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이루자
성호복•박종숙 가정
1. 통일교회 입교 2. 나의부모님 3. 출생과 어린시절 4. 축복과 동원 5. 공부를 시작하다 6. 일화를 퇴직하고 신동아건설로 7. 천주청평수련원건설본부장으로 8.천정궁건설 9. 선원건설사장으로 10. 선원건설 명예회장에서 물러나 공직자로
주요내용 : 원고 작성자 성호복, 초등학교 졸업반일 때 우리집에 동계 계몽전도 나온 사촌형에 의해 통일교회 입교,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에 매료됨, 예수님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이 인생의 지표가 됨, 목회자가 아닌 건설인으로서 사명 완수, 내적으로는 개인 완성과 가정완성을, 외적으로 복귀되고 완성된 천원동산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영원히 임재 하실 천정궁과 천원단지건설을 위해 정진하고 있음.
1. 통일교회 입교
1962년 12월 동계계몽전도를 나온 사촌형에 의해서 통일교회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으로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면소재지 기성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부흥회 때는 2km가 넘는 교회 새벽기도에 다녀와서 학교에 가곤 하였다. 기독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는 대단히 큰 축제다. 나는 연극에서 예수님 역을 맡았다. 그 역에 몰입하다 보면 예수님과 일체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통일교회에 인연이 되고 나서는 기성교회를 그만두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통일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는 중학교 진학이 쉽지 않았다. 면 소재지 초등학교에서 300여명이 졸업하였지만 고창읍내에 있는 고창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특별히 공부를 잘하던 나와 3명 정도였다. 당시 통일교회 다니는 학생들은 전교 학생회장, 연대장 등을 비롯한 비교적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리 선생님 한분도 그때 전도되었는데 훗날 리틀엔젤스학교를 설립할 때 서울에 올라와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때 우리를 지도하시던 지역장은 권영조 목사이셨다. 그분은 강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에 합격하셨으나 참부모님의 말씀을 따라서 대학을 포기하고 부산까지 걸어서 전도 나가는. 천리행군에 참석하신 정예대원 으로서 고창교회에 부임 하시여 뜨겁게 부흥이 되던 시기였다.
나를 비롯한 성화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길에 교회에 들러서 도시락을 드리고 가면 지역장님은 그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셨다. 나는 읍내에 사는 내 옆자리의 진종현이라는 학생이 도시락을 싸다가 나에게 주었다. 그는 다시 자기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곤 하였다. 그 친구를 잊을 수 없어서 환고향 시절에 찾아가 친구의 어머니에게 “그때 참 감사했습니다.”는 인사를 늦게나마 드렸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찾아뵙곤 하였다.
교회 식구들도 늘어나고 학생들도 늘어나자 교회는 단칸방에서 위 아래 두칸 방과 대청마루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임종대 이종철과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의 학생들이 교회로 하숙을 옮겨 아랫방은 목사님께서 사시고, 윗방은 우리 3명의 학생들이 사용하고 대청마루는 성전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하숙비가 한 달에 쌀 6말이었는데, 우리는 쌀 6말을 교회에 드리어 그 쌀로 목사님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식구들이 늘어나고 계속해서 새로운 식구 원리수련을 하는 관계로 15일이 되기 전에 쌀이 바닥이 나면, 가장 어린 나는 성미 사업을 하고 큰형들과 청년 식구들은 사업을 하였다
겨울방학, 한창 자랄 나이인 14살 어린 나이에 나는 7일 금식을 하고 집에 돌아갔다. 부모님께서는 한마디 나무람도 없이 보약을 해주셨다. 나는 그 후유증으로 영양실조가 되어 한동안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뒤로 돌아가!” 할 때 나 혼자만 듣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가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방학 때는 하계 전도와 동계 계몽전도를 나갔는데. 어머님께서 조그만 항아리에 김치와 콩자반 같은 것을 담아 머리에 이고 가져다 주시곤 하셨다. 어린 아들이지만 믿어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다. 그런 믿음의 조건이 있었길래 훗날 6500쌍 기성축복을 받으셨다.
