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1. 4. 21.~22.(수,목) - 음력(3. 10.~11.), 일출 05:45~일몰 19:04
●산행지: 비슬지맥 1구간 (사룡산-팔조령)
●산행코스: 생식마을-비슬지맥분기봉-사룡산-541m봉-시루봉갈림길-오재-마일리갈림길-517m봉-537.6m봉-수암재-수암사갈림길-부처바위-무지터갈림길-구룡산-구룡재-매남리갈림길-650m봉-617.9m봉-정상재-538m봉-588.1m봉-발백산-군계갈림길-541m봉-494.6m봉-임장재-508.4m봉-477m봉-송림재-가척재-332.9m봉-산불초소봉(351.4m봉)-350m봉-비오재/비리재-군계봉(331봉)-274.6m봉-곱돌이재/곡돌내재-307.3m봉-326.7m봉-당미기/갈마리재-295.1m봉-갈고개-삼성마을입구-257.7m봉-450.8m봉-430m봉-471m봉-542m봉-대왕산(615.7m)-595.7m봉-643.9m봉-582m봉-벗고개/벅곡재-삿이등(515.7m)-삼면봉(488.4m)-463.2m봉-잉애재-658.1m봉-신방산(703.5m-선의산-고동골말랭이(712.7m-용각산갈림(용각산 왕복)-삼각점봉(481.7m-보리고개-성현/남성현재-삼면봉(471.9m)-경산공원묘원쉼터-고리골산(638m)-삼군봉(634m)-상원산(673.4m)-유구재(415m)-팔조령(380m)
●먹거리: 생수2.5리터, 빵(삼립호떡, 단팥빵, 단팥크림빵), 약과3, 홀스3, 사탕7, 알마겔5, 홍삼스틱5
●준비물: 쟈켓, 바람막이,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장갑, 손수건, 휴지, 우의, 물티슈, 스패츠, 긴팔, 말방울, 매트, 은박매트, 안대, 귀마개, 양말, 여분의류, 띠지50
●거리: 약 63.4km
●소요시간: 31.13h
●누구랑: 나홀로
●경비: KTX49,300, 택시20,000, 팔조령 라면,캔맥6,500, 번개시장국시5,000, ITX31,100, 뒤풀이14,000
●날씨: 9~27, 첫날은 덥고, 둘쨋날은 약간 흐림
●산행경과:
* 4. 20.
- 08:38 : 생식마을
- 08:48 : 비슬지맥분기봉
- 08:58 : 사룡산(685.5m)/ 삼군봉(영천시 북안면, 경주시 산내면 → 청도군 운문면)
- 09:36 : 오재
- 10:27 : 수암재
- 11:06 : 구룡산(674.8m)/ 삼군봉(청도군 운문면, 영천시 북안면 → 경산시 용성면)
- 11:23 : 구룡재
- 11:37 : 경산 구룡산(650.8m), 발백산3.5km
- 12:09 : 정상재/ 질매재
- 13:33 : 발백산(674.5m)/ 바리박산, 반룡산3.9km
- ??:?? : 군계분기봉(청도군 → 경산시)
- 15:00 : 임장재
- 15:25 : 508.4m봉/ 부일봉
- 15:30~55 : 휴식
- 17:03 : 송림고개, 용림마을1.5리터 보충
- 17:36 : 산불감시초소(351.4m봉)
- 18:11 : 비오재
- 19:00 : 곱돌내재/ 대천고개, 갈고개4.6km
- ??:?? : 삼면봉(295.1m, 청도군 금천면, 경산시 용성면 → 남산면)
- 21:14 : 갈고개/ 버스승강장, 대왕산2.7km
- 23:03~57 : 대왕산(641.2m), 잉어재5.1km
* 4. 21.
- 00:20 : 삼면봉(641.2m, 경산시 남산면, 청도군 금천면 → 매전면), 청두분맥분기봉, 잉여재3.9km
- 01:10 : 벗고개/ 벗곡재
- 01:24 : 520m봉(샷이등)
- 02:23 : 삼면봉(488.4m, 청도군 매전면, 경산시 남산면 → 남천면)
- 02:44 : 잉애재/ 525지방도로, 선의산3km
- 03:35~05:35: 휴식
- 06:14 : 시루봉(703.5m)
- 06:36 : 선의산(756.4m)/ 마암산, 용각산5km
- 08:32~48 : 용각산갈림길, 200m왕복
- 08:39 : 용각산(696.8m)/ 삼면봉(경산시 남천면, 청도군 매전면 → 청도읍)
- 09:47 : 삼면봉(481.7m, 경산시 남천면, 청도읍 → 화양읍)
- 10:04 : 보리고개
- 10:44 : 안산(501.7m)/ 논달말랭이
- 11:18~33 : 남성현재/ 성현, 애견장례식장, 물
- 12:11 : 삼면봉(472.4m, 경산시 남천면, 청도군 화양읍 → 청도군 이서면)
- 12:54 : 경산공원묘원
- 13:58 : 삼계봉(634m, 청도군 이서면, 경산시 남천면 → 대구 달성군 가창면), 팔조령3.43km
- 14:30~38 : 상원산(678m)
- 15:45 : 팔조령/ 산장휴게소, 수도,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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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거리
- 숙재~대천고개 24.5km
- 생식마을~비오재 22.3km
-. 숲재~정상고개 8.4km
-. 생식마을~송림고개 19.3km
- 송림고개~잉여재 22.2km
- 송림고개~갈고개 13.2km
- 비오재~팔조령 38.5km
-. 비오재~잉애재 16.5km
- 정상고개~대천고개 14.6km
- 대천고개~잉여재 15.6km
- 갈재~잉여재 8.7km
- 잉애재~팔조령 21.6km
-. 잉애재~남성현재 13.3km
-. 남성현재~팔조령 8.3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용림마을: 송림재는 우틀, 비닐농장 주인에게 식수 1.5리터 보충, 민가는 빈집임
- 용성 개인택시: 053-852-1116
- 대천고개/ 곱돌이재: 곡내리마을 식수보충 가능
- 갈고개: 갈고개휴게소, 화장실, 버스 승강장, 모텔 2곳
- 선의산: 계단 내려서자마자 급좌틀
- 용각산 : 200m 다녀와야 함.
- 경산 개인택시: 053-801-1331, 717-9980
- 청도 각남면 택시: 054-371-4411
- 남성현재: 애견장례식장 식수, 화장실 (혹시 야간에 퇴근하면 뒤편 고물상에서 물 구할 수 있겠음)
- 경산공원묘원: 사무실로 잠깐 내려가면 식수 가능함
- 팔조령: 내려서서 좌측 청도 쪽, 산장휴게소(053-768-2567), 매점겸 식당 앞에 수도 있음.(라면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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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숲재 가는길
- 서울 경부~경주 07:10, 19:10, 3.30h, 20,600
- 서울역~신경주 05:15, 2h, 37,000
- 신경주~광명 50, 51, 70, 700번 3코스
- 광명~산내 07:35, 길건너서 350번
- 산내~시루미기: 첫차
* 경산-서울 오는길
- 14, 16, 18:30, 동서울, 28,400, 3.30h
- 14:40, 15:30, 17, 22, 남부터미널, 21,800
* 청도-서울 오는길
- 청도역 이용, 고속버스는 대구나 밀양으로~
* 동대구-동서울: 16시, 16:40, 17:20, 18시, 18:40, 20시
- 대구역ITX, 동대구역KTX, 동대구시외버스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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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하는 혼술을 출정식 일정에 맞췄습니다. 보통 고기 3인분, 소주 1병인데 이날은 누룽지 추가였네요.
저의 산행후기는 후답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위해서, 선답자님들의 산행후기를 정리하여 간추린 것에 불과하며 시간부족으로 보다 많은 선배님들의 산행기를 살피지 못해 미진하기만 합니다. 후답자 분이 제 산행후기를 토대로 수정, 보완하여 더욱 완성도 높은 산행후기를 작성한다면 그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이번 비슬지맥은 "대구매일신문"에서 연재한 비슬기맥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홀대모 카페 취지에 맞게 기맥을 지맥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비슬지맥 1구간 청도 남산과 화악산이 조망되는 청도군 이서면 팔조령에서 마치고 왔습니다.
전 구간 2.5리터를 짊어지고 다녔는데, 정보 부족으로 쇳덩이보다 더 무거운 1리터는 여분으로 계속 지니고 다녔네요.
경산의 휘황찬란한 야경을 머리맡에 두고,
대왕산 밴치에서 물병을 매트로 감싸 배개 삼고, 은박 매트를 이불삼아 배낭에 종아리를 올리고 1시간 휴면을 취했습니다.
이후 작은 대왕산을 지나 20분 정도 진행하여,
청두분맥이 분기하는 삼면봉(경산 남산면, 청도 금천면→매전면)인 국지원 지도상 643.9m봉(준희선생님 641.2m봉 산패)에 올랐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그 산줄기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체 아쉬움을 남겨두고 진행하였습니다.
팔조령까지 63.4km 나왔구요.
헐티재까지 21km로 중간에 끊을 장소를 몰라 더 이상은 진행하기 애매했습니다. 날을 세워 갈 수만 있다면 비슬지맥을 2구간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구간이기도 했지만 역사가 깊은 이 중요한 구간을 밤에 지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그 보다 앞서 이틀 연속 진행하기는 체력이 벅찼습니다.
비슬은 시작부터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올해 100km전후의 15개 지맥을 마무리하겠다는 목표와 15개 지맥 모두를 2구간으로 마무리 해보겠다는 계획에 변경을 가져왔으니깐요.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큰 살면서 변화를 선택한다는게 어렵다는 말이겠지요. 저도 언새 50 중반입니다. 날밤을 새우고 진행하기 보다는 야심한 새벽시간대 너댓시간 쉬어준다면 산행의 피로는 거반 감소될 것이고 넉넉하게 산행후기를 작성할 시간도 벌고, 굳이 시간에 쫒기듯 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산에서 야심한 밤에 꿀맛같은 휴식을 취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사실 한두 시간 이내 잠깐의 토막잠을 자기위해 무거운 비박장비를 가져다니기도 어려운 구석이거든요.
팔조령에서 5분여 걸려 지름길로 석주사로 걸어내려, 팔조령터널 도로로 나오고 도로따라 약 1km 진행하여, 우록리, 삼산리마을 입구에서 대구역으로 버스를 타고 나왔습니다.^^ 카카오택시 요금이 2만원이 넘는지라 까짓 멀쩡한 다리두고 산행도 일찍 끝나 여유도 있는데 일단 대구쪽으로 걸어 보자는 마음으로,,, 초행길에 이정도면 하늘이 항복했다고 봐야 할려나요. ㅋ
잘 아시다시피 우록리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모하당 김충선장군의 녹동서원이 있는 곳으로 이른바 대구산꾼들이 즐기는 가창환종주 구간과 겹치는 다음 구간에 줄곧 내려다 보게 되는 곳입니다.^^
다음 구간 팔조령엔 반대로 대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될 것입니다.
이른 새벽 서울역에서 ktx를 이용하기도 번거롭고,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허리가 무지 아파 불편합니다. 그 보다는 전날 경주에서 건천을 걸쳐 아화에서 숙박하고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여 시루미기 생식마을로 가는 방법이 나아 보이네요. 경주에서 건천을 걸쳐 산내로 들어가 숙박하고 첫 버스를 이용하여 시루미기로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광명삼거리에서 07:36분 버스로 산내로 들어가 산내에서 09:20분 출발하는 우라리행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택시를 이용했습니다.(요금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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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슬지맥(琵瑟枝脈)이란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아화고개와 숲재 중간에 위치한 사룡산(四龍山, 683m) 북쪽 400m 지점인 656m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사룡산(683m), 구룡산(674.8m), 발백산(674.5m), 대왕산(607m), 선의산(756.4m), 용각산(692.5m), 상원산(674.1m), 삼성산(668.4m), 우미산(-0.7km 747.3m) 등 600~700m 대의 산군들을 지나 비슬산(琵瑟山 1083.6m)에 이르러 북쪽으로 청룡지맥을 분기 시키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화봉(1057.7m), 수봉산(592.5m), 묘봉산(514m)을 지나 천왕산(619.2m)에 이르러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분기시킨후 동남진하며, 호암산(611.2m), 화악산(930m), 형제봉(556.7m), 종남산(663.5m), 팔봉산(391.4m), 붕어등(278.8m)을 지나 금호강의 남쪽 울타리와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나루터에서 밀양강과 낙동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146.5km인 산줄기인데, 최고봉인 비슬산(琵瑟山 1083.6m)의 이름을 따서 비슬지맥 이라 칭한다. 비슬지맥은 흔히 '용의 기운이 흐르는 산줄기'라고 이야기 한다. 사룡산, 구룡산, 용각산 등 비슬지맥 산군의 산 이름에는 유독 용(龍)자가 많이 들어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비슬지맥에서 분기하는 지맥은 비슬산에서 북진하는 청룡지맥(약 37km)과 천왕산에서 남진하는 열왕지맥(약 30.4km)이 있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청룡지맥과 함께 금호강의 남쪽울타리를 이루고,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밀양강을 낙동강에 합수시킨다. 동쪽 밀양강 건너로는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영축지맥의 끝을 바라보고, 남쪽 낙동강 건너로는 낙남정맥에서 분기한 무척지맥의 끝을 바라보며 그 맥을 다한다.
* 구간 거리
낙동정맥 분기봉-(0.4)-사룡산-(4.8)-구룡산-(4.7)-발백산-(9.3)-비오재-(2.1)-곱돌내재-(8.1)-대왕산-(4.1)-잉어재-(3.9)-선의산-(3.8)-용각산-(5.2)-남성현재-(5.4)-상원산-(1.4)팔조령
비슬지맥 행정계를 살펴보면 삼군봉인 사룡산, 경주시 건천읍, 영천시, 청도군 경계에서 시작하여 구룡산에 와서 건천읍-영천시와 작별하고 경산시-청도군 경계를 따르다가 상원산 직전에 삼군봉인 삼계봉에서 대구광역시-경북 도경계를 만나고, 도경계를 따라 삼면봉인 비슬산, 조화봉, 수봉산, 삼군봉인 열왕지맥분기점, 삼면봉인 천왕산, 삼면봉인 화악산까지 이어간다. 화악산을 지난 헬기장(삼면봉)부터 청도군 경계를 벗어나 밀양땅 부북면으로 들어선다. 비슬지맥 전체 146.5km 중에서 청도군 경계를 100km여 지나는데 비슬지맥 전체의 70%에 해당한다. 좀 더 자세히 행정계를 살펴보면, 낙동정맥에서 분기해 나오는 비슬기맥 분기봉(658.9m봉)은 영천시 북안면과 경주시 서면, 산내면이 갈리는 봉우리로, 비슬기맥을 출발할 때는 우 영천시 북안면, 좌 경산시 산내면으로 갈려 잠시 남서향하다, 삼군봉(三郡峰)인 사룡산에서 좌측이 경주시 산내면에서 청도군 운문면으로 바뀌어 구룡산까지 이어진다. 이 구룡산에서 위쪽이 영천시 북안면에서 경산시 용성면으로 바뀌고 아래쪽은 계속 청도군 운문면으로 나뉘어 잠시 서향하다가 남향하면서 발백산(바리박산) 이후 593m봉까지 이어지고, 이 봉에서 온전히 경산시 용성면 안으로 들어서서 가척재(용림임도)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남서향과 남향을 번갈아 가며 경주, 영천, 청도, 경산을 가르며 이어가는 셈이다. 벅고개(벗고개)를 출발할 때는 우측(북쪽)이 경산시 남산면이고 좌측(남쪽)이 청도군 매전면으로 구분지으며 서향하다가, 488.4m봉(삼면봉)에서 우측이 경산시 남천면으로 바뀌어 남서향과 남향을 반복하면서 용각산 갈림봉(650봉)까지 이어지고, 이 갈림봉부터는 맥길이 서향으로 바뀌면서 아래쪽(남쪽)이 청도군 매전면에서 청도읍으로 들어서게 된다. 잠시 서향하던 맥길은 55번 중앙고속고속국도가 지나는 481.7m봉에서 아래쪽이 청도군 화양읍으로 바뀌어 성현(남성현재)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위쪽은 삼면봉(488.4m)에서부터 계속 경산시 남천면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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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경북 동남부에 있는 시로 상고시대 사로국(斯盧國)이 있던 지역으로 진한 12국 중 하나에 속했다. BC 57년 건국 이래 992년간 왕조를 이어온 신라의 본토이다. 진한의 중심지였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6·25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우리나라 최대의 유물·유적이 보존된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많은 청동기 유물들이 경주시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신라의 전신이며 경주 6촌에서 성장한 사로국의 생활모습을 짐작케 한다. 57년 6부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서야벌이라 했다. 65년(탈해왕 9)에는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고, 307년(또는 503년이라고도 함)에 국호를 신라라 했다. 즉, 신라 건국 후에는 서라벌(徐羅伐)·계림(鷄林)이라 불렀다. 935년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1308년 계림부윤으로 바꾸었다가 1413년 경주로 정해졌다. 별호는 금성·월성·낙랑·금오·문천이었다. 경주의 고읍으로는 대성군·약장현·상성군·임관군·안강현·기계현·신광현·음즙현·장진현이 있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으로 바뀌어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에 속했다. 1931년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다시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실시된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주군과 통합되어 경주시라는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2009년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문무대왕면·양남면·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중부동·황오동·성건동·황남동·월성동·선도동·용강동·황성동·동천동·불국동·보덕동 등 4개읍 8개면 11개동(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 186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정로 260이다. 백두대간 낙동정맥과 호미지맥이 시의 동부와 서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어 시의 지세는 크게 동쪽의 해안지역, 중앙의 분지지역, 서쪽의 산악지역으로 구분된다. 해안지역은 급경사를 이루어 하천이 짧고 평야가 적다. 중앙의 분지지역에 해당하는 동지역은 토함산(吐含山:745m), 금오산(金鰲山:495m) 등에 둘러싸였으며, 서쪽의 산악지역에는 도덕산(道德山:703m)·구미산(龜尾山:594m)·주사산(朱砂山:622m)·단석산(斷石山:827m) 등이 솟아 있다. 서면 인내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한 형산강이 시의 중앙을 북류하여 포항시를 지나 동해로 흘러든다. 복안천·남천·소현천·신당천·기계천 등이 형산강에 합류한다. 특히 금오산에는 수평·수직 절리가 발달하여 도깨비바위·고깔바위·탁자바위 등으로 불리는 많은 핵석(核石)이 발달했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문화유산은 물론,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자연박물관이다. 국가지정문화재(국보 31, 보물 81, 사적및명승 77, 천연기념물 3, 중요무형문화재 2, 중요민속자료 16)와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30, 기념물 17, 무형문화재 2, 민속자료 4) 및 문화재자료 42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강동면과 천북면 일대에 고인돌이 밀집해 있으며, 1968년 이후 지정된 경주국립공원 8개 지구인 남산·서악·화랑·소금강·토함산·단석산·대본·구미산 지구 등이 있다. 특히 남산지구(사적 제311호)는 그 자체가 거대한 노천박물관으로 36개 계곡에 110개의 절터와 61개의 석탑 및 78개의 불상이 산재해 있다. 노동동고분군(사적 제38호)·황남동고분군(사적 제40호)을 비롯한 다수의 고분군과 무열왕릉(武烈王陵, 사적 제20호)·괘릉(掛陵, 사적 제26호)·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등, 사적 158호)·오릉(五陵, 사적 제172호)·현곡면오류리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불국사·석굴암과 남산 일대의 유적이 대표적이며, 그밖에 분황사·백률사(栢栗寺)·기림사(祇林寺) 등의 현존 사찰들과 황룡사지(黃龍寺址, 사적 제6호)·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사적 제8호)·감은사지(感恩寺址, 사적 제31호) 등의 절터에 많은 유물·유적들이 있다.
