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청 http://www.gyeongju.go.kr/
경주문화관광 http://guide.gyeongju.go.kr/
신라 천년의 고도로서 풍부한 신라의 문화유산과 동질성을 고스란히 지켜온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이다. 1995년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경주군과 하나의 통합시를 이루었다.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양북면·양남면·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중부동·성동동·황오동·성건동·탑정동·황남동·월성동·선도동·용강동·황성동·동천동·불국동·보덕동 등 4개읍 8개면 13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44개). 시청소재지는 양정로이다. 면적 1,324.03㎢, 인구 277,185(2006), 인구밀도 209.4명/㎢(2006).
연혁
진한의 중심지였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6·25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우리나라 최대의 유물·유적이 보존된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많은 청동기 유물들이 경주시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신라의 전신이며 경주 6촌에서 성장한 사로국의 생활모습을 짐작케 한다. 57년 6부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했다. 65년(탈해왕 9)에는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307년(또는 503년이라고도 함)에 국호를 신라라 했다. 935년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했다가 987년 동경(東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 경주방어사로 강등되었으며, 1015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했다가 1031년 동경으로 환원했다. 이때 흥해(興海)·장산(章山)·수성(壽城)·영주(永州) 등의 속군과 안강(安康)·신녕(新寧)·자인(慈仁)·하양(河陽)·청하(淸河)·연일(延日)·해안(解顔)·신광(神光)·기계(杞溪)·장기(張鬐) 등의 속현이 있었다. 1202년 경주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 계림부윤으로 바꾸었다가 1413년 경주로 정해졌다.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했다. 1637년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독립했다. 별호는 금성(金城)·월성(月城)·낙랑(樂浪)·금오(金鰲)·문천(蚊川)이었다. 경주의 고읍으로는 대성군(大城郡)·약장현(約章縣)·상성군(商城郡)·임관군(臨關郡)·안강현(安康縣)·기계현(杞溪縣)·신광현(新光縣)·음즙현(音汁縣)·장진현(長鎭縣)이 있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으로 바뀌어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에 속했다. 1931년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다시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경주군과 통합되어 경주시라는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경주군, 대성군).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지맥인 동대산맥(東大山脈)과 단석산맥(斷石山脈)이 시의 동부와 서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어 시의 지세는 크게 동쪽의 해안지역, 중앙의 분지지역, 서쪽의 산악지역으로 구분된다. 해안지역은 급경사를 이루어 하천이 짧고 평야가 적다. 중앙의 분지지역에 해당하는 동지역은 토함산(吐含山:745m), 금오산(金鰲山:495m) 등에 둘러싸였으며, 하천에 의해 형성된 화강암 침식분지이다. 서쪽의 산악지역에는 도덕산(道德山:703m)·구미산(龜尾山:594m)·주사산(朱砂山:622m)·단석산(斷石山:827m) 등이 솟아 있다. 서면 인내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한 형산강이 시의 중앙을 북류하여 포항시를 지나 동해로 흘러든다. 복안천·남천·소현천·신당천·기계천 등이 형산강에 합류한다. 특히 금오산에는 수평·수직 절리가 발달하여 도깨비바위·고깔바위·탁자바위 등으로 불리는 많은 핵석(核石)이 발달했다. 인천(麟川)은 울산광역시 백운산(白雲山)에서 발원하여 금오산 서쪽을 따라 북류하다가 건천읍에서 동류하는 대천(大川)과 반월성을 감싸며 시가지 남쪽을 따라 흐르는 남천(南川)과 합류하여 서천(西川)이 된다.
이는 다시 덕동호(德洞湖)와 보문지(普門池)를 거쳐 시가지 북쪽을 따라 서류하는 북천(北川)과 합류하며, 경주시 현곡면 어림산(御臨山)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현곡천(見谷川)과도 합류하여 형산강 본류를 이룬다.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내남·건천·안강 평야 등 비옥한 평야지대는 신라 천년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기후는 산간분지에 위치한 관계로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낸다. 통합 전 경주시 지역은 연평균기온 13.2℃ 내외, 1월평균기온 -0.3℃ 내외, 8월평균기온 26.6℃ 내외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82㎜ 정도이다. 식생은 빈약한 편이다. 소나무·참나무·오리나무 등의 수목과 관목이 자라며, 시가지에는 버드나무·플라타너스, 그리고 수입된 이탈리아 포플러, 히말라야 삼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다. 한편 통합 전 경주군 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3.3℃ 내외, 1월평균기온 -0.3℃ 내외, 8월평균기온 26.6℃ 내외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98㎜ 정도이다.