2. 나의 부모님
아버님은 1917년 음력 10월 29일 출생하셨고, 어머님은 1918년 8월 20일에 출생하셨다. 일제 침략이 극심했던 시절, 조선의 선비 집안 훈장 할아버지 슬하에서 5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나셨다. 신학문을 하면 일제의 앞잡이가 된다고 생각하시던 훈장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시고 당신 서당에서 한문만 가르치셨다. 아버지께서는 친구들은 다 학교에 다니는데 당신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외로움을 일찍이 풍류로 세상 시름을 달래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형제분들의 우애가 남달라 농번기 모내기 때는 먼저 큰집 모내기를 하고, 가을 초가집을 이을 때도 큰집 먼저 이으시고 형제들 초가집은 나중에 이으셨다.
장남인 큰 아버지를 제외한 3형제가 일제 징용을 가셨다. 둘째 큰아버지 한분은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두 분은 살아 돌아오셨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을 원망하신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대개 일본을 원망하거나 원수 나라로 비난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777가정으로 축복을 받으신 누나가 음란한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딸 간수를 잘하라.”는 동네 친구 분의 비난 말씀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나는 내 딸을 믿네. 내 딸은 절대 그런 잘못 된 곳에 다닐 딸이 아니네.”라고 응답하시며 절대 믿음을 보여주셨다. 순회사님들이 집에 오시면 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시다가도 가마솥에 더운밥을 해서 정성껏 대접해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을 믿으셨다. 내가 어렵게 고창중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야 할 나이에 7일 금식을 하고,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오지 않고 계몽전도를 나가도 나무라시지 않고 믿고 지도해 주셨다. 아버지는 온화하고 근엄하시고 듬직한 분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3. 출생과 어린시절
나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5일 전인 1950년 6월 20(음력 5월 4일)일에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길에 나섰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위가 심했다고 한다.
지금은 남의 집 텃밭이 되어있지만,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목동리 구목 279번지가 고향이다. 태봉산을 마주하고 남쪽으로는 남촌마을이 북쪽에는 와룡마을이 다정하게 감싸주는 그곳에서 나는 부모님의 지극하신 사랑 속에 태어났다
집 뒤에 작은 배나무가 심어져 있고 안방과 작은방 그리고 부엌인 전형적인 초가삼간이었다. 아버지는 밖에서 걱정스런 모습으로 인줄을 맬 새끼줄을 꼬고 계시고 어머니는 방에서 혼자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을 낳으시던 모습이 아련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6•25사변으로 남편을 잃은 이모님께서 과부로 혼자 사시기가 어렵다고 우리를 당신이 사시는 무장으로 이사를 오라고 부탁하셨다. 내 나이 4살, 소달구지에 이삿짐 싣고 아산에서 무장까지 걸어서 갔다. 어머니께서 애지중지하던 다듬잇돌은 너무 무거워 아산 어느 소나무 밑에 숨겨 놓으셨다가 나중에 찾으셨다.
낯선 동네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장지매 마을에 도착했다. 십여 호 집들이 모여 사는 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그곳에서도 제일 부잣집인 이모네 집은 사랑채 위아랫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윗방은 불이 안 들어가는 냉방이라 사용하지 못하고 좁은 아랫방 하나에서 우리 가족들이 오순도순 살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우리 일곱 식구도 살기 어려운 비좁은 단칸방에, 나보다 한 살 위인 작은집 호석이 형이 나를 찾아 우리 집으로 계몽전도를 나와 여덟 식구가 되었다 40일을 함께 뒹굴며 지냈는데 그 어려웠던 시절, 형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생전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너무나 멋졌다. 이 한마디는 어린 나를 감동시켰고 평생을 함께하는 생애의 목표가 되었다.
4. 축복과 동원, 순교보다 더 어려운 축복
1978년 10월 말쯤 참부모님께서 약혼 매칭을 주관하셨다. 나도 약혼 매칭을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다행히도 맨 첫날 새벽쯤에 아버님이 “너, 너” 지정해 주셔서 참아버님께 경배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핏 키가 작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비로소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가로등은 없고 실내에서 비쳐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서 대상을 얼굴을 보았다. 첫인상은 “때가 묻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이 순수하구나. 저 도화지 안에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그릴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해보았다. 다음 날 여의도 집회가 있어 같이 참석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밝은 아침, 처음으로 만났는데, 어제 저녁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내가 좀 깔끔한 성격이라 다소 실망하였다. 약혼 후, 명동에 가서 밝은 하늘색 투피스와 꽃무늬 핑크색 실크 브라우스를 맞추어 주었다. 그런데 그 옷을 입고 데이트한 기억이 없다.