* 영천시
경북 동남쪽에 있는 시이다.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으로는 군위군과 청송군에 맞닿아있다. 영천의 지세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이라 표현한다. 이때 '이수(二手)'는 남천과 북천을 말하는데, 남천은 보현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임고면을 지나는 자호천과, 어림산에서 발원하여 고경면을 지나는 고촌천이 조교동에서 합쳐지는 강 줄기를 말한다. 북천은 보현산 왼쪽에 위치한 화북면에서 발원한 고현천과,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신녕면으로 흐르는 신녕천이 합쳐진 하류이다. '삼산(三山)'은 좁은 의미로는 작산·마현산·유봉산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보현산·팔공산·운주산을 가리킨다. 행정구역은 금홍읍·청통면·신녕면·화산면·화북면·화남면·자양면·임고면·고경면·북안면·대창면·동부동·중앙동·서부동·완산동·남부동 등 1개읍 10개면 5개동으로 구성된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영천시 시청로 16이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절야화군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임고군으로 개칭하고 영현으로 도동현·임천현·장진현·신령현·맹백현을 관할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도동현과 임천현을 병합하고 영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995년(성종 14)에 자사가 파견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으며, 뒤에 주(州)로 승격했다. 1413년(태종 13)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 때 영천군이 되었다. 영천의 별호는 익양·영양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고종 31)에 대구부 영천군,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영천군의 20개면이 10개면으로, 신령군의 4개면이 2개면으로 통합되어 영천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내서면·내도면·완산면·우곡면이 합해 이루어진 영천면이 1937년에 영천읍으로, 1973년에 금호면이 금호읍으로, 1986년에 화북면 삼창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영천읍은 1981년에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95년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영천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해왔던 영천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영천시를 이루었다. 북쪽과 동쪽은 백두대간 낙동정맥이 뻗어내려 화산(828m)·방가산(756m)·보현산(1,124m)·수석봉(821m)·운주산(806m)·도덕산(703m)·천장산(695m)·어림산(510m) 등의 산들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화강암질의 팔공산(1,192m) 지리와 태실봉(466m)이, 남쪽에는 침식에 강한 분암류로 이루어진 금박산(432m)·구룡산(675m)·사룡산(685m) 등이 솟아 있다. 갑령·노고재·시티재·땅고개 등의 고개는 예로부터 주요교통로로 이용되어왔다. 이 지역의 주요하천으로는 동부와 남부를 남서류하는 금호강과 남부를 서류하는 북안천, 북부에서 남류하는 고현천, 중앙을 서류하는 고촌천, 서부를 남동류하는 신령하천 등이 있다. 이들 하천은 영천시에서 금호강에 합류하여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시가지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북안에 구시가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남안에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팔공산도립공원을 비롯하여 산세가 수려한 산들이 시를 둘러싸고 있고, 금호강이 시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 관광명소가 많다. 팔공산도립공원내에는 은해사·운부암·백홍암·갓바위·안흥폭포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신령면의 수도사폭포, 위장병과 고혈압에 좋다는 고경면의 황수탕, 자양면의 영천댐 등의 명소가 있다. 중심시가지에는 창구공원과 완산공원이 있으며, 교촌동 마현산의 마현공원에는 6·25전쟁 전적비와 충혼탑, 2km의 산정로가 있다. 이외에도, 보현산 정상에는 1996년 준공된 보현산천문대가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1.8m 광학망원경과 1.8m 망원경용 에셀 분광기(고분산 분광기인 BOES와 중분산 분광기인 긴슬릿 분광기가 결합된 형태), 4K CCD 카메라, 지상망원경용 근적외선카메라 시스템(KASINICS), 태양플레어망원경 등의 천체 관측 시설을 보유한 한국천문연구원 산하의 연구기관이다.
* 경산시
경북 남부에 있는 시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으나 대구발전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영향을 받아온 지역이다. 행정구역은 하양읍·진량읍·압량읍·와촌면·자인면·용성면·남산면·남천면·삼북동·계양동·남방동·내동·여천동·유곡동·신천동·점촌동·평산동·사동·삼풍동·옥곡동·사정동·옥산동·중산동·정평동·삼남동·서상동·신교동·상방동·백천동·대평동·임당동·대동·조영동·갑제동·계양동·중방동 등 2개읍 6개면 7개 행정동 28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매로 159이다. 삼한시대에 압량소국(押粱小國:또는 押督國)이 있었으며, 102년 신라 파사왕이 이곳을 점령하여 군을 설치했다. 뒤에 압량주(押粱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둠에 642년에는 김유신이 군주가 되었다. 648년에는 도독이라 칭하여 656년에는 김인문이 압독주 총관이 되기도 했다. 757년 장산군(獐山郡)으로 고쳐 양주(良州:양산)에 속했다. 이때 해안현(解顔縣)·여량현(餘糧縣)·자인현(慈仁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고려 940년에 장산현(章山縣)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018년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을 피하여 경산현으로 개칭했다. 1317년에는 국사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되었으며, 1390년에는 공양왕비의 출신지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조 때에 현령으로 강등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으나 1601~08년에는 대구부에 잠시 병합되기도 했다. 별호는 옥산(玉山)이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의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 등 3개의 독립된 현이 통합된 곳이다. 옛 경산현 지역은 대체로 압량읍·남천면과 1989년 시 승격으로 분리된 옛 경산시 일대이며, 옛 하양현 지역은 하양읍과 와촌면·진량면 일대, 옛 자인현 지역은 자인면·남산면·용성면 일대에 해당한다. 3개현은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경산군·하양군·자인군이 되어 대구부 관할 아래 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경산군이 하양군, 자인군, 신령군의 남면 일부를 병합하여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56년 경산면이, 1973년 안심면·하양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1년 대구의 직할시 승격 때 안심읍과 고산면을 이관했다. 대구의 위성도시 성격을 띠고 학원도시로 발전한 경산읍이 1989년 시로 승격, 경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의 대대적인 행정구역개편으로 경산군과 다시 통합되었다. 시의 대체적인 지세는 크게 북부산지·남부산지·중부저지로 구분된다. 남부는 병풍산(571m)·동학산(動鶴山:603m)·용각산(龍角山:693m)·선의산(仙義山:756m)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서부에는 환성산(環城山:811m)·인봉(印峰:887m)·무학산(舞鶴山:575m) 등이 솟아 있다. 통합 이전의 경산시였던 동지역은 성암산(聖岩山 : 469m)·백자산(柏紫山 : 486m)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낮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금호강이 시의 중앙부를 흐르며, 청통천(淸通川)을 비롯해 용각산에서 발원한 남천천(南川川), 용성면 구룡산에서 발원한 오목천(烏鶩川) 등이 금호강에 흘러든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그 주위에는 100m 내외의 구릉성산지가 분포한다. 경산시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5, 사적 3)와 문화재 자료 3점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경산임당동고분군(慶山林堂洞古墳群, 사적 300호)과 경산조영동고분군(慶山造永洞古墳群, 사적 331호)이 대표적인데, 특히 1982년 발굴된 임당동고분군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 남천면·자인면·용성면 등지에 고인돌이 남아 있다. 압량읍에는 삼국시대의 고대식광장(古代式廣場)인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 사적 218호)이 있고, 자인면 북사리, 압량읍 압량리, 남산면 안심리, 용성면 등지에는 삼국시대의 고분이 분포한다. 군사 유적지로는 압량 장대산(將大山), 용성산성(龍城山城), 성산봉대(城山烽臺), 시산봉대(匙山烽臺)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상감초화문병(象嵌草花文甁, 보물 제239호)이 대동(大洞)에 위치해 있는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청도군
경북 최남단에 있는 군. 동쪽으로는 경주시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밀양시와 도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는 경산시와 맞닿아있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예로부터 '청도반시'로 알려진 감의 주산지이다. 청도소싸움축제가 청도군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매년 전국규모로 이루어진다. 행정구역은 화양읍·청도읍·각남면·풍각면·각북면·이서면·운문면·금천면·매전면 등 2개읍 7개면 127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12개리). 군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청화로 70이다.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어 삼한시대에 우유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서국이 있었으나 신라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멸망하고 신라는 이곳에 솔이산성·오도산성·경산성을 설치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3성을 각각 소산현·오악현·형산현으로 개칭하고 밀성군(밀양)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초에 이들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을 설치했다. 1018년(현종 9)에 밀성군의 속군이 되었다가 1109년(예종 4)에 감무를 파견함으로써 독립했으며, 충혜왕대에 이 고을 사람 김선장(金善莊)의 공로로 청도군이 되었다가 곧 다시 감무가 파견되었다. 1366년(공민왕 15)에 다시 지군사가 파견되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을 유지했으며, 별호는 오산·도주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청도군, 1896년에 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대구의 두입지인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밀양의 비입지인 고미면이 청도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각북면·금천면은 그대로, 상읍면·차읍면이 화양면으로, 현내면·이동면이 풍각면으로, 내남면·초동면이 각남면으로, 상북면·차북면이 이서면으로, 용산면·하남면이 대성면으로, 중남면·상남면·내서면·초동면이 매전면으로, 동상면·일위면이 종도면으로, 이위면·고미면이 운문면으로 폐합되었다. 1940년에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에 청도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에 종도면을 폐지하고 매전면과 금천면에 나누어 속하게 했다. 1979년에 청도군청이 화양면으로 이전하면서 화양면이 화양읍으로 승격되었다. 낙동정맥의 비슬지맥이 뻗어내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군의 남동쪽에 가지산(1,240m)·운문산(1,188m)·문복산(1,014m)·억산(944m), 서쪽에 수봉산(593m), 남쪽에 화악산(932m)·남산(860m), 북쪽에 선의산(756m)·용각산(693m) 등이 솟아 있다. 군의 서쪽 및 서북쪽 산지에서 발원하는 풍각천·각북천 등이 합류하여 청도천을 이루어 동쪽으로 흐르다가 화양읍을 지나 남류한다. 밀양강의 본류를 이루는 동창천은 무적천 등을 합류하면서 군의 동쪽을 남서류하며, 청도읍 남부에서 청도천이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충적지는 농경지로 이용된다. 군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8, 천연기념물 6, 중요민속자료 2), 지방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19, 무형문화재 2, 기념물 9, 민속자료 6, 무형문화재 2), 문화재자료 9점, 등록문화재 2점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화양읍 동천리의 지석묘, 각남면 화리의 지석묘와 석관묘 등을 비롯하여 군내의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산성으로는 화양읍의 청도읍성·폐성·백곡토성, 청도읍의 오례산성·철마산성, 운문면의 호거산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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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지맥 중 사룡산과 비슬산 사이 75㎞ 정도 되는 산줄기의 흐름은, 사룡산(686m)~오재(375m)~구룡산(675m)~질매재(410m)~바리박산(675m·발백산)~육동구간~곱돌이재(210m)~갈재(170m)~대왕산(606m)~잉애재(373m)~마암산(756m·선의산)~용각산(기슭·650m)~성현(270m·남성현재)~고리골산(잠칭·673m)~팔조령(380m)~삼성산(668m)~밤티재(535m)~청산(802m)~헐티재(510m)~천왕봉(1,083m, 비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비슬지맥의 북쪽 기슭에는 동→서 순으로 북안면(영천)-용성면(경산)-남산면(경산)-남천면(경산)-가창면(달성) 등 5개 면이 분포했다. 그 땅에서는 3개의 지천(支川)이 생겨 금호강으로 합류해 간다. 용성서 시작해 남산-자인(경산) 경계선 역할을 하며 흐르는 오목천'(烏鶩川)이 첫째다. 다음 물길은 남천면서 발원해 경산 시가지로 흐르는 남천(南川)이다. 셋째는 가창면 물을 싣고 대구 중심부를 관통하는 신천(新川)이다. 반면 비슬지맥 남쪽에는 청도의 여러 읍면과 경산 일부 땅이 자리 잡았다. 처음 것은 운문면이며 다음은 흔히 육동지구로 불리는 경산 6개 마을이다. 비슬지맥 낮은 구간을 넘어 북편의 용성면이 남쪽까지 영역을 확장한 결과다. 육동 다음 분포는 청도 금천면–매전면–청도읍–화양읍–이서면-각북면 순이다. 청도 9개 읍면 중 7개가 이 산줄기에 등대고 있다. 비슬지맥 남쪽 이들 땅의 물은 크게 둘로 모여 흐른다. 서편의 청도천(淸道川)과 동편의 동창천(東倉川)이다. 두 하천의 유역을 가르는 것은 비슬지맥 중간 즈음에 솟은 용각산서 내려서는 유천분맥이다. 길이가 무려 22㎞에 달하는 이 산줄기는 최남단 유천까지 내리 달리며 청도를 둘로 좍 갈라놓는다. 서쪽은 '산서'(山西), 동쪽은 '산동'(山東)이라 별칭 될 정도다. 여기까지가 비슬지맥 본맥 대강의 모습이다.
♤ 숙재(淑嶺, 475m)
경북 경주시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숲재로 되어 있으나 고개가 아화 방향으로 급하게 숙이고 있다고 숙재라고도 하는데 숲재는 숙재의 오기인듯 하다. 아화쪽 아래동리 이름도 숙골이고 거기 있는 저수지도 숙곡지이고 숙재(淑嶺)라고 쓴다. 우라리(牛羅里)는 마을 모양이 소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주 산내면 최오지인 우라리는 행정구역상으로 산내면이지만 생활반경은 서면에 있는 아화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라 생식마을이 있는 이곳을 시루미기라 부르는데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 고개 정상에는 우라생식마을, 우라二리 청년회 표시석과 석두암 표지판이 보인다. 생식마을 입구에 있는 버스 승강장에는 생식마을을 말하는 시루미기라고 적혀있다.
