위생-경상남도 울산읍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도 번역 출판했다. 또 강정택의 논문을 번역하고 부록으로 강정택의 생애를 조명한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업경제>도 나왔다. 이 책의 서평은 서울대 인류학과 한상복 명예교수가 <한국문화인류학 42-1호>(2009년)에 발표했다.
▲ 신형석울산시 박물관추진단 학예사
이를 계기로 울산시는 2009년 2월 국립민속박물관,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과 학술교류 협정을 체결해 의미있는 사업을 시작했다. 1차로 국립민속박물관 주관으로 달동지역에 대한 도시 민속조사를 진행하고 영상자료를 제작했다.
앞으로 울산박물관에서는 특별기획전을 개최하고, 내실 있는 다양한 교류사업을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