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법(心法)호흡법 / 칠통 조규일
무의식적 호흡과 의식적 호흡에서 밝힌 것과 같이 호흡을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크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하며 호흡을 하되 어떤 생각과 어떤 의식에 어떤 마음으로 호흡을 하느냐 더욱 더 중요하다. 단순히 의식만 깨어서 코로 숨 쉬는 것을 의식하며 호흡을 관하는 것과 호흡을 하며 양 장심을 의식적으로 생각 의식하고 마음으로 장심 호흡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코를 의식하며 호흡하는 것을 관하여 볼 때는 이다(Ida)와 핑갈라(Pingala)의 기(氣)의 통로로 기(氣)가 순환하지만, 장심을 생각 의식하며 마음으로 장심으로 호흡하는 것을 바라볼 때는 양 장심을 통하여 팔- 어깨 -가슴- 단전으로 기가 들숨을 통하여 들어갔다가 날숨 때는 이 통로를 통하여 장심으로 나온다. 이와 같이 어떤 생각 어떤 의식 어떤 마음을 가지고 호흡하느냐에 따라서 심법으로 인한 호흡은 심법으로 인한 호흡을 따라 기의 통로 있는 경우 그 통로를 따라 호흡이 되고 호흡이 되면서 기가 호흡하는 곳을 따라 순환하게 된다. 본인은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호흡을 심법호흡법이라 이름 한다. 장심을 의식하며 마음먹고 장심으로 호흡하면 장심호흡이 되고, 용천을 의식하며 마음먹고 용천으로 호흡하면 용천호흡이 되며, 단전을 의식하며 단전으로 호흡하겠다고 마음먹고 단전으로 호흡하면 단전호흡, 석문으로 하면 석문호흡이 된다. 회음을 의식하며 회음으로 호흡하겠다고 마음먹고 회음으로 호흡하면 회음호흡, 이런 식으로 명문으로 하면 명문호흡, 백회로 하면 백회호흡, 정수리로 하면 정수리호흡, 인당으로 하면 인당호흡, 가슴으로 하면 가슴호흡, 마음으로 하면 마음호흡, 배꼽으로 하면 태식호흡이 된다.
호흡법만 다르지 방법은 마음에 있고 의식에 있고 생각에 있다 그래서 이를 심법이라 할 것이다. 육체를 통한 육체 안팎으로 이루어지는 호흡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심법호흡법이 있다. 육체와 육체 밖으로부터 호흡법으로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의식하고 그런 호흡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호흡을 하는 우주호흡이 있고, 마음을 여닫이 문이라 생각 의식하고 마음먹고 마음을 열기 위해서 들숨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날숨 때 마음을 문을 닫는 것 역시도 심법으로 하는 호흡법이다. 이뿐인가. 나비기공할 때 역시도 한 호흡에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 또한 심법호흡법이고, 단전 부풀리기 및 중단전 부풀리기 상단전 부풀리기 온몸 부풀리기가 모두 다 심법하는 호흡이니 모두 다 심법호흡법이다. 이와 같이 심법으로 호흡하는 것을 심법호흡법이라 이름 한다. 지금까지 저마다 호흡법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모두 지칭하며 심법호흡법이라 말하는 것을 심법호흡법이 이런 것이란 것을 알아서는 각자가 심법을 일으켜 일으킨 심법으로 호흡을 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다. 우주 삼라만상은 심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수행에 있어서 심법호흡법으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심법호흡법이란 이름을 지어서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각종 이름의 호흡을 말한 것과 같이 나무와 호흡하고 싶다면 호흡하고 싶은 나무와 호흡하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흡하면서 좋은 기만 몸에 축적하고 싶다면 호흡을 할 때 그렇게 생각 의식 마음먹고 그렇게 호흡하는 것이다. 기에너기 부족하면 기에너지 호흡을 하고, 생명에너지가 필요하면 생명에너지 호흡을 하며 신성에너지 호흡이 필요하면 신성에너지 호흡을 하는 것이다.
많은 기운을 받고 싶으면 많은 기운을 받는다 생각 의식 마음먹고 호흡을 한다. 어디에 있는 기운을 끌어오고 싶으면 그곳과 호흡을 한다.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그곳의 기운을 가져오고 그것으로 기운이 가도록 한다.