♤ 우라리 생식마을
우라리(牛羅里) 생식마을인 '시루미기'는 1940년대 이전까지는 민가가 없다가 그 후 700여평의 다랑논을 개간하면서 처음 민가가 들어섰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빨치산의 거점이 되어 불태워 없어진 뒤로 사람이 살지 않다가, 1960년대 초 한 신앙인이 들어가 생식마을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40여 호 100여 명의 마을로 자리잡았다. '시루미기'라는 마을 이름 중 '미기'는 재나 잘록이를 의미하는 '목'에다 발음하기 쉽게 '이'를 붙여 '목이'라 하다가 '미기'로 변화되었는데, '시루'는 산꼭대기에 펑퍼짐하게 퍼진 마을 자리가 떡시루 모습이어서 시루미기란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이 수련할 때 내리 친 칼에 맞아 그 마을 안 바위가 시루떡 모양으로 잘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었다. 경주 산내 생식마을은 30여년 전에 임야 8만여평 공동구입/속세 벗어난 산속의 30여가구 100여명/고기와 불에 닿은 음식은 입에도 안대/바르게 사는 것은 자연 그대로 사는것/‘먹는 즐거움 버려야 진정한 자유 얻어’ 살아있는 것만 먹는다. 불에 익히거나 구운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고기와 생선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산에서 나는 이름 모를 야생초와 나무껍질,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야채와 쌀 등을 날것으로 그냥 먹는다. 생식마을 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리고 평화롭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렸기 때문이란다. 경쟁과 시기 질투는 아랫마을 속세의 이야기,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산나물과 맑은 공기가 있는 한 고통받을 일도 없다. 이들은 하루 두차례 예배를 올린다. 새벽 3시 30분과 저녁 7시가 예배시간, 그렇다고 해서 특정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자유다. 천주교·불교·기독교신자는 물론 선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는 「식물연구」에 있다. 혹시 독초를 먹을지도 모르기 때문, 새로운 식물을 발견했을 때는 발표회를 갖기도 한다. 각종 산나물과 식물공부는 물론 한자와 동의보감 등을 공부한다.
- 지금은 1세대 정착민들은 거의 돌아가고 2세대 몇사람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허물어져 가는 폐가들이 많아 을씨년스럽다.
♤ 비슬지맥분기봉(659m)
비슬지맥은 낙동정맥에서 분기하여 사룡산에서 구룡산, 대왕산, 용각산, 달성의 비슬산, 천왕산, 화악산, 밀양 종남산을 거쳐 오우진나루까지 약 146.5km, 밀양강과 낙동강을 가르다가 모은다. 대구, 경북사람들은 대구생활권을 중심에 두고 금호강 수계를 따라 비슬지맥이라 부르는 걸 선호하고, 부산, 경남사람들은 밀양과 밀양강을 더 중시해 밀양지맥이라 부르기를 선호하지만 신산경표에서 비슬지맥으로 통일을 기하였다.
- 긴 4각 대리석 표지석 한면에는 '낙동정맥 / 해발 656m'가 새겨져 있고, 다른 한면에는 '비슬기맥분기점'이라 표시되어 있다.
'부산 / 같이하는 산악회'에서 세운 이정표에는 비슬기맥을 '밀양기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 정상 표석 하나와 금속 이정표 하나가 서있다.
- 전망좋은 산불감시초소 북쪽으로 경부선이 시원하게 뻗어있으며 그 우측으로 영천시 고경면과 경주시 서면이다. 비행기 소리도 아닌데 ktx경부선이 왠종일 온 골짜기를 진동하는건 어쩔까 싶다.
♤ 사룡산(四龍山, 685.5m)/ 삼군봉(영천시 북안면, 경주시 산내면 → 청도군 운문면)
네마리 용이라는 사룡산은 낙동정맥 지경재(아화고개)에서 정맥 줄기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 솟아오른 600m 전후의 네 봉우리(597m봉, 640m봉, 659m봉, 686m봉)를 말한다. 서로 5분여 거리로 밀집해 있는 이 봉우리들 중 두번째 것(640m봉) 남서 사면(斜面)은 절벽이고, 그 밑으로 고속철이 뚫고 들어가는데, 부산성터의 밑을 지나 고속도 건천나들목 남쪽 지점까지 6㎞ 이상 이어지는 '당리터널' 시작점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세번째인 659m봉에서 비슬지맥이 갈라져 가는데, 낙동정맥은 이 봉우리만 통과할 뿐 사룡산 정상봉(頂上峰)은 비켜간다. 네번째 사룡산 최고봉은 낙동정맥이 아니라 비슬지맥에 솟은 첫 봉우리로, 이 봉에서 영천시 북안면 당리,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세 지역(郡)이 나뉜다. 정맥과 지맥은 분기봉서 갈리지만, 세개 시·군은 여기서 나뉘는 것이다. 서쪽으로 구룡산, 남쪽으로 장륙산, 정족산과 이어져 있으며, 주봉과 더불어 시루봉, 문방동(645.2m), 조래봉(585m)으로 연결되어 있고, 옛날 용 네마리가 승천한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사룡산은 이웃한 경주 오봉산의 부산성과 연결되는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시대 병사들이 이 산을 거점으로 삼아 적을 물리쳤다하여 영천 사람들은 사룡산을 전방산 또는 '전배이'라고 부른다. 낙동정맥의 분기점을 세번째 봉에 따로 표시하기도 하지만, "사룡산에서 낙동과 갈린다"는 말이 그다지 어긋난 말이 아닐 것이므로 사룡산 정상이 낙동정맥의 분기점이고 비슬지맥의 시작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표기 또한 그러하다. 사룡산은 직현천(直峴川)의 발원지로 사룡산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내칠리를 거쳐 남쪽으로 흘러 밀양강의 최상류 중 하나인 동창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직현천의 이름은 내칠리의 자연 마을 중 하나인 직현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직현(直峴)은 순우리말 이름인 곧은터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내칠리(內漆里)는 안옻밭의 한자 표기인 내칠전(內漆田)에서 칠(漆)을 칠(七)자로 바꾸고, 전(田)을 생략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호구총수] 경주의 산내면에는 칠전리(漆田里)로 기록되어 있다.
- 사룡산에는 영천시에서 세운 대형 정상석(사룡산 / 해발 685m / 영천시청)과 영천시 북안면 당1리에서 세운 정상석(해발 685m/ 四龍山頂上)이 있다. 그 좌측에는 '청도산악회'에서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세운 작고 예쁜 정상석(낙동정맥 / 四龍山)이 있는데, 낙동정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 예전에는 정상석 세개와 정상목이 하나 있었는데 하얀 정상목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석 바로 아래에는 사룡산 정상에 '靈山 辛公과 配 月城金氏' 합분묘가 자리하고 있다.
♤ 경주 부산성(부산성)
사룡산의 동쪽으로 오봉산이 이어지며 삼국시대이 부산성(사적 제25호)이 있다. 부산성은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주사산, 오봉산, 오로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일면 여근곡)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 그리고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 우물터, 못터 및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있다.
♤ 장륙분맥
사룡산에서는 남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지맥 능선과 달리 남쪽으로 또 하나의 능선이 뻗어 나가는데, 경주 산내와 청도 운문을 가르며 뻗어 내리는 장륙능선이다. 사룡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하는 능선은 사룡산을 출발해 동창천(東倉川) 가까이의 같은 높이의 장륙산(將六山, 686m)까지 약 12km를 이어 달리며 청도 운문면과 경주시 산내면을 가른다. 최저점조차 해발 400m에 가까울 만큼 위세가 대단하고, 주행을 끝내는 순간까지 대체로 600m대를 지켜나가는 것도 특징인 능선인데, 장륙분맥으로 칭해도 좋을 것이다.
♤ 칼바위등(497m)
우측 잡목사이로 북안면 상리마을과 KTX경부선이 지나는 철교가 보이는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는 542m봉에서 내려서다가 잠시 올라 암릉봉을 좌측 사면으로 우회하여 통과하는데, 칼바위등'이다. 이 봉우리 남쪽 괴틀마을에서 '칼바위등'이라 부르는 봉우리인데, 괴틀마을은 20여 가구의 마일리 최북단 자연마을이다.
- 칼바위등에서 잠시 내려서면 '김녕김공(金寧金公) 묘'를 지나는데, 배(配) 순흥안씨(順興安氏)의 묘는 따로 떨어져서 '고노양지맥현(古老陽地麥峴)에 '해좌(亥坐)' 방위로 묘가 있다고 표기하고 있다.
♤ 오재(375m)/ 921번지방도
오재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와 영천시 북안면 상리의 경계에 위치한 재(峙)로 92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며 고개 우측으로 영천시 북안면 방향으로 애국지사 이형표추모비와 오재쉼터 표지석이 있다. 사룡산과 구룡산의 등산기점이기도 한 곳으로 사룡산은 영천시 쪽에, 구룡산은 청도군 쪽에 각각 등산로입구 안내 푯말이 세워져 있다. 좌측 청도군 운문면 방향으로 도로따라 잠시 이동하면 천막이 쳐진 건물이 보이고 그 맞은편 도로 우측에 오재 들머리 이정표(←구룡산정상 3.1km, →사룡산정상 1.9km, ↑상리 2.3km)와 글씨가 모두 지워지고 (수암)만 남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사룡산을 지나 이어가는 비슬지맥은 그 북편에 영천시 북안면 상리가 자리하고, 남쪽 산자락에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정상리가 붙었다. 이 동·서 구간 비슬지맥서 가장 낮은 곳이 오재다. 이 최저점이 최고점 사룡산과 불과 1.6km 떨어져 있다. 사룡산서 내려서는데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 오재는 운문~북안을 잇는 주 통로로 부상해 있다. 오래 전 921호선 지방도가 개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에 따르면 옛날 도보시대 중추 교통로는 오재서 서쪽으로 800여m 더 가서 닿는 밤재였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만 해도 모두 밤재를 통해 청도로 피난 갔다고 했다. 저런 유명세 영향으로 청도 쪽 그 바로 밑 저수지는 '밤재못', 그 아래 골은 '밤재골'로 불린다. 이들과 재 너머 영천 '두곡못'을 잇는게 옛길이라 했다.
가야할 구룡산 우측으로 영천시 북안면의 마을들인 상리와 당리 및 복리가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지방도와 함께 내려다 보인다.
♤ 영천시 북안면 상리
상리는 옛 영천군 원곡면이었던 지역인데 1914년 인근 마을을 병합하여 사리라 하였다가 사란 글자가 불길하다고 하여 상리로 고치고 북안면에 편입시켰다. 못마을 또는 감동은 예부터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며 신촌은 김녕김씨 칠대조께서 감동에서 분기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하고 양지촌은 가장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한 듯한 곳이기도 하며 여러 성씨가 모여사는 작은 마을이다. 김녕김씨 가장 많이 모여사는 집성촌은 신촌이고 굽말 또는 굼말은 마을 깊은 곳에 위치한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당리는 원래 영천군 원곡면이었으며 면소재지였는데 사룡산 밑에 신당이 있었으므로 당리라 하였다. 북리는 본래 북골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모양이 베짜는 북처럼 생겼다하여 지은 이름이기도 하며 상마을 또는 대리는 북동의 안쪽에 있다하여 상마을이라 한다. 마을 개척은 1590년대라 전해오며 중리는 들 중앙에 들 중앙에 있으며 예부터 취락이 형성된 곳이리도 한 곳으로 다른 자연부락에 비하면 가장 큰 마을이다. 새골은 구룡산 밑에서 큰 망르까지 길고도 좁은 계곡이 약 500m나 되며 대리는 가장 큰 마을로 옛날에는 큰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 밤재(400m)
밤재는 오재에서 서쪽으로 산등 하나를 넘어서 있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와 영천시 북안면 상리를 내왕했던 옛 고개로 92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오재와는 다른 고개인데 지도상에는 오재를 밤재로 표기한 지도가 많다.(오기인듯 싶다.) 국토지리정보원 2005년도 1/50,000 지형도에도 밤재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밤재는 율령으로도 불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지도서]에서 청도의 물산(物産)에 밤이 언급되고, 고개 아래에 밤재골, 밤재못과 같이 '밤'자가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 고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서 밤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향토지에 의하면 옛날에 밤재는 영천과 청도를 연결하는 지역민과 보부상들의 주요 교통로였다. 한국전쟁 때 북안면 사람들이 모두 밤재를 통해 피란을 갔었다. 하지만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약 800m 떨어진 곳에 영천과 청도를 연결하는 921번 지방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통행량이 크게 감소하였다.
- 오재에서 출발하여 약 15분 진행하면 잘록이 안부를 지나는데, 등로 좌 우에도 희미한 옛길이 보이는 '밤재'다.
♤ 마일리(馬日里)갈림길/ 수암산(537.6m)
청도의 제일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운문면에 있는 마일리는 지도상 누에의 뿔 모양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영천시 북안면 상리와 맞닿은 곳에 있는 청도군의 최오지 마을이다. '마일'이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산골에 마을이 있어서, 청도말로 마울인 마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마일로 번했다고 전하며, 마을로는 아랫마을, 평지마을, 구마실, 안마실, 외두리, 음지마을, 새집마을, 신강괴기(괴틀), 수암(아래수암, 윗수암) 등이 있는데, 구룡산 높은 봉우리가 북쪽을 막고, 그 주봉들인 우리봉과 마일봉이 마을의 앞과 뒤를 막으면서 마을은 가운데 계곡에 주로 형성되어 있다. 경작지는 마일천 양안으로 논이 있고, 산비탈에는 계단식 밭을 일구어 대부분 고추와 콩 등을 경작하고 있다.
♤ 수암재(水岩峙, 445m)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아래 수암마을과 영천시 북안면 상리 경계에 있는 삼거리가 있는 고개이다. 잠칭 '수암산(537.6m)'을 지나서 산줄기는 다시 90여m 가라앉는다. 영천시 북안면과 청도군 운문면을 잇는 오재, 밤재, 수암재 3대 고갯길 중 마지막인 수암재다. 양회임도 삼거리로 이어지는 도로는 자동차 한대 겨우 다닐 정도로 좁다. 하지만 그건 단순 임도나 농로가 아니라 당당한 마을 진입로다. 수암은 청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도 마일리 큰 마을서 올라오며 '아랫수암'을 연결했을뿐 아니라, 수암재를 지나서도 서쪽의 '윗수암' 마을을 잇는다. 게다가 수암재~상리(북안) 구간도 말끔히 다듬어져 몇 년 전부터는 청도~영천 사이까지 온전히 연결하게 됐다. 수암사로 향하는 이정표가 서있다. 지명 유래는 고개 아래에 있는 수암마을에서 따온듯 한데 수암(水岩)은 구룡산 아래 500m이상 고지에 아랫수암과 윗수암, 두개 마을로 형성된 청도의 강원도라 할 수 있다. 물과 나무와 바위가 풍부하므로 수암(水岩) 또는 수암(樹岩)으로 쓰여왔다고 한다.
- 삼거리에서 구룡산(수암사) 방향으로 출발하면, 우측 칡덩굴 사이에 '구룡산 / 무지터→' 표지판이 보인다.
♤ 수암사(水巖寺)
수암사는 신라 때 다섯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인 수암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점차 절이 쇠락함에 따라 민가가 들어서면서 절은 폐사되었다고 하며 또한 수암에는 윗수암과 아랫수암이 있다고 한다. 몇해 전 혜국스님께서 토굴을 짓고 수행을 했으며 스님의 상좌였던 성천스님과 병천스님께서 수암사 복원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 부처바위
생김새가 미륵부처님 상이다. 3m정도의 기암(奇巖)으로 기도하는 부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소나무와 바위가 어울어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부터 영험있는 미륵골 돌부처라 하여 소원을 비는 이가 많았으며, 지금도 부처바위를 찾아 소원을 비는 이가 많다고 한다.
- 부처바위를 조금 더오르면 나타나는 전망바위에서 뒤돌아 보면 출발지에서 이어져 온 지맥 능선과 그 뒤 낙동정맥 마루금이 산너울을 그리며 바라다 보인다.
♤ 무지터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와 영천시 북안면 상리 구룡산(영천) 9부능선에 위치한 구룡산 용이 눈에 해당되는 명당으로 영천 사일의 남원곡 사람들은 구룡산 9부능선에 위치한 천년의 마르지 않는 옹달샘을 두고 무지터라 부르면서 산신의 음용수이자 자신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준 물길로 믿었다. 가뭄에도 샘이 마루지 않아 구룡산을 의지하고 살아온 남원곡 사람들에게 신령수를 넘어 기우제를 올리는 제단이었다. 영천, 경산, 청도 세개 부락에서 합동으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구룡산 정상에서 동북쪽 아래로 불과 50여m 지점에 위치한 이 옹달샘은 북안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무지터에서 흐르는 한줄기 물길이 남원곡 땅을 흠뻑 적시고 400여 년전 노계가 살다간 도계를 지난다. 그리고 다시 영천시 도동 고갯마루 완귀정 앞 개울을 만들고 자호천과 합류하면서 마침내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되는 것이다. 무지터는 가는 명주실 꾸리 하나쯤 족히 풀어 내릴 만큼 아주 깊은 샘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매몰되었다. 지금도 1m 정도의 깊이와 폭을 가진 이 샘은 여전히 맑은 물이 가득 고이고 흐른다. 사람들은 구룡산에 살던 아홉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승천하였다고 하면서 이 무지터를 용의 눈이라고도 한다. 무지터는 마치 큰 광주리를 얹혀 놓은듯 넓고 펑퍼짐한 지형에다 햇살마저 비켜갈 줄 모르는 양지녁이다. 잔설이 서둘러 녹는 자리에 갯버들 흰 잎새가 돋아나고 연이어 연분홍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나는 곳이다. 습지식물이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북안면 전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잇어 경관상으로 매우 수려하다. 무지터를 구경하고 삼거리로 되돌아 나가 구룡산으로 향하여야 하지만, 무지터 우측 능선에 올라 구룡산으로 바로 오르는 등로가 있다.
