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 : 조정래 문학관(버스터미널 옆:제석산 자락)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흥암로 89-19 T. 061-858-2992
* 벌교역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은하수는 태백산맥문학관을 출발지로 하니 다소 다릅니다)
벌교역 - 매일장터 - (5분) - 남원장(오향왕족발) - 정도가네(국일식당) - (5분) - 금융조합(농촌지도소) - (10분) - 자애병원(벌교 어린이집) - (10분) - 횡계다리(벌교 홍교) - (10분) - 김범우집(김병욱씨 본가) - (15분) - 소화다리(부용교) - (10분) - 서민호 야학(벌교교회당) - (30분) - 현부자네 집 - (20분) - 철다리 - (15분) -벌교역
소설 태백산맥에서 묘사한 벌교 가볼만한 곳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hkY&articleno=960292&categoryId=195380®dt=20120326113000','195380')
벌교홍교다리
☞. 진트재(진지재) : 벌교계엄사령관 심재모가 구룡에서 이 고개에 와서 벌교를 보았던곳
벌교역->순천방향 약 3km 정도 : 진지재에 기차 터널이 있음
☞. 진트재터널 : 안창민과 하대치가 이 터널입구에서 군용열차를 습격 탈취 했던곳
70년대 초반까지 증기기관차[석탄 기차]가 다녔던곳
☞. 회정리 3구(장양리) : 외서댁이 살았던 마을/ 중도방천 이전 까지 마을앞이 갯뻘.
벌교역--> 순천방향/857번도로 약 2.5km 정도
☞. 현부자 집 : 현부자 집 (소풍장소였고, 제각이라고 했음. 현 박씨문중 소유)
벌교역 ->시내 약 1km 정도 : 조정래 문학관 옆
☞. 소화의 집 : 무당의 딸 소화의 집
벌교역 -->시내 도로 약 1km 정도 : 조정래 문학관 옆
☞. 회정교회 : 서민영이 야간 학교를 열었던곳/ 이지숙과 이근술
벌교역 -->시내 약 1km 정도 : 터미널에서 문학관 반대방향.
소화다리 뒤편 골목길로 들어서 언덕아래 흰 교회당
☞. 조정래 생가 : 조정래 작가가 국민(초등)학교 4~6 학년 무렵 살았던 집
벌교역 -->시내 도로 약 1km 정도 : 회정교회 건너편 국민아파트 옆
☞. 중도 방천 : 일본인 중도가 주축이 되어 여자만 갯뻘을 농토로 만들기 위한 방뚝
벌교역->벌교대교 끝 우측부터 선수까지 지도로 찾아가기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성벽 쌓는것인디... 더 힘든것은 갯뻘 일이여"
"죽지 못해 하지라..!" "개 돼지 맹크롱 천대받아 감시롱 허제이~~~!
소작민, 민초들의 한이 어려 있는 곳....
☞. 중도의 집 :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방천뚝 공사를 주도했던 고리대금업자 중도가 살던집
중도방천길 따라서 철다리 건널목 건너 좌측
☞. 철다리(제2부용교 아래) : 염상구와 깡패 땅벌이가 오야붕 자리를 놓고 기 싸움을 했던곳(약 500m)
동쪽은 중도방천길/ 서쪽 철길 아래는 벌교포구(계엄군 숙소)
☞. 선창(철다리 밑 창고?) : 포구, 경찰 토벌대와 계엄군의 숙소가 있던 곳
벌교역-->시내길 부용교 건너기 전 우측 철다리 밑
☞. 차부 : 벌교역에서 나오면서 좌측(고흥방향)으로 약 100 여 m (현재 벌교 우체국 자리)
☞. 남원장(요정) : 유지들의 모임장소,토벌대장과 경월 이야기,정현동의 은밀한 흥정 장소
벌교역전 삼거리에서 벌남교 가는길 중간 좌측 약 100m(오향왕족발간판건물)
☞. 술도가(양조장) : 주인 정현동의 욕심은... 결국 소작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남원장에서 벌남교 쪽 삼거리 지나 오른쪽으로 10m 오른편 일본풍의 목조2층건물(1층은국일식당으로 운영 중)
☞. 남도여관 :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부하들이 숙소로 쓰던곳.(벌교남교 정문 왼쪽)
벌교남교 들어가면서 왼쪽 건물(필자 초등때는 보성여관)
☞. 남국민학교 : 인민재판을 구실로 무고한 양민에게 총살 결정을 내렸던 곳
벌교남교 건물은 대부분 목재였음
☞. 포목점: 양효석의 아버지 양병갑의 가게 광주상회(벌남교를 나와서 왼쪽 첫째 사거리)
현재 신협 벌교 본점 있는곳(벌교역에서 약 300m)
☞. 북국민학교: 염상진과 좌익세력이 인민재판 하던곳
포목점 사거리에서 산쪽(용현사)으로 가다 오른쪽(현 벌교여중)
"인민재판인가 몬가 끝나고 굿판이 벌어지는디...." 웨메~~~!!!!"