좋은 것 들어오고 나쁜 것 나가게 호흡하는 호흡, 어느 산에 좋은 기운 강한 기운으로의 호흡, 수행의 경지가 높은 어느 분이 계시는 곳과의 호흡, 이뿐만이 아니다. 영계와 호흡, 천계와의 호흡, 신계와의 호흡, 광계와의 호흡, 빛덩어리와의 호흡, 순수 100% 기에너지와의 호흡, 순수 100% 생명에너지와의 호흡, 순수 100%의 신성에너지와의 호흡, 27단계, 56단계의 호흡, 그 이상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어느 곳과도 기운받기 뿐만 아니라 호흡이 된다. 몰라서 못할 뿐 알고 있으면 알고 있는 그곳을 통하여 호흡을 하면 그곳과 하나가 되어 호흡을 하게 된다. 비록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어느 순간 또는 그곳과 호흡을 하게 된다. 심법 아닌 것이 없다. 심법 아닌 것이 없는 곳에 심법을 일으켜 심법으로 호흡해 보라.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수행이 일취월장 이루어 갈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현재 처해있는 상황의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는 안 것을 생각 의식 마음먹고 그렇게 되도록 호흡을 해보라. 이와 같이 하는 호흡을 심법호흡법이라 한다. 온몸으로 하고 싶으면 온몸으로 하고 피부로 하고 싶으면 피부로 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으면 마음으로 하고 가슴으로 하고 싶으면 가슴으로 하면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하고 싶은 곳과 호흡을 하면 된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의식하고 어떻게 마음먹고 호흡을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고 또 생각하고 의식하고 마음먹은 대로 호흡을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본인이 출신을 하고 수행 단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는 것은 생각하고 의식하고 마음먹고 심법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별도로 좌선하고 수행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호흡을 통하여 수행의 단계가 올라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지 생각하고 의식하고 마음먹고, 생각한 대로 의식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호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법을 일으키고 일으킨 심법대로 호흡을 했을 때 일상적 호흡이 바로 심법호홉이 되어서 수행이 되는 것이다. 심법호흡법은 이미 여러분들은 본인을 통하여 어느 정도 가늠은 하리라 생각한다. 자등명이란 빛덩어리 호흡이 그러하고, 자등명하나되기 호흡이 그러하고, 출신한 것으로 수행 단계 올라가는 호흡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지금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고 싶은 그것을 생각 의식 마음먹고 마음으로 하는 심법을 통하여 호흡으로 해보라.
전에는 확철대오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기에 확철대오라고만 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르니 “깨달음이 무엇인가?” 했고 “이것이 무엇인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화두 삼아 수행 정진했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심법호흡법을 통하여 해도 되지 않는가 생각한다.
한번 해보라. 그대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확철대오가 무엇인지 아는가? 안다면 아는 그것을 심법을 일으켜서 심법으로 그것이 되도록 호흡을 해보라. 그래서 심법호흡을 통하여 자성경계를 깨고 확철대오되도록 해보라.
이는 무조건 위의 것으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수행의 경지에 맞게 바로 앞에 것을 하면서 파헤칠 때는 파헤치고 하나 되고자 할 때는 심법호흡으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심법으로 일으켜 호흡을 해보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심법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단 한 가지 단전에 기운이 충만해야 어느 것을 해도 상기나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이를 알아야 한다. 그런 만큼 축기되어 있는 만큼 축기된 상태에서 축기되어 있는 안에서 그 어떤 심법호흡법이든 가능하다. 자기 자신에게 맞게 하면 된다.
밝혀야 하는 것은 밝혀야 하고 파헤쳐야 하는 것은 파헤쳐야 하니 되지 않고는 심법호흡으로는 되지 않으니 유효적절하게 심법호흡을 잘해서 수행이 일취월장 이루며 오기 바란다. 2011. 04. 14 17:56
심법(心法)을 배워 익혀서 마음에 함이 없도록 하라. / 칠통 조규일
우리는 육체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정신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마음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육체의 영향< 정신의 영향<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육체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고 정신은 마음으로 극복 변화할 수 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의식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마음은 바꿀 수 있고 마음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다. 마음엔 함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함으로 마음 안에서는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한 것에 대한 작용을 일으키고 일으키는 작용은 마음 작용으로 마음 안에 상으로 가지게 되고 가진 상으로 인하여 정신에 작용을 일으키고 일으킨 정신은 육체를 이끈다.
이러함에도 이러한지를 모르고 육체가 나라고 인식하고는 육체에 얽힌 법(法) 물질(色) 법에 빠져서는 육체의 영향을 받고 육체에 이끌리게 되고 물질에 이끌리게 되니 자연 정신과 마음이 육체에 이끌리게 되어 정신과 마음이 황폐화되기가 쉽다. 육체 법에 빠져 있다가 육체가 병을 얻으면 정신과 마음까지도 병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아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 많다하겠다.
육체가 나이되 영혼을 믿고 영혼을 위하여 나름대로 깨어있고 깨어서 종교를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꼭 종교의 믿음 생활이 아닐지라도 육체 법을 따르고 물질 법을 따르되 정신을 중요시하고 영혼을 중요시하여 정신력으로 육체를 이끌고 육체를 이끄는 정신력으로 어느 정도 육체와 물질 법을 극복하고 정신법으로 이끌면서 정신법에 빠져서는 심법(心法)까지도 정신법에 이끌도록 하다보니 육체로 인한 병은 어느 정도 극복해 가지만 막상 마음의 병을 얻어서는 마음의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병에 걸려서는 육체까지도 병을 얻게 하여 정신력이 점점 쇠퇴해져 가고 정신이 쇠퇴해 가면서 정신이 더욱 더 혼탁해져서는 혼탁한 정신으로 육체가 병을 얻어 절망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다 하겠다
육체가 나이되 영혼을 믿고 영혼을 위하여 깨어서 종교를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며 꼭 믿음 생활이 아닐지라도 육체법 물질법을 따르되 정신법을 따르고 정신법을 따르되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인하여 생멸하는 지를 알고 마음법, 심(心)법을 따르고 공부하는 이들을 보면 육체로 인한 병을 심법으로 어느 정도 치유 극복해 가고 또한 정신적으로 얻은 병과 마음의 병까지도 어느 정도 치유 극복해가며 마음 공부를 하여간다 하겠다.
