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38:12~30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에 초점이 맞춰져 그리스도의 혈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표상인 요셉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악한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은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문제는,
첫째,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에서 비롯됩니다.
유다가 요셉을 판 죄책감, 형제들과 아버지에 대한 환멸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이방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내며 영적으로 내리막의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배우자 탓, 공동체 탓을 하며 그들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목장에 가는 것은 목장이 너무 좋고, 위로받기 위함이 아니라 차별 없는 보혈의 공동체에서 내가 얼마나 차별이 많고 교만한 사람인지 깨닫기 위함입니다.
유다가 헤브론을 떠나 가나안의 ‘아둘람’으로 갑니다. 예수 공동체를 떠나니 ‘반석’이란 뜻을 가진 세상친구 히라를 만나고, 부요한 장인 수아의 딸과 불신결혼 합니다. 그리고 ‘파수꾼’이라는 엘과 ‘부요와 왕성’의 정욕적인 오난 그리고 ‘평화와 기도’의 셀라라는 아들 셋을 낳고 ‘거짓’의 도시 거십에서 ‘예쁜 종려나무’인 며느리 다말을 얻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다를 예수님의 조상으로 지목하셨기에 여호와 앞에서 악한 장자 엘을 죽이셨습니다. 계대혼인법에 의해 시동생 오난이 다말에게 후사를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이 의무를 행하기 싫으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면 되었는데 오난은 수치당하기는 싫고, 결혼해서 재산을 나눠주기도 싫으면서 단지 성적 쾌락만을 맛보고자 했습니다. 땅에 설정했으니 극도의 이기심을 넘어 하나님을 대적하였기에 하나님은 악한 둘째도 죽이셨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기업을 이으려면 막내아들도 주어야 하지만,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했음을 깨닫지 못한 유다는 오직 며느리 다말이 불행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책임전가 합니다. 회개의 반대는 책임전가인 ‘너 때문이야’입니다. 아내까지 죽었는데 유다는 여전히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딤나로 갑니다. 유다가 죄책감으로 공동체를 떠나 불신결혼하고 문제 자녀들이 방종하여 죽은 것이 유다의 악의 결론입니다.
여러분! 목장까지 오셔서 날마다 비판을 일삼으면 자녀들에게 비판과 이기심, 책임전가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여러분은 유다의 이런 악의 단계 중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너 때문이야’를 부르짖는 사람은,
둘째, 결정적인 악을 범합니다.
다말은 기업이 이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창기로 변장을 했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생활방식에 젖어 슬픔을 일과 성적 쾌락으로 잊으려 하니 변장한 며느리 다말을 창녀인 줄 압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다말에게 주어 언약의 주도권이 다말에게 넘어갑니다. 부끄러움 당할 것을 생각하고 세상의 반석같은 친구 히라를 통해 죄의 흔적을 지우려하지만, 유다에게 죄의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행음했건만 며느리가 행음했다는 소식에 불사르고 죽이라 합니다. 유다가 공동체를 떠나 한 것이 결국 며느리를 창녀로 보고 행음하여 임신시킨 일입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오래도록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만, 믿음의 공동체에 속해 고통을 무릅쓰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너 때문이야, 부모 때문이야, 환경 때문이야, 나라 때문이야 한다면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도 내 죄가 인정되지 않아 결정적인 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는 나보다 옳다”의 내 책임입니다.
유다는 다말이 언약의 후사를 위해 하나님의 옳으심으로 행했음을 깨닫고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아니함으로 회개합니다. 또한 다말의 임신이 유다 자신의 악에 비해 의롭다고 공동체 앞에서 고백합니다. 인간 최고의 감정이 회개지만 최고로 교만한 감정이 수치심인데 유다와 다말이 인간적으로 이 일을 했다면 수치심이 어땠겠습니까?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처럼 유다의 깨달음을 위해 다말의 죽어짐이 있어야 했습니다.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교회가 큐티로 듣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고백공동체가 이뤄진다고 정갑식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말이란 지체의 희생을 통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 내 책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나보다 옳다는 것은 내 죄를 인식할 때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옳다고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넷째, 최고의 축복을 주십니다.
다말의 부끄러움을 무릅쓴 적용은 시아버지를 살리고,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 아들을 주심으로 두 아들의 죽음까지 보상하셨습니다. 후에 보아스가 룻을 받아들일 때 성문의 장로들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 같게 하기 원하노라’고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저주이고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유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공동체고백입니다.
오랜 세월 전도해도 예수 믿지 않던 동생이 직장에서 자녀가 다섯인 연상의 이혼녀와 사귀다 임신 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는 낳아야 하지만 결혼은 우리들교회에 와서 양육 받은 뒤에 생각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들교회를 떠나지 않고 계속 나오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사건을 주셨을까? 저는 생명 귀한 줄도 모르고 여러 번 낙태로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녀는 돈도 없는데 동생의 아이까지 여섯 명을 낳은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 여자가 나보다 옳도다’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4년을 기다려서 작년에 그 여자와 결혼해 여섯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집집마다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 다말이 중심 잡으면 다 살아납니다. ‘너는 나보다 옳도다’를 부르짖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