대상은 충북 괴산으로 임지를 떠났다. 나는 생활비와 함께 편지도 보내주곤 하였는데, 눈에 뭐가 씌웠는지 실제로 만나면 서로가 그렇게 안 맞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내가 좋아하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웃는 얼굴, 입는 옷, 좋아하는 색깔, 등 어쩌면 그렇게 나하고 맞지 않는지, 만날 때마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대상을 만나러 갈 때는 “좀 다정하게 대하여 주어야지.”라고 마음먹어 보지만, 막상 대상을 대해보면 왜 그렇게 보기가 싫은지,,, 옛날 어른들이 부부가 조화롭지 않은 경우를 두고서 “공방(空房)들었다.”라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3년 임지가 끝나고, 추가 임지도 끝나자, 대상은 우리 집에 들어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냉랭하게 지냈다. 대상 역시 아직 정식 축복도 받지 않은 어정쩡한 상태인데다 낯선 환경 속에서 어려운 시부모와 함께 하는 생활이라 많이 힘들어 했다. 그 처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도 내 마음이 힘들었다. 그런 상태로 지내다가 1982년 축복을 받았다, 40일 성별 기간이 지나 3일 행사를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정이 생기지 않았다. 40일이 끝나가는 날까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어렵게 3일 행사를 치루었다
축복이 끝나자마자 협회로부터‘ 3년 남편 동원’ 지시가 떨어졌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걱정 되었지만 말씀 앞에 순종하였다. 전북 기동대 생활을 하였는데 한 달에 20일은 활동하고 10일간은 사업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사업 목표를 달성하여야 며칠간 집에 돌아올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부부생활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 차제에 흥진님이 성화하셨으니 정성을 드리기 위해 성별생활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우린 일 년 가까이 성별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임지 생활을 하는 도중, 나이가 많은 대원들은 정년이 허락되어 임지 동원이 끝났다. 임지 동원이 끝난 바로 다음 날에 중동 리비아 건설 현장에 취업이 되어 나는 1년 동안 또 집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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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 반대편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갖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내와 먼저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운 기준에 아내가 도달하지 않는다고 나를 기준으로 삼고 대화하고 바라보니 으르렁대고 싸울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나를 내려놓고 아내의 입장에 들어가 아내의 수준으로 신앙도 생활도 맞추어가자.’ 이런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다소 홀가분 해졌다
귀국 후, 부부가 하나가 되고자 신앙하기 좋은 대내기업에 들어가기로 생각을 바꾸고 눈높이를 낮추어 일화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다. 물론 급료는 내가 다녔던 회사보다는 월등히 적었다. 그 동안의 경력이나 3년 임지기간도 합산되지 않아 일반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였으니 급료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해, 잠들기 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기도하고 이어 아내가 기도 하였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도를 통하여 하게 되고 아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도로 하였다. 나는 아내의 간절한 심정의 기도를 통해 아내를 점점 이해하게 되었고, 아내도 내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우리 사이는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사이가 좋아지니 정도 생겨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훈독과 기도 생활을 생명시 하며 살고 있다. 기도는 대화이며 소통의 길이다
늦정이 더 무섭다고 한다 남들이 권태기에 들어서는 때, 우리 부부는 신혼처럼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내가 축복을 받을 무렵, 부모님께서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막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때만 해도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 아내가 퍽 힘들어 하였다.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갔을 때, 여자는 부엌을 통해 들어오라는 집안 어른의 말에 아내는 몹시 황당해 하였다
나는 부모님 위주로 살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면 부모님 방에서 같이 TV도 보며 하루 일어났던 집안일도 들으며 지내다가 잘 시간이 돼서야 아내 방에 들어갔다. 5남매가 한 동네 살았는데 시골서 올라오는 친척들은 방이 둘 밖에 없는 우리 집에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머물렀다.