- 무지터는 관리가 되지않아 지저분하고 물은 음용은 커녕 손을 씻기에도 어려울 정도이다.
♤ 구룡산(九龍山, 674.8m)/ 삼군봉(청도군 운문면, 영천시 북안면 → 경산시 용성면)
경북 영천시 북안면과 청도군 운문면, 그리고 경산시 용성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데크목의 전망대와 정상석 그리고 판독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지키고 있다. 영천과 청도, 경산이 맞닿은 3군 경계봉으로 이 산에서 사방으로 갈라져 있는 주능선이 아홉개로 되어있고 그 현이 용과 같다고 하여 구룡산이라 부른다도고 하며,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에 이 산 바로 아래에 있는 연중 마르지 않는 '무지터'라고 불리는 샘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구룡산이라 부르고 그곳에 생긴 동리를 구룡동이라 부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무지터 바로 옆 넓은 너럭바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무지터 주변에는 무덤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도 포획하지 않는 등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신성시 하였다. 이 산의 동쪽에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의상이 창건한 웅정암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웅정암은 1603년에 중창되었다. 이때부터 이 절을 영지사라고 불렀다.
♤ 구룡산에 전해내려오는 전설
구룡산이라는 명칭은 용왕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동해의 용왕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세상을 뜨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왕비는 처음에는 전처의 소생인 세 공주를 사랑해 주었으나 날이 갈수록 계모의 본성을 드러내며 학대가 심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용왕은 용궁에서 학대를 받는 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그 중 한 딸을 육지에 나가 살도록 하였다. 세상으로 나온 용왕의 딸은 해동(海東) 조선의 정기를 지닌 명산 금강산을 찾아갔으나, 이미 그곳에는 용왕의 동생이 하늘의 비를 다스리며 터를 미리 잡고 있었다. 금강산에 자리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의 태백산 줄기를 따라 살기 좋은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다 보니 수목이 울창하고 정상이 평평한 좋은 산을 발견하고 터전을 잡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구룡산이라 한다. 이 용은 때때로 구름을 낳고, 비를 내리게 하여 육지의 억조창생을 도왔다. 용왕의 막내딸은 그곳에 터전을 잡고 성장해 결혼한 결과 열마리의 귀여운 새끼를 낳았고, 날이 갈수록 탐스럽게 자랐다. 열의 자식 중 아홉의 자식은 말을 잘 들었으나 막내자식은 날마다 어미용의 속을 태우다보니 어미용은 다시 동해로 부왕을 찾아가 막내자식을 처벌해줄 것을 간청하니 용왕은 어미용을 용궁으로 부르고 아홉 마리의 용은 넓은 하늘나라에 올라가게 하여 이 세상의 비와 구름을 관장케 하고 말썽꾸러기 용은 그곳에서 쫒아냈다. 쫒겨난 용은 지금의 용산(경산시 용성면 용산리 소재)에서 살다가, 본래 살던 곳(구룡산)이 그리워 찾아가다가 용왕님의 노여움을 사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그곳이 지금의 반룡산이라고 하며 이 구룡산은 아홉 마리의 용이 올라간 뒤부터 구룡산이라 불렀으며,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 지역 주위에는 구룡산, 사룡산, 반룡산, 회룡지, 운룡사, 구룡마을, 용호리, 용전리 등등 용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혹은 아홉마리의 용을 낳아 그 중에 한마리가 불효했다고도 하며 승천한 아홉의 용들은 비와 구름을 관장하며 천우를 다스렸는데 막내아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옛날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며 다시 내려오다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가 죽은 자리가 바로 반룡산이라고도 한다. 구룡리 북서쪽 건너편에는 장재라는 곳이 있는데 그 마을 냇가에는 용암이라는 큰 바위굴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이 굴은 옛날에 이곳에 살고 있던 용이 승천하려고 하는데 어떤 여인이 피가 묻은 빨래를 하는 바람에 그 승천하려던 용이 머리를 바위에 박고 승천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용이 머리를 박은 바위가 용암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용암에는 용이 살았다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은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 하며 지금도 그 샘은 깊고 물색깔이 짙푸른 가운데 지금이라도 용이 불을 품으며 승천할 것 같아 아무도 이곳을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 구룡재(九龍峙, 590m)/ 다박재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양회임도 삼거리이다. 동에서 달려 온 비슬지맥 능선은 구룡산을 지나고도 500여m 더 서행(西行)하다가 590m재로 떨어진다. 좁지만 중요한 시멘트도로가 지나는 잘록이다. 경산구룡- 청도구룡 두 마을이 이 길로써 이어지고, 그 둘은 이걸 통해 경산 용성면과 청도 운문면 중심지로 더 멀리까지 연결된다. 그 점을 주목한 듯 등산지도들 중에는 이 잘록이를 '구룡재'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1/5,000 지형도는 거기 있는 조그만 저수지를 '다방못'이라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재니 고개니 하는 뒷말 없이 그냥 '다박'이라 불리던 땅이라 했다. 그러니 굳이 재라 부르려면 '다박재' 정도가 맞을 터이다. '다박'이라 할 때는 '다'에 악센트가 주어졌다. '다방못'은 '다박못'을 발음대로 받아 적은 결과로 보이며, 구룡재는 비슬지맥을 종주하는 산꾼들에 의해 붙혀진 지명인듯 하다.
- 이정표(운문면 ←운문면 정상리 ↑발백산 4.2km)가 있다.
♤ 금박분맥 갈림봉
비슬지맥 사룡산 지나 구룡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금박분맥은 금박산, 도천산을 지나 금호강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24.07km(고래) 영천, 경산 청도 지역의 지맥으로 좌우측으로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 매남리(梅南里)갈림길
경산시 용성면의 자연부락인 매남리는 구룡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로 비교적 고도가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 남쪽에 외곡지, 이암지, 상도삼지 등이 분포해 있어 수원이 풍부한 지역이며 자연마을로는 매남, 가만골, 구룡마을 등이 있다. 매남마을은 매방우가 있어 매암마을로 불리며, 가만골마을은 새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룡마을은 구룡산 밑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사근달마을은 사기를 구웠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 매남리 갈림길 이정표(↑발백산 4.1km,↓구룡산 0.5km, →매남리 0.3km)가 있다.
♤ 경산 구룡산(650.8m)
다박재(구룡재)를 지나 올라서서 583m봉에서 비슬기맥은 남쪽으로 완전히 굽는다. 그러면서 금방 651m봉으로 솟으니, 경산시장이 「구룡산 / 위치: 용성면 매남리, 높이: 해발 675m/ 이 표지판을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기념사업으로 설치합니다. 2000. 1. 1 / 경산시장」란 정상석을 세웠다. 하지만 해발 고도가 잘못되었다. 이 봉우리는 675m 구룡산이 아니라, 기껏해야 650.8m로 '제2의 구룡산'으로 불리는 정도다. 더욱이 경산 구룡마을서는 이걸 '안산(案山)'이라 부르는 산으로, 마을의 남쪽에 솟은 마을 앞산이라는 뜻이다. 이 651m봉에서 정말 주목할 바는 일대가 가톨릭 성소로 다듬어져 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높다랗게 섰고, 짧잖은 거리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다. 이 봉우리 바로 동편에 자리한 '청도구룡'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기인한 일이라 했다. 마을에 따르면 청도구룡은 조선조 후반 참혹했던 천주교 탄압시기에 숱한 신자들이 피신해 살던 곳이다. 하지만 다른 신앙촌들과 달리 이곳에선 희생자를 한명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산 속 마을에 170여 년 전 벌써 공소(용성성당 구룡공소)가 설치됐다. 또 지금까지 수많은 성직자를 배출하여 가톨릭에 특별한 마을인 셈이다. 이 마을은 본래 '비석리'였으나 '구룡'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청도구룡’이라 별칭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본명은 잊혀지고 모두 구룡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 구룡공소
1815년 을해박해 때에 청송 노래산과 진보의 머루산의 교우촌이 파괴됨으로 인해 영천과 경주 지방으로 피난하여 산재하여 있던 신자들이 더 깊은 산속을 찾아 이곳 구룡산에 모여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 자급자족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신중하고 은밀하게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구룡산 지역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모여든 곳으로 경북 남부 지역의 주요 피난처였으며, 인근의 대구, 영천, 경주, 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신자들간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경남북을 잇는 주요 통로였다. 한편 구룡공소는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배교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던 연유로 사료된다. 구룡공소는 교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로 형성된 교우촌이지만 신부가 주재하여 사목하였으므로 성당으로 건립된 곳이다. 1921년 12월 11일 안세화 주교의 사목 방문을 기념하여 새 성전의 건립을 추진하여, 20년간 전 교우 절미 운동을 전개, 1933년 9월 13일에 성전의 준공을 이루었다. 1993년 이문희 대주교가 부활 미사 지번 후 성지로의 개발을 지시하여, 1995년 공소를 복원하고 피정의집을 마련하였다.
- 제 11처와 제 10처 십자가 상을 지나 내려서면, 십자가의 길이 좌측에서 올라오는 표지가 있는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기맥길은 직진 방향 잡목 숲길이다. 9처를 지나면서 십자가상과 작별을 한다. 좌측은 구룡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이어진다.
♤ 정상재(亭上峙, 424m)/ 질매재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651m봉(안산)을 지나면 비슬지맥은 질매재로 떨어졌다가 바리박산/ 발백산으로 솟는다. 고도 기준으로 240m 폭락했다가 260m 치솟는 것이다. 8번군도가 지나가며 공소 입구를 알리는 표시석과 소공원, 장승 등이 있고 구룡산 펜션으로 내려가는 길도 보이는데 촤즉 아래 마을이 정상리라서 산꾼들은 이곳을 정상재로 기록한 것이 많이 보이나,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질매재라고 부른다. 질매란 소 등허리에 얹어 짐을 싣거나 우마차 채를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길마'가 그것인데 고개가 길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질매재라 불렀다고 하며, 그 동편 정상리 어르신은 이 질매재를 넘어다니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옛날에는 아이들은 소 먹이러 넘나들고, 저쪽 영천·경산 등의 어른들은 이 쪽에 있는 이름난 약수를 찾아 그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질매재에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났고, 재 꼭대기엔 소공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이 질매재는 청도쪽 아랫동네가 운문면 정상리라 '정상고개'라고도 하고, 우측편 동네가 용성면 매남리라 '용성고개'라고도 한다.
- 발백산까지 2km이다. 질매재에서 발백산 들머리는 발백산 방향 포장 임도를 따라 약간 들어서다가 바로 좌측 시그날이 안내하는 방향의 능선으로 들어서야 한다.
♤ 발백산(髮白山, 674.5m)/ 바리배기/ 바리박산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 봉화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질매재를 출발해 45분가량 오르면 구룡산과 맞먹는 발백산에 올라선다. 옛날 이 산속에 머리가 하얀 신선이 있었다고 하여 그 신선의 머리카락을 의미해서 발백산이라 하였고, 근동에서는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렸던 산을, 국가기본도가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뒀다. 1918년 일제(日帝)가 처음으로 전국 1/50,000 지형도를 완성하면서 세세한 땅이름을 지도라는 문서에 싣게 되었는데,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우리말 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한자를 사용하다 보니 이 산 이름도 '바리배기'를 '발백'으로 차용한 결과물인 것이다. 국가지형도에도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자를 써서 '발백산'이라 적어 두었으나 이 지역의 인근마을에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렀다.
- 정상 이정표에는 직진방향으로 가면 반룡산이라 표기를 해놓았는데 지맥길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반룡산 이정표쪽으로 진행한다.
- 바리박산' 정상은 뛰어난 전망대다. 지나온 사룡산~구룡산~질매재 능선은 물론, 사룡산에서 부산(富山)을 거쳐 흐르는 낙동정맥 능선까지 훤하다. 2007년 5월에 정상석을 세운 청도산악회서 일대 잡목을 베어낸 공이 크다고 했다.
♤ 군계 분기봉(593m)/ 청도군 → 경산시
이곳부터는 청도군과 작별하고 온전히 경산시 용성면으로 들어서는데 분기봉에는 좀 특이하게 생긴 이정표가 서있다. 바리박산 이후 산줄기는 서쪽을 향해 슬그머니 굽어 100여m 내려 섰다가 조금 솟아 닿는 언덕 같은 593m봉에서 둘로 나뉜다. 더 낮게 떨어지면서 거의 직진하듯 서쪽으로 이어가는 게 비슬지맥이다. 반면 좌회전해 남쪽으로 방향을 되돌리면서 높이를 별차 없이 유지해 가는 능선이 '동곡(東谷)능선'인데, 운문호 서편을 감싼 산줄기다. 동곡능선의 동편은 '동창천' 유역이고 서편엔 그 지류의 지류인 '부일천(扶日川)'이 흐른다. 593m봉에서 남쪽으로 동곡능선을 갈라 보내고, 비슬지맥은 북→남에서 동→서로 본래의 주향(走向)을 회복하여 약 6.5km의 ‘육동 구간’을 지난다.
- 이곳에서 뚜렷한 직진길을 버리고 우틀하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 경산시 용성면
경산시 용성면은 십중팔구 용산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용성면의 주산이 용산이며 용산을 달리 용산성 혹은 용성이라고 부르기에 그러하다. 용산은 남산면 갈지리와 용성면의 곡신과 용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고도 400여 미터지만 이 산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날이 오래도록 가물면 주위의 사람들이 이 곳 용산에 기우제를 올리는데 매년 때가 이르면 용산지 부근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이웃하여 있는 용강사의 스님을 모셔다가 당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 드린다. 이르자면 마을의 제사를 지내는데 용산지라 하는 곳은 용산 동북쪽에 있는 연못을 이른다. 한편 마을 뒤쪽에 있는 용거랑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로 후려친 곳인데 일백여 미터나 파여있으며 용거랑을 용구렁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구렁이나 거랑이나 갈라져 후미지게 파여 있는 곳을 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용성에는 용과 걸림을 보이는 마을 이름이 여럿 있는데 용산은 물론이고 용전, 용천이 이들 보기에 값하는 곳으로 용전 동쪽에 자리한 반룡사도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풍수논리로 보면 산은 용으로 비유하는 일이 많다. 용은 물신인 동시에 불을 다스리는 신이라고 믿었고 용을 화나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보고 우리 조상들은 용을 두려워 하였다. 유교의 수호신인 동시에 불교의 수호신이기도 한 용은 물신과 불신의 대명사처럼 쓰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물과 불은 우리 생명의 말미암이니 특히 그 가운데 흐르는 물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님을 물론이며 우리 몸의 일부로 여겨 생명이란 물과 불의 함수로 보았다. 용성은 금호강의 지류인 오목천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갈래로 갈라지는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넓은 평야와 언덕으로 되어있다.
♤ 육동(六洞)
육동은 이 능선 남쪽에 있는 경산 용성면의 6개 마을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육동의 특징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용성의 다른 땅으로부터 외돌아져 있다는 점이다. 용성의 북쪽 물은 ‘오목천’(烏鶩川)을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들지만, 육동 물은 ‘부일천’을 타고 ‘동곡천’에 합류했다가 동창천을 거쳐 밀양강으로 간다. 물길로 보면 청도에 가깝고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산에 속해 있다는 얘기다.
♤ 물안재(403m)
바리박산 밑 593m 봉 분기점을 출발하자 마자 산줄기는 403m 재로 190m나 내려앉는다. 저 403m봉까지의 구간 남쪽에 자리한 게 부일리(扶日里)다. 서편 가척리(加尺里)와의 경계선은 그 봉우리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지릉이다. 두 마을은 '땅고개(330m)'로 연결되며, 지금은 그 위로 임도가 나 있다. 부일리 구간에서 먼저 주목할 지형은 403m재다. '물안재'라 불리는 403m 재는 지맥 위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위에 논이 개간돼 있어 일단 놀랍다.
