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시모론의 시계
이근자
도마질 소리였다. 대주는 오랜만에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다. 가족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대주가 김밥을 싫어해 아내는 불고기와 계란말이, 밑반찬 등으로 도시락을 쌌다. 아내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듯 아내는 조리 기구를 많이 사용했고 뒷정리를 싫어했다. 대주도 설거지가 싫었다. 그래서 대주가 집에 있는 날엔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먹자고 했다. 몇 번 부부싸움을 한 뒤 아내는 미리 반찬을 만들었다. 찌개도 물만 부어 끓일 수 있도록 손질해, 냄비 째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낮잠을 자든지 티브이를 보며 칼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았고 외출했다 돌아와 곧바로 허기를 채울 수 있어 더 좋았다.
오늘 같은 날, 대주가 청소기라도 돌리는 것이 평화로운 가정의 불문율이었다. 대주가 모른 척 침대에서 뒹구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아내의 칼질이 거칠어졌다. 앙탈을 부리듯 점점 커지는 도마 소리가 집 안의 다른 소리를 부추겼다. 아들 녀석 우가 산만하게 뛰어다녔고 시계의 침들이 큰 소리로 째깍댔다. 집 안의 모든 초침이 대주더러 일어나라고 짝칵짝칵, 합창을 해대면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하는 수없이 벌떡 일어나 우의 외출복을 챙기고 생두를 커피머신에 넣었다. 아내는 대주가 내린 커피가 맛있다고 했다. 커피나 당근 하나도 맛있는 것을 고수하는 아내였다.
가끔 가는 산행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펼치면 음식 맛과 모양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당연히 요즘 보기 드문 내조의 여왕을 얻었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대주가 말려도 아내의 요리솜씨는 나날이 늘었다. 조리사 자격증을 따라고 권하자 자기는 시(詩)에서만 전문가가 되고 싶다더니, 소망대로 작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아빠, 앞을 잘 봐. 갑자기 공기가 흐리고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꾸물대지? 트럭이나 나무가 쓱 사라지면 멈춰. 딱 멈춰야 해. 싱크-홀이야.”
얼마 전부터 녀석은 차에 타기만 하면 타조처럼 목을 앞으로 빼고 싱크-홀 타령을 했다. 티브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였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지반이 약한 쪽의 지층이 털썩, 주저앉으며 생긴 커다란 구덩이가 비쳤다. 속을 파먹은 아이스크림콘의 껍질이 내려앉듯 도로 째로 푹 꺼진 구덩이에서 하얗고 빨간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찢어진 아스팔트의 검은 실금이 뚜렷했다. 대주는 구덩이에서 살아 있는 것의 그림자를 찾았지만 방영되진 않았다.
“헤라쿨레스에서는 내가 X-맨이었거든. 땅속 싱크-홀이 다 보여. 요리조리 피해 다녔잖아. 아빠도 기억나지?”
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드라마 제목을 본 따 자기가 저 멀리 헤라쿨레스라는 별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제 아빠와 엄마를 그곳에서 만나 지구로 따라왔다고 했다. 아이는 이런저런 얘기를 돌연변이들의 초능력과 연결해 그럴 듯하게 지어냈다. 대주는 아이 눈에 보였다는 지표 아래, 텅 빈 길의 갈래를 상상했다.
미국의 한 미식축구장 밑을 잔잔히 흐르며 석회석 암반을 깎아 먹었다는 물줄기나 백년이 넘게 불타고 있다는 가스기둥, 바다 밑의 블루-홀에 사는 눈먼 괴생물체가 일으킨다는 소용돌이까지. 대주는 골밀도 검사에서 본 X-레이 사진을 떠올렸다. 지구에 방사선을 비추면 골다공증에서 보이는, 겨우 껍데기가 지탱하고 있는 땅속의 빈 공간들이 보일까. 싱크-홀을 둘러싼 껍질은 좀 더 희거나 검붉거나 짙은 파란색을 띠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푸른 잔디구장이거나 버뮤다 삼각지대의 심해이거나 사랑을 나누고 있던 누군가의 침실일 수도 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 서자 대주는 고개를 뒤로 젖혀 목 뒤의 근육을 풀었다.