인구
1995년 통합 이전 경주군 지역은 전체적으로 이촌향도 현상이 뚜렷한 인구유출지역이었다. 1965년 21만 171명으로 최대 인구를 기록한 이후 전지역에 걸쳐 감소추세를 보였다. 1970년 18만 8,122명에서 1980년 16만 7,171명으로 10년간 4만 1,572명이 감소하여 24.9%의 감소율을 보여 감소추세가 심화되었다. 이 기간에 양북면·산내면 등을 중심으로 인구가 감소했으며 상·공업적 기반이 비교적 갖춰진 안강읍은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던 지역이었다. 이곳의 전체인구 60%가 4개의 읍지역에 거주하며, 1990년 안강읍에 가장 많은 3만 3,169명의 인구가 거주했고, 산내면(4,822명)에 가장 적은 인구가 분포했다. 1990년의 인구이동 상황은 전입이 1만 1,248명, 전출이 1만 5,786명으로 전출인구가 많다. 전출의 경우 취업·자녀교육 등의 목적으로 주로 인근의 경주·포항·대구 등 도회지로의 전출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경주시는 통합 이전까지 매년 안정적인 인구증가 현상을 보여왔다. 1960년에 7만 5,953명, 1970년에 9만 2,093명, 1980년에 12만 2,038명, 1990년에 14만 1,895명으로 꾸준한 인구증가를 보였다. 1970~80년에는 32.5%의 증가율을 나타냈으며, 1980~90년에는 16.2%의 증가율을 나타내, 1980년대 이후 인구증가 경향이 다소 둔화되었다. 그러나 1995년 경주군과 통합조치로 인구가 격증하여 1990년 14만 1,895명에서 1995년 28만 159명으로 무려 97%의 인구증가율을 보이게 되었다. 시 전체인구의 47%가 읍·면지역에, 53%가 시내에 해당하는 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산업과교통
우리나라 제1의 관광도시로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전체 취업인구 중 40%가 3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밖의 산업은 다소 부진한 편이다. 경지면적 243.59㎢ 가운데 논이 169.57㎢, 밭 74.02㎢로 논이 경작지의 70%를 차지한다(2006). 형산강 유역의 비옥한 분지평야를 중심으로 곡물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곡작물인 쌀·보리 외에 콩·옥수수 등이 주요 작물이며, 이밖에 배추·무·등의 채소류와 과일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사과는 건천읍·강동면·천북면, 배는 서면, 양남면, 포도는 건천읍·안강읍 등을 중심으로 생산되지만 경지면적과 농가구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건천읍에서 생산되는 양송이는 통조림으로 가공하여 수출한다. 축산업은 한우·젖소·돼지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수산업은 전반적으로 쇠퇴한 편이다. 해양수산부 지정 어항인 감포항은 상대적인 교통조건과 하부시설의 미비로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 제조업은 중·소규모의 경공업 위주이며 안강읍의 풍산금속, 천북면의 동서산업 경주공장, 외동읍의 태화방직 등 총 728개 공장이 있다(2006). 지방특산물로 시래동에 전통 곡주 제조업체인 경주교동법주 양조(주) 공장이 있어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생산규모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신라의 수도로서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1920년대까지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대구와 함께 영남의 상권을 주도했다. 1960년대 이후 교통발달과 인구성장으로 기존의 정기시장이 점차 상설시장으로 발전하여 지금은 8개 상설시장과 경주백화점이 있으며 9개 정기시장이 있다. 또한 관광산업의 성장과 관련하여 힐튼 호텔, 경주조선 호텔 등 호텔 15개소, 숙박업소 276개소, 음식점·휴게실 2,817개소가 있다.