♤ 임장재(410m)
경산시 용성면 부일리 뒤 불당골과 그 북편의 송림리 후롱골을 연결하는 임도 길목으로, 공원벤치처럼 긴 나무의자들이 놓인 풍경이 독특하다. 물안재 남쪽의 부일리 ‘귀재골’에서는 최근 산촌생태체험장 조성 작업이 마무리됐다. 동곡능선 초입의 화전재 일대에서 본 시설들이 바로 그 일부다. 산을 나무들이나 제 맘대로 살도록 던져둘 대상지가 아니라 인간 삶과 생산의 귀중한 터전으로 인식하게 하는 모범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산림청이 10억원을 지원했으며, 마을서는 도시 가족·단체 등에게 과일·버섯 따기나 산나물 캐기 등 산촌 생활을 체험케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주민들은 민박과 토속음식 판매 등을 통한 수입을 기대한다고 했다. 임장재 너머 후롱골 땅에는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는데, 함번웅 대표가 40여년 전 벌거숭이 산 99만㎡(30만평)을 구입하여, 오가피 · 한약재목 · 조경수 · 수액채취목 · 특수묘목 · 산나물 등 짧은 기간 안에 소득을 내주는 '작목'을 식재하여 산을 들판의 '농장'에 상응할 '임장'(林場)으로 가꿔놓았다. 마을에서조차 이름 없던 이 410m재에 '임장재'라는 새 이름표가 달린 이유이기도 하다.
- 우측에는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고 우측으로는 동아임장이 개인 땅이니 출입하지 말라는 횡단막과 나무 벤치 두개가 있으며 산촌생태체험관 1.5km 이정표가 서있는 임도에 도착한다. 고개 우측에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는데 산을 들판의 '농장'에 상응할 '임장(林場)'으로 가꿔놓은 99만㎡(30만평)에 달하는 산지가 조성되어 있다.
♤ 부일봉(扶日峰, 508.4m)
부일리 구간서 주목해 둘 또 다른 지형은 508m봉이다. 산줄기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거기서야 처음으로 큰 들판(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이 펼쳐져 보여서다. 드디어 바리박산 서편 첩첩산중 매남리 권역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뜻있는 지형인데도 508m봉에는 이름이 없다. '부일봉'이라 부르면 좋지 않을까 싶다.
- 이끼가 잔뜩 끼어 보이지 않는 4등삼각점, 영천484이 있다. 송림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좌틀하여 내려선다.
♤ 가척리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만 트여 대종리와 연결되고 마을 북쪽에는 용림지란 못이 있고 골짜기 가운데 넓은 들판이 이루어져 있다. 가척리 도요지가 있었다. 마을에 있는 당수나무는 신성시되고 있으며 정월대보름만 되면 동제를 모신다. 마을 우래는 가재와 가현리 및 가척동은 본래 자인군 하동면의 지역으로 가재 밑이 되므로 가재 또는 가현리와 가척동이라 하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비리재를 병합하여 용성면에 편입이 되었다. 못안과 지내마을은 비리재 골을 타고 안쪽 고을로 가면 큰 못이 있고 못안에 마을이 있다하여 못안과 지내로 부르게 되었으며 최근에 못안에는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으며 복숭아산지로 개발되어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 가척재(加尺峙: 240m)
부일리 구간 종점인 403m봉을 지나면 비슬기맥이 급락해 25분여 만에 240m재로 떨어지는데, 율농지 위 작은 연못 위로 보이는 잘록이 안부가 가척재다. 산줄기 남쪽의 가척리와 북쪽의 송림리를 연결하는 용림임도로도 불리는 양회임도가 통과해 존재감이 높은 재로, 비슬산까지의 기맥 중 최저구간이다. 일대에는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폐가들이 있는데, 경산 대구CC에서 신설 골프장 건설을 위해 토지를 매수하였지만 사업성 때문에 골프장 건설이 중단되어 폐 건물과 농장이 폐허로 방치되고 있는 곳이다. 18홀 크기의 골프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재 일대 지명에 혼란이 생겨 있는 점이다. 국가기본도에는 이 자리에 ‘용림’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표기해 뒀다. 경산시청은 새주소 부여 때 북편 송림리서 이 마을을 거쳐 그 아래 가척리 비오재 본마을까지 관통하는 길에다 ‘용림로’라는 이름을 붙여 놓아, 등산객 사이에는 240m 잘록이가 ‘용림재’로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용림’이란 마을을 아는 주민이 없고, 왜 그런 지명이 붙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길 또한 최근에 났을 뿐, 전에는 넘어 다닐 일이 별로 없어 이름조차 없던 고개라 했다. 재 위 마을은 ‘못안’이라고만 불러왔는데, 가척리 비오재 마을과 이것 사이에 큰 저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저수지 이름도 ‘조고못’이라 부르다가 ‘율농지’라 바뀌었는데, 국가기본도 또한 ‘율농지’로 표기하고 있다.
♤ 용림재(310m)/ 송림재
특이하게도 일대에 ‘용림’이란 이름을 쓰는 지형으로는 240m재에서 700여m 떨어져 있는 ‘용림재’ 딱 하나가 있었다. 동편 가척리·부일리 등의 사람들이 비슬기맥을 넘어 서편 용성면소재지 마을로 다니던 길목이라고 했다. 자동차시대 이전 아이들은 그걸 넘어 학교에 다니고 어른들은 용성장에 다녔다는 얘기다. 하지만 재 이름 중 ‘용림’이 무엇에서 연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척리는 물론 부일리·송림리·부제리 등 사방의 인근 마을 어르신들은 이 재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했지만, 용림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혼란도 거기서 출발된 게 아닐까 싶었다. 일대 생활사에 중요한 그 ‘용림재’를 지도에 표시한다는 게 엉뚱하게 마을 이름으로 용림을 들먹이게 됐을 개연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짜 ‘용림재’와의 혼란이나마 피하도록 240m재에 별도의 임시 명칭을 붙여두는 것일 터이다. 아쉬운 대로 ‘가척재’라는 이름표를 달아 놔 보자. 이 가척재는 비슬기맥 최저 구간의 시점이다. 최고점 높이래야 300m도 채 안 되기 일쑤인 능선이 거기서 시작된 후 12㎞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 가척재에서 0.9km지점이다.
이 구간의 행정계를 살펴보면 용림임도로 알려진 가척재를 출발할 때는 경산시 용성면 내를 리(里: 송림리와 가척리)로 나누며 333봉까지 잠시 달리다, 이 봉에서 서향에서 남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계속 용성면 내를 달려 비오재(비리재)를 지나 군계봉(331m)까지 이어진다. 이 군계봉에서 좌측으로 청도군 금천면을 만나, 우 용성면 · 좌 금천면으로 갈려 ‘U자’ 형태로 서향하여 삼면봉인 295.1m봉까지 이어지고, 이 갈림봉에서 우측이 용성면과 이별하고 남산면(좌측은 계속 금천면)을 만나 복고개까지 ‘W자’ 형상으로 달리는데, 그 중간 대왕산이 ‘W자’의 가운데 꼭지점인데, 대왕산과 복고개 사이 봉우리인 큰골산(643.9m)에서 좌측(남쪽)이 청도군 금천면에서 매전면으로 바뀌고 우측(북쪽)은 계속 남산면으로 경계하며 이어진다.
- 332.9m봉에서 지금까지 서향하던 기맥길이 남향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방향이 바뀜으로써 비슬지맥은 육동 지구의 서쪽 담장 역할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육동의 동편에는 동곡능선이, 북편과 서편에는 비슬지맥이 흐르고, 남쪽만 열려 있는 형세다.
♤ 351.4m봉/ 산불감시초소봉
사방이 트여있다. 남쪽으로 가야할 방향이고 우측(남서쪽)으로 용산(435m)과 그 아래 곡신리와 용산리 전경, 북서쪽 용성면 소재지 방향, 북쪽으로 지나온 방향과 북동쪽으로 지나온 구간의 바리박산(발백산, 674.5m)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산너울은 앞쪽이 동곡(東谷)능선이고, 뒤쪽 희미한 능선이 장륙(將六)능선이다.
- 산불감시초소와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휀스에 둘러쳐져 있고 준희님의 351.4m봉 산패가 휀스에 걸려있다.
♤ 비오재(飛烏峙)/ 비리재
경산시 용성면 부제리와 대종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비오재, 비리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이 고개 부근 마을에 금슬이 좋은 소금장사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소금 장삿길을 떠난 남편이 돌아오는 길에 변을 당하여 죽었다. 이 소식을 모르는 부인은 식음 전폐하고 고갯마루에서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둔 후 죽은 부인의 한이 까마귀로 변하여 이 고갯길을 맴돌며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개이다.
- 가척재에서 2.8km지점이다.
♤ 갈림봉(331m)/ 군계
경산시에서 청도군으로 바뀌는 봉으로 지맥길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 잠시 올랐다가 묘지 있는 곳에서 우틀하여 내려선다. 발백산 이후 군계 분기점을 지나 청도군과 헤어져 온전히 경산시 용성면 지역 능선을 걷다가 이곳부터 또다시 좌측으로 청도군의 군계 능선을 다시 만나 대천고개(곱들고개)로 내려간다. 이 봉에서 직진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육동 구간을 마감하고, 경산군과 청도군을 가르는 가지산 줄기이고, 비슬지맥은 우틀하여 묘지 방향으로 골짜기같이 푹 꺼져 마치 계곡인 양 엎드려 있는 곳으로 이어간다.
♤ 용성면 곡란리(谷蘭里)
경산시 용성면에 위치한 곡란리는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번답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는 용산지, 갈리지자, 버들못, 죽곡지, 가전지 등이 분포하고 있어 수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자연마을로는 곡란, 남역, 수동마을 등이 있다. 곡란마을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다 해서 골안 또는 고란이라 불리다가 후에 곡란마을이라 개칭되었다. 남역마을은 곡란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수동마을은 냇물 동쪽에 자리한다는 의미에서 수동마을이라 불린다. 문화재로 시도유형문화재 80호인 난포고택(蘭圃故宅)이 있다.
♤ 곱돌이재/ 대천고개(210m)/ 919번 지방도로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91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곱돌이재는 오랜 세월 청도 운문면을 경산과 가장 빠르게 이어줘 온 길목인데, 그걸 넘어 운문면의 많은 청소년들이 경산으로 유학 가고, 어른들은 자인장을 왕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재의 국가기본도 상 이름은 ‘대천고개'(곡돌내재)로 표시되어 있는데, 현지에서는 이런 이름을 아는 이가 없다. 경산쪽서 청도쪽으로 넘어봐야 겨우 도달하는게 소천리인데 그게 어떻게 대천고개냐고 하면서 소천 쪽에서는 그걸 오직 ‘곱돌이재’라고만 한다고 했다. 그 너머 처음 닿는 경산의 곡란리쪽 땅 이름이 바로 ‘곱돌이’고 그곳 저수지가 ‘곱돌이못’이라는 얘기다. 곱돌이라는 말은 도로나 물길이 굽어 돌기를 곱(2배)으로 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곳 양편에서 산덩이 두 개가 교대로 튀어나옴으로써 물길과 사람길이 그걸 피하느라 반원을 그린 후 다시 반대로 반원을 그리며 곱돌이하기 때문이다. 고개 아래에는 곱돌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산꾼들이 부르는 대천고개는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따온듯 하며 대천리는 운문면이 중심지였는데 대천리의 옛터와 운문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현재의 대천리는 수몰민들의 이주단지로 운문면 대천리와 방지리로 갈라졌다. 운문산과 가지산, 문복산에서 내려온 물들이 무척천을 이루고, 마일리와 정상리에서 내려온 물이 합쳐져 봉화천과 경주시 산내면 지역에서 내려온 물이 또다시 만나 '큰내'를 이룬다고 해서 대천(大川)이라 부른다고 한다.
- 좌측 소천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나가면 바로 운문면 운문호가 자리잡고 있다.
밤에 지나는데도 중장비 작업 소리가 요란합니다. 나무에 먼지도 많고.... 우측엔 채석장, 좌측엔 골프장 불빛 그렇더군요.
♤ 307m봉
지맥길이 앞으로 무사할려나 싶을 정도로 안창산업 골재 채취장이 산허리를 파먹고 들어온다. 걱정스런 채석장을 지나 이정표가 서있는 307m봉에서 우틀로 급하게 꺽어진다. 지금까지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오던 맥길은 307m봉을 지나면서부터 북서 방향으로 급 우틀하여 조금 더 높은 327m봉을 향하여 이어진다. 이 방향 전환봉인 307m봉은 상당히 의미 있는 지릉 출발점인데, 서편 동곡천과 그 지천(支川)인 동편 부일천을 가르는 분수령 능선이다.
- 이정표(←곡돌내재 1.5km, →갈고개 4.1km)가 서있는 307m봉에서 우틀로 급하게 꺾어 이어진다.
♤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葛旨里)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는 조선 말까지 밀양군 고미면에 속해 있었고, 1896년 청도로 이관되면서 일위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삼성(三聖)과 갈지(葛旨) 그리고 구복(龜伏)을 합해서 갈지동이라 하여 종도면에 편입되었다. 1919년 종도면이 폐지되어 금천면에 편입되고, 금천면 갈지동이 되었으며, 1988년 갈지동에서 갈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갈지리는 삼성과 갈마리로 부르지만 표기는 갈지(葛旨)라고 하며 산이 높지 않아 계곡이 깊지 않으며, 따라서 땅이 메마르다고 해서 갈지(渴地)라고 한다고도 전하고 있어 김전에는 한 마을에 저수지가 여덟개나 준비된 것이다. 경산시 남산면에도 갈지리가 있는데 옛날에 면리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이곳이 한마을로 불렸다고 전한다. 갈지리에는 고인돌이 남아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당미기(200m)/ 갈마리재/ 양회임도
당미기는 남쪽 청도 금천면 갈지리 ‘갈마리마을’과 북쪽 경산시 용성면 용산리 사이를 잇는 재다. 꼭대기에 옛날 당집이 있어서 저런 이름이 붙었고, 갈지리 쪽 사람들이 용성장으로 내왕하던 고개라 했다. 넓은 공터에 맞은편에는 커다란 과수원이 있고, 지금은 임도 겸 농로가 통과하는 제법 큰 길목이 돼 있다. 개념도에는 그냥 편하게 북쪽 용산리에서 이름을 따 용산재로, 또한 아래쪽 갈마리에서 이름을 따와 갈마재로 함께 표기하고 있다. 이정표가 있는데 우측으로는 용산으로 가는 길이라서 용산재라고도 부르는데 지명의 유래는 갈마리에서 따온듯 하다.
경산에는 삼성현 박물관도 있더군요.
♤ 삼성현의 고장
경북 경산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설총(薛聰: ~655),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를 비롯한 3명의 성현(聖賢)을 배출한 고장이다. 특히 설총은 용성면 용전리 116번지 일원의 구룡산 자락인 반룡사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한다.
♤ 용산(용산, 434.6m)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에 있는 산으로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산으로 용산산성으로 더 잘 알려진 산인데 전설에는 용성 어느 마을의 아낙이 이른 아침에 빨래를 하다 안개 속에서 걸어오는 산을 보고 놀라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걸어가던 산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용산이 됐다고 한다. 인근 구룡산의 전설에는 구룡산 정상 무지개터에서 열마리 용이 승천했는데 그중 한마리 용이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반룡사 구룡산 자락이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굶어 죽어 생긴 곳이 용산이라 한다.
♤ 삼면봉(295.1m)/ 청도군 금천면, 경산시 용성면 → 남산면
삼면봉으로 지맥의 우측이 경산 용성면에서 남산면으로 바뀌면서, 북쪽으로 지능선이 뻗어나가 용산으로 이어지며, 지릉 동편엔 용산리 마을, 서편엔 경산시 쓰레기매립장이 자리 잡고 있다.
- 삼각점이 있다.
♤ 갈고개/ 갈재(葛峴, 180m)/ 버스승강장/ 4차선 일반국도
경북 경산시 남산면 평기리와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69번 일반국도 4차선 도로가 지나며 주변에는 모텔과 공장, 갈고개휴게소라는 구멍가게와 음식점이 보인다. 갈고개는 청도군에서 경산시 남산면으로 가는 두개의 주요 고개 중 하나로 대왕산 동쪽 금천면 갈지리에서 오르면 갈고개이고, 대왕산 서쪽 매전면 금천리에서 오르면 복고개이다. 갈고개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대구서도 줄곧 오르고 밀양서도 줄곧 올라야 하는 두 지역간 가장 높은 고개'라고 칭하지만 실제는 고개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갈령(葛嶺), 갈마루(葛峴) 또는 갈재라고도 부른다. 갈지리 마을 앞산이 풍수상으로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갈(渴)지리라 하고 고갯마루를 갈(渴)고개라 불렀다고 하며, 또한 고갯길을 닦을 당시 칡이 하도 무성하여 갈(渴)을 갈(葛)로 하여 갈고개(葛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 대왕산 들머리의 이정표(←대왕산 2.7km, 곡돌내재 5.6km→,↑남산면) 따라 좌틀한다.
♤ 삼성마을 입구
청도군 금천면 갈지리에 있는 삼성마을(삼성동)은 과거에 우씨(于氏), 김씨(金氏), 박씨(朴氏)가 처음 거주하였고 삼성인(三性人)이 살았다고 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다.
♤ 불당골봉(450.8m)/ 삼각점봉
김전소류지갈림삼거리인 느티나무 아래에서 가파른 등로를 타고 오른다. 우측 아래 마을이 불당골이다. 3등삼각점 동곡305가 있다. 국토지리원 지도상 450.8m봉이다. 여기서 대왕산 정상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567m봉으로 그것도 전위봉이다.