마음 공부는 마음작용을 살펴 아는 것이고 마음작용을 살펴 아는 것은 심법을 알아 가는 것이라 할 것이며 심법을 아는 것이 묘법(妙法)을 알아 가는 것이고 묘법(妙法)을 알아 가는 것이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공부라 할 것이다. 마음 공부하여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음에 함이 없을 때 자취의 흔적도 없이 마음은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진 곳 일체지가 있고 여래가 있을 뿐이로다.
이런 관계로 여래가 있는 일체지를 알면 일체지에서 생멸하는 묘법을 드러내고 묘법을 알면 묘법에서 생멸하는 심법을 드러내고 심법을 알면 심법에서 생멸하는 마음작용을 드러내고 마음 작용을 알면 마음작용에서 생멸하는 정신법을 드러내고 정신법을 알면 정신법에서 생멸하는 물질법을 드러내고 물질법을 알면 물질법에서 생멸하는 육체법을 알아 육체로 인한 것은 정신으로 극복하고 정신으로 인한 것은 마음으로 극복하고 마음으로 인한 것은 묘법으로 극복하고 묘법으로 인한 것은 무위법으로 극복하고 무위법은 자등명인 자성불로 현현한다 하겠으며 현현하는 자성불은 무량광으로 여여하다 하겠다.
이와 같이 무량광은 무위법에 있고 무위법은 자성불에 있고 자성불은 자등명에 있고 자등명은 묘법에 있고 묘법은 심법에 있고 심법은 정신법에 있고 정신법은 물질법에 있고 물질법은 육체법에 있어서 어느 법에 머물러 어느 법에서 바라보고 살피느냐에 따라 생멸하는 법의 작용이 다르고 작용하는 법의 생멸은 어느 법을 알고 행하느냐에 따라 하위법은 상위법을 따르고 상위법은 무위법으로 통하지 않는 곳 없이 전체로 통하여 있다 하겠다.
그래서 육체로 인한 병은 정신법으로 어느 정도는 치유될 수가 있고 정신으로 인한 병은 심법 마음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치유될 수가 있으며 마음으로 인한 병은 묘법과 자등명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치유될 수가 있다. 하겠다.
살아가는 자체가 고통이고 고(苦)인 인생 길에서 자기 자신에게 시시때때로 오는 고통과 아픔의 병을 잘 살펴서 스스로 정신을 마음을 바꿔서 스스로 치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겠다. 병의 90%로가 마음에서 생긴 병이고 마음의 고통이 전부다 마음의 걸림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보면 마음을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른 만큼 육체에 얽매이기보다는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하겠고 깨어 있는 정신에 얽매이기보다는 마음 공부를 통하여 심법을 익히고 배워서 묘법을 알아야 하겠고 묘법(妙法)을 알아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음에 함이 없어야 하겠다.
2006. 03. 29 15:24
심법으로 수행처 도량 만들어 놓고 수행하기 / 칠통 조규일
우주 일체가 심법에 의하여 좌우된다. 어떤 생각 어떤 의식 어떤 마음을 먹고 행하느냐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이 다르고, 생각이나 의식 마음이 다르고 또한 몸의 변화도 생각이나 의시 마음의 변화도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기 위해서 변화하기 위해서 수행한다. 수행하면서 좀 더 좋은 곳, 자기 자신이 수행이 잘 되거나, 또는 기도하면서 기도가 잘 되는 곳에서 수행하고 기도하려고 한다. 몸을 가지고 수행하는 만큼 육체란 물질은 시공에 걸려 있어서 육체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미음대로 자유롭게 어디를 오갈 수 없다보니 좋은 도량 좋은 수행처가 더 간절할지도 모른다. 간절하면서 시공에 걸려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보다 좋은 수행처 보다 좋은 도량을 찾아가서 수행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서 또는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서 있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다. 비록 좋은 수행처 좋은 도량에 가서 수행을 못할지라도 이곳에서 자기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해서 수행의 경지를 높이고 기도의 바램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절도 하고 수행도 한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깨어서 수행할 수 있는 한 수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수행처가 아니고 도량이 아니면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본인이 늘 말해왔듯이 수행처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 있는 그곳이 바로 수행처이고, 자기 자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도량이다.
지금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수행처이고 도량이다. 육안으로 보는 지금 있는 곳은 상황의 상태, 주어진 환경은 다만 형상의 형태가 그러할 뿐,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의 세계는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식 마음에 따라서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하고 받아드리는 마음에 따라서 육안으로 보이는 환경의 형태의 형상은 같으면서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받아드려지고 인식 의식하고 행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주어진 환경의 상황의 상태, 상태란 형태의 형상에 따라서 그것을 생각 의식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의식하고 마음작용을 일으키며 행동한다.