모래먼지와 꽃가루가 누렇게 앞 유리로 날아와 차의 속력이 만드는 회오리에 휘말려 흩어졌다. 대주는 봄 외출이 싫었다.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자고 말해주기를 바라며 옆자리에 앉은 아내를 바라봤다. 아직 바람이 찬 초봄이었다. 맨다리에 짧은 바지와 속이 비치는 꽃봉오리 시스루를 입은 아내는 유원지 들판에 내리자마자 춥다고 투덜댈 게 뻔했다. 대주는 일기예보가 알려준 기온만 믿고 여벌옷을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연애 시절, 아내에게 벗어줄 요량으로 얇은 겉옷을 일부러 입었던 때도 있었다. 자신의 큰옷을 걸치고 있는 아내를 볼 때나 자신의 주머니에 아내의 손을 들여 만지다보면, 그런 사소한 일이 대주에게 주는 소속감이나 평안에 놀라곤 했다. 아내는 거울을 보고 눈가를 톡톡 두드리곤 선글라스를 꼈다. 다른 날보다 화장이 짙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부터 노출이 심한 옷을 골라 입는 아내였다. 꼭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시를 쓴 것처럼.
“담에는 그 자식을 싱크-홀에 빠뜨려야겠어. 푸하하. 자식이 순둥이처럼 파닥대며 떨어져 머리가 퍽, 깨지겠지? 크흐흐.”
그 자식은 우에게 약을 올린다는 초등 2학년 같은 반 아이었다. 만화영화에서 개구쟁이 짱구가 개 순둥이를 괴롭히듯 친구의 머리를 박살내겠다고 우는 말했다. 머리뿐이 아니었다. 팔다리는 마네킹의 그것처럼 해체되었고 눈알도 뽑혀 나와 싱크-홀의 벽 이곳저곳에 공처럼 튀어 다니다 짓이겨졌다. 아무리 친구가 밉다 해도 우의 말은 지나쳤다. 대주는 어젯밤의 회식자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자리였다. 왜 그랬을까. 기분이 언짢았다. 대주가 위안을 받고 싶으면 으레 그러듯 아내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살갗을 비비는 단순한 동작에 마음을 두어도 의식이 아내를 떠나 술자리로 달려갔다.
“빨간불! 자기야, 정신 차려.”
아내가 다리에 얹힌 대주의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내가 운전한다니까. 저쪽 가로 차 세워 봐.”
“괜찮아.”
“아이 술 냄새, 아직도 난단 말이야.”
“아빠 입 냄새는 똥구멍이야. 순둥이 똥구멍, 똥구멍.”
우가 아내의 말을 받아 대주를 놀렸다. 대주는 아이 쪽을 향해 하아, 숨을 뱉었다. 우는 냉큼 뒷좌석으로 물러앉아 혀를 쏙 내밀곤 순둥이 똥구멍에 붙은 파리나 먹으라고 말했다. 집에서 저런 말을 하면 아이를 소파로 던져 몸을 덮치고 간지럼을 태워 항복을 받아내곤 했다. 대주는 뒤로 팔을 뻗어 휘저으며 녀석을 잡아채는 시늉을 했다. 아이는 깔깔 웃으며 좌석 구석에 딱 붙어 웅크렸다. 그렇게 우와 장난치며 몸을 움직이고 나니 머리가 좀 개운했다.
대주는 어디든 등을 기댈 데만 있으면 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한 나들이를 망칠 수는 없었다. 아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물 문화관이라는 디아크 로비에 들어서자 미니어처 인물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팅맨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남자는 발가벗어 성기를 드러낸 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대주는 놀랐다. 인물상이 하나였다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주의 팔뚝만 한 그리팅맨은 오백 개나 되었고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모양, 똑같은 파란색이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남자가 디아크의 둥근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지만 떼로 몰려 있는 것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그리팅맨에서도 느껴졌다. 대주는 인상을 찌푸리고 인물의 내리깐 눈매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가 유니크하다고 했지? 문화충격 좀 받아야 돼, 당신은.”
새파란 놈이 줄지어서 발가벗고 인사하는 조각상을 이제 봤다고 아내가 이죽대는 게 싫지 않았다. 대주가 어젯밤처럼 술을 마시고 늦게 오거나 자기가 한 청을 거절하면 아내는 투정 같은 복수를 했다. 대주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귓불을 만졌다. 아내가 팔을 대주의 허리에 두르면서, 좋지? 라고 물었다.
“진짜 독특한데.”
