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6월 30일(주일)
누가복음 17:20-37
”고난 받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지난 24일(월), 경기도 화성시에서 리튬 배터리 공장 화재 사고로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 23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왜 이런 대형 참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요?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라는데요.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레 19:33~34)
성서는 함께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한국 땅에 살아가는 외국인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난민(難民)들의 처우개선(處遇改善)과 인권에 우리 정부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16일(일),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주 팔복동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19살 청년 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일기장과 메모장에 적힌 내용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어린 청년의 메모장에는 자기 계발, 회사 생활, 저축 등 미래에 대한 목표가 세세히 담겨있었지요.
2024년 그의 목표가 이랬습니다.
”‘남의 이야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기’, ‘기록하는 습관 들이기’, ‘구체적인 미래 목표 세우기’, ‘운동하기’, ‘미술·사진 등 예체능 계열 손대보기’“
그리고 친구들에게 돈을 아끼지 말고 사진을 많이 찍어두자는 목표도 덧붙여 놓았지요.
또 그의 인생 계획에는 이런 게 적혀 있었습니다.
”‘일본어, 영어 등 다른 언어 공부하기’,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경제에 대해 공부하기’, ‘살 빼기’, ‘사진에 대해 알아보기’, ‘악기 공부하기’“
그리고 일본어, 영어 등을 배우기 위해 독학 기간을 정한 뒤 책을 사고, 인터넷 강의를 찾아보겠다는 보다 구체적인 계획도 적어뒀어요.
그러고 보면, 열아홉 어린 청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꿈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쓰임새별로 통장을 분리하고 월급 대부분을 저축해 목돈을 마련할 계획도 세워두었고요. 이다음 군대에 갔을 때 받는 월급도 고스란히 저축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2027년 2월까지 6,000만 원을 모으는 것이 그의 소소한 목표였지요.
그의 메모장에는 직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적어두었지요. “조심히 예의 바르게 일하겠음. 성장을 위해 물어보겠음. 파트에서 에이스 되겠음.” 심지어 신입 사원 환영회를 앞두고 “잘 부탁드립니다. 건배!”라는 문구까지 적어둘 정도로 계획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하려면 자기가 일한 설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의 사항까지 세밀하게 적어두었을 정도였어요.
이렇듯 그는 꿈 많고 건실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습니다. 회사가 청년에게 홀로 배관 점검 업무를 맡기지 않고 2인 1조 회사 규정만 지켰더라면 청년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회사는 안전 관리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경기도 화성시 아리셀 제조공장의 참사와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을 열아홉 살 어린 청년의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며 열아홉 살 청년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우리의 자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아프고 가슴이 아립니다.
현재 서로 적과 적으로 맞선 남북 관계로 전쟁 위기에 내몰린 우리의 현실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가난한 자 등 불평등과 인권 사각지대에서 지금도 가슴을 치며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 마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더 이상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도움받지 못하는 괴롭고 외로운 형편에 놓인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은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다른 게 아녜요.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없게 하는 거예요. 차별과 불평등이 없게 하는 거예요. 눈물과 슬픔이 없게 하는 겁니다. 괴롭고 힘들고 아픈 사람이 없게 하는 거예요.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줍니다. 책임을 져주는 거예요. 남 탓하기보다는 내 탓이라고 말합니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저항합니다. 타인을 높여주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웃게 만듭니다. 상대가 빛나도록 만듭니다. 나는 겸손하게 낮추고 타인과 세상이 밝아지도록 힘씁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 또는 천국(天國)이라는 다른 표현입니다. 오늘 누가의 말대로 하면 천국, 곧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지요. 하여 우리는 죽은 뒤에 구원받는 게 아니라 지금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입니다.
흔히들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하면 사람들은 종말(終末)을 말하지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종말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종말론’(終末論)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상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들도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종말론을 달리 표현하면 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묵시(默示)란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에요. 하여 묵시록(黙示錄)이란 ‘묵시한 내용을 적은 글’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묵시적 종말론은 악의 체제가 막을 내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올 거란 기대이지요.
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풀어보면 이것은 단순히 소수 이단 종파가 부르짖는 세계 종말에 대한 예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더욱 절박해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 세상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오늘 삶의 자리에서 살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더불어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타인을 위해 자기 삶 전체를 희생하면(33절) 그곳에 그분이 계시는 거지요. 거기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지점을 명확하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가 과연 인자(人子), 곧 자신들이 기대하는 그분인가 관심을 보인 거예요.
당시 하나님 나라는 유대교의 핵심 주제였어요.
이에 평소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겠습니까?”(20절)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 그 시점과 시기를 물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 그 표징을 물은 거예요. 그들은 그 표징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가난한 예수』, 김근수 지음, 동녘, P.437)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인 표징이나 징조로 보는 게 아니라고 일축(一蹴)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오는 징조나 표징은 없다고 대답한 거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말은 표징이나 징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볼 수 있게 오는 징조를 거부한 거지요. 하여 하나님 나라가 오는 때와 장소조차 거론하지 않아요.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다고 말할 뿐이에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더불어 온 거예요.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에게 드러난 거예요(눅 10:9). 또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 거예요(눅 11:20). 하나님 나라는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져 줌으로써 우리 가운데 슬며시 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고 정의를 세워가며 평화를 퍼뜨리는 게 바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우리가 사는 거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질문하고 예수님이 대답하는 대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하나님 나라를 무작정 기대하지 말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살라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20~21절이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다루었다면 22~37절은 사람의 아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따로 구분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도, 사람의 아들 오심도 때와 장소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본문이 연결된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사람의 아들이 언제 오느냐로 주제만 바뀌었을 뿐이지요.
