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휘, 한국 최초의 마초 액션 스타
한국액션영화사를 통틀어 최초의 마초 액션스타를 고르라면 장동휘다. 박노식, 오지명, 독고성, 이대근 등 이후 등장한 화려한 명단의 첫 머리에 손꼽혀야 할 그는 그야말로 ‘묵직한’ 남자 중의 남자였다. 특별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둔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흔히 화려한 테크닉의 ‘무술’로 대표되는 액션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보스’ 혹은 ‘큰 형’이라는 이미지에는 딱 들어맞는 사나이였다.
그의 구수하고 믿음직한 외모야말로 한국액션영화의 옛 얼굴이다. 한국식 패싸움 영화라 할 수 있는 왕년의 소위 ‘다찌마와리’ 영화에서 그는 결코 움직임이 많지는 않았지만, 대포알 같은 효과음을 뿌리는 가죽장갑의 묵직한 한 방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아마도 그런 장동휘의 이미지를 확립시켜 준 것은 김효천 감독의 '팔도사나이'(1969. 사진)였다. 영화 속에서 확실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종로 일대를 누비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김두한의 그것이었다. 고아로 자라 일본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그는 야쿠자 아베(허장강)를 손봐주면서 민족의식을 불태우게 된다.
하나둘 전국의 의리의 주먹들을 규합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반일’영화가 흥행성 있던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오직 한 판 붙기 위해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이(박노식)는 그를 평생의 형님으로 모시게 된다. “서울에서 젤 센 놈이 누구여?”라며 까불다가 바로 한 주먹에 나가떨어지고는 무릎을 꿇고 높임말로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던 용팔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소를 자아내는 압권이다.
실제로 김효천은 김두한의 숭배자였다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김두한이 세상을 뜬 뒤(1972년) 이대근을 주인공으로 '실록 김두한'(1974)과 '협객 김두한'(1975)을 만들기도 했다. 아마도 TV시리즈 '야인시대'의 원조가 바로 그였다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1990)을 만들며 박상민이라는 젊고 날렵한 김두한을 등장시켜 차별화를 시도한 이유이기도 했다.
특별출연한 '전국구'(1991) 역시 김두한 스타일의 액션영화였음을 떠올려보면 그가 만들어낸 김두한 이미지는 꽤 오래도록 한국액션영화를 대표하는 표정이었다. 이후 김효천 감독은 이대근, 김희라, 윤승원 등의 후배들에게 그 이미지를 투사시켰다.
‘김두한=장동휘’라는 사실은 그가 늘 보스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였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것은 굳이 다찌마와리 액션영화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그 이전부터 ‘의리의 큰형’이었다. 한국액션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정창화 감독의 '대평원'(1963)과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을 시작으로 '추격자'(1964), '창공에 산다'(1968), '황야의 독수리'(1969), '한국 제일의 사나이'(1970), '비내리는 명동거리'(1970)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이라 할 수 있는 이만희, 임권택, 김효천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배우다.
특히 김지운 감독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영화 중 하나로 꼽은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도 그는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곧 개봉하게 될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리'의 부제이기도 한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변태’ 악당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장동휘는 신성일, 최무룡 등이 누렸던 선명한 위상에 비한다면 미약하지만 작은 역할이라도 계속 모습을 비췄다.
안타까운 일은 지난 2005년 그가 타계했을 때 영화전문지들도 그렇고 그 어디서도 그에 관한 의미 있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원로배우들과 달리 그는 유별나게 정치권을 기웃거리지도, 욕심내며 영화 제작이나 연출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역할이라도 후배들 영화에 모습을 비추며 평생 배우로만 살았던 사람이다. 이제 그런 이미지의 액션스타를 찾아보기란 힘든 일이기에 그를 더 추억하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장동휘
인천 출신이면서 인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듯이 평생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배우 장동휘(張東暉, 1919~2005)도 그런 인물 중에 하나다. 특히 문화 예술인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아,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했던 이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화배우만 해도 앞에 소개했던 황정순, 도금봉이 그렇다.
인천이라는 지역이 인구를 ‘수렴하고 발산’하는, 그러니까 흔히 토박이라고 말하는 토착 인구는 별로 없이 대부분 잡다한 지역의 혼합 인구가 유입되었다가 다시 떠나고 하는 그런 특성 때문일까. 예수마저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못 받았다고 하지만, 특히 인천에서는 내 고장 출신에 대해 그런 면이 더 강했던 것일까.