어느 날 부모님이 고향에 내려가셨다. 처음으로 둘만의 자유시간이 오붓하게 주어지자 아내가 어찌할 줄 몰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집이 편하다”고 하시며 밤늦게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아내는 가끔 그날을 추억하며 웃는다.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끝까지 시부모님을 잘 모셔준 아내를 고맙게 생각한다.
5. 공부를 하기 시작하다
내가 일화에 다니면서 월급이 많지 않아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아내가 자기도 함께 돈을 벌겠다고 하였다. 나는 돈은 나 혼자 벌어도 되니까 “부부 중 한 사람은 공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에 순종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아내는 환고향 활동, 여성연합활동, 향토학교봉사 등을 하였다. 그리고 차남이지만 축복가정인 우리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자고 마음을 모아 부모님 두 분을 성화하실 때까지 잘 모셨다. 부모님은 1988년 6500가정 기성축복을 받으셨다.
참아버님께서 미국에서 세계섭리를 이끌고 계실 때, 그 바쁜 와중에서도, 손님을 맞아 경배 받으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영어 단어를 공부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이후, 우리 부부도 공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나는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여 학위를 받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건축석사학위와 경영MBA도 공부하여 실력을 갖추었고, 건축분야의 최고 경지인 기술사에도 합격하여 5대 일간지에 합격자 명단이 실리기도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1000명씩 합격하는 사법고시보다 기술고시인 기술사들은 몇 백명 이내로 선발되어 몸값이 귀한 시절이었다.
아내도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단국대학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통일신학교(UTS)에서 수학하였다. “청평 천정궁 공사는 부부가 합심하여 정성을 들이며 공사를 해야지 아내가 미국에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돌아와서 같이 정성 들이라.”고 대모님이 말씀하셨다. 아내는 UTS를 중퇴하고 한국에 돌아와 단국대학에서 행정학 박사를 학위를 취득하고, 청주교대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 정년퇴임을 하였다.
두 아들도 미국에서 학자금 론(loan, 대출)을 얻어 공부하여 둘 다 치과의사가 되었다. 큰며느리는 수의사, 둘째 며느리는 회계사다. 모두 2세 축복을 받아 큰아들은 미국 워싱턴에서, 둘째 아들은 미국 달라스에서 치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6. 일화를 퇴직하고 신동아 건설로 이직
아이들 둘과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데 일화에서 받는 급료로는 생활이 빠듯하였다. 둘째 아이는 유치원도 늦게 보내는 등 짠돌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구의동 집이 교회에 가까워서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다녔다. 그런 만큼 부부사이도 원만해져서 은혜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해, 6000가정 총회가 이천 일신석재에서 거행되었는데 그때 참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왜 식구들이 기업체에 있느냐?”는 말씀이 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때 당시에는 일화가 맥콜이 잘 팔려 5000명 이상의 직원들이 근무하였는데, 다른 대기업에서 음료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맥콜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비비콜 같은 유사 제품들을 대량 생산하여 값싸게 팔았다. 이는 상대방 우수 상품을 밀어제치기 위한 건전하지 못한 기업의 상술(商術)이었다. 보리음료로서 맥콜이 법적으로 특허를 받아서 잘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경쟁이었기에 합리적이지 않았다. 다른 경쟁 관계에 있는 음료 회사들이 맥콜보다 맛이 없으면서도 지나치게 값이 싼 제품을 만들어서 대량 판매하였다. 보리음료는 맛이 없다는 인식을 대중화하였다. 이런 까닭에 맥콜 판매가 부진하였고, 직원들을 감면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 상항에서 참부모님의 말씀은 회사의 구조조정을 위한 적절한 말씀이었다.
나는 그동안 능력이 있지만 축복가정으로서, 참부모님께 봉사하는 마음으로 급료를 현저히 적게 받으면서 일화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서 “나에게 정말 해방을 주시는구나.” 판단하고 곧바로 신동아건설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입사를 하였다. 그 당시는 부동산 붐이 일어나서 건설 분야에 인력들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일화에서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후 주임으로 진급되어 연봉이 2400만원 정도였으나 신동아건설에서는 직급을 차장으로 해주고 연봉은 4500만원으로 계약하였다.