대주의 수긍에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팅맨의 몸은 통통했지만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이상한 건 벌거벗은 남자의 정중한 인사가 어젯밤의 술자리와 더불어 공 계장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공한나는 이름 그대로 숫자 영을 하나씩만 움직여 소도시의 말단 심부름꾼에서 광역시의 계장까지 올라온 통계과 직원이었다. 그 직책을 맡은 직원의 평균 나이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고 요즘 세상에도 남자가 대다수인 부서에서 여자였다. 오백 개 그리팅맨의 인사는 위압적이었다. 그 효과가 공 계장의 인사와 같다고 말하면 아내는 이해할 수 있을까. 공한나는 허접한 일이라도 아주 열심히 했다. 일하느라 결혼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공의 통계수치는 교묘했고 그것 자체로 완벽했다. 부서의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수십 개의 지점은 물론 전국 규모의 산출과 집계가 우리 부서에서 이루어졌다. 공 계장은 기대치까지 예상해 모두의 마음에 드는 임계값을 제시했다. 공의 집에 가 본 직원의 말에 의하면 서른 평형대의 아파트가 세계에서 수집한 통계자료로 가득 찼더라고 했다. 일에는 진지하고 악착같은 공이 인사를 할 때면 사람이 달라졌다. 접대 전문가처럼 아주 나긋나긋하면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의 인사가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그것처럼 가식이라고 동료 직원끼리 숙덕댔지만 공한나에게 고개 숙여 맞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주는 자신을 밟고 올라서려는 공한나의 곰 같은 몸집과 무표정한 눈을 피하지 않으려 기를 썼다.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우를 가리켰다. 녀석은 사람의 눈이 없는 구석에서 그리팅맨의 아랫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대주는 피식 웃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내가 안내하는 대로 둘러보고 있어도 그리팅맨의 깍듯한 인사가 공 계장의 것과 겹쳐 머리가 무거웠다. 아이는 터치스크린을 누르며 다른 꼬맹이들과 몰려다녔다. 대주는 계단 아래의 구석자리 소파에 앉았다. 짙은 물속처럼 꾸며놓은 아늑한 공간에 검푸른 조명이 일렁였다. 아내가 책을 뒤적이다 전화를 받고 스크린 물속에서 첨벙대는 아이의 동선을 확인하느라 대주 곁을 떠났다 다가왔다 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대는 틈새로 어젯밤 가요주점에서 주고받던 술잔이 겹쳤다.
대주는 둔탁하게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아내의 시스루 꽃봉오리와, 숨바꼭질하듯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다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빈 도마질을 했다. 새벽에도 구첩반상을 차려내면 밥그릇을 싹 비웠다던 아버지와 살면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대주가 문제집 세 장을 푸는 내내 칼질이 끊이지 않았는데, 저녁상엔 토막 난 오이 한 접시가 놓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에도 어머니는 요리를 했고, 대주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동안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십 년이 지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인정했다.
어머니와 달리 대주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학교나 군대로 값비싼 시계를 보냈다. 홍콩이나 볼리비아의 주소가 찍힌 국제우편이었다. 대주는 그 시계를 팔아 여자를 샀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대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시계를 없애버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왜? …… 어머니는 아버지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다른 얘기에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다. 대주는 어느 때부터 자신에게 캐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이유에 대해.
결혼 직후 신혼집에서 받은 소포는 아버지가 보낸 마지막 시계였다. 어떠한 메모나 언급이 없었지만 그냥 알았다. 시계는 오래된 사진에서 본 어머니의 결혼예물이었다. 아내는 대주의 얘기를 들으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태엽도 감고 팔목에 차 무게를 재듯 아래위로 흔들고 난 후 상자에 넣었다. 대주는 그것을 팔지 않고 간직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오르는 시계였다. 툼레이더나 시간여행자 같은 영화를 본 뒤 대주는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가 시계에 비밀을 숨겨, 자신의 자취를 따라오길 바라며 아들에게 보낸 것일까. 그 생각이 든 날 전문가에게 시계를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눈알현미경으로 살펴본 뒤, 시간을 알리는 최소한의 부속뿐이라고 했다. 영화에서처럼 미래나 비밀의 세계를 상징하는 표식은커녕 흠집조차 없다는 말은 대주를 실망시켰다. 이후 대주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시계를 재물의 가치로만 생각했다. 은밀하게 물려받아 간직하는 금괴 하나쯤으로. 직장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시계는 사업밑천이 되었다. 또 다른 날엔 아버지와 다르게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삶을 마감한 후,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작은 소망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시계는 대주에게 기이한 부적 같은 무엇이었다.
자지러지는 아이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아내가 대주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세 살쯤 된 아이가 형으로 보이는 아이의 손에 든 장난감을 가리키며 울고 있었다. 아내가 대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지나치는 동안 울던 아이는 어른에게 안겨 거세게 버둥댔다. 아내를 따라 강변으로 나가자 풀밭에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우가 아내의 폰으로 게임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내는 녀석에게 휴대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우는 몸을 휙 돌리며 더욱 맹렬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하지만 기어이 아내에게 폰을 뺏기자 대주를 보며 입을 내밀었다. 대주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자 아이는 킥보드를 툭 차는 것으로 게임을 포기했다. 우는 킥보드를 잡고 일어섰다. 쏜살같이 튀어나가려는 우를, 아내는 재빨리 잡아챘다. 우가 음식 앞에서 고개를 저으면 아내는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녀석은 김밥을 입에 넣고 나서야 광장으로 킥보드를 몰았다.
“김밥은 언제 쌌어?”