이와 같이 어떤 생각 어떤 의식 어떤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주어진 환경의 상황의 상태, 형태의 형상을 인식하는 안에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때 인식하고 행동하게 되는 주어진 환경, 상황의 상태, 형태의 형상이라고 하지만 더 엄밀하게 살펴본다.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의 상태나, 형태의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놓인 현실 지금 여기를 어떻게 받아드리느냐는 생각 의식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똑같은 환경에서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을 안일하거나 방일하기 위해서 핑계꺼리를 찾는 과정에 그것들이 놓여 있는 것일 뿐이다. 업과 습에 따라서 업의 관성으로 굴러가는 과정에 자기 자신의 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핑계꺼리 내지는 숨기 위해서 그렇게 받아드리고 그렇게 생각 의식 인식하며 행동한다. 사실은 육안으로 보이는 환경, 상황의 상태, 형태의 형상은 다만 시공의 걸림으로 있을 뿐 그것을 걸림으로 인식 의식 생각 마음먹고 걸림으로 시공에 처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육체는 물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물질은 물질에 걸려 있을 수밖에 없고 시공은 시공에 걸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 의식 마음은 시공에 걸리지 않고 물질에 걸리지 않는다. 다만 물질에 걸리는 생각 의식 마음이 있어서 물질에 걸리고 물질에 갇히고 물질에 놀아날 뿐, 생각 의식 마음은 물질과는 상관없이 자유롭다. 자유로운 만큼 생각 의식 마음은 그 어느 것이든 생각과 의식 마음의 주변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생각 의식 마음으로 만드는 환경 주변은 심법이 작용하고 심법이 작용한 주변은 심법대로 상황의 상태가 되고 환경이 된다. 이와 같이 심법대로 되는 주변의 상황의 상태를 자기 자신에 맞게 만들어 놓고 생활하거나 수행하거나 기도하며 이 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이렇게 된다면 꼭 육체를 움직여 좋은 수행처 좋은 도량, 수행이 잘 되는 곳,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따로 없이 자기 자신이 있는 그곳을 좋은 수행처, 수행이 잘 되는 도량,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 곳이 될 것이다. 어떻게 심법으로 좋은 수행처를 만들고 좋은 도량을 만들고, 어떻게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 곳으로 만들어 놓고 수행 정진하거나 기도할 것인가? 그것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의식이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을 그러한지 마음으로 인식하여 받아드리고 그 상황의 상태에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집에서 절을 할 때 아무 대상이 없거나 또는 어떤 형상을 두고 절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냥 절을 하게 되지만 매일 절을 하다보면 그것을 보고 있던 중음신이나 지나던 잡귀가 절하는 것을 보고 절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절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는 중음신에게 절을 하거나 잡귀에게 절을 하는 것과 같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집안에 중음신을 모시는 꼴이 되거나 잡귀를 모시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집에서 절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이 잘 다니는 대웅전을 생각하고 의식하고 대웅전에서 절을 한다고 생각 의식하고 인식하고서 대웅전 안에서 절을 한다고 마음먹고 절을 하는 것이 좋다. 꼭 잘 다니는 절 대웅전에 가지 않아도 비록 육체는 대웅전에 가지 않고 집에서 절을 하지만 절하는 자기 자신은 대웅전 안에서 절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집에서 절을 하면 자기 자신이 잘 다니는 절 대웅전에서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다만 육체가 대웅전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자기 자신에서 육체를 제외한 모든 것들 생각이나 의식 마음은 대웅전 안에서 절을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는가? 육체는 시공에 걸려서 가지 못했을 뿐 육체 역시도 심법에 의하여 대웅전에 나아가서 절을 한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문제이다. 생각 의식 마음먹고 받아드렸다면 그것은 시공과 상관없이 행한 것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그러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도 또 중요한 것은 생각 의식 마음이 받아들인 만큼 육체도 받아드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육체는 육체에 의하여 육체가 반응하며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생각 의식 마음을 어떻게 먹고 행하느냐에 따라서 반응하며 받아드리며 작용하는 것이다. 즉 마음먹고 생각 의식하고 인식하면 육체는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 자신이 있는 그곳은 육안으로 볼 때 상황의 상태가 그러하고 형태의 형상이 그러할 뿐, 그곳은 근본 자등명에서부터 지금 현재라고 하는 것이 모두 다 하나로 통하여 있다. 한통속으로 있는 것이다. 다만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하기를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대로 생각 의식 마음이 받아드리고 육체가 반응할 뿐이다. 모두 다 하나로 통하여 있는 곳에 있다. 어느 것을 생각 의식 인식하고 마음먹고 행하느냐에 따라서 육체가 반응하고 생각 의식 인식하며 마음이 반응하고 마음이 작용한다. 어떤 상황의 상태에서 어떤 생각 어떤 의식 어떤 마음을 먹고 인식하여 받아드리느냐에 따라서 받아드려지는 것이 마음 의식 생각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어떤 생각 어떤 의식 어떤 마음이냐에 받아드려지는 것이 다른 것과 같이 생각과 의식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도량을 만들어 수행처를 만들어서 늘 만들어 놓은 도량에서 언제 어디서나 수행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쓴다. 어떻게 심법으로 수행처 도량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수행할 것인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문제는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의식하고 인식하며 수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앞에서 집에서 절을 할 때 잘 다니는 절의 대웅전에서 절한다고 생각하며 절을 하라고 생각하고 의식하며 절을 하면 마치 그 절 대웅전에서 절을 하는 것과 같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이 있는 곳 주변을 그와 같이 생각 의식하고 인식하며 수행해야 한다. 