보십시오. 22~23절 구성은 20~21절의 문맥과 비슷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향해 사람의 아들 오심을 설명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오는 것에 대한 징조나 표징을 거부한 것처럼 인자의 오심도 역시 볼 수 있게 하는 표징과 징조를 거부하지요.
사람의 아들은 여기저기 어느 한 곳에 오지 않고 다만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세상 모든 곳에서 볼 수 있게 온다는 거예요.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현혹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극히 현실을 외면한 채 피안의 세계를 고집하며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있는 소종파나 이단 종파는 예수님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느니, 재림 예수가 누구니, 재림주가 언제 어느 장소에 임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헛소리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시한부 종말론뿐만 아닙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고 억압하며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적 모순과 불의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5절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람의 아들에 대한 기존 관념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25절은 사람의 아들이 오는 조건을 말한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 오느냐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먼저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문맥에 따르면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과 버림받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동안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기대를 깡그리 무너뜨리게 했기 때문입니다.-(『가난한 예수』, P.438)
예수님은 왜 제자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게 했을까요?
아마도 누가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이미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사실, 예수가 고난받고 버림받았다는 건 누가의 독자들에게는 의미 없이 들렸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저자 누가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닐까요?
그리스도가 영광에 앞서 수난받아야 한다는 신학적인 필요성을 누가는 느낀 거예요. 예수가 고난받고 배척을 당했음에도 사람의 아들로서 온다는 사실을 누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말하자면 누가는 메시아 예수가 사람의 아들임을 이 대목에서 강조한 거지요. 이뿐만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배척이 제자들에게도 역시 당하게 되는 수난임을 넌지시 말하고 싶은 거예요.-(『국제성서주석 누가복음(Ⅱ)』, I. 하워드 마샬 지음/강요섭 옮김, P.390)
그렇습니다. 누가는 고난의 중요성을 말한 거예요.
예수님의 고난이 지금 나의 실존적 고난과는 무관하다고 볼지 몰라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자기 십자가와 같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외면한 사람은 구원과 무관해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어요. 자기 십자가는 자기희생을 뜻합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리지 못해요. 개인 안전과 개인 구원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를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지금 맛볼 수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온 삶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아와 롯의 이야기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때가 어떤가를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와 롯 얘기에서 말하려는 의도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거예요. 전도자의 말로 표현하면 하루하루 그날그날에 최선을 다하며 충실하라는 뜻일 겁니다.
사람이 ‘지붕에 있다’(31절)는 말은 매우 위급하고 불안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31절은 이미 66~70년에 경험했던 유다 독립전쟁의 대재난을 빗대어 비유한 표현이랄 수 있어요. 전쟁 때 황급히 피난 가듯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때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리고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는 말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뜻이에요. 또 롯의 아내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의 아들을 의지하라는 거예요(31b~32절).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 갑작스러운 심판이 닥칠 거라는 말입니다.-(『국제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394)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는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날에는 사람들 사이에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기 때문입니다(34~35절). 34~35절은 심판 때 선택된 사람은 구원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멸망한다는 묵시록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주님,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37절)
지금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장소에 관해 물은 거예요. 장소에 대한 물음에 예수님은 비유로써 대답하지요. 죽은 시체에 독수리들이 모여들 듯 곧 버림받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의 아들이 임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종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충격적인 종말의 예는 어쩌면 당시 누가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오늘 우리에게 단지 경고하기 위한 건 아닐 겁니다.
다만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을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맡겨진 일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거예요. 이것은 단지 개인적 구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또한 그곳에 사람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화성 아리셀 제조공장의 참사와 열아홉 살 청년의 죽음을 대하면서 과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과연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어느 때까지 고난받고 버림을 받을까요?
아니 이런 물음은 어쩌면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고난받는 현장에서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하나님 나라는 세월호, 이태원, 오송, 화성 아리셀 공장 참사를 잊지 않고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와 나라를 위해 행동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와 그 또래의 수많은 청년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아파하며 더 이상 안타까운 죽음이 없어야 한다고 외치는 수많은 사람의 행동 속에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는 겁니다.
이제는 교회 공동체가 개인의 구원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와 사람의 아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입시다. 죽은 뒤에 가는 천국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와 내 가족, 내 교회만 구원받았다고 하는 게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인칭보다는 이인칭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는 거예요. 헌신과 희생이 담보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더불어 사람의 아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타인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거예요. 말하자면 고난받는 곳에, 아픔과 슬픔이 있는 곳에, 차별과 혐오와 억압과 고통이 있는 곳에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지금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외국인이란 이름으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행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늘 함께 있습니다.
열아홉 살 청년 노동자의 24년 목표 중에 “남의 얘기 함부로 하지 않기”가 있었지요. 이건 청년의 목표이자 꿈이었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산 거예요. 함부로 남을 헐뜯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록 열아홉 살 어린 청년이었지만 그는 인생 스승 같아요.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내 일, 내 가족, 내 직장에 애착을 갖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고난받는 이웃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기도 /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더 이상 참사는 안 됩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행동하겠습니다. 고난받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차별과 불평등이 있는 곳에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함께 하옵소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