" 그 질로 소화다리로 끌고가서 사람들 귀경시키듯이 줄줄이 세워 놓고 죽이..
☞. 용연사 : 문기수가 야산대장 염상진의 "최후명령"을 접수하러 불도신자를 가장해서 간곳
벌교 여중에서 에망(M1)고지 올라가는 길에 있는 절(벌교역 1.8km)
☞. M1고지 : 벌교포구 계엄 사령관 심재모가 종합지휘소를 꾸민곳(용연사 뒷산)
세망동 뒷쪽=벌교읍지역 대부분/낙안읍성 및 들판/금정산/ 제석산/ 중도방천
여자만과 섬 등을 볼수 있는 천연 요새지
☞. 벌교 금융조합 : 송경희의 아버지 송기묵이 조합장이였지만 좌익세력에 죽임을 당했다
벌교여중지나 광주상회(포목상)에서 읍사무소 방향 약 150m 왼쪽(현존, 벌교읍농촌지도소건물)
☞. 경찰서 : 반란사건으로 불 타 없어져 버린 경찰서(반란군의 임시 본부이기도 했음)
☞. 벌교 장터 : 장터거리(읍사무소->홍교다리 가는길 좌측 주변)(시내길 약 1km))
웃 장터라 했으며,
현재 장터는 벌교역 주변(농협 쪽) 순천-고흥-광주-목포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
☞. 벌교역, 가판, 매일장터->소화다리 가는 길의 전화국 앞 건물(시내길 약 500m)
역전 앞 도로 양편으로 차량의 통행이 불편할정도로 늘어선 가판행렬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북적거리는
☞. 벌교 소화다리 : 14연대 반란사건과 좌익과 우익 서로간에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밀물때 홍교까지 올라온 바닷물이 온통 피바다였다는 가슴아픈 기억을 간직한 다리 현재 이름은 제 1부용교( 시내길 1킬로미터)
"소화다리 밑에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사람 쥑이는거 날마둥 보자니께 환장허것구만요.!!! "
" 나가 왜? 죽어야 되는지 알고나 죽으면 한이 없당께...!!!
☞. 읍사무소 : 계엄사령부와 불타 없어진 경찰서가 더부살이 했던곳.
금융조합 앞쪽 50여m-삼거리 좌측으로 150m 대로 좌측
☞. 청년단 : 벌교 청년단 근거지 (염상구가 윤옥자를 탐해 마누라 삼은 자리이기도 함
읍사무소 뒷쪽 M1고지 올라가는 계단 옆(벌교역에서 800m)
☞. 자애병원 : 안창민이 총상을 입고 찾아간곳(후생병원)
읍사무소에서 홍교다리 가는 중간 지점(현 벌교 어린이 집)
☞. 홍교다리(횡계다리) :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지주의 쌀을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주기 위해 쌓아둔 곳.
약 3분의 2는 없어져서 신축(857번 도로 혹은 시내길 1.5km)
☞. 김범우 집 : 김사용의 아들인 인민군 장교 김범준과 빨갱이로 몰린 김범우의 본가.