오이김치를 젓가락으로 집던 아내는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대주를 봤다. 그러곤 웃으며 눈을 흘겼다.
“아이 참, 오이소박이는 언제 담았는지 알아?”
“모르지.”
대주는 아내를 따라 웃었다. 아침에 김밥 마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었는데 아내는 대주의 무관심을 타박했다. 국에 밥을 말아 먹은 뒤 아이의 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내는 몇 개나 된다고 그걸 먹어, 라며 대주의 팔을 때렸다. 아이의 도시락은 손바닥보다 작았다. 대주는 우에게 먹이라는 뜻으로 불고기를 가리키곤 아내의 무릎에 드러누웠다. 아내의 김밥은 대주의 혀가 기억하는 모든 김밥보다 맛이 좋았다.
“다음부턴 김밥만 싸.”
“싫어하잖아.”
“내가 뭐 앤가. 아무 거나 먹으면 되지.”
“나도 그냥 도시락이 좋아. 목도 안 막히고.”
대주는 아내의 옆구리 살을 더듬었다. 아내는 간지럽다며 몸을 뒤틀었다. 과일을 집어 자기도 먹고 대주 입에도 넣어 주었다.
“이쪽이 낙동강인가?”
“저기 아파트 단지가 성서면 이게 금호강일 거야.”
강폭은 넓은데 비해 물이 얕았다. 바지를 걷으면 걸어서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으로 내려가는 비스듬한 비탈엔 작고 가녀린 봄풀이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보인다고 했다.
“시 수업은 어때?”
등단 후 지역 문단에서 호평을 받고 왕성한 활동을 하며 문화센터에서 강의까지 맡은 아내였다. 저녁반도 개강하자는 말을 아내는 거절했단다. 우에겐 아직 엄마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학원을 거쳐 박사가 되고 싶다는 아내는 그 모든 일을 우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로 미뤄놓았다.
“시 반? 어디나 마찬가지지. 문화 한량이 있고 시에 자신을 건 사람도 있어. 시를 쓰면서 낭송을 배우는 여사님 있다고 했잖아. 기억나? 목소리가 구수하다고, 저번에 얘기 했잖아. 수업을 그 여사님이 읊는 시낭송으로 시작하거든. 자긴 시낭송 안 들어봤지? 아나운서가 북한사람 말투로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돼. 약간 웃기거든. 근데 그게 중독이 되나 봐. 여사님이 결석해서 낭송을 안 들은 날은 뭔가 허전해. 낭송을 듣는 게, 말간 햇빛 아래에서 벗고 있는 것처럼 낯이 간지러운데도 말이야.”
아내는 시 창작을 배우는 수강생 전부가 거짓말을 하는 한 사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거짓말이 끝이 없다고 투덜댔다. 누가 누구랑 사귀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봤다며 우기고 다툰다고 했다. 단어가 두 개만 중복돼도 표절이라고 다른 수강생을 몰아붙여 중재를 하느라 진땀을 뺀다고 했다.
“커피 마시자.”
대주가 보온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흙먼지가 날리자 아내가 도시락뚜껑을 닫았다. 돗자리를 깐 곳은 건물에 가려 바람이 적은 곳이었다. 강변이라는데 자갈이나 모래는 보이지 않고 풀과 나무, 강물이 전부였다. 광장에도 보도블록이 빽빽이 깔렸는데 끊임없이 흙바람이 불었다. 대주는 바람을 등지고 아내를 껴안듯이 마주보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아내가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짓는 웃음은 묘했다. 향을 음미하느라 입 안에 머금고 있다 삼키고 입술을 핥는 표정이 섹시했다. 대주는 아내의 뺨에 앉은 티끌을 털어냈다. 아내가 거울을 꺼내 얼굴에 선크림을 덧바르고 대주에게도 발라준 다음이었다. 우가 돌아왔다. 멀리까지 갔다 왔는지 우는 땀에 흠뻑 젖었으면서 콧물을 훌쩍였다.
“아빠, 내가 정답을 알아왔어.”
“정답?”
“응. 돌고래처럼 생긴 저게 물방울이라는 거야, 그 자식이. 이해할 수 없잖아. 그런데 유식한 할아버지가 그랬어. 물수제비를 뜨면 물방울이 딱 저 모양이래. 자식이 물수제비도 모르더라고. 아빤 물수제비 알지?”
우는 물 문화관 건물을 가리켰다. 아이는 옳은 말도 또래의 사내애가 말하면 틀렸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대주는 대답 대신 물수건을 뽑아 아이의 콧물을 닦으며 코를 짓눌렀다. 대체 어디에서 아이의 심술보가 자라는 걸까. 아야. 우는 대주를 때리려 팔다리를 휘두르다 제 엄마에게 잡혔다. 아내는 아이를 앉히고 따뜻한 국물과 김밥을 먹였다.