7. 천주청평수련원 건설본부장으로
당시 나는 신동아건설 김포 풍무리에 1,200세대 아파트 현장소장으로 근무 중이였다. 청평은 청평수련원공사 진행 중으로 특히 왕궁건설을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건설 경험이 풍부한 축복가정 건축기술자가 필요하여 나에게 입사 요청이 왔다. 그러나 나는 일화에서의 경험도 있고 해서 신앙과 일터를 철저히 구분하여야 편할 것 같아서 일 년을 미루며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청평으로 입사할 것을 결심하고 아내를 두 아이들과 함께 미국 UTS로 유학을 보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평에 들어가서 수련생처럼 봉사하는 심정으로 다시 10년 만에 대내 업무로 복귀하였다.
천주청평수련원 급료는 그때 당시 하영호 부원장이 연봉 2700만원을 받으면서 협회 공직자로서 봉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다시 신동아건설 보다 월등히 적은 봉급을 받고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여자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상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저를 채용하시려면 급료는 상관없으니까 절대적으로 믿어 주십시오.” 이 조건을 흔쾌히 수락하였고, 나는 입사하였다.
나는 영계가 함께하는 천주청평수련원에 입사하기 전에 먼저 나를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40일 청평 수련원 수련에 참여하였다. 직장인이 아닌 수련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입사하여, 평일에는 정상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주말수련에 참석하여 봉사하며 열심히 근무하였다.
8. 천정궁 건설
천정궁은 천주평화 신문명 개벽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평화의대왕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시는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는 건축물인 천정궁은 영원한 성지 중의 성지이며 본전성지이다. 영계의 총사령관이신 천총관 흥진님과 대모님 그리고 충모님의 정성과 기도로 2006년 6월 13일에 봉헌이 되었다.
천정궁 봉헌식은 천지창조 이후 처음으로 살아계신 하늘부모님과 평화의 왕 참부모님께서 왕권즉위식(2001.1.13.) 이후 실체적으로 선의 왕국인 천일국 왕궁을 봉헌한 기쁨과 환희의 날이었다. 나에게도 벅찬 감동의 한 날이었다. 참부모님 재세시에 참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천정궁을 건설하여 봉헌해 드린 건설기술자로서의 최고의 기쁨과 영광의 날이었다.
1) 일송정 주위에 하늘의 왕궁 건설을 결심하심
21세기가 시작되었다. 즉 3000년이 새롭게 열리는 2000년 1월에 천주청평수련원에서 40일 수련을 받고 천주청평수련원 건설본부장으로 명을 받았다. 천성산 8부 능선에 우뚝 서 있는 일송정 주위에 하늘 왕궁을 건설하시려는 참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공사를 출발했다. 가슴 설레던 그 당시의 기억이 엊그제와 같은데, 벌써 세월이 22년을 지났다.
사실 그 당시는 좀 난감했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허가를 받아야 할지? 과연 이곳에 건축허가가 가능한지조차도 모른 채 무조건 “예, 하겠습니다.”하고 출발했다. 건축공사비가 얼마나 들어갈지, 건설자금은 준비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크고 웅장하고 거룩하게 건축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건축에는 먼저 설계가 완성되고 예산 책정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이 믿음과 복종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인간적 판단을 배제하고, 그저 참부모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과 절대복종으로 출발하였다.
업무가 시작되자 인간상식에서 벗어난 천일국식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군청에, 내일은 도청에, 환경청에도 들어가야 하는. 예측하지 못한 돌방상황이 날마다 발생하였다. 그렇다고 막상 찾아가더라도 누구를 만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것은 일반 건설 현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 믿음으로 출발해서 정부기관에 가보면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대기하고 일을 가르쳐 줄 정도 였다.
2) 고속도로 건설허가보다 먼저 우리가 천정궁 건축허가를 받음
천정궁 건설 허가를 받기 위한 제일 첫째 관문은 환경청에서 환경영향평가에 준하는 환경성 검토를 받는 일이었다. 당시 환경청에는 한강 상수원 보호지역이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천성산 8부 능선에 절대 이런 대규모 건물은 허가할 수 없다는 방침이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환경청장께서 직접 천성산 일송정까지 짚차를 타고 현장을 둘러보시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셔서 환경성 검토 허가를 무사히 얻을 수 있었다.