홍교다리 북쪽끝 길 건너 마을 입구(시내길 약 1.6km, 현 봉림김병욱씨 본가)
☞. 들몰 마을 : 하대치의 처 들몰댁의 친정 마을.(전동/들몰 마을이라고 한다)
홍교다리에서 광주방향 (15번국도로 약 1km)
☞. 고읍마을 : 벌교남교 교사이자 빨치산인 안창민의 고향.
들몰에서 광주방향 (15번 국도로 약 800m 좌측 산자락 밑 마을)
☞. 주릿재 : 해방구로 묘사된 율어가는 고갯길(벌교역에서--> 추동저수지 약 7km)
벌교역--15번 국도 낙성(추동저수지)--주릿재-->율어
☞. 석거리재 : 벌교계엄사령관 양효석이 빨치산을 막기위해 진지를 구축한 곳.
벌교에서 15번 국도 따라 외서면 가는 고갯길(벌교역에서 약 7km)
☞. 대밭골 : 염상진 권유로 김범우가 문서방 집으로 피신갔던 마을(벌교역에서 약 4km)
벌교역->벌교여고 앞->무만동->월곡->대밭골
☞. 열가재 : 벌교에서 2번 국도를 따라서 조성(보성방향) 가는 고갯길
☞. 마동재(송장고개) : 심재모가 염상진를 토벌하기 위해 넘어 갔던 고갯길
벌교역 <-> 조성 간 기차 터널
구전에 의하면 "터널공사 때 많은 사람이 죽어서 [송장고개]라고 한다" 고 함☞. 첨산 : 벌교에서 뱀골재 지나 고흥 가면서 우측(수동마을)에 삼각뿔 모양의 산
또 다른 첨산은 벌교<-->순천 가는길 우측(별량면에 있음)
☞. 뱀골재 : 고흥방향으로 가기 위해 넘던 고갯길(벌교역에서 약 2km)
고갯길 우측에 지금도 주인없는 무덤이 많음(공동 묘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하여>
“우리는 [태백산맥]에서 역사를 가동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읽는다.”- 김훈(소설가)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는 사람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이름 없는 숱한 영혼들, 바로 그들이다.”-김철(문화평론가)
▶ 출간 의의
해방 이후 분단문학의 역사가 일구어낸 거대한 성과 『태백산맥』! 1980년대를 보낸 이 땅의 젊음 중 그 누가『태백산맥』을 품지 않았을까? 『태백산맥』의 시간적 배경은 한반도가 해방과 분단을 동시에 맞아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4·3항쟁과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부터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조인되어 분단이 고착화된 1953년 10월까지다.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 불리는 역사에 정면으로 부딪혀 80년대 최대의 문제작이 된『태백산맥』은, 1983년《현대문학》에 원고지 16,500매 연재를 시작으로 1986년 제1부 출간(한길사)과 1989년 완간(전10권) 이후 300만 부가 판매되었으며, 1995년 해냄에서 재출간된 후 250만 부가 판매되어 현재 550만이 넘는 독자들의 손을 거쳤다. 20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설로 주목받아온 만큼『태백산맥』출간 이후, 조정래 작가는 수년간 작품의 불온성 시비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6·25전쟁의 비극성을 우리 민족 내부의 모순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출해 이념의 금기 지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되었으나, 한편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족 분단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태백산맥』은 한국문학사의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동안 6?5전쟁과 분단을 다룬 소설은 많았지만 『태백산맥』만큼 이를 깊고 넓고 세밀하게 형상화한 작품은 없었다.
“우리 문학이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해방 40년의 기간이 필요하였다” (김윤식)라는 찬사를 얻을 만큼, 해방 전후의 치열했던 역사와 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태백산맥』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주는 영원한 한국문학의 고전임에 틀림이 없다.