“이쪽 강은 물이 왜 이렇게 쬐끔이야? 저쪽엔 정말 콸콸 흐른단 말이야.”
“무서웠어?”
“아니야. 헤라쿨레스에서는 저 물을 다 마셔도 배가 안 불렀어. 난 마셔봤거든. 근데 아빠, 자전거 타고 싶어. 두 명이 타는 거. 내가 앞에 탈거야.”
아이는 순식간에 밥을 마셔버리곤 대주에게 자전거 대여점을 가리켰다. 아이가 자전거 앞자리에 앉아 제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내도 차 트렁크에 물건을 넣다가 손을 마주 저었다.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보니 근처가 꽤 넓었다. 자전거 길은 춘천까지 이어진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었다. 대주의 마음은 꼬불꼬불 산길과 들판을 가로지르는 라이더나 된 듯, 하늘 끝 먼 데를 바라보며 페달을 밟았다. 우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서서 페달을 밟아보더니 힘들다고 관두었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곡예를 하듯 의자에 올라가 쪼그려 앉거나 몸을 돌려 대주를 마주보고 키득대기도 했다. 몸을 틀고 오르내리는 것을 몇 번 하더니 이마에 땀이 맺힌 우는 내리겠다고 했다. 대주는 아이를 광장에 내려주고 난 뒤 아내를 태웠다. 아이와는 세 바퀴나 돌았는데, 아내가 춥다며 몸을 움츠려 광장을 다 벗어나기도 전에 되돌아왔다. 자전거를 돌려주고 실내로 들어왔다.
주머니가 부르르 떨었다. 아내와 우는 영상 쇼를 보겠다며 2층의 꼬불꼬불한 실내계단을 휘돌아 갔다. 온통 음악소리와 고함과 탄성이 벽과 천장에 부딪혀 왕왕 울렸다. 대주는 3층 전망대의 구석진 곳으로 가 휴대폰을 받았다. 같은 부서의 동료였다.
“부장님 전화 받았어?”
술은 좀 깼느냐, 공 계장이 오늘도 출근해 일을 하더라, 등의 잡다한 이야기 끝에 동료가 물었다. 대주는 고개를 저으며, 부장이 자신에게 할 말이 뭘까, 생각했다.
“어젯밤 일 말인데, 부장님이 함구령을 내렸어. 요즘 같은 시국에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다고 했다네.”
“무슨 일?”
대주는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는 지점을 내려다보며 찰나에 자신의 노선을 정했다. 어젯밤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내내 기분이 언짢은 하루였다. 동료는 생각 안 나냐고 다그쳐 물었다.
“끝까지 갔잖아, 어제.”
“그래, 필름이 끊기도록 갔지. 젠장, 술을 끊어야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아니. 술자리 일을 그렇게 말 할 수야 있나…… 그냥 그랬지 뭐.” 대주는 어디까지 아는 척을 할까, 잠깐 망설였다.
“마지막 폭탄주는 누가 돌렸지? 김 과장이었나. 공 계장 닮은 기집애가 자네 옆에 앉았지, 그렇지? 그리고 폭탄주가 여러 번 돌아간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계집애 하나가 미성년자라는데……. 김 계장, 그 개자식은 손버릇이 더러워서…… 그렇다. 밖이야?”
전화기로 동료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가 캭, 들렸다. 대주는 가래침이 자신의 몸 어딘가로 날아와 들러붙을 것 같아 몸을 움찔 피했다.
“아이 데리고 유원지 왔어. 말 돌리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 봐. 함구령은 또 무슨 말이야?”
“아냐…… 기억도 안 나는데 뭘. 필요 없지, 그런 건……. 사무실에서 보지.”
“재미있는 일은 같이 알자. 응?”
둘의 마지막 말은 겹쳐서, 재미있는 사무실에서 일 같이 보자로 마무리가 됐다.
그 계집애가 공만 닮지 않았어도 술상을 치우고 자리를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미성년자라니.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시는 아득하게 멀었다. 몇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강둑 너머의 수십 층 아파트가 저렇게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주는 자신이 이곳에 고립된 것처럼 느꼈다. 개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주류고 자신은 외곽으로 밀려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작은 공간에 구겨져 처박힌 기분이었다. 마음을 죄어오는 그 공간을 부셔버리기 위해 사고라도 치고 싶었다. 어젯밤에 이런 기분으로 술상에 올라간 걸까. 난 여기서도 할 수 있는데. 계집애가 노래방 기기의 화면에서 보여주는 야한 장면을 가리켰다. 김 계장이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고 계집애는 술과 안주가 번들번들하게 쏟아진 탁자 위를 손가락질 했다. 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폭탄주를 몇 잔이나 마셨다. 계집애는 무표정이면서 비웃듯 입매를 살짝 일그러뜨려 웃었다. 대주는 계집애가 공한나인 듯 마구 다뤘다.