방법은 이러하다. 수행하기 좋은 수행처의 도량에서 수행하고자 한다면 일단은 수행처의 도량을 알아야 한다. 수행처의 도량을 안 다음에는 그 수행처의 도량을 생각하고 그런 다음 의식하고 그런 다음에 그 수행처의 도량에서 수행한다고 인식하고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 자신이 그 수행처의 도량에 가지 않아도 그 수행처의 도량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다가, 또는 자기 자신이 육체는 아닐지라도 육체 안의 자기 자신은 그 수행처 도량에 가서 수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외 여러 방법들이 참으로 많다.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이해를 돕고 또 그렇게 수행처의 도량을 만들어놓고 수행하는데 부족하지 않을 정도 설명을 더할까 한다. 예전에 산기운받기에서 산기운을 끌어다놓고 수행하는 방법을 설명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그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기운받기는 산에 기운 땅의 기운을 끌어다가 받아가면서 그 속에서 수행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그것과 다르게 심법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심법으로 도량을 만들어놓고 수행한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여러 방법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은 자기 자신이 전에 가서 수행한 수행처의 도량을 자기 주변에 만들어놓고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교주가 자기와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종교의 교주로 하여금 함께 있다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있고, 또 교주가 자기 자신을 지켜주고 있고 또 교주의 힘이나 에너지를 그대로 받고 있다. 그분과 함께 있다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있다. 전에 언젠가 말했듯 영계에서, 천계에서, 신계, 광계,...자등명 세계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기운받기의 기회로도를 많이 그렸듯이 그 세계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세계의 기운이 자기 자신을 감싸고 있고, 그 세계의 기운 속에 있다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이 그 세계로 가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기운을 있는 그대로 받으면서 그 기운으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도량을 만들어놓고 만들어 놓은 도량 안에서 늘 수행하는 것이다. 도량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수행할 때마다 그곳을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 정진해야 하지만, 수행하고자 하는 세계와 자기 자신과 연결해서 수행하고자 하는 세계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집을 짓듯 도량을 만들어 놓으면, 만들어 놓은 집과 늘 함께 있을 것이며 수행을 하고 하지 않고 함께 있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 기운을 받을 수 있고 또 수행하고자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수행이 최상의 수행처에서 최상의 도량에서 수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만들어 놓으면 자기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수행처의 도량도 같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심법으로 하는 만큼 어느 세계 어느 단계와도 연결할 수 있다. 모른다면 할 수 없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는 얼마든지 연결해서 수행처의 도량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최고 최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곳과 연결해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수행처의 도량을 자기 자신과 함께 한 몸이 되도록 만들어 놓는다. 한 몸이 되게 만들어 놓은 수행처의 도량은 부수어 없애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으니 수행을 하면 잘 될 것이 아닌가? 온 몸에 영적구조물들을 가지고 있거나 만들어놓고 있는 것을 볼 때 수행하는 수행자는 수행하기 좋은 수행처의 도량을 영적구조로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인은 심법으로 태평양에 공룡이 천도되어 가도록 만들어 놓고, 또한 용, 이무기 뱀이 승청 천도되어 가도록 만들어 놓았으며, 그뿐만이 아니다. 바다생물들이 천도되어 가도록 만들었고, 중음신 및 지옥중생이 공부하여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것들은 지금도 만들어 놓은 곳에 있다. 그런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심법으로 만들었다. 물론 법(성)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심법으로 만드는 것에 있어서 행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심법으로 행하면 된다. 법(성)력이 부족해서 되지 않는다면 될 때까지 만들어도 보고 만들어 지지 않을 경우 수행할 때마다 연결하고 생각 의식 인식하고 수행해서 언제 어디서든 좋은 최고 최상의 수행처의 도량에서 수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본자등명을 생각 의식 인식하고 근본자등명 속에서 수행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심법은 아는 만큼 행할 수 있고 모르면 행할 수 없는 것이 심법이다. 심법으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수행도량을 만든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이 부수거나 그 외 누군가가 부수지 않는 한 영적구조물로 수행도량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자기 자신과 늘 함께 있으면 자기 자신에게 최고 최상의 수행도량이 될 것이다. 한 번 심법으로 수행도량을 만들어놓고 수행하기를 권하여 본다. 2012. 3. 1 15:10 중음신 및 지옥중생이 수행하여 좋은 곳으로 가도록 만들어놓은 도량, 자등명 세계로 올라가도록 만들어 놓은 우주 허공에 만들어 놓은 도량, 용, 이무기 뱀이 19단계에 승천하여 올라가도록 만들어 놓은 도량, 바다생물의 중음신이 천도되어 가도록 만들어 놓은 도량, 공룡이 천도되어 가도록 20단계 이상으로부터 연결해서 만들어놓은 도량과 같이 수행자에게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하루 속히 증득하도록 위와 연결해 도량을 만들어주면 하루 속히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할까? 어느 단계? 몇 단계? 어느 자등명 세계?를 연결해서 도량을 만들어주면 하루 속히 확철대오의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을까? 거기가 어디든 있는 그곳은 모두 다 통하여 있다.