▶ 태백산맥 연보
1983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 시작
1986년 제1부「한의 모닥불」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길사), 제2부「민중의 불꽃」(2권, 1987)
제3부「분단과 전쟁」(2권, 1988), 제4부「전쟁과 분단」(2권, 1989, 전10권 완간)
1990년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시사저널》)
1991년 『태백산맥』으로 단재문학상 수상, 전국 대학생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 1위(《중앙일보》)
1994년 『태백산맥』 영화화(태흥영화사, 임권택 감독)
1995년 『태백산맥』을 출판사를 옮겨서 출간(도서출판 해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한겨레신문》)
1996년 독자 선정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1위(《동아일보》)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큰 책’ 1위(《시사저널》),
단일 주제 비평서 『태백산맥 다시읽기』가 권영민 교수 집필로 출간
1997년 『태백산맥』1백 쇄 출간 기념연 개최, 대하소설로 1백 쇄 발간은 최초의 일
1999년 ‘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에 선정(《중앙일보》)
문인들이 뽑은 지난 1백 년 동안의 소설 중에서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 선정(《한국일보》)
2000년 『태백산맥』 일어판 10권 완간(집영사와 1982년 완역 출판계약 체결)
▶ 저자의 말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대를 흔히들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곧 그 시대가 그만큼 치열했고 격랑이 심했으며, 분단사 속에서 또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복원하고 되살리느냐가 바로 분단극복이고 통일지향일 것이다. 그 시대의 복원은 바로 오늘을 푸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현장을 찾아다녔다. 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일 수만은 없으며, 엄연한 역사사실 앞에서 소설을 쓰는 자는 제멋대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증언을 토대로 하고 확인을 거친 것들이다.그 이야기들을 소설로 엮으면서 나는 시대정신에 냉정하고자 했고, 우리의 오늘을 투영하고자 했다.
▶ 추천사
작가 조정래가 파악하고 있는 민족분단의 문제는 정치적 이념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삶이 밑바닥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얽혀 있던 의식의 매듭에 해당된다. 이러한 인식은 분단상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논의가 드러내는 논리적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는 심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의 장편대하소설『태백산맥』은 이러한 관점에서 분단민족의 허리를 이어가는 작업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숨겨진 진실의 재확인과 민족적 자기 모럴의 새로운 확립이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의 비극에 대해 새로운 비판적 반성을 시도해야만 하는 윤리적 판단이 이 작품에 깊이 깔려 있다. - 권영민(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대하소설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를 다루는 일에 관한 한 『태백산맥』을 넘어설 작품은 아직 없다. 이 책은 첫째 반공 이데올로기와 분단 이데올로기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고, 둘째 현시기의 민족,민주 운동의 진전에 의한 당시의 사회, 정치사 대한 심화된 인식을 작품 안에서 역사,논리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셋째 그 결과 여순민중항쟁에서 6·25에 걸친 기간의 분단상황에 대한 총체적 파악에 성공하고 있다. -이재현(문학평론가)
『태백산맥』은 문학사의 일부를 넘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꿈틀거리는 역사를 이룬다. 역사는 주어져 있는것이 아니며, 그것을 구성하려는 피나는 싸움의 산물이다.
분단의 문제에 관한 한 이토록 생생한 소설적 육체로 빚어진 작품도 드물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이 『태백산맥』의 역사적 진정성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피고름을 뚫고 솟아오른 『태백산맥』의 문제성은 현재적이다. 그 『태백산맥』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역사의 신음이 아니라, 분단을 밀어내는 역사전환의 거대한 전동이다. - 이광호(문학평론가)
▶ 줄거리
제1부 한의 모닥불 [1권~3권]
여순반란사건이 종결된 직후부터 1948년 12월 빨치산 부대가 율어지역을 해방구로 장악하는 데에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소석의 첫 장면은 1948년 10월 24일 밤이다. 여순 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반란군들은 산 속으로 퇴각한다. 이때 정하섭이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현 씨네 제각에서 살고 있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한다.
소화는 정하섭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며 감시를 피해 정하섭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불과 나흘 전만 해도 벌교는 좌익의 수중에 들어 있었지만 여수에서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거점으로 하여 좌익 반군들이 순천까지 그 세력이 확대된다.