다음 관문은 경기도청에서 국토이용계획변경과 건축허가를 받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까지 꼭 허가를 받아내야 한다.”는 흥진님 대모님의 말씀에 따라 급히 출동하였다. 가보니까 마침 그날, 도지사님은 미국 출장을 출발하였다. 나는 국토이용계획변경 허가 결재를 받기 위해 담당 직원과 함께 부랴부랴 김포공항까지 쫓아갔다. 공항 귀빈실 휴게실에서 경기도청 건설교통국장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결재를 받았다. 그때서야 왜 그날에 꼭 결재를 받아와야 한다고 지시를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영계의 섭리는 인간의 판단보다 한발 앞서는 것을 체험하였다.
자기 일처럼 열성을 다해 준 국장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주청평수련원 정심원 기도실에서 지극정성을 들여 주신 흥진님 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기도정성의 힘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그런 상황에서 결재를 받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진행되고 있었던 경춘선 고속도로 허가보다 우리 천정궁 건축허가가 먼저 허가되었다. 그래서 천정궁 건설이 가능했다. 만약에 경춘 고속도로 허가가 먼저 나왔더라면 고속도로 접도구역이 선포되어 현재 청심 신학대학원 자리에 청심신학대학원대학 허가가 나오지 못하고 청심신학대학원대학 부속박물관인 천정궁 허가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우리가 먼저 결재를 받았기에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이 머무실 성전인 천정궁을 비롯하여 천일국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도 들어서게 되었다.
3)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부모님 생애와 하나님왕권을 상징하는 설계
설계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한옥으로 왕궁을 계획하셨으나 참부모님께서 천주를 상징하는 원형 돔과 열주를 주제로 설계하실 것을 말씀하여 주셔서 한옥 설계계획을 접었다. 그 대신에 세계적인 건축가를 찾아갔다. 그들과 함께 인류문화의 원천인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세계적 건축을 둘러보았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프랑스 파리 왕궁과 대성당,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영국 버킹검 왕궁과 대성당 등을 견학하였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천정궁 건축의 구체적인 조감도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처럼 참부모님 생애와 하늘부모님 왕권을 상징하는 천정궁 설계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였다.
유대인 출신의 미국 파커교수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화가 출신인 보리스 설계사, 미국 하버드출신인 키트, 한국을 대표한 허승희 P,D,I 건축 설계사무소 회장, 그리고 한국의 원일 건축 설계사무소가 천정궁의 의미와 품위를 담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모든 콘셉트설계는 참부모님께서 직접 지도해 주셨고, 세부적인 설계는 흥진님 대모님의 지도와 가르침으로 완료하였다. 2001년 7월에 참부모님을 모시고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4) 본 공사 착공
본 공사를 착공하여 토목공사와 지반 안정화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천정궁에 쓰여 질 석재를 구하기 위하여 전북 남원 석산, 포천 석산 황등 석산 가평 석산등 전국의 유명한 석산을 돌아보며 대형열주를 가공하기 위한 티 없이 하얀 원석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군데 현장조사를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중국의 산동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숨겨 놓으신 하얀 화강석 광산을 개발하고 그곳에 천정궁 석재 가공공장을 신설하고 한국의 웅천에는 대형열주가공공장을 신축하여 천정궁 석재 가공만을 위한 기계를 설치하여 석재가공을 하였다
내부 대리석은 전 세계 육대주에서 생산되는 대리석을 사용하였으나 주 대리석은 브라질 화이트로사라는 대리석을 브라질 석산을 개발하여 이태리로 옮겨 이태리 유명한 가공공장에서 가공 하였으며 촉박한 공기를 맞추기 위하여 일부 대리석을 비행기로 수송하여 공사를 완료 할 수 있었다
5)토공사 착공과 지반 보수공사
그런 와중에 2002년 토목 터파기공사와 지반공사 중에 천재지변을 흙막이 공사에 변위가 발생하여 6개월 동안 공사가 지연되었다 보수공사는 정말로 피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영하20도를 넘나드는 엄동설한에도 24시간 주야로 혼신을 다하였으며 한국에서는 한번도 시공해 본적이 없는 대형 안정말뚝공사, 초대형 집수정공사 RCD 기초공사등 2년여에 걸쳐 정성으로 지반안정화 공사를 실시하였으며 한국토목학회와 서울대 한양대 토목구조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무사히 완벽하게 공사를 완료하였다.