♤ 대왕산(大王山, 615.7m)
경북 경산시 남산면 흥전리와 청도군 금천면, 김전리 경계에 있는 남산면의 진산으로 정상은 움푹 파여있는데 예전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석이 두개나 있고, 이정표와 쉼터의자도 보인다. 대왕산은 ‘大王山’, ‘大旺山’으로도 표기되는 봉으로, ‘백두대왕’ ‘팔공대왕’ '태백대왕'하는 무속의 사례로 종합해 보건대 ‘대왕’은 산신(山神)의 별칭으로 추즉된다. 이 일대에는 더 높은 봉우리들이 있는데도 굳이 이곳을 최고봉이라 하면서 오랜 세월 우러르고, 이 봉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것도 그래서일 수 있다. 경산 남산면 남쪽에 동서로 길고 높게 솟은 비슬기맥이 주는 신령스런 느낌의 중심에 섰으니 산신의 땅이라 느낄만 했을지 모른다. 대왕이 산자락에 있는 마을을 수호해주기 때문에 마을이 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마을 이름을 흥정(興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상석 우측에는 대왕산 유래비와 항일의거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항일대왕산죽창의거는 1944년 7월에 안창률, 김명돌, 박재달 등 29인이 일제의 징용과 징병에 저항하기 위해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한 후 죽창으로 무장하고 대왕산 사월굴에 모여서 의거대를 조직해 일제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 것을 기리기 위한 표지석이다. 대왕산의 유래비 내용은 정상에 한개의 봉수대가 있고, 산 허리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일곱개의 절터가 있으며, 일제 때 경산시 남산면의 항일죽창의거활동 중심지였으며 대왕산 아래에 분포한 여섯개의 자연부락 사림(寺林), 흥정(興政), 안심(安心), 흑실(墨室), 연하(蓮荷), 우검(尤劍)의 이름을 유추해 볼 때, 하나의 작은 부족국가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정상석 뒷쪽에서 경산시 남산면쪽 들판과 금학산과 경산시내가 아스라히 조망된다. 반대쪽으론 낙동정맥 가지산군 영남알프스와 운문지맥의 억산이 조망된다.
♤ 삼면봉(641.2m)/ 경산시 남산면, 청도군 금천면 → 매전면/ 큰골산, 학일산 분기봉
우측은 경산시 남산면이고 지맥의 좌측이 청도군 금천면에서 매전면으로 바뀐다. 국토지리원 지도상 643.9m봉으로, 개념도와 국지원 지도상 이 봉에서 남쪽 아래로 약간 떨어져 큰골산(644m)이 위치하고 있다. 학일산(692.9m)으로 가는 능선이기도 하다.
- 4등삼각점 동곡 412가 있고, 준희선생님 641.2m봉 산패가 있다.
♤ 청두분맥
삼면봉인 641.2m봉에서 기맥길은 북서 방향으로 이어가고, 남동 방향으로 지능을 하나 갈라내니 '청두산능선'이다. 이 능선은 629m봉에서 남서향으로 내려서서 큰골산(644m), 청두산(501m)을 지나 원정자마을로 내려서는 능선으로, 청두분맥이라 할 수 있다.
※ 이 청두산은 국토지리원 지도상 천주산(天柱山, 516.9m)을 지칭하는 듯 하다. 이외 629m봉에서 남동 방향으로 달려 동 청도군 금천면, 서 청도군 매전면을 가르며 잠시 내려서고, 도태재(돈치재, 315m)를 거쳐 513m봉에서 동향으로 뻗다가 학일산(693m) 전에서 남향하여, 동곡재(210m), 아래고개(260m)를 지나 동창천에서 그 맥을 다하는 능선으로 나뉜다.
♤ 벗고개(420m)/ 벗곡재/ 복고개(伏峙)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천리에서 경산시 남산면 사림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벗곡재 또는 복고개라고도 부르며, 청도군 매전면에서 경산시 남산면으로 가는 유일한 고개로 민초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데, 이 고개에서부터 각각 30리의 거리에 있는 경산 자인장과 청도 동곡장을 넘나드는 고개이다. 구동창에서 동창천의 지류인 관하천을 거슬러 올라 금천리의 동쪽 계곡을 택하면 마당 마을이 있고, 여기서 산길을 오르면 해발고도 420m의 복고개에 이르는데, 옛날 경산 자인장을 내왕할 때 이용하던 고개였는데 좌측 아래에 있는 금천리는 베틀노래로 유명한 마을이다. 금천리에서 서쪽의 이현재 마을을 거쳐 오르면 잉어재를 넘어 경산시 남천면에 도달한다. 벗고개는 목고개, 비곡재, 벅곡, 벅곡재 등 다양한 지명으로도 불리우며 옛날부터 이 고개를 넘어 다닐적에는 옷을 벗지 않고서는 더워서 다닐 수가 없다고 해서 벗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며 조선지형도에는 복치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지방도 925호선이 훨씬 낮은 잉어재를 통과하고 있으며 복고개는 왕래하는 행인이 없는 폐도가 되어 있다.
- 삼면봉인 641.2m봉(643.9m봉)에서 우측 북서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25분 정도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잘록이 재인 벗곡재로 떨어진다. 아래쪽 마당말리 입구와 재너머 사림리에서 선명히 올려다 보이며 두 마을의 연결 고리다. 마당말리 마을 어른은 ‘벅곡’이 본명이라고 못 박아, 재는 ‘벅곡재’, 그 아래 골은 ‘벅곡골’이라는 것이다.
- 벗고개 우측으로는 자동차가 다닐만큼 넓은 임도가 지나고 있다.
- 재 우측 아래 1.2km 떨어져 사림리가 있고, 좌측으로 큰골산과 금천리 마당마을이 있다.
♤ 청도군 매전면 금천리(金川里)
매전면 금천리는 해발고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며 내륙 산지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이사리, 가재골, 마당, 잉어태가 있다. 이사리(伊士里)는 임진왜란 전에 임씨(林氏), 방씨(方氏), 백씨(白氏)의 삼성(三性)이 동기를 열고 초명을 정할 때 임공의 휘가 이사라 임공의 공헌 후에라도 망각치 않게끔 임공의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한 것이며, 가재골은 마을의 산등성이가 가재의 모습이므로 붙인 이름이며, 마당은 넓은 등성이에 마당같은 곳이라 하며 붙은 이름이고 잉어태는 마을 뒷산이 잉어 모습과 같으므로 지어진 이름이다.
♤ 경산시 남산면 사림리(沙林里)
남산면에 있는 사림리는 산방산 자락에 위치하며 마을 앞으로 사림천이 흘러나간다. 송내지, 반곡지, 독자지, 약수지 등 크고작은 연못이 매우 많으며 자연마을로는 사림(새림, 사름), 바끝사림(외사리), 안사림(내사리), 양달, 음달 등이 있는데 사람은 본래 신림사(新林寺)가 있었으므로 새림, 사림, 사름이라 하였는데, 후에 사림리가 되었다. 바깥 사람인 사림 바깥 쪽에, 안사림은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고, 양달은 사림 서북쪽 양지에, 음달은 동남쪽 음지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경산시 남천면 신방리(新方里)
경산시 남천면에 있는 신방리는 신방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고도가 낮은 지대에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북쪽에 집뒷들과 신방소류지가 자리하고 있고 자연마을로는 신방, 못안마을 등이 있다. 신방마을은 새로 이룩되었다 하여 새방이라 불리다가 후에 신방마을이라 개칭되었으며, 못안마을은 못 안쪽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못안마을이라 불린다.
♤ 삿이등(520m)
국립지리원지도상 515.7m봉이다. 지맥길은 벗곡재(420m)를 출발하자 말자 520m봉으로 100m 가파르게 솟는다. 이 뚜렷한 봉우리를 마당마을서는 ‘삿이등’이라 부른다.
- 커다란 바위와 그 옆에 나뭇가지에 준희님 산패가 있다.
♤ 삼면봉(488.4m)/ 청도군 매전면, 경산시 남산면 → 남천면
이 삼면봉은 경산시 남산면, 남천면이 만나는 봉우리로 이곳부터 북쪽은 경산시 남산면에서 남천면으로 면계가 바뀌는 셈이다. 우측이 남산면에서 남천면으로 바뀌어 남서향 하면서 우측(북) 경산 남천면, 좌측(남) 청도군 매전면으로 구분지으며 이어진다.
- 준희님 486.1m 산패가 걸려있고 4등삼각점, 동곡 411이 있다.
♤ 잉어재(373m)/ 925지방도로
잉애재는 청도군 매전면 금천리와 경산시 남천면 신방리를 잇는 지방도 고갯길이다. 청도 매전과 대구광역시를 연결하는 최단거리 코스여서, 옛날 매전면 동산리 구동창마을에서 동창천의 지류인 관하천을 거슬러 올라 금천리의 서쪽 계곡을 오르면 이현재 마을에 이어 잉어재에 이르는데 대구 약령시 약전골목에 약재를 팔려 등짐을 지고 넘던 고개였으며 고개 좌측의 청도 매전면 동산리에는 조선시대 매전역이 있었다. 고개 남쪽은 금천리이고, 북에는 신방리(新方里) - 송백리(松栢里) 순으로 분포했다. 금천리에서 선의산의 동북 지맥을 넘으면 잉어재이고, 구곡리에서 선의산의 서남 지맥을 넘으면 말마리 고개이다. 이어재 혹은 잉애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재 이름은 더 모호하다. 예로부터 ‘잉애태’라는 이름으로 가리켜져 왔던 그 재인지 조차 유동적이다. 국가기본도는 여기가 아니라 더 동쪽 486m봉 어디에다 ‘잉어재’라 표기하여 놓았다. 그 북편 신방리 골짜기는 '잉어골', 거기 있는 저수지는 '이어지'라고도 했다. ‘이어’는 ‘잉어’의 한자 본딧말이다. 그런데도 산줄기 남쪽 여러 마을 어르신들은 이 재를 ‘잉애태’라 부르고 있었다. ‘태’는 ‘티’(고개)의 방언이니 ‘잉애재’라는 뜻인 셈이다. ‘잉애’의 뜻은 동네 어른들은 그걸 잉어라고 주장하는데, 뒤 골짜기가 잉어같이 생겨 ‘잉어터’가 됐다는 얘기다. 국가기본도는 이 재 자리에다 ‘이현재’라 적어 놨는데, ‘잉어 이(鯉)’자와 ‘고개 현(峴)’자를 합친 조어다. 그러나 ‘잉애’가 잉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발음 때는 ‘잉’에 악센트를 주어 물고기 잉어와는 전혀 다른 발음 방식인데, 그렇게 발음하는 ‘잉애’는 베틀 부속품인 ‘잉앗대’의 ‘잉아’를 말한다. ‘잉아’가 발음하기 좋게 변해 ‘잉애’가 된 것이다. 잉앗대 제작을 생계 삼던 옛날 어떤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그 일대에 전해져 온다고 하는데, 잉애태 마을 뒤 바위가 잉앗대 모양을 해 마을 이름이 됐다는 설도 있었다. 고개 좌측 아래에 있는 이현재마을은 금천리에서 가장 오지에 속했으나, 현재는 지방도 925호선이 고개를 통과하고 있다.
- 삼면봉(488.4m)에서 10여 분이면 내려선다. 선의산까지 3km 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 경산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올라, 경산시 남천면 교통표지판을 지나서 이동통신 중계탑이 서 있는 곳이 들머리다.
♤ 시루봉(703.5m)
잉애재에서 선의산 사이 산줄기는 꾸준한 오름세로, 400고지 이상을 쳐 올려야 하는데, 출발 직후 돌봉(441m봉, 국지원 지도 438.2m)으로 향하는 10여 분, 그 다음 594m봉 오르는 20여 분 간이 힘든 구간이고, 이후에도 고동봉(659m봉) 등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전체적으로 계속 올라 703.5m 암봉에 오르면, 남동 방향으로 숲실-암자골 골짜기가 한눈에 조망되는데, 이 암봉은 ‘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바위덤 봉우리다.
- 남서쪽이 가야 할 방향 능선이다. 3분여 내려서면 잘록이 안부인데 684m재다.
♤ 청도 매전면 두곡리 금정골
금정골이 있는 청도 두곡리는 두실과 숲실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면 두실에서 두곡이 유래되었는데 두실은 선의산과 용각산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 두메산골이라는 뜻이며 한자로 두곡이라고 전해지며 디실이라고도 한다. 마을은 디실, 숲실, 중각단, 절골, 말마리, 암자골 등이 있는데 숲실은 두곡리에서 두번째로 큰 마을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임곡동으로 독립된 마을이었다. 두곡리 큰 골짜기 중 하나인 암자골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중각단의 각단은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곳을 일컫는 말로 가운데 있다는 뜻이 된다. 암자골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아랫마을과 암자골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중각단이라 한다. 절골은 옛날 절이 있어 이름이 유래했고 지금은 시누대밭으로 변하여 옛날 사람이 살 때의 감나무가 나이도 잊은채 대나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절골 안쪽에 말마리라고 해서 경북 경산시 남천면 하도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몇 집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없어진지 오래이다. 암자골은 숲실 안쪽 선의산 아래에 암자가 있어 암자골이라 했는데 암자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농지로 바뀌었다. 암자골은 선의산과 용각산의 중간에 있어 해방 전후로 해서 지역의 빨치산 때문에 마을을 비우고 현재의 숲실 옆 새각단으로 옮겨와서 살았으며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다.
♤ 선의산(756.4m)/ 마암산(馬巖山)
경산 남천과 청도 매전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선의산 정상부는 암괴봉우리로, ‘맘산바우’라 불린다. 그런 특별함에 걸맞게 선의산 정상에선 ‘온 세상’이 다 보인다. 남쪽 멀리로는 운문분맥 산줄기, 북으로는 경산시가지 뒤로 팔공산이 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경북마을지' 기록과 주변 마을 어르신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선의’는 ‘생이’의 음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고인을 무덤으로 모셔가는 ‘상여’의 경상도식 발음이 ‘생이’인데, 산이 상여같이 생겨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오르내림 없이 평평하게 길게 이어지는 능선에 상여의 사각 진 지붕 처마 모양을 연상한 결과로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경산 어른들은 산은 '생기산', 그 북편 골짜기 및 거기 있던 마을은 '생기골'이라 불렀다. 그 쪽서는 상여를 ‘생기’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생기골은 경산쪽 선의산 주 등산로 시점인 도성사 안 계곡이다. 송백1리에 속하는 그 골은 사육신 박팽년의 노복이 선생의 후손을 숨겨 대를 잇게 한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람을 살리고 흥하게 하는 곳이 상여 터인가 싶었다. 인접 송백2리 입구엔 발해 대조영의 후손들 세거지임을 들어 스스로 ‘발해마을’이라 알리는 표석이 서 있기도 하다. 돌림병을 막아 주는 ‘풍신’이 된 ‘전영동’이란 신인(神人)이 인근에 살았다는 오래된 전설도 있다. 하지만 산의 남쪽 청도 두곡리 어르신은 ‘선의산’이란 이름을 매우 거북해했다. “옛날부터 마암산이라 불러왔는데 지금 와서 왜 '선의산'이라 하느냐”는 것이다. 말씀대로 마암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산현 조에서부터 나타나는 명칭이다. ‘남쪽 21리에 있는 현의 진산’이라 했다. 경산 사람들이 이 산을 ‘마암산’이라 부른 흔적은 지금도 있다. 그 꼭대기 암괴를 ‘맘산바위’ 혹은 ‘망산바우’ ‘만세바우’라 부르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때 첫 지형도 제작 과정서 ‘마암산’이 묻히고 ‘선의산’이 채택됐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 선의산 정상석 앞면에는 "선의산 / 남천면의 주산으로 쌍계산이라고도 하며 선녀가 하강하여 춤을 추는 형상이라 하여 선의산(仙義산)이라 이름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의 정기를 받으면 8정승이 태어난다는 설화가 있다. 산의 정상에는 용정(龍井)이라는 샘이 있어 가뭄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뒷면에는 "선의산 / 위치 : 남천면 원리 / 높이 : 해발 756.4m / 이 표지판을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기념사업으로 설치합니다 / 2000. 1. 1 / 경산시장" 그러나 이 표석의 『남천면 주산으로 선녀가 춤추는 형상이어서 선의산이라 한다”고 써 뒀다. 하지만 ‘仙義’(선의)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해득되지 않는 한자 조어일 뿐으로 춤추는 선녀와 전혀 무관하다. 표석의 설명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라고 매일신문 박종봉 편집위원은 주장하고 있다.
- 마을 주민들은 이 산을 바라볼때 편안한 마음을 준다고 하여 마음산이라 했는데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선의산이라고 했다고도 하며 산능선의 형국이 말의 안장 처럼 생겼다 하여 마안산이라는 설도 있다.