남로당 조직에 연결되어 있던 벌교 지역 좌익 세력들이 반군에 합세하여 벌교를 장악한 것은 1948년 10월 20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군경 진압군에 의해 밀려서 벌교를 포기하고 산 속으로 퇴각하게 된 것이다. 벌교를 장악했던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함께 조계산으로 쫓겨 가게 되었지만 진압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궁벽한 율어면을 점거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후 그곳을 해방구로 선포하고 조직과 세력을 정비하게 된다. 군경 진압군은 벌교를 장악했던 좌익 반국 세력을 몰아낸 후, 청년단의 도움으로 마을에 남아 있는 좌익 세력과 부역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힘쓴다. 그 바람에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마저도 좌익과 우익으로 서로 갈라지고 원한이 겹쳐서, 반란군과 함께 산 속으로 가 버린 입산자 가족들은 온갖 곤욕을 치르게 된다.
벌교의 유지로서 주민들의 신망이 두터운 김범우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처단되고 고문을 당하는 등 고통을 받게 되자 희생을 줄여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김범우의 개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총살을 당한다.
벌교 지역에서는 흉흉해진 민심을 돌리고 혼란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수습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였고 해방 직후 제헌국회의원이 된 최익승을 수습위원회 대표로 선임하게 된다. 김범우는 최익승을 찾아가 읍민들의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좌익을 두둔하는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에 구속 되었다가 순천으로 송치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루는 여러 가지 삽화 가운데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는 청년단 감찰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양효석, 송성일, 등 우익 희생자 아들들을 모아 이른바 멸공단을 조직, 밤이면 입산자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부녀자, 노인을 가리지 아니하고 잔인한 보복을 한다. 형 염상진과는 반대의 사상을 지닌 염상구는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다못한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수습위원회 대표 최익승에게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게 되는데…… . 이 과정에서 하대치의 아버지 판석 영감은 목숨을 잃는다. 정하섭이 좌익에 가담했기 때문에 좌익 세력이 벌교를 장악했을 때, 악덕 지주로 처단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양조장 주인 정현동은 다시 군경찰이 들어오자 빨갱이로 몰려 경찰서에 갇힌다. 최익승은 정현동을 빼내주는 조건으로 양조장 지분 절반을 차지하고 정현동은 벌교에 진주한 토벌대의 후원회 회장을 맡는다.
아들 김범우가 순천 경찰서로 송치되자 그의 부친 김사용은 김씨 문중의 힘을 빌려 아들을 석방시키고 경찰서장 남인태를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킨다. 벌교가 수복되자 좌익 잔당이 처단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벌교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간척 사업으로 일찍부터 일제 자본이 침식한 이 지역은 토지를 둘러싸고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쌓였던 곳이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해방 직후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으로 치닫고 결국은 계급의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사회의 한 단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의 존재와 그 사회적인 실체가 드러나며, 이에 대응하는 토착지주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이 군경의 힘을 업고 벌이는 여러 형태가 잘 그려져 있다.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비참한 입산자 가족들의 삶과 함께 중도적인 입장의 지식인 김범우 등의 활동은 대립과 갈등의 사태 해결을 위한 입장의 지식인 김범우 등의 활동은 대립과 갈등의 사태 해결을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
제2부 민중의 불꽃(4권~5권)
제 2부는 <민중의 불꽃>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여순 사건이후 약10개월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이 1949년 1월의 소작농 봉기를 전후로 하여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부의 내용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토지의 소유와 연관된 농민들의 좌절과 분노이다. 벌교 지방은 농민이 전체 주민의 8할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지주에게 목을 매달고 있는 소작농이다. 농민들은 해방된 후 토지개혁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지만,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자 불만이 갈수록 높아만 간다.