아내는 코코아와 커피가 든 잔을 들고 전망대로 나와 대주에게 다가왔다. 대주가 의자를 당겨 옆에 자리를 만들자 아내가 앉았다. 우는 아이들이 몰린 곳으로 뛰어갔다. 실외 전망대는 골지처럼 홈이 파인 방부목으로 바닥 장식을 해 고급스러워 보였다. 건물 전체가 물수제비나 물방울을 상징한다지만 그건 외부나 하늘에서 본 형태일 터이고, 안에서 보기엔 럭비공의 속을 파내고 그 끝을 둥글게 잘라낸 뒤 요리조리 모양내어 말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쪽 끄트머리는 커피전문점과 계단이 있는 실내였고 반대편엔 옥상 수조였다. 수조는 꼭대기 층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배가 볼록한 반달모양의 수조는 어린이 수영장만큼이나 컸다. 남색 타일바닥 위로 물을 얕게 채웠고 그 물은 중심부에서 가 쪽으로 졸졸 흘러내렸다. 넓은 하늘이 수조에 가득 비쳐 실제보다 크고 깊게 보여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수조를 두른 목책과 전망대 난간 사이에는 작은 둘레길이 나 있었다. 녀석과 아이들은 반달 모양의 그 길을 따라 빙빙 돌아다녔다. 한 아이는 목책에 다리 하나를 걸치고 어른이 있는 쪽을 둘레둘레 보았다. 다른 아이는 차마 다리를 걸치지는 못하겠는지 목책 너머로 자기의 분신인 쓰레기를 슬쩍 떨어뜨렸다. 꼬마 예술가들은 물에 들어가고 싶은 염원을 그렇게 표현했다.
“맛은 정말 떨어진다. 그치?”
아내는 실내 전문점에서 사온 커피를 마시며 코를 찡그려 보였다. 대주도 아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머리띠처럼 올렸던 선글라스를 내려 썼다. 얼굴의 반이 시커먼 안경알에 가려졌다.
“맛이야 당신이 내린 커피가 최고지. 이번 거는 르왁인가? 첨엔 신맛이 나고 삼키고 나면 단맛이 남더라.”
“응, 제일 좋은 건 아니야. 중급치곤 맛이 괜찮지.”
아내는 커피를 많이 마셨다. 커피홀릭이었다. 아내도 자신의 중독을 인정했다. 대주는 아내의 한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아내 말처럼 자신은 스킨중독인지도 몰랐다. 아내는 대주에게 잘 생각해 의견을 말하라고 한 뒤 학원 몇 군데의 장단점을 꼽았다. 그 중 한 곳으로 우가 다니게 될 것이었다. 대주는 시간을 끈 뒤 대답했다. 대주가 아내의 질문을 충분히 고려하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주의 기준은 아내가 장점을 감추듯 가볍게 슬쩍 흘린 학원을 골라 의견을 낸 것이었다. 아내는 대주의 선택에 활짝 웃었다. 자신의 의견을 깊이 숨기고 숨바꼭질 하듯 상대를 떠보는 아내의 버릇은 시를 쓰면서 더 교묘해졌다. 대주는 자신이 아내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아내를 즐겁게 할 수 있어 기뻤다. 우가 다가오자 아내는 식은 코코아 잔을 내밀었다. 우는 그새 친해진 아이에게 다가가 코코아를 나눠 주었다. 아내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는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대주에게 손바닥을 보인 뒤 뒤돌아 커피점이 있는 실내로 들어갔다. 아내가 걸어간 계단참엔 다리가 길고 옷차림이 멋진 남자애가 서있었다. 나이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쯤으로 보였다. 아내와 몇 마디 주고받은 남자는 뒤돌아서 갔다. 아내는 전망대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고 섰더니 잠시 후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대주는 아내가 실내 찻집을 가로질러가 하체부터 한 계단씩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눈으로 아내의 뒷모습을 쫓아 고개를 빼들고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금방 올게. 문자가 왔다. 대주는 아내의 문자와 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이는 저보다 어린애를 뒤쫓으며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고 있었다. 대주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갈림길에 선 듯 아내가 내려간 계단 아래쪽의 빈 천장과 전망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가 다가와 손을 끌었다. 전망대의 턱을 가리키며 자신을 안아 올리라고 했다. 대주는 아이를 안고 전망대 난간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길을 내려다보며 아내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이쪽 강은 동촌유원지의 구름다리 밑을 흘러 이곳까지 왔어. 낙동강은 금호강을 만나 부산의 철새도래지인 을숙도까지 흐른단다. 네 엄마와 데이트하러 간 적이 있지. 갈대가 굉장히 많은 곳이야.”