♤ 「일제 만행 / 쇠말뚝 뽑은 곳 / 쇠말뚝 크기 / 길이 1500mm, 지름 15mm」 표지석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바람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던 청와대 옛 본관 건물을 철거했고, 문화부는 국책사업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옛 조선총독부)을 철거하였는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 민주화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깨끗이 부숴버렸음을 의미한다. 내무부(현 안전행정부)는 전국 명산(名山)에 박혀 있다는 ‘일제 풍수침략의 산 증거’인 쇠말뚝을 뽑아냈고, 일제가 개악했다는 고유 지명 찾기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 쇠말뚝의 진실은 아무리 조사해도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임을 입증할 근거는 없었다는 점이다. 쇠말뚝은 일제시대에 꽂았던 측량용 삼각점이거나 마을 주민 스스로 박은 염승풍수용 말뚝, 군부대가 박은 것, 목재 전주(電柱) 지지용, 광산 및 산판 물건 운반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교육부는 황국신민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는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었고, 남산 제 모습 찾기를 위해 외국인 아파트 폭파 장면을 공영방송이 전국에 생중계했다. 상해 임정(臨政)요인 유해 봉환, 독립유공자 확대(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이었다), 중국 현지의 임정(臨政)청사복원….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정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 행정부서가 동원되어 총력전을 펼쳤다. 심지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슬로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누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바로 세웠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미디어 펜, 16. 3. 22 발췌]
♤ 고등골말랭이
개념도 상 710봉, 국립지리원 지도 상 712.7m봉이다. 두곡리 입구에서 보면 마암산 정상 봉우리보다 714m봉이 더 높아 보인다. 680m재를 사이에 두고 정상봉서 서쪽으로 15분가량 더 간 곳에 솟은 실질적인 마암산 제2봉이 그것이다. 두곡리 어르신은 이걸 ‘고동골 말랭이’라 불렀다. ‘고동봉’ 정도의 이름을 붙여주면 소통에 좋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는 남동쪽으로 ‘진등’(긴등·長嶝)이라 불리는 산줄기가 분기해 두곡리 들머리 마을회관까지 내려서며 지나온 ‘암자골’과 다음의 ‘절골’ 공간을 나눈다. 그 암자골 곁가지 골이 ‘고동골’이다.
♤ 경산시 남천면 하도리
이곳 남천면과 화양읍에는 청도로 가는 남성현 아래로 긴 기차굴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는 바로 용각산과 선의산 사이에서 용마가 나왔다는 하도리 마을이 있다. 하도리 마을을 달리 굿골 혹은 구곡이라고 부르고 옛말로 굴을 굿이라고 하는데 이로 보면 오늘날의 긴 기차굴이 생길 것을 미리 알리기라도 한 미래지향적인 땅이름이라고 하겠다.
- 임산물을 가끔 드론을 띄워 감시한다는 경고표지판이 보이고 우측 산허리 가까이 닦아놓은 임도도 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간 띠지를 모조리 제거한 흔적이 있습니다. 보이는 족족 다시 걸어두긴 했지만서도....
♤ 말마리재(478m)/ 하도재
선의산과 용각산의 가름선인 478m재를 두고, 두곡리 사람들은 재를 넘으면 남천면 하도리(河圖里)이기 때문에 ‘하도재’라 불렀고, 다른 사람들은 ‘말마리재’라 불렀다. 두곡리 쪽 조금 아래에 ‘말마리’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기 때문인데, 절골마을 상부 ‘마지’라 불리는 저수지 안이 그 자리라 했다. 지금은 염소농장 하나밖에 없지만 집터들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하도재 혹은 말마리재는 한때 “하루에 소 1천 마리가 지나다닌다”고 할 정도로 통행량이 많아 재 위에 주막이 성업할 정도였다. 용각산 남서편 덕암·내리 사람들이 그 마을 뒤 ‘큰고개’를 통해 비슬지맥에 오른 뒤 용각산 북사면을 타고 말마리재까지 오가며 땔나무를 챙기고 ‘모풀’을 베러 다녔기 때문이다. ‘모풀’은 다음해 못자리용 퇴비를 만들기 위해 모내기가 끝난 7, 8월쯤 베어 모으던 풀이었다. 모두가 땔감과 비료가 귀하던 1960년대 이전 이야기들이다.
- 성황당 흔적이 있다.
♤ 용각산분기점(650m)/ 용각산 200m
말마리재에서 25분 여 용을 써서 오르면 널찍하고 평탄한 고원 같은 지점에 이정표 뒷면이 보이는 갈림길에 닿는다. 용각산 북편기슭 해발 650m 높이의 ‘용각산 분기점’이다. 이정표 앞쪽으로 가서 보니 '선의산 갈림길'로 우측(서쪽)으로 지맥길이 이어져 남성현재로 가게 되고, 좌측(남동쪽)으로 0.2km 지점에 용각산 정상이 있다.
- 지맥은 남성현재 6.3km 방향으로 진행한다.
♤ 용각산(龍角山, 696.8m)/ 삼면봉(경산시 남천면, 청도군 매전면 → 청도읍)
용각산은 청도군 매전면과 청도읍 사이에 솟은 산으로, 낙동정맥이 주사산과 단석산을 지나 사룡산, 구룡산, 반룡산으로 뻗은 비슬지맥 중의 주산으로 여기서 분기한 곰티가 청도지방을 산동과 산서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산이다. 마을주민들이 흔히 마암산이라고 부르는 북쪽의 선의산(757.1m)과는 능선으로 이어진다. 청도읍의 북쪽에 위치하여 용각산에 실비가 내려 운무에 덮이는 광경을 용각모우라고 하여 청도팔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청도사람과 친숙한 산이다. 정상 부근에 말굽 모양 바위와 말 고삐를 매는 곳이라는 바위구멍이 있는데, 옛날 어느 장수가 이곳에 용마를 매어 두었다가 청도 앞산이라 불리는 와우산까지 용마를 타고 날아다녔다는 설화가 전한다. 또 옛날에는 정상 밑에 용샘이라 부르는 우물이 있어 명주실 한 꾸러미를 풀어 넣어도 밑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 하나 지금은 메워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산 정상부를 발로 구를 때 땅의 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큰 동굴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용각산에서 선의산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고 억새밭이 더할 수 없는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 용각산 꼭대기엔 ‘龍角山 697.4m’라 새긴 정상석이 있는데, 본래 그 자리에 있던 암괴에다 글자만 새겨 넣은 극히 보기 드문 정상석이다. 청도산악회서 1991년도에 설치했다.
- 지나온 대왕산과 가야할 비슬산 등 두루두루 조망이 좋다.
♤ 용당분맥/ 유천분맥
용각산 분기점에서 갈라져 나가 용각산을 거친 후 남동쪽으로 굽어 돌기 시작하는 능선이 ‘유천분맥’이다. 청도를 산서(山西)와 산동(山東)의 두개 권역으로 가르면서 유천까지 22㎞에 걸쳐 기세 좋게 내달리는 산줄기다. 그 중요한 산줄기 출발점이 용각산이니 청도에서는 용각산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 기록이 용각산을 ‘소조산’(小祖山)이라고까지 판단한 이유도 그것임에 틀림없다. 풍수지리학에서 소조산은 조산 다음으로 위상 높은 산이다. 대한민국의 원초적 조산은 백두산이고, 거기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산하에 넓은 터전을 만들 때 그 모산이 되는 산이 소조산이다.
♤ 큰고개(428m)
좌측으로 도로와 만나는 잘록이 재로 내려서는 이 재를 그 아래 덕암리 마을서는 ‘큰고개’라 불렀다. 앞서 매전면 두곡리의 말마리마을 말마리재와 산길로 이어져 있다는 고개인데, 남쪽으로 내려서면 용암온천이다. 곰티재와 청도소싸움장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사거리 이정표가 서있다.
- 남성현재까지 3.8km를 표시하고 있다.
♤ 삼면봉(481.7m)/ 경산시 남천면, 청도읍 → 화양읍
봉우리 처럼 느껴지지 않는 소나무군락지 솔방등에 NO.045라 새겨진 삼각점이 박혀 있다. 좌측 남서쪽으로 지능을 하나 보내는데, 청도읍에서 화양읍으로 바뀌는 삼면봉이다. 우측(북쪽)은 계속 경산시 남천면이다.
- 이정표가 서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용암온천과 상설투우장 가는 방향이, 지나온 방향으로는 용각산과 선의산 가는 방향표시가, 그리고 진행방향으로는 남성현재 방향표시가 되어 있다.
♤ 보리고개(370m)
재로 내려서는데 남성현재까지 3.3km를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가 서있다. 이 고개의 정식 명칭은 ‘보리절고개’다. 금곡마을 뒤 계곡 중간쯤에 있었던 ‘보리사’ 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우측으로 경산 하도리 하산 방향과 좌측으로 청도 송금리와 숫골 하산 갈림 이정표가 서있다.
♤ 논달말랭이(501.7m)/ 안산(案山)
보리절고개를 지나면 비슬지맥은 100m 이상 솟아 500m대 산덩이를 이룬다. 국가기본도는 그 중 가장 높은 502m봉에다 ‘안산’이란 이름을 붙여놨는데, ‘안산’은 대부분 마을 앞산을 가리킬 때 쓰는 보통명사다. 북편 경산 하도리(河圖里)의 앞산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가 싶다. 반면 남쪽의 청도 금곡마을서는 그걸 ‘논달 말랭이’라 불렀다.
- 489.9m봉'에서 작은 봉우리를 하나 더 오르 내린 뒤 삼각점이 있는 501.7m봉에 오른다. 3등삼각점, 청도 317이 있다
- 남성현재까지 1.4km 남아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오른다.
- 성현재에서부터 행정계를 살펴보면, 성현재(남성현재)를 출발할 때는 우측(북쪽)이 경산시 남천면이고 좌측(남쪽)이 청도군 화양읍으로 나뉘며 서향하다가, 471.9m봉(삼면봉)에서 좌측이 청도군 이서면으로 바뀌어 북북서로 나가다 경산공원묘원의 638.0m봉에서 서향으로 바껴 삼군봉(686m봉)까지 이어지고, 이 삼군봉(634m)에서 우측이 경산시 남천면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바뀌고, 좌측은 계속 청도군 이서면으로 갈려 남서향하면서 우록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 성현/ 남성현재
남성현재는 남성현이라고도 불리는 고갯마루로서 경북 경산시 남천면과 청도군 화양읍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는데 국도 25호선이 이곳 지하의 남성현터널로 지나가며 도로명은 남성현로이다. 성현(남성현재) 남쪽 아래의 남성현역은 1905년 1월 경부선 철로 개통으로 순식간에 최고의 교통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땅은 이미 훨씬 이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는데, 고려 때부터 ‘성현역’(省峴驛)이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열차가 아니라 말 타는 역인 게 다르나, 말 또한 열차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으니 중요성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 시절 관리들의 공무 여행을 위한 역로(驛路)는 부산·밀양 쪽에서 유천역~성현역~시지~범어역(대구)을 거쳐 경상감영(대구)으로 이어져 있었다. 청도 아전들 또한 대구 경계의 담티재까지 나아가 신임 군수를 맞아서는 성현재를 넘어 부임지로 모셨다고 했다. 흔히들 팔조령을 통과하는 부산~밀양~청도~대구 노선이 ‘영남대로’라 해서 옛 교통의 중심축이었던 듯 여기기 십상이지만 실제는 그러잖았던 셈이다. 서민들은 그 길을 지나다녔겠으나 관료들에게 청도의 관문은 팔조령이 아니라 성현재였던 것이다. 성현역은 나아가 조선조 들어서는 지역 총괄역으로 격상되기까지 했다. 청도 6개, 밀양 5개, 창녕 3개, 달성 2개, 대구 1개(범어역) 등 17개 역이 그 관할 하에 편제됐다. 그 권역을 국가는 ‘성현역도’라는 이름으로 묶었다. 지금은 지방행정 구역로만 ‘도’(道)가 설정되지만, 그때는 역 관할단위도 ‘역도’(驛道)라 분류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대구역 권능이 이 역에 주어졌다고 보면 되려나 싶다. 그 영향으로 성현역 일대에는 거대한 역촌(驛村)이 형성됐다.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조달해야 해 넓은 논밭을 경작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관료들을 뒷바라지하는 데도 사람이 많이 쓰였다. 일대 몇 개 마을이 역 직할로 들어갔으며, 숙박 공간 등 역의 건물 규모도 엄청났다. 때문에 ‘찰방’(察訪)이라 불리던 ‘역도’(驛道) 책임 ‘역장’의 격은 현령에 맞먹는 종6품이나 됐다. 본역에만 역리 및 역노비 등 114명(영남역지·嶺南驛誌)이 있었다 하고, 조선후기엔 1천 명에 달했다는 기록(여지도서·輿地圖書)도 보인다고 한다. '성현'(省峴)이 이렇게 중요한 곳이지만 이제 본명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 국가기본도가 '남성현재'라고 표기하면서부터 이름이 바뀌었다. 짐작건대 '남성현'은 일제가 '성현의 남쪽'에 기차역을 만들면서 붙인 이름인데, 광복 이후에도 이 나라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이 재에까지 '남성현'이란 이름을 끌어다 붙였다. '동국문헌비고 역대국계(歷代國界)’에는 성현을 '솔현'으로 적고 있는데, '嶺南之省峴 俗呼 所乙峴'(영남의 성현을 항간에서 소을현이라 부른다)이라는 게 그것이다. '성현'이 순수 우리말 '솔고개' 혹은 '솔재'의 음을 표기한 것이라는 뜻일 터이다. 이전에는 ‘솔정재’로 불렸는지, 1940년쯤 씌어졌다는 '청도문헌고'에는 아예 '松亭嶺'(송정령)이라 번역 표기해두기도 했다. 현재도 인근서는 '솔정재'라 부르는 경우가 있고, 재 아래 마을 이름 역시 변함없이 '송정'이다. 그 남쪽 숫골마을 어르신들은 “솔정재·새인재(성현재)라 하고 마을도 '새인동'이라 했는데 슬그머니 남성현재로 바뀌더라”고 했다.
- 묘지에서 고개로 내려서니 사람이 머무는 고물상이 보이고, 바로 아래 건물이 반려견장례식장이다. 장례식장이 퇴근하면 고물상에서 물을 구해야 한다. 쉼터 옆 건물엔 카페가 있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것 같다.
♤ 삼면봉(472.4m)/ 경산시 남천면, 청도군 화양읍 → 청도군 이서면/ 서레야님은 대적봉이라고 했다.
이 갈림봉은 개념도상 472.4m봉이고, 국지원 지도상 471.9m 봉으로, 삼면봉이다. 지금까지 우측 경산시 남천면, 좌측 청도군 화양읍으로 구분지으며 서향으로 달려온 기맥길은 좌측이 청도군 이서면으로 바뀌어 북서향으로 이어가게 된다.
- 성현 출발 후 30여 분에 등로 좌측에 칠곡리 이정표를 지나 갈림봉에 도착하여, 우틀로 방향을 바꾼다.
- 약간 앞쪽에 4등삼각점, 청도 426이 있으며 준.희님의 '비슬지맥 472.4m' 산패가 나무에 걸려있다.
♤ 경산공원묘원/ 묘원관리사무소로 잠깐 내려가 물을 구할 수 있다.
고리골산(638m봉)으로 오르는 구간 동편 골에는 '경산공원묘원'이 펼쳐진다. 거길 어르신들은 악센트가 ‘리’에 붙는 '고리골' 혹은 '고로골'이라 불렀다. 경산 하도리 땅인 고리골은 638m봉을 정점으로 한 산덩이의 남동쪽 사면인데, 그 안은 옛날 대단한 고사리밭이었다고 했다. 638m봉(고리골산)에서 북동쪽으로는 600m내외의 지릉이 뻗어 있는데, 경산묘원이 경산 땅에 있으면서도 경산서는 안 보이는 반면 청도서는 거의 전부가 허옇게 올려다 보이는 원인이다.
- 묘원 주변으로는 야생동물의 출입을 막기 위해 원형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고,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 묘원의 왼쪽 길을 한동안 계속 따르면 나서는 철문이 나오고, 나서기 직전 우측으로 고리골산 등로를 표시하는 띠지가 보인다.
♤ 고리골산(638m)
공원묘원 상단 휴게쉼터에서 통상 좌측으로 우회하는 '고리골' 혹은 '고로골'이라 불러 온 골짜기 뒷산으로 경산공원묘원의 최고봉이다.
♤ 모골재(552m)
'모골'은 고리골산(638m) 북릉과 삼군경계봉(630m고리골산)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는 병풍능선 사이에 형성된 산전리 골짜기다. 등 너머 상원리와 10리밖에 안 되지만 자동차로는 60리를 돌아야 이어지는, 경산 남천면에서도 가장 깊은 10리 골짜기라 한다. 옛날 일대의 땔나무 공급지였고, 약초와 코발트 산지였으며, 유례 드문 맥반석 출토지라 했다. 특별한 흙이 나 예부터 청자 가마가 여럿 가동되던 도요지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인기있는 피서지면서 고찰 경흥사(慶興寺)가 인접하여 있다.