설령 그것이 세상사요 인심이라고 해도, 누차 지적하는 바지만 공식적인 우리 '인천시사', 우리 ‘인천 영화사’에 역시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전체 기록 자체도 그 양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인천출신 유명 영화인들이 모조리 빠져 있어 소활(疏闊)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그들의 이름 석 자라도 인천사에 기록하는 것이 약소하지만 대접하는 것이고 인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게 하는 일이다. 무슨 행사를 유치하고 무슨 대회를 열어 인천, 인천을 외치는 것도 중요하나 이런 인천 인물 하나를 더 찾아내 기록하는 것이 말 그대로 인천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미있는 일일 터이다.
이야기가 많이 옆으로 갔다. 장동휘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도록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배우로 명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그는 인천 태생이다. 그의 가계(家系)라든지, 인천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학업 시절의 기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으나, 몇몇 기록에는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상업학교라면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일 것인데, 이 또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장동휘가 인천 태생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역시 1959년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경인일보 6월 16일자 ‘사고(社告)’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내용인즉 7월 4~5일 양일간 인천시민관에서 ‘제1회 인천 출신 영화인 귀향 예술제’를 개최한다는 것으로, 앞선 황정순, 도금봉 편에서도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인천(제물포)에서 태어난 한국 예술계의 톱스타를 총 망라한 귀향 예술제’에 출연하는 ‘귀향 배우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가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된 행로 역시 자세하지 않다. 어느 기록에는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 있던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하여 광복 후에는 악극단 '낙천지'의 멤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그가 작고한 뒤 그의 주변을 취재한 듯한 기록에는, ‘1936년 고교를 졸업한 이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에 몸담으면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후 ‘6·25 동란 때 예술단으로 종군, 국군 위문 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는 다소 상이한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뚜렷이 밝혀 낼 단서가 없다.
아리랑 (1957)
장동휘, 조미령, 윤봉춘, 김동원, 윤일봉
장동휘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나이 38세인 1957년으로 김소동(金蘇東)이 감독한 「아리랑」에 첫 출연하면서였다. 그 후 그는 성격배우, 액션배우로서 연기력를 보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박노식(朴魯植), 허장강(許長江), 황해(黃海), 독고성(獨孤星) 등과 함께 한국 액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다.
그가 출연한 주요 인기 영화를 살펴보면 「두만강아 잘 있거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순교자」 등을 시발로 1960년대 말에는 「팔도사나이」 「돌아온 팔도사나이」 등의 ‘팔도 시리즈’와 「명동 노신사」 「명동 백작」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명동 시리즈’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돌아가는 삼각지」 「용서받지 못할 자」 「창공에 산다」 같은 영화에 출연해 액션배우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는다.
장동휘는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청룡영화상 특별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한다. 만년의 작품 「만무방」으로 춘사영화예술상 남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영화계의 남긴 공로로 유공영화인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일설에는 ‘인천의 유명한 장사’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말 그대로 건장한 체격과 독특한 마스크, 특유의 너털웃음, 상대를 압도하는 눈초리,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만의 카리스마를 창출했는데, 그 때문에 주로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아 통쾌한 액션을 연기함으로써 남성미 물씬 풍기는 한국 최고의 액션 스타 1세대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여배우 문희씨(중앙)와 심사위원들이 함께 한 기념사진
평생 단 한 번도 TV 출연을 하지 않은 것이나 나이트클럽 출연 자제 등 외고집 영화 인생을 산 장동휘. 그는 그의 외모만큼, 또 연기 스타일만큼 진정 선 굵은 영화인으로 세인의 가슴 속에 추억된다.
‘1969년 TV가 본격 등장해 영화 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영화계를 떠나지 않고 현장을 지켰으며, 부도가 난 영화사의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고 특히 ‘동료의 빚을 떠안아 20년간 대신 갚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의리가 깊었다고 한다. ‘영화사가 어려움에 처하면 출연료를 받지 않기로도 유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제5회 중도일보 영화제.가요제 ‘백마상시상식’퍼레이드
그는 생전에 영화배우협회장,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영화 예술 발전과 함께 열악한 환경에 있는 배우들의 권익 보호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평생 의리 존중을 생활 신조로 삼아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후배 영화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핀 보스 기질의 사나이, 장동휘. 그는 분명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95년 「엄마와 별과 말미잘」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으며 이후에는 참전예술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원로 영화 배우들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2005년 작고할 때까지 충북 청주에서 만년을 지낸 듯한데, 아무래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인천과 거리가 점점 멀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07.8.12 기호일보)
1919년 6월 22일 인천에서 태어나,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한 뒤, 광복 뒤에는 악극단 낙천지에서 활동하였다.