유물,유적관광
경주는 신라 천년의 문화유산은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자연박물관이다. 국가지정문화재(국보 31, 보물 81, 사적및명승 77, 천연기념물 3, 중요무형문화재 2, 중요민속자료 16)와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0, 기념물 17, 무형문화재 2, 민속자료 4) 및 문화재자료 42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강동면과 천북면 일대에 고인돌이 밀집해 있으며, 1968년 이후 지정된 경주국립공원 8개 지구인 남산·서악·화랑·소금강·토함산·단석산·대본·구미산 지구 등이 있다. 특히 남산지구(사적 제311호)는 그 자체가 거대한 노천박물관으로 36개 계곡에 110개의 절터와 61개의 석탑 및 78개의 불상이 산재해 있다. 노동동고분군(사적 제38호)·황남동고분군(사적 제40호)을 비롯한 다수의 고분군과 무열왕릉(武烈王陵:사적 제20호)·괘릉(掛陵:사적 제26호)·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등:사적 158호)·오릉(五陵:사적 제172호)·현곡면오류리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불국사·석굴암과 남산 일대의 유적이 대표적이며, 그밖에 분황사(芬皇寺)·백률사(栢栗寺)·기림사(祇林寺) 등의 현존 사찰들과 황룡사지(黃龍寺址:사적 제6호)·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사적 제8호)·감은사지(感恩寺址:사적 제31호) 등의 절터에 많은 유물·유적들이 있다.
그밖에 구황동3층석탑(국보 제37호)·나원리5층석탑(국보 제39호)·정혜사지13층석탑(국보 제40호)·서악동마애석불상(보물 제62호)·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골굴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 등의 불교문화재와 월성(月城:사적 제16호)·임해전지(臨海殿址:사적 제18호) 등의 성 및 궁궐터, 첨성대(국보 제31호)·계림(鷄林:사적 제19호)·포석정지(鮑石亭址:사적 제1호) 및 아사달·아사녀의 전설이 얽혀 있는 영지(影池)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건물이 밀집해 있는 강동면 양동민속마을, 천도교 성지인 용담정(龍潭亭)도 유명하다. 또한 조선시대의 유물·유적으로 경주읍성(사적 제96호)·옥산서원(사적 제154호)·석빙고(石氷庫:보물 제66호) 등이 있다.
경주는 우리나라 10대 관광권 중의 하나로 1974년 이후 경주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3개 사적지구의 문화재 복원·보수·정화 작업과 함께 대규모 위락시설을 갖춘 보문단지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종합위락관광단지를 조성했으며, 1979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 10대 유적지로 선정된 바 있다. 경주관광개발사업이 완료된 1979년 이후 관광사업은 더욱 활성화되어 2006년 관광객이 연중 720만 명으로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교육과문화
화랑도의 오랜 교육전통이 뿌리내린 지역으로 신라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세워졌고 조선시대에 와서 그 자리에 경주향교를 재건했다. 전통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의 옥산서원·용산서원 등 다수의 서원과 서당이 있으며 초창기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개교한 계림학교(경주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계림초등학교), 안강읍의 경주사립옥산학교(지금의 옥산초등학교) 등을 들 수 있다. 2006년 현재 유치원 66개소, 초등학교 46개교, 중학교 19개교, 고등학교 20개교가 있고, 서라벌대학과 경주대학교,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위덕대학교가 있어 문화·교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밖에 신체장애자 아동을 위한 경희학교가 있다.
경주지방에는 전설에 얽힌 3기8괴(三奇八怪)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각 유적지마다 수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민속놀이로는 세시에 따라 행해지는 사자놀이·풀놀이·관등놀이, 추석의 기원과 관련된 가배놀이 등이 있으며 양동마을의 줄다리기 호미씻기가 대표적이다. 지역내 곳곳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해안지방에서는 용왕을 모시는 별신굿이 행해진다. 특히 풍신인 영등할머니전설과 관련된 음력 2월의 영등(靈登)은 해안지방에서 중요시되었다. 민요는 아주 다양하여 〈지신밟기노래〉·〈보리타작 노래〉·〈모내기〉 등의 노동요와 〈방아타령〉·〈베틀노래〉·〈항굴래비노래〉·〈어사용〉·〈경주고적가〉 등이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