다만 아는 만큼 볼 뿐이고 아는 만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으로? 심법으로.
심법에는 시공간이 없다. 그저 행하면 된다.
어디에 있던 이때 중요한 것은 아는 것 그리고 심법으로 행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알지 않고서는 그 어느 하나 제대로 행할 수가 없다. 그런 고로 알아야 한다. 많은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2011. 06. 25. 04:19 칠통 조규일 (확철 칠통 명철) / 2011년 6월의 짧은단상중에서 -
심법(心法)으로 행하고 이루어내라. / 칠통 조규일 (확철 칠통 황금종려)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法雨)가 내린다.) 좌선하고 앉는다. 지그시 눈을 감고 좌선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전체적으로 살펴본다.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나서 머리 위쪽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한 최대한 높이 올려다본다. 올려다본 높고 높은 하늘로부터 법비(法雨)가 내린다.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法雨)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쏟아지는 법비는 혼탁한 머리를 씻어주며 머리 속을 맑고 깨끗하게 해준다. 법비는 계속 머리 위로 쏟아진다. 쏟아지는 법비를 뚫고 백회를 통하여 머리에 탁한 것과 몸통에 있는 것들이 벡회로 빠져 나오면서 쏟아지는 법비를 뚫고 거슬러 올라간다. 온몸으로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가 쏟아진다. 쏟아지는 법비는 좌선하고 앉아 있는 온몸을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고 백회로 쏟아지는 법비는 백회를 통하여 몸통으로 들어오면서 몸통에 탁하고 검은 것들로 떨어지고 떨어져서는 몸통에 탁하고 검은 것들을 백회로 빠져나가도록 하면서 쏟아지는 법비를 거슬러 올라타고 백회로 빠져나가면서 하늘로 흩어진다. 그러면서 몸통 안이 맑고 깨끗해진다. 쏟아지는 법비에 몸은 점점 맑아지며 깨끗해지고 몸통 안도 맑고 깨끗해진다.
이것을 하면서 자기 자신 몸 안에 무엇인가 모를 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쏟아지는 법비를 맞으며 몸 안에 있는 것이 맑아지고 깨끗해져서 업장이 녹아 내리고 업장이 녹아 내리면서 맑아진 것은 백회를 빠져나오면서 머리로 쏟아지는 법비를 뚫고 거슬러 올라 영계 내지 천계에 간다. 머리 백회로만 법비가 쏟아진다. 쏟아지는 법비를 뚫고 몸통 안에 있는 것들이 하늘로 올라간다. 몸통 안이 맑고 깨끗해질 때까지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를 뚫고 올라간다. 가늠할 수 없이 높고 높은 머리 위의 하늘에서부터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가 내린다.
*이것을 행하는데 머리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그냥 두라. 머리가 맑아지기 위해서 흔들리는 것이며 머리 속에 탁한 것이 빠져나가느라고 흔들리는 것이며 머리 속이 안팎 없이 통하기 위해서 흔들리는 것이다.
* 머리가 탁하다고 생각되시는 분, 몸이 탁하다고 생각되시는 분, 머리 속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분, 몸(몸통)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분은 해 보라.
맑고 깨끗한 신령스러운 법비가 전지전능하게도 모른 것을 다 해준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의식한 대로, 뜻한 대로, 심법(心法)으로 행하라. 그러면 행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중음신들은 수행하는 분들에게 수행에 방해되는 것을 갔다 놓는데...그것을 보고 그것을 제거해 주면서 수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몸통 안에 갔다놓을 생각을 못했을까? 중음신이 수행하는 사람에게 갖다 놓는 것과 같이 지금 수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갖다 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몸에 지니고 다닐 필요없이 몸통에 넣어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일단은 해 봐야겠다. 그리고 살펴봐야지...