1957년 38살의 늦은 나이에 김소동 감독의'아리랑'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그 뒤 임권택 감독의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유현목 감독의 순교자 등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말에는 팔도사나이(1968)를 비롯해 돌아온 팔도사나이 예비군 팔도사나이 등 팔도 시리즈와 명동출신(1969),명동노신사 명동백작등 명동 시리즈에 출연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 뒤에도 '돌아가는 삼각지' (1970), 용서받지 못할 자(1970), 한강(1975) 등에 출연하면서 박노식 · 허장강 · 전원윤(독고성) · 황해 등과 1960년대초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 액션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8년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 1979년 '뒤돌아 보지 마라'등에 출연한 뒤, 1982년을 끝으로 12년간 영화계에서 떠났다가, 1994년 활동을 재개하였다. 같은 해 엄종선 감독의 '만무방'에서 기구한 운명의 노인 역으로 출연해 춘사영화예술상 남우주연상, 이듬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주로 전쟁영화와 범죄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았다. 건장한 체격에 매서운 눈, 화통한 목소리와 특유의 너털웃음, 선 굵은 액션 연기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배우협회장,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 안산지부장을 지냈다.
1919년에 태어난 장동휘는 중국에 있을 당시 연극단 칠삼조를 통해 데뷔했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악극단에서 악극배우로 주로 활동하다가 19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영진 역을 맡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1960년대 초반 전성기를 맞이한 전쟁영화에서 강인한 남성상을 보여주면서 스타가 되었다. 거장 이만희 감독을 만나면서 그의 경력은 정점에 올랐으며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 스타로 큰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도 그는 싸움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출연작으로는 두만강아 잘있거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암살자, 오인의 사형수, 심술각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창공에 산다, 돌아보지 말라, 만무방], 엄마와 별과 말미잘 등 500여편이 있다. 2005년 4월 2일 밤 9시경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머니투데이 2008.8.11)
한국 액션의 전설, 지다, 배우 장동휘 별세
원로배우 장동휘가 4월2일 밤 9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살. 고관절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지난 4년을 투병했던 그는 두달 전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됐고,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원로배우 황해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비보가 날아들어서였을까. 빈소가 마련된 서울 삼성병원을 찾은 영화인들은 어느 때보다 숙연했고, 침울했다. 4월5일 영화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엔 신영균, 남궁원, 안성기, 이덕화 등 동료, 후배 연기자들과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황기성 서울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등 영화계 인사들이 자리해 부인 조원희(77)씨를 비롯한 유족들의 오열을 나누고, 달랬다. 박준규는 중절모 쓰고 머플러 두르고 파이프 물고 카리스마 내뿜던 고인의 영정 앞에서 10년 전 아버지 박노식의 영면을 떠올리며 “생전에 스타였던 두분 모두 사람들이 산을 찾는 식목일을 골라 똑같이 땅에 묻히시는 걸 보면 대단한 양반들”이라는 말로 슬픔을 애써 지웠다.
박노식, 허장강, 황해 등과 1960년대 대표적인 액션배우로 군림했던 장동휘는 1920년 인천 율목동 9번지에서 태어났다. 인천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극장에서 본 악극에 매료되어” 스무살 되던 해 콜럼비아에 입단했고, “국내와 만주를 넘나들며” 무대에 섰다. 배우 윤일봉의 추천으로 19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의 영진 역을 맡으면서, 서른일곱에 뒤늦게 영화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분대장 역할을 맡으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국도극장에서 개봉,
“당시 전쟁물로서는 가장 많은” 23만여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던 이 영화에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전우를 다독이는 인간적인 분대장으로 열연했다.
1994년 윤정희와 함께 출연한 <만무방>까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남긴 영화는 500여편. 남성적 장르인 전쟁물과 액션물에서 그의 개성이 가장 빛났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올해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장동휘가 출연한 영화들을 다시 봤다는 부산국제영화제 코디네이터 조영정씨는 여기에 흥미로운 해석을 덧붙인다. “당대의 액션배우들은 맨주먹으로 세상과 맞서면서 터프함을 과시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반면 그가 맡은 인물들은 눈물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권철휘 감독의 <북경열차>(1969)를 보면, 그는 극중에서 자신의 죽음을 순수하고 가련한 소녀의 죽음으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조씨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세상의 규칙을 초월한 단독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며 그를 험프리 보가트에 비유했다.
쉰이 넘어서도 촬영현장에서 팔씨름 내기 하면 진 적이 없었고, 지방 로케 가서도 시비 거는 깡패들을 손쉽게 제압했으며, 스트라이프 양복 구겨진다며 촬영 중에 절대로 앉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긴 그는 평생 영화 외길만 고집했다. 1970년대 들어 TV의 위세에 밀려 영화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음반 취입 등 갖은 유혹이 쏟아졌지만, 그는 부도난 영화사의 영화에 무료 출연하면서까지 충무로를 지켰다고 한다. 안성기는 “영화 속 모습하고 실제 삶하고 너무 비슷한 분이었다”며 “배우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는 등 평소에도 맏형 노릇을 했다”고 전했다. 윤일봉도 “인기나 돈에 연연해하지 않고 평생 배우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