6)릴레이 철야정성으로 천정궁 공사
천정궁 건설 공사 시공회사인 선원건설은 천정궁과 천원동산건설을 위해 특별히 참부모님께서 세워 주신 건설회사로서 천정궁 공사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현장사무실 옆에 기도실을 만들어 전 직원이 매일 릴레이 철야정성을 들이며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공사 중에는 참부모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현장을 자주 방문하시어 많은 내용을 직접 지도해 주시고 정성을 모아 주셨다. 참부모님께서 현장을 찾아 주심은 영광이요 큰 축복이었다. 그러나 공사를 책임진 나로서는 인류의 메시아요 참부모님께서 현장을 방문하시면 긴장한 상태로 현장정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참부모님께서는 공사가 너무 바빠 애로사항이 있을 때도 찾아오시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참부모님이 나중에 오시도록 진언을 드린 적도있다. 나는 충심으로 말씀을 드렸으나 행여 불충한 일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한없이 죄송스럽고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마무리하여 참부모님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충정임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7) 효심과 정성으로 공사 진행
모든 공사는 정성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옥상 돔 최상단에서부터 지하 구석구석까지 상젤리아 디자인 문짝 디자이인 인테리어 디자인 마루바닥 패턴 카펫트디자인 대리석바닥 패턴 디자인 하나하나가 모두 정성과 지성으로 결정되어 시공되었다. 하수도 맨홀 뚜껑 하나까지도 직접 천정궁 콘셉트로 디자인하여 제작하였다. 이태리 대리석 가공공장, 중국석산 현관 주물공장, 등 어느 한 곳에도 관심과 정성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정궁에는 맥반석 참숯 천연페인트 요노석고보드 등 친환경적인 자재들로만 선별하여 사용 하였으며 각 층마다 실마다 천정궁 문장을 넣어 우리만의 디자인으로 설계하여 제작 하였다. 특히 삼층에 사용된 목재는 시베리아 혹한에서 자란 페어우드라는 특수목재이었다. 이처럼 어느 곳 하나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모시려는 효심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
9. 선원건설 사장으로
천정궁공사를 봉헌하고 참부모님께서 여수에 70층 호텔을 건설하시고자 준비 중일 때 초고층 건물을 건설할 건설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여 여수로 자리를 옮기여 공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2009년 6월말에 통일유지재단 이사장이신 국진님께서 호텔 프로젝트를 잠정적으로 중단하였다. 당시 여수디오션 홍선표사장과 호텔 운영을 위하여 미리 영입하였던 호텔 부사장과 건설 전문가인 나도 갑자기 준비도 없이 명예퇴직하게 되었다.
신동아건설에서 퇴직하고 청평에 들어오면서 퇴직금으로 마련하여 두었던 땅에 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선원건설이 사장이 바뀌고 경영이 어려워 많은 적자를 내고 있어 통일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선원건설을 처분할 것인가를 검토하던 중 건설전문가인 나를 선원건설 사장으로 영입하여 선원건설을 정상화시키자는 의견을 모았다. 나를 선원건설 사장으로 영입하여 선원건설을 정상화시키는 적임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선원건설에 부임을 받은 이후 ‘변화와 혁신’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많은 일을 하였다. 임원 5명중 3명을 퇴임시켰으며 직원 100여명 중 고위급 직원 20명을 명예퇴직 시키는 뼈를 깎는 아픔을 감내하며 구조조정을 하였다. 그리고 부실한 협력 업체 47%를 교체하여 건실한 업체로 바꾸어 나갔다. 57개 품목이나 되는 본사 직접 구매 물건도 3개 품목만 구매하도록 대폭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95%에 이르는 원가율을 86%로 낮추어 4년 연속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와 흑자경영의 원년으로 출발하였다. 이렇게 강도 높은 변화와 혁신을 하다 보니 다소 몇 군데에서는 반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고 변화와 혁신을 멈출 수 없었다.