2009. 07. 30. 13:27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받는 것과 심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칠통 조규일 (확철 칠통)
이 몸이 오직 나이고 이 몸이 다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는 어느 종교가 되었던 종교를 믿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이 몸이 나이되 이 몸이 다하면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곳으로 가도록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자기 이득이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나 후자의 경우는 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자기 자신도 생각하지만 남도 생각하고 또한 죽은 뒤의 세계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됨으로 비록 삶이 힘들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고 힘들 때마다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좋다고 하겠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나라에 태어나고 천국에 태어난다 또 하나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정성을 다하여 이루어질 기도만 하면 기도를 들어준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도 선(禪)이 아닌 염불로 보면 역시 그러하다.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을 가지고 불보살님들에게 의지하여 기도만 하면 이루어진다 심지어 몇 번만 불러도...가피력을 받고 얻는다. 기독교에서 은혜를 입고 성령을 받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자력이라기보다는 타력이라고 하고 불교는 타력이라기보다는 자력이라고들 한다. 자력이라고 말하는 불교에는 선(禪)과 교(敎)가 있다. 불교를 공부함에는 선(禪)이고 있고 경전이 있으며 염불이 있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법으로 이를 심법(心法)이라고도 하고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중생을 깨우쳐주기 위한 가르침이며 염불은 염하는 부처님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기도 염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기 위해 또는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단순히 염불하는 것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염불을 좀더 깊게 들어가면 염불에는 염불선이고 염불수행이 있다. 단순히 염불하는 것이 아니고 일심 일념으로 염불 수행을 하면 염불선에 들게 되고 염불선에 들면 염불 삼매에 빠지게 된다. 염불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을 부르는 염을 통하여 가피력을 받고 위력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럼에도 다른 것은 염불을 함으로 염불하는 부처님을 자기 자신 안에서 맞이하고 맞이하는 부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화현(化現)하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밖으로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은 단순히 염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을 통하여 염하는 부처님을 맞이하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처님을 화현시키는 화현법(化現法)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염불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염불하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을 믿고 의지하여 염불을 한다
사실 이런 기복이 없다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함으로 믿는 구석이 생기고 믿는 구석이 생김으로 믿는 이로 하여금 나아갈 수 있는가하면 또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니 되더라는 이루어지더라는 기복이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기도하게 되고 간절하면 간절함만큼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집중 몰입 선정 삼매에 듦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되고 그럼으로 더욱 더 깊게 빠져들고 더욱 더 빠져들어서는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싶고 관찰하고 싶어져서 관찰하며 관하다가 그러한 현상이 마음법 심법에서 생기는 지를 알고 자기 자신이 했던 하고 있는 것에서 심법 공부를 하게됨으로 해왔던 것으로 통하여 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선(禪)을 하게된다. 선을 하게 되어서는 더욱 더 깊어짐으로 전체를 통하게 된다. 이렇듯 어느 것으로 통하든 하나만 제대로 통하면 전체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하기에 알려주는 입장에서 보면 근기 따라 근기에 맞게 알려주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믿고 따르기만 하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아들을 돌봐주듯 다 돌봐 줄 것이며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에게 젖 달라고 애원하듯 간절히 해라. 그러면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주듯 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을 찾기만 해도 부처님께서 들어줄 것이며 기도만 하라 그러면 부처님께서 들어줄 것이다 염불만 하라. 그러면 염불하는 부처님으로부터 위신력을 받고 가피력을 받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지면 다행인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물으면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간절함이 부족하고 내 업이 그러하고 내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하니 마음을 바르고 하게 더욱 더 믿고 의지하여 간절하게 하여 부르는 이름과 부처님과 통하게 하라고 한다.
통해서 그렇지 않고 하며 통한다니 무엇이 통하는 것인가?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부처님 마음과 기도하거나 염불하는 자기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가?
그것은 청정심에서 통하는 것이다. 맑디 맑은 순수의 순백의 백지 위에서 통하여 순백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뜻과 의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그대는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안팎 없이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밖이 탁하다면 안에서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며 안이 탁하다면 밖에서 통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안팎에서 이루어져서 전체로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이 뜻과 의지를 가지고 기도 염불한 불보살님들의 가피력을 받는 것과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심법은 자기 자신이 인식하고 의식한 마음 안에서 이루어져서 밖으로 현현하여 나타나니 일체법이 모두 다 심법인지를 아는 사람에 있어서 일체의 생멸법이 마음 안에서 생멸하는 지를 아는 사람에 있어서 부처님의 가피력이 심법이고 심법이 부처님의 가피력이려니 부르는 이름의 부처님에서 보면 부처님의 가피력이고 위신력이지만
부르는 이름이 마음이고 마음인 심법에서 보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심법의 작용으로 인하여 일체의 생멸법이 도래하고 도래한 일체의 생멸법 안에서 작용함으로 작용한 심법은
부처님의 가피력 위신력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 안에 누구나 있는 부처님 마음인 심법의 작용이라 하겠으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불러서 염하는 부처님의 가피력이고 위신력이며 돌보아 주시는 신(神)들의 보살핌이라 한다.
2006. 05. 0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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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흡호흡', '천돌호흡'의 차이란 무엇입니까?
칠통 조규일 2013. 08. 06
흡'과 '흡호흡', 또 '천돌호흡'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중략
7월 13일 올리신 법문 <처음으로 저곳을 의념하며 흡하기 시작하다>을 보며
저도 가신 길을 따라 흡해 봅니다.
중략
오늘 잠에서 깨어 또 <칠통사랑방>에 들어와 법문을 보면서 흡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흡하려다 문득 "과연 내가 흡을 바르게 하고 있는가?
그러면 흡, 흡호흡, 천돌호흡'의 차이가 뭐지? 하고 문득 의문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선사님 법문 <처음으로 저곳을 의념하며 흡하기 시작하다> 를 찾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밝혀 드러내는 것과 별개로 저곳까지 흡하며 가보자
어제 2013. 07. 27 퇴근길에 일어난 생각 한 토막
흡(吸)한다는 그냥 들숨과 날숨의 흡이 아니다.