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 소리를 냈다.
“이쪽은 도시의 남쪽이야. 지난달에 불빛축제 구경하러 스파밸리에 갔지? 이 방향으로 쭉 가면 그곳이 나와. 여긴 북쪽이야……”
대주가 전망대 난간을 따라 한 바퀴 돌고난 뒤 제자리 맴으로 몸을 빙 돌려 서자, 아이는 대주의 어깨에 머리를 거칠게 눕히며 볼멘 소리를 했다.
“아빠, 지구는 열심히 자전을 하고…… 우는 피곤하다.”
대주가 지리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알아챈 아이가 그를 저지한 것이었다. 대주는 큭, 웃었다. 전망대를 한 바퀴 더 돌려다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내를 본 것 같아서였다. 말은 피곤하다면서 발이 땅에 닿자 우는 아이들이 있는 물가로 뛰어갔다. 대주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아내였다. 아까 자전거를 탔던 강변로를 따라 아내와 남자애가 걸어가고 있었다. 우의 키로는 난간 바깥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젊은 애가 대학원에서 만난 클래스메이트거나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우가 둘의 모습을 보는 건 싫었다. 대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줌을 최대한 당겨 초점을 맞추는 동안 아내는 한 번 뒤를 돌아보았고, 어린놈이 주는 윗도리를 받아 입었다. 주변 풍경은 아까와 똑같았다. 롤러스케이트나 보드를 탄 애들이 광장을 가로질렀고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어른들이 일부러 팔을 크게 흔들며 걷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몸에 맞는 팬츠차림의 자전거 라이더들이 강을 옆에 끼고 벤치에서 쉬거나 달렸다. 둘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처럼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들이 대주에게서 멀어지고 강을 가로지른 수문에 다가갈수록 거칠게 흐르는 강물이 동영상에 잡혔다. 뒷모습만 보이던 두 사람은 다리 위로 올라가 카메라 화면에서 사라져버렸다. 대주는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지? 곧 해가 질 텐데……. 대주는 아내가 이곳으로 돌아오려면 많이 걸어야겠다, 라고 생각을 시작해 차를 몰고 데리러 가면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문자를 보냈다. 전송버튼을 누르면서 자신에게 자동차 열쇠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시락을 꺼내고 돗자리를 넣느라 아내에게 주었다. 비상키는 집과 차 안 서랍에 하나씩 있었다.
대주는 화장실에 가 우를 씻기고 자신도 볼일을 봤다. 자신의 휴대폰으로 아내 폰의 위치추적이 되는지 검색해봤지만 서비스가 지원되지 않는다는 안내문만 떴다. 카센터 직원이 와서 차 문을 열어주고 갈 때까지 아내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우는 뒷좌석에 드러누웠다. 대주도 의자를 뒤로 젖혀 몸을 뉘였다. 아내가 건너간 다리 위로 검붉은 노을이 덮쳤다. 어린 대주는 창문으로 노을색이 짙어지기를 기다려 문단속을 했다. 기껏 방과 현관을 나서 학교에 다녀와, 닫을 문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슬렁어슬렁 시간을 오래 끌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고 나서 창문을 열고 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주방에 불을 켜고 안방의 티브이를 켜 타이머로 끄기 예약을 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아버지를 찾고 있을까. …… 불안이나 기다림도 익숙해진다는 걸 대주는 잘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휴대폰의 주소록을 뒤졌지만 아내 친구 셋과 처가 식구가 다였다.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현관문 열쇠 갖다 줘. 집에도 못가고 있어. 일 분이 지나고 이 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우가 게임을 많이 해 전화기의 배터리가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대주는 우가 잠든 뒷좌석을 돌아보곤 조수석 박스에서 펜과 종이를 찾았다. 엄마 찾으러 갔다 올 테니 차에 있으라는 메모를 써 아이의 머리맡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에게로 신호가 가고 있는 휴대폰을 들고 강변로를 달렸다. 주차장과 광장이 거의 비어 있었다. 헉헉대며 달려간 다리 너머엔 빈 들판이었다. 아까 찍었던 동영상을 다시 켜 자세히 보았다. 그들은 대주가 달려온 강변로를 걸었고, 대주가 서 있는 다리를 건넜으며 다른 도시의 구역 안으로 사라졌다. 들판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주는 밤처럼 깜깜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보에 걸려 쿨럭쿨럭 내뱉는 짙누런 거품조차 깊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검은 강 속으로 잠겼다. 바라보고 있으니 대주의 몸이 그 밑으로 빨려 들 듯 어찔했다. 고개를 들어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내를 찾으러갈 데가 없었다. 집으로 오라는 문자를 아내에게 보내고 뒤돌아섰다.