사장인 나부터 솔선수범하여 봉급은 퇴직 때까지 생활비 5백만원을 받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원리 원칙에 입각하여 참 부모님께서 선원건설을 창업하신 ‘창업정신’에 충실하고 나를 믿고 선원건설을 맡겨주신 참 부모님 뜻을 받들어 선원건설을 정상화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3년 연속 흑자경영을 하고 후임 대표에게 인수인계하여 주었다.
공교롭게도 청평 현장은 여름휴가와 우리 대명절인 성화절 행사가 겹쳐서 선원건설 사장으로 재임하는 기간에는 가족과 함께 휴가 한번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사적인 휴식 시간을 가질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러나 참어머님께서 내리신 한량없는 은혜가 많았다. 이를 우리 가족은 잊을 수가 없다
2017년 6월 24일 일기장의 기록이다.
“어제 늦게까지 업무에 매진하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늦잠 좀 자고 쉬려는데 어머님께서 ‘아젤리아’에 갑자기 내려오셔서 찾으신다고 급히 호출하신다. 집이 남양주시 덕소여서 주말이라 차도 많이 막혀 11시쯤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보고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천정궁에 올라와 점심 같이하고 가라고 하신다. 천정궁에 올라가니 벌써 어머님께서 식탁에 나오시어 기다리고 계셨다. 앉자마자 식사기도를 하라 하신다. 어머님을 바로 앞에 모신 식사자리에 식사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 점심 후 차를 마시면서 가족이나 형제, 신앙 등 많은 것을 물으시며 사랑해 주신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10. 선원건설 명예회장에서 물러나 공직자로
‘축복가정’, ‘건설기술자’로서 하늘부모님과 천지인 참부모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시는 성스러운 본전성지 천정궁과 천원단지를 건설했던 나의 경험을. 천정궁에서 15년 이상 참부모님을 모시며 운영관리 해온, 천정궁 본부와 함께, 새롭게 건설 중인 천일국 행정청인 천원궁과 천정궁 천승전 통합 운영관리를 위하여,
“선원건설 명예회장에서 퇴임하고 공직자로 근무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따라서 한위일 위원장과 함께 천원궁 건설 운영분과 공동위원장으로 열심을 다하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늘 보시기에 의로운 삶일까?’, 나는 축복가정 건설인으로서 청평 천정궁과 천원단지 건설을 통하여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영계를 체휼하며 살았다. 14살 어린 나이에 뜻을 안 이후,“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이루자”라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남은 여생도 천보가정으로서 천일국 주인으로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충효의 도리를 다하고 싶다.
첫댓글 정혁순님 댓글
성호복, 박종숙가정의 하늘향한 효심으로 천정궁 건설현장 책임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신모습,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감동적인 자서전이었습니다. 6천가정 한 형제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손기문님 댓글
성호복형제님의 자서전을 감동있게 잘 읽었습니다. 누가 나쁜말을 해도 딸을 믿고 아들을 믿어주는 휼융하신 아버님을 두셨습니다. 차남 임에 불구하시고 축복을 시키셨고 집에서 모시고 함께 살았다는 것 성호복형제부부의 효심을 엿볼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셨던 부인에게 하늘은 효부상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전문지식을 취득하여 선원건설 사장으로 아내는 대학교수로 비상 할수 있었던 토대는 방송통신대학이였습니다. 동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 참아버님께서 한남동에서 교구장회의를 주재 하시다가 갑자기 청평 천성산에 기도를 해야 한다고 교구장들을 대동하시고 천성산 일송정 소나무가 서있는 위쪽으로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시고 이곳에 성전이 들어 설것이라고 말씀하셨을때 이 높은곳에 건물이 들어 설수 있을까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아름다운 천정궁이 들어 섰습니다. 천정궁을 지은 주역이 성호복 형제님이라는사실에 무한한 존경을 표합니다. 온가족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하봉문님 댓글
성호복 형제님의 자서전을 감동있게 잘읽었읍니다. 천정궁 건설이라는 크신 사명을 짊어지고 그일을 휼륭히 해내심에 축하드림니다.그리고 천원궁 건설에 참여하여 큰일을 하시게됨을 또한 축하하며 좋은성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