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慶會樓)---국보 제224호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하던 곳으로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태종 12년인 1412년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고 하며 공조판서였던 박자청이 총감독을 맡았는데 박자청은 노비출신으로 세상에 태어나 건축기술이 웨낙 뛰어나 높은 관직을 한 인물이기도 한데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연못에는 큼직하고 반듯한 섬을 만들고 장대석을 쌓아 호안하였으며 둘레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난대[廻欄石]를 두어 돌난간을 두르고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하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바깥과 통하게 하였다 합니다.
세종 때의 일화로
경회루는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었는데 세종 때 아주 낮은 직급에 구종직이라는 사람이 경회루에 담장을 넘어 들어가 경치를 보다가 세종과 마주치게 되었고 죽었다고 생각한 구종직은 “경회루를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싶어서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자 세종은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신하라 생각하고 노래를 불러보게 하고 정 1품도 잘 외우지 못하는 ‘춘추’라는 책을 외워보라고 했는데 하지만 구종직이 춘추를 잘 외워니 벌은 주지 않고 정 9품에서 종 5품으로 특진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일찍 죽자 12세의 어린 나이의 단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김종서에 의해 궁지에 몰린 수양대군은 권람과 한명회와 함께 김종서 등을 처치하고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오르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하고 성삼문에게 옥쇄를 가져오라 명을 내리자 성삼문은 울면서 상서원에서 옥쇄를 꺼내 내시인 전균에게 들라하고 경회루로 가서 옥쇄를 바치자 단종이 부복해 있는 수양대군에게 일어나 옥쇄를 받으라 하자 못이기는 척 옥쇄를 받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옥쇄를 넘겨준 비극의 현장이 바로 경회루입니다.
그 뒤 성종 때에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며 경회루 돌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는 등 다소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 화려한 모습을 보고 오키나와에서 온 일본 사신이 “용이 물 속에 비치어 그 모습이 장관"이라며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용재총화>에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했으며 황룡주(黃龍舟)를 타고 만세산을 왕래하며 사치를 일삼으니 흥청이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얘기로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남아 있다가 고종 4년인 1867년 4월에 재건되었지만 일제시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렸는데 현재는 경회루 동쪽과 북쪽 담장이 복원되었습니다.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하고 다리를 건너 경회루 기단 양끝에 있는 2개의 문은 음양(陰陽)을 뜻하며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본 딴것이며
경회루 2층 내부입니다.
경회루 1층 과 2층내부입니다.
경회루 마루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이 가장 높은 곳으로 왕이 앉아서 잔치를 맞았던 곳이며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가 낮고 세 번째 칸도 한 뼘 정도가 낮아 가운데로 갈수록 높은 직급의 신하가 앉게 되어 있는데 가운데 3칸은 천지인을 뜻하고 12칸은 일 년 열두 달을 말하며, 경회루를 받치고 있는 바깥의 기둥은 24개로 24절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옛날 기록에 보면 왕의 명령으로 연못 북쪽에 용을 넣었는데 옛날부터 용은 물을 다스리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신비한 동물로 여겼는데 연못에 용을 넣은 것은 경회루에 불이 나지 않도록 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또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 북쪽에 넣어 두었는데 이는 불을 막기 위해서라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을 청소위해 물을 빼고 준설을 하던 중 북쪽 못 바닥에서 출토된 용2마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용은 길이가 146.5㎝, 넓이가 14.2㎝, 무게가 66.5㎏ 이라고 합니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1867년'조일강화조약을 체경 할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조선후기 무신인 신관호(나중에 신헌으로 개명)의 글씨입니다.
경회루의 잡상은 우리나라 건물 중에서 가장 많은 11개를 설치했는데 이 역시도 처음부터 11개를 설치한 것인지 몇 번의 복구를 거치면서 처음과 달리 설치된 것인지는 확인이 안 되나 수정전이나 사정전 강년전 등을 봤을 때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시문(資始門)
경회루 동쪽 담장에 있는 3개의 문중 남쪽으로 있는 문으로 문안으로 들어서면 경회루로 이어 지는 다리가 있는데 어도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문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자시(資始)란 『만물이 건원에 의뢰하여 시작한다.』라는 뜻입니다.
함홍문(含弘門)
경회루 동쪽 담장에 있는 3개의 문중 가운데 있는 문으로 이 문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함홍(含弘)란 『포용하고 너그럽다.』라는 뜻입니다.
이견문(利見門)
경회루 동쪽 담장에 있는 3개의 문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이견(利見)란 『대인을 만나본다.』라는 뜻입니다.
필관문(必觀門)
경회루 북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은 하향정과 연결되어 있는데 고종 5년인 1868년에 만들었으며 필관(必觀)이란 『반드시 그 여울목을 살핀다.』라는 뜻으로 맹자의 진심(마음을 다함)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했는데 “물을 구경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그 여울목을 반드기 보아야 한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만시문(萬始門)
경회루 북쪽 담장에 있는 이 문은 언제 만들어 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일성록』기록에 의하면 고종 8년인 1871년 고종이 만시문을 지나 대보단으로 갔다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며 만시(萬始)란 『만물이 의뢰하여 비롯하다.』라는 뜻입니다.
하향정(荷香亭)
하향정 현판입니다.
경회루 북쪽에 있는 육각정자로 북궐도형과 궁궐지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이승만 대통령시절 대통령을 위한 휴식과 낚시를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