열쇠수리공을 불러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우는 씻지도 않고 침대로 올라가 내처 잤다. 대주는 자동차로 가 피크닉 짐을 옮겼다. 배가 고팠다. 낮에 먹다 남은 음식을 먹을 요량으로 도시락뚜껑을 열었다. 김밥이었다. 손을 댄 흔적도 없이 도시락 가득 모양내어 꽉 채운 김밥이었다. 대주는 8개의 통 뚜껑을 전부 열어 식탁에 펼쳐놓았다.
그러고 보니 똑같은 도시락이 두 세트였다. 점심에 먹었던 도시락 통을 한군데로 몰았다. 먹다 남은 딸기 위엔 마른 검불이 얹혔고 반찬과 밥이 반 너머 비어 있었다. 개봉하지 않은 도시락엔 김밥과 딸기, 씨 없는 청포도와 오렌지가 색색으로 담겼다. 과일은 대주가 먹은 것과 똑같았다. 맨밥과 김밥의 차이였다. 대주는 물방울과 하트 모양, 누드김밥을 차례로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디스플레이용 젤라틴 음식을 씹는 듯 질기기만 했다. 그래도 대주는 꾸역꾸역 김밥 한 통을 다 비웠다. 아내는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아내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식탁에 펼쳐져 있는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대주는 도시락을 식탁에서 냉장고로 천천히 옮겨 넣으며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줌을 누려는지 우가 방에서 나오며 바지춤을 더듬었다. 대주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가 변기 앞에 세웠다. 우는 오줌줄기가 끊어지자 털썩, 대주의 품에 기대며 중얼댔다.
“엄마, 너무 깜깜해. 무서워…….”
우는 꽉 잡아달라고 했다. 대주는 아이를 안은 채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문득 아버지의 마지막 시계를 받았던 신혼 초, 그 근래의 일이 떠올랐다. 아내가 연락 없이 하룻밤 집을 비웠다. 아내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다시는 그럴 일 없다고 울며 용서를 구해 덮어둔 일이었다. 아버지의 시계와 아내의 가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연결이었다.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면 날씨에 상관없이 강제로 입어야했던 교복이 떠올랐다. 철 이르게 두껍게 입은 동복 위로 쏟아지던 따가운 햇살에 끈끈하게 흐르던 땀, 꽉 껴안아도 멈추지 못하던 어머니의 칼질, 우산 없이 맞아야했던 추운 겨울의 빗줄기, 여름 장마……. 몸에서 나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도 피할 수 없었던 빛살처럼, 아버지에 대한 역겨운 기억이 이 밤에 다시 떠오르는 건 무슨 연유일까. 당연히 아내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내와 아버지를 관련 짓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속이 거북하고 머리가 아팠다. 아이를 침대에 뉘고 집 안의 불을 하나씩 켰다. 베란다로 가 창문을 열고 두 귀를 밖으로 내보냈다. 저녁에서 한밤중으로 가는 바깥의 소리를 몰두해 들었다. 사람이나 사물의 수런거림이 잦아들며 자신 안의 외침이 크게 들리는 것을 대주는 속수무책으로 들었다. 아버지는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아내는 어디에 갔던 걸까. 오늘은? 구역질이 났다. 화장실로 가 변기를 끌어안았다. 토해도토해도 김밥은 끊임없이 역류했다. 내장이 뽑히는 것 같았다. 너무 피곤했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월요일엔 공한나가 버티고 있는 직장으로 출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가 집을 비워도 대주는 대학 수능을 치렀고 아버지는 시계를 지구 건너편으로 보냈다. 대주는 물로 입을 헹구고 침대로 갔다. 둥글게 몸을 말고 쪼그려 누웠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초침소리가 들렸다. 대주의 착각이었다. 아버지의 시계는 초침이 멈춘 지 오래였다. 정기적으로 먼지를 털고 관리를 하지만 시간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주의 귀에는 초침소리가 들렸다. 한 발 한 발 아내가 젊은 놈과 걸어가듯 초침소리가 서랍을 밀고 착짝, 밖으로 나왔다. 심장에 화살표 같은 침을 박아 넣듯, 불안이 뿌리를 심듯, 초침의 규칙적인 소리가 대주의 몸 안을 파고들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대주는 베개에 입을 묻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악, 야!
아이 씨, 죽여 버릴 거야……. 우가 몸을 뒤채며 발길질을 했다. 그 밤에 대주는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러 욕실에 다녀왔고 폰을 열어 아내의 소식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선 막다른 안식처를 찾은 듯 침대에 올라갔다. 잠 속을 떠다니는 초침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착착착…… 캭캭……착짝짝. * (200*87)
* 옥시모론: 모순 어법으로 뜻이 대립되는 어구를 나열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나 효과를
노리는 수사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