북에서는 이미 농지개혁이 실시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주들은 오히려 농지개혁 이전에 소유 농지를 처분하고자 한다. 소작인 모르게 논을 처분한 고흥 지주 서운상은 불만을 품은 소작인 강동기가 삽으로 내리찍은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강동기는 그 길로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반면에 서민영은 지주로서 자기 소유의 논을 모두 소작인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하여 협동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농지문제의 심각성 및 농민들의 참상을 국군 벌교 지구 사령관 심재모에게 들려주어 심재모로 하여금 농민들의 농지개혁 요구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한다. 염상진 등 좌익 반란군은 율어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의 환영을 얻고, 그들의 지원으로 자신들이 내세운 혁명 과업을 수행한다. 벌교의 농민들에게는 이러한 율어 지역의 변화가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염상진 빨치산 부대는 벌교읍을 습격하여 지주들로부터 쌀을 빼앗아 인민들에게 고루 나눠 먹도록 하기도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령관 심재모는 용공 혐의로 서울로 압송되고 그 후임으로 백남식이라는 관동군 출신의 친일 경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벌교 지역 주둔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백남식은 하숙집 주인 과부 송씨와 그녀의 딸을 농락하고 토벌군이 철수하게 되자 송씨의 딸을 속여 끝내 결혼을 한다. 그는 송씨 재산 절반을 차지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병과를 헌병으로 바꾸어 후방 근무를 택한다. 그의 행태는 당시 부패한 군의 실상과 그 비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때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벌교를 떠나 서울에서 반민 특위 사건이나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을 맞는다. 그리고 백범과 몽양이 이승만과 한민당을 위시한 친일 세력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벌교 지역에서 지주들이 소작인 모르게 자기 땅을 팔아 먹거나 빼돌리는 일이 더룩 늘어나자, 농민들은 이에 분노하여 대규모 항의 시위를 일으킨다.
지주 졍현동은 멀쩡한 논에 바닷물을 끌여 들여 염전을 만들겠다고 하다가 이에 분개한 소작인의 낫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농지개혁법이 발표된다. 대부분의 소작농들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라 유상몰수 유상분배란 것을 알고는 더욱 분노하기 시작한다.
벌교에 주둔한 군경과 지역 청년단은 사태가 악화되자 농민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제3부 분단과 전쟁 (6권~7권)
제3부는 1949년 10월부터 1950년 12월까지의 6.25전쟁의 현장과 합께 이 전쟁의 성격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무대가 벌교 지역ㅇ르 벗어나 전쟁의 현장을 따라 확대되고 있으며, 남과 북의 상황 변화와 미국의 개입 등이 비판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염상진 등에 의해 장악되고, 좌익 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한다.
그러나 경찰이 철수하기 직전에 미리 좌익 전향자들을 사살하였기 때문에 또다시 살육의 참상이 겪는다. 당시 군부의 모습은 벌교 지역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심재모를 통해 실감있게 묘사되고 있다.
심재모는 용공혐의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벌교 지역 주민들의 진정으로 풀려나서 군에 복귀하여 태백산 지구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하고 있던 중 6.25전쟁을 맞는다.
그는 여러 부대를 옮겨 다니며 6.25전쟁 당시 무방비 상태로 부패와 무능에 빠져 있던 군대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피난 수도 부산의 모습도 이 부분에서 그려진다.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상하는 특무대원들의 횡포는 맹목적인 이념 전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벌교의 최익승이 부산으로 피난와서도 군대와 짜고 군수품을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는 장면은 반민족적인 자본가들이 행태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3부의 내용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벌교 지역의 지식인 김범우와 손승호 등의 사상적인 선회이다. 김범우는 인민군 치하에서 전북도당에 근무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패퇴하자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된다. 그는 미군들이 자행한 강간, 살인, 방화 등 비인간적이고도 부도덕한 행태를 보면서 한국전쟁이 미군과 우리 민족의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김범우는 결국 미군 부대에서 탈출한 후에 공산주의 노선을 택하게 되며 인민군에 자진 입대한다. 손승호도 6.25전쟁 후 공산주의자의 길을 택한 후에 빨치산으로 입산한다. 이에 따라 벌교에서도 염상진 등은 다시 입산하게 된다.
이때 많은 농민, 곧 소작인들이 염상진을 따라 입산하고 있다.