- 대구산꾼들이 즐기는 가창환종주가 여기서부터 비슬지맥과 겹치며 우미산갈림봉까지 계속됩니다.
♤ 삼계봉(634m)/ 삼군경계면(청도군 이서면, 경산시 남천면 →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모골재'(552m)를 스칠 듯 지나친 후 삼군경계봉(경산시, 청도군, 대구시 달성군)인 634m봉을 지난다. '경북공고 기계과 동문산악회'에서 세운 이정표 (↑동학산 1.66km, ↓팔조령 3.43km, →남성현 4.57km)와 '준·희'님의 '비슬지맥 / ▲634m' 표지판이 길안내를 하고 있다.
♤ 복수덤(686m)/ 대구시 경계능선
모골재를 사이에 두고 638m봉 서편에 자리한 640m봉에서 북으로 출발, 686m봉을 거친 뒤 '병풍산(568m)' 지난 지점서 서쪽 용지봉(634m)과 동쪽 성암산(472m)으로 나뉘어 가는 산줄기다. 대구(달성군 가창면)와 경북(경산시 남천면)을 나누는 경계능선이고, 80㎞나 된다는 '대구 9산 종주' 코스의 서편 들머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슬지맥은 병풍능선 초입의 640m봉조차 거치지 않는다. 더 남쪽 해발 630m 분기점을 지날 뿐이다. 거기서 조금 북으로 가야 640m봉으로 높아지며, 더 가야 686m봉으로 솟는다. 저 최고봉은 높이가 686m나 되면서도 국가기본도에 이름이 채록되지 못한 봉우리다. 엉뚱하게도 대청봉(687.5m)이란 정상석을 머리에 얹고 있다. 그러나 가창면 상원리 어르신들은 누구 없이 단번에 '복수덤'이라고 지목해냈다. 복수초(福壽草)가 군락을 이뤄 예부터 그렇게 불러왔다는 것이다. 상원리서 특별히 중시해, 집 지을 때는 거기에 방향을 맞추고 아들 낳으면 그 이름을 딸 정도였다고 했다.
♤ 한실/ 대곡(大谷)
고리골산(638m)~삼계봉(634m)~669m봉(국가시설)으로 이어진 산덩이는 한마디로 청도군 이서면 대곡리 뒷산으로, 남쪽 골짜기가 한실 혹은 대곡인 것이다. 대곡리 옛 사람들은 경산묘원 아래 400m재를 통해 비슬지맥에 올라 고리골서 고사리를 뜯거나, 지금도 흔적이 선명한 도중의 찬샘 물을 식수 삼아 모골재(552m)를 거쳐 상원리 쪽으로 넘어 가 땔나무를 하고 모풀을 베었다는 것이다.
♤ 상원산(上院山, 678m)
상원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가창면과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지대에 위치한 산이다. 고려시대 이 일대에 교통과 숙박기능을 가진 '원(院)'이 있어 마을 이름을 '상원리(上院里)'라고 하였다. 상원산은 상원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즉 상원리 안쪽 계곡에 위치한 '내상원(안상원)'을 통해 상원산 부근을 넘어 남쪽인 동래(東萊)로 가는 길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졸들도 배치되었다고 한다. 상원산 정상은 미군 통신부대 주둔지였는데, 현재는 철수한 상태이지만 아직도 군부대의 철조망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조망 우측으로 난 등로를 따라 부대 외곽을 빙 둘러 나오면 군부대 정문 앞에서 진입로에 합류하게 된다.
- 정상에는 '상원산 / 674m' 정상 나무 표지판이 붙어있고 그 옆 산마루에 청도산악회에서 세운 '상원산 / 673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3등삼각점, 청도 314가 있다.
- 군부대정문 시멘트포장도로에서 지맥은 좌측이지만 우측 군부대 정문 방향으로 올라 상원산 정상에 들른다. 잡목과 군부대시설로 인해 조망은 전혀 없다.
- 근부대 정문을 나서서 군사도로를 한참 따라 내려가다 우측에 특고압변전소를 바라보고 지나 도로를 버리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꽤 큰 묘지와 송전탑이 나오는데 여기서 등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알밥니다. 우틀해야 합니다.
♤ 유구재(415m)/ 추모비
669m봉 구간을 지나서부터 산줄기는 급강하하기 시작한다. 변전소를 거치는 등 20여 분간 급강하하여, 자연과예술을사랑한의인이라는 이철우박사의 개인 추모비가 서있는 415m 잘록이에 닿는다. 청도 이서 대곡리서 대구 쪽으로 왕래할 때 넘던 길목인 유구재다. 유구재를 지나고 묘지 군락지를 25분여 더 걸으면 팔조령이다.
♤ 팔조령(八助嶺, 360m)/ 산장휴게소 식당
팔조령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 사이의 큰고개로 봉화산(539.7m)과 상원산(674.1m) 사이에 있다. 청도군 이서면에서 달성군 가창면으로 넘어가는 여섯 개의 주요 고개인 우륵재, 봉화재, 팔조령, 범재, 독지재, 상원산재 중에서 가운데 있는 팔조령은 가장 낮은 해발고도의 고개로서 조선시대 한양으로 향하는 큰길인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으로 문경새재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고개로 알려져 왔지만, 경부선 철도의 건설과 팔조령 터널로 인해 지금은 교통량이 급감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관광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기팔조령(八助嶺: 360m)록에 ‘최정산 팔조령’으로 나타나고, 근세엔 ‘삼성산 팔조령’으로 표시된 고개다. 청도군지는 "수레도 넘지 못하여 소, 당나귀, 인력으로 짐을 옮기거나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붐볐고, 대구로 가는 가장 직선길이었기에 화물이 줄을 이었다" 고 적고 있다. 행인들은 양원에서 단숨에 이곳까지 왔지만, 이 고개를 넘기 위해 한숨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팔조리 윗마을 옛길 입구 쪽에는 주막터가 남아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 행인들이 힘든 고개를 넘다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행인 규합을 위한 역할 때문에 더 중요했다. 청도의 운문적과 함께 팔조령 봉화산은 마적단이 득실거려 8명이 모이지 않고는 고개를 넘지 않았다는데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흔히 서울~부산 간 최단거리 코스라 하며, 조선시대 ‘영남대로’ 경유점이고 임진왜란 때 왜군의 중요한 북상코스였을 뿐 아니라 경부선 철로 통과지로 내정됐던 곳이라는 얘기도 있다. 중요한 길목이란 뜻이다. 팔조령은 물자와 사람들이 지나는 도로 역할뿐만아니라 군사적 요지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대우는 그만하지 못해, 옛날엔 역로(驛路)에서조차 제외됐던 듯하고 자동차도로 또한 이제 와서야 투자가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팔조령의 중요선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제기되었는데 승정원일기 1788년(정조12) 6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선조 20년에 청도읍성을 쌓고 청도읍 주변의 신학성, 고읍성, 중성 그리고 남쪽의 오혜산성 등을 묶어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이 전략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결국 팔조령과 성현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대구가 함락되는 결과를 낳았다. 팔조령이란 이름을 두고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관도인 영남대로 중에서 여덟 번째의 고개라는 설도 있고, 여러 얘기가 나돌지만, 그것 역시 글자풀이의 결과일 뿐 ‘八助’(팔조)는 순수 우리말 이름의 음을 표기한 이두식 한자일 것이리라는 시각이 유력하다. ‘팥재’ 같은 게 그 본명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형도 상 팔조령 높이는 380여m, 터널은 해발 250m 정도로 읽힌다.
- 그 좌측에 '팔조령 산장 휴게소'가 있다. 다음 들머리는 산장휴게소 우측 능선방향이다.
- 팔조령 이후 통점령(通店嶺)까지는 11km에 걸쳐 니은(ㄴ)자 모양의 등로를 역순으로 그려간다. 동에서 서로 6km쯤 진행한 후 우록재(수야밤티재)를 지난 593.1m봉에서 북으로 방향을 바꿔 5km가량 이어가는 것이다. 니은(ㄴ)자 능선 북동쪽은 대부분이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공간이다.
♤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 마을
팔조리 마을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지역인 팔조령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서 팔조령 아래 계곡 사이로 형성된 팔조리는 정확한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여덟번째 고개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팔조라 전해지기도 하며 8명 이상 무리를 지어 넘어야 하는 팔조령 아래 마을이라고 하여 팔조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본래 청도군 차북면 지역으로 상팔조동과 하팔조동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두 마을을 합해서 팔조동이라 하고 이서면에 편입하였다가 1988년 팔조동에서 팔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팔조저수지 아래에 신당이 있으며 아직도 마을에서 정월이면 제사를 지내는데 이 신당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물게 많은 현액이 걸려있다. 수많은 보수를 하였으며 축수문(축문)이 현액을 하여 걸려있기도 한데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내용은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말이 새겨져 있다. 상원산의 한 줄기가 대곡리와 팔조리 사이로 내려와 칠곡리 앞에서 끊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팔조리는 동과 서 및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으로만 트여 있는데 이 부근에서도 가장 좁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와 이어져 있는 산의 잘록이는 대구로 통하는 가장 짧고 낮은 길이어서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인 영남대로의 중심이 되었다.
다음 2구간은 봉천재나 앞고개가 희망사항입니다만 어디로 끊어야 진출입이 유리할지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퐁라라님!!
양반 밥상에 반주는 있어야죠,
팔조령은 비실이의 나와바리인데요
비실이나와바리출입에 미신고출입은 과태료 날라갑니다.
곤장은 없응게 청도 막걸리 동동주 한사발로. 쭈~~욱.
담에 도착하는 밀양은 준.희 선생님 나와바리여서 사전에 신고 하시라요.
아고고~ 산적들이 많사옵니다~^^
지맥산행시 제일먼저 시작한 비슬지맥
종주시절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내요
감사합니다
항상 안.줄산 하셔요~()()()
법광선배님!
머잖아 영웅등극이시니 첫 지맥이라면 십 수년전 일인가 보네요.^^
올만에 조카들과 도봉산 다녀오는 길입니다.
다음 구간 팔조령-청산-헐티재-비슬산-원맹이재-수봉산-비티재-천왕산-요진재-화악산-봉천재-앞산까지 예상해 봅니다.
헐티재와 비티재에서 매식한다면 한결 나을것 같네요. 등로도 어렵진 않을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징하게 가버렸네..ㅎ 분기봉에서 헐티재까지 미답구간이라 숲재에 들어가는 교통편도 참고되고, 계획상 이번 여름에 탠트를 들고 갈생각이라 중간중간 식수등 참고사항에 도움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선배님!
용림마을은 모두 빈집입니다.
비닐하우스에 사람이 없으면 비오재에서 인가가 가깝게 보이니 거기서 식수를 보충하면 되겠더군요.
여름엔 가벼운 모기장 텐트 추천합니다.^^ ㅋ
퐁라라님 비슬지맥 1구간 길게도 가셨네요 분기점 접근이 어렵죠 비슬산 철쭉시기에 지날 것 같은데 기대됩니다 청도 대구 코로나로 진행중 멈추고 다시 진행한 우여곡절이 많은 비슬지맥입니다 낙동강과 밀양강 합수되는 날머리까지 무사완주를 기대해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네~^^ 비슬산 참꽃은 지났던데 철쭉을 기대해도 될까요.
코비드-19 발생 초기에 지나셨군요. 세르파님 띠지 잘보며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분기점에서 용림재 가는 길에
어머니가 고관절 골절이란 사고 때문에
걸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구간.
많은 설명과 사진으로 복습 잘했습니다. ^^
이 날 꽤 더운 날였는데
긴 산행 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똥벼락님!
띠지 간간이 살피며 덕분에 수월하게 걸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첫날은 땀을 좀 뺐고요, 둘쨋날 구름낀 날씨가 오히려 고마웠답니다.
사진을 충분히 올릴 수 있어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대구근교쪽 산행 하셨군요
자세한 설명으로 이지역에 살아도 모르는게 참 많네요
비슬산 철쭉도 아주 이쁘답니다.
부케님
의기소침, 카페 대문사진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시네요.
비슬산은 철쭉시기에 맞춰 지날것 같습니다.
상원산에서 조금 헤맸습니다.
울타리 밖으로 잘 돌다가 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나?하고는 다시 돌아와서,
군부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망 밖에 정상석이 있네요. 넘어가진 못하고,,,
정문으로 나와 배낭을 놓고 다시 울타리 밖으로 돌아가서 정상석을 인증했습니다.
그 군부대 정문에 부케님 띠지를 확인했네요. 부케님 띠지기 왜 여기있지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아하 여기가 부케님 나와바리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디게 반가웠습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상원산 정상석 사진이 안비네예
이틀을 쉼없이 걸어서 비슬지맥 첫 구간도 상원산을 내려선 팔조령에 이르렀네요.
분기점인 낙동정맥 사룡산도 오랫만에 반갑네요.~
사룡산 다음에는 구룡산인데 두 곳을 만납니다.
저도 얼마전 금적길에 보은 구룡산을 만났었는데...
당초 구간 목표하셨던 하산 지점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대단하신 걸음 하셨구요.
금년 목표치인 15개 지맥 2구간 마침도 때론 변경 사유가 생길 수도 있나 봅니다.
무더위에 만만치 않은 장도를 이어가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어지는 안전한 여정을 기대합니다.^^
네 방장님~^^
팔조령-헐티재 21km인데 이틀 연속 밤새워 가다간 제 명에 못 살것 같아 그만 갔습니다.
중간에 우록밤티재에서 우록리로 내려오는 길도 있긴하던데 팔조령에서 잘 그친듯 싶었습니다.^^
다음 구간도 월맹이재나 마령재에서 2~3시간 쉬고 갈려고요. 감사합니다.^^
드디어 비슬에 발을 들여놓으셨네요.
사정 변경으로 계획 변경을 하면서 많은 깨달음도 득하시고....
세월 참 쏜살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 산길을 걸은 지가 벌써 6년이 되었으니....
그 때 추억을 안주 삼아 기억을 되씹게 됩니다.
그때 산행기를 들추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고수들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밟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 조금 과한 욕심을 가지고 오늘도 산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한 켠의 속마음에는 여린 욕심도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어도 좋으니 따뜻한 사람이고 싶다는...."
용들의 행렬이 참 거창했다는 기억도 떠오릅니다.
사룡산 고스락의 표지석 3개 도합 12룡.
경산 구룡산 영천 구룡산 도합 18룡....ㅎ ㅎ
그때는 안 보이던 풍경도 첨가되었네요. 반려동물 힐링센터.
긴 산행 준비하고 실행하고 다시 정리하고....
그 과정을 즐겁게 해내는 퐁라라님,
덕분에, 방안에 편히 앉아서 그 흔적을 즐감하게 됩니다.
그 열정과 인내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후속 산행이 기대가 됩니다.
긴 여정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범산선배님!
벌써 6년 전에 지나신 길이군요.
용의 계산이 특이하십니다.^^
용성의 용산과 말 안 듣고 도망간 반룡산도 비슬의 용 행렬에 들어 있더군요.^^
저도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 별반 재미 없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낱 사라지고 말 먼지같은 존재라는 걸 잘 알아서 일겁니다.^^
남성현재에 반려동물장례식장이 새로 차려진 모양입니다.
그전 선배님들 산행기에는 골동품경매장이 있다고 알고 갔거든요.
덕분에 깨끗한 화장실에서 세면도 가능합니다.
장거리는 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이 없으면 더 이상 가지 못합니다.
최소한 송림재나 비오재에서 한번, 그도 아님 대천고개(곱돌곡재)에서 처음 물을 보충해야 하고,
그 다음이 갈재와 이 남성현재 입니다.
갈재에서 물을 보충하고,
이후 22km 지점이니 남성현재에 물이 없으면 경산묘원 관리사무실을 찾아야 합니다.
중간에 물을 보충할 확실한 장소가 많을수록 무게가 그만큼 덜어지니깐요.
그리고 중간중간 물 비슷한 게 보이면 무조건 목을 축이며 간답니다.^^ ㅋ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거운 봇짐 메고 장거리 운행을 하셨습니다.
홀산으로 하는 장거리 산행 결코 만만치 않을텐데
꾸준히 이어 가시는 모습에 항상 대단함을 느끼네요.
곳곳의 유래,특성을 잘 담아 내주시고 계시네요..
시간적 여유가 많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들여다 보고 싶은데..
중간중간에 끊어서 들여다 봐야 하네요 ㅎㅎ
그러다 보니 댓글 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여튼 많은 자료 찾아 써내려 가시는 산행기
많은 후답자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다류대장님!
배낭 무게 10kg정도는 감당할 수 있겠더군요.
겨울엔 좀더 무거워야 몸이 뎁혀지고, 한여름에는 좀더 가벼워야 하는데 물 무게가 관건입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취미가 조금 있어서요.
선답자님들 후기를 읽고 필요한 부분 발췌하고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 같은 풍경이라도 달리 보입니다.
지나간 곳을 오래 기억에 남기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산행기의 대부분을 미리 써놓고 현지에서 확인하는 식입니다.
그리되면 새로 알게 되는 사실도 있고, 잘 못 알고 있는 사실도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