제4부 전쟁과 분단 (8권~10권)
제4부는 1950년 12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협정 직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대미에 해당하는 지리산의 빨치산 투쟁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룬다. 소설적 공간이 다시 벌교와 지리산 지역으로 고정된다. 6.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 작정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진다. 특히 박현영 등 남로당 계열이 전쟁의 실패와 함께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패배감과 전의를 상실하지만, 역사 선택의 기로에서 항전의 결의를 가다듬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과 죽음이 역사 투쟁으로의 전환임을 인식하고 대부분 강렬한 최후를 맞는다. 한편 인민군에 입대했던 김범우는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갇힌다. 그는 뜻밖에도 거기서 제자 정하섭을 만난다.
두 사람은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의 눈을 통해 거제포로수용소의 실상이 속속들이 파헤져 진다.
포로 석방 때에 정하섭은 북으로 가고 김범우는 반공 포로로 위장, 석방되어 고행에 돌아온다. 그는 정하섭으로 부터 남에 남아 거점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지리산에 근거했던 빨치산 세력은 군경의 터벌 작전으로 모두 와해된다.
이름 없는 숱한 빨치산 전사들과 함께 손승호도, 독립투사요 인민군 소장인 김범준도 토벌군의 총탄에 스러진다. 염상진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는 군경과 수많은 전투를 하였으나 패퇴를 거듭한다.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나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간다.
===================
<참고>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약칭 '여순 사건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약칭 '여순 사건', 1948년 10월 19일)은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과 제주 4·3 폭동 진압 명령에 반대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 당한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만에 겪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 진압 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1]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 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군란' 등으로 불리었으나 지역 주민들이 반란하였다고 오인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사건의 진행
배경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입대 시 신원조회를 하는 지금과 달리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과 친일 지주에 반감을 품은 소작농, 빈곤층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고,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다. 여기에 당시 군과 경찰은 국가주도권을 놓고 무장충돌을 벌일 정도로 매우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반란이 친일 경력의 경찰과의 충돌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지창수의 선동 발언중 친일 경찰 척결이 들어간 때문이이지만 그 본인과 반란군 지휘부들이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인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약하다.
14연대의 반란과 진압
1948년 10월 19일 :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무장반란을 일으키고, 경찰과 많은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후원회장 등을 포함한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70여 명이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시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결탁해 순천을 장악하고는 살인, 약탈, 방화 등을 저질렀다.
10월 21일 : 반란군이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10월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이끌게 하고는 진압을 명령하였다.
10월 22일 : 진압군이 오후 3시에 순천 공격을 시작하였다. 반란군의 주력은 광양 및 인근 산악지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 진압군이 오전에 순천을 장악하였다. 진압군은 순천 장악 직후 일사천리로 광양 일대의 반란군 주력을 섬멸하고,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반란군은 여수의 입구인 미평 근처에 매복, 진압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철모에 총을 맞고 장갑차에서 떨어져 고막이 터지고 허리부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 반란군의 주력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10월 25일: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에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진압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협조자 색출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극우 연루설 유포
여순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극우 세력[2]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내무부는 경찰국에 수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다.[3]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4]— 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하고,[4][5]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지목했다.[5]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면서 '극우정객'을 재차 언급하였다.[4] 같은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발생했던 '혁명 의용군 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기를 여순사건의 배후에 있는 극우파로 지목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10월 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박하였고, 그의 반박문이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3]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 기사)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민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다.[6]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叛徒,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7] 10월 30일 담화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수 없다"고 발표하였다.[8]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여동(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회오(悔悟)하고 정궤(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기대와 탁부(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 기사)
결과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9]
여순사건 이후 서수(序數)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각주
1. 여순사건 60년에 위령탑 하나 없으니《경향신문》, 2008년 10월 21일.
2. 당시에는 '극우'가 오늘날처럼 반공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자, 즉 김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3. 가 나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
4. 가 나 다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년 10월 26일자
5. 가 나 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자
6. 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
7. 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자
8. 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
9. “그때 오늘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다”. 중앙일보. 2010.08.13. 2010년 12월 18일에 확인함.
10. 박정희는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로당의 군사총책 간부였다.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는 체포된 후 1949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을 넘겨서 감형, 이후 특사로 풀려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