흡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만큼 그릇만큼 흡하여 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두고 그것을 인식 의식하고 있는 그것을 흡하여 모두 다 품는 것이다.
흡하는 순간 흡함과 함께 흡하는 것을 내 안이 비워진 그릇만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만 만큼 흡하여 빨아드릴 수 있고 담아낼 수 있는 것 아닌가?
56단계 안에서부터 흡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되면 비워낸 만큼 흡하여 품어서 올라오고 올라와서
에너지 힘이 부족하면 올라온 세계에서부터 하나하나 밟으며 에너지를 채우고 힘을 길러서며 비우고 비워서는 또 힘과 에너지가 충분하다 싶으면 흡하여 올라오고 올라오지 않았는가?
‘저곳, 참자아의 마지막 끝을 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저곳까지 흡하며 가보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에너지 힘이 되는 만큼 흡하며 가자.’ ‘밝혀 드러내 그리는 것과 별개로 흡하며 가자.’
그러면서 본인 있는 곳과 인식한 저곳을 의념하며 품으려 흡을 하였다.
흡하려고 하는 순간 거대한 벽에 부딪친 듯싶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거대하게 부딪친 벽을 그곳을 마지막 지점으로 해서 품안에 가득 담으려 하며 흡을 하여 보았다. 거대한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운전하면서 호흡할 때마다 흡을 하며 최대한 흡을 하며 품으려 했다.
많이 엷어진 것 같았고 많이 가까이 간 듯 보였다.
중략
배가 나온 것은 아래쪽으로 가야 것이 내려가지 못해서 배가 나왔던 것이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은 가슴 즉 마음의 문이 닫혀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
몸이 살찐 것처럼 부풀어 있는 것은 흡 내지 흡호흡을 잘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흡과 흡호흡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것에 앞서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의 몸이 텅 빈 통이라고 생각하고
흡을 하던 흡호흡을 하던 해야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입이나 코를 통하여 흡이나 흡호흡을 할 경우에는
흡을 통하여 또는 흡호흡을 통하여 텅 빈 몸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로 들어가서 들어가는 장기가 부풀어 오를 수도 있답니다.
또는 흡 또는 흡호흡을 할 때
몸통을 생각하고 몸통 안에 담드는 품는 듯 흡이나 호흡을 하였을 때
보이지 않은 호흡문들이 열려있지 않은 경우에
그것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데 막혀 있는 경우
그런 곳으로부터 부풀어 오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에는 아래쪽을 펑 뚫려 있지 않은 관계로 배가 구업으로 나왔던 것 같고
이번에는 아래쪽이 다 차고 가슴 부분으로 나와야 하는데 가슴이 막혀 있으니
즉 마음의 문이 막혀 있으니 자연스럽게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 정체됨으로 하여
가슴 부분 몸통 전체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등명 세계에서 올라와 궁극까지는 천돌호흡이 자명체를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돌호흡으로 자등명체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궁극을 넘어서부터는 천돌호흡으로 어렵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천돌 호흡 역시도 몸통을 하나의 통을 생각 의식하고 하는 호흡이고
몸이 갖고 있는 장기를 위한 코 입의 호흡과는 다르지요.
물론 흡이나 흡호흡 역시도 그냥 일반적인 것과 같이 흡이나 흡호흡을 하면
마치 우리들이 날숨과 들숨을 하는 것과 똑같아서
아래 단계에서는 별 문제가 없지만 위 단계에서는 들어가서는 밀고 나와야 하는 만큼
일반적인 들숨과 날숨, 즉 일반적 호흡과 같이 흡이나 흡호흡을 하면 아니되고
반드시 몸통을 생각 의념하고 흡 또는 흡호흡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호흡문 역시도 모두 다 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열려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열리지 않다면 이럴 때 점검해서 모두 다 열려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래 전에 자등명을 그리며 올라올 때 했던 이야기인데
그리며 올라가면 처음에는 담겨 있다가 그 다음의 세게를 담으면서 전에 담았던 것을 머리 위로 나간다고 했었는데,
흡을 하던 흡호흡을 하던 이와 같아야 합니다.
입을 또는 가슴으로 흡을 하여 몸통 안 가슴 안에 담았을 경우
몸통 안에 있는 것을 명신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몸통 안에 있는 것을 비워야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비워져야 합니다.
마치 들숨과 날숨과 같이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일반적인 호흡을 그냥 하면 장기에
들숨과 날숨을 의식아면 이다와 핑갈라의 통로가 열리고
몸통을 의식하면 명신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명신이 열려지 않았거나 백회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지요.
본인 갖은 경우에는 자등명길을 밝혀 드러내며 담고 비우고 하는 것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들어오면 나가거나 들어오려고 하면 명신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처음에 흡을 하며 가슴 마음으로 담고 빠져나가는 것은 명신으로 빠져나가게 해야 한답니다.
처음에는 이 또한 잘 되지 않으니 숙달이 될 때까지 훈련이 필요하고 숙달되면
자연스럽게 흡을 통하여 들어오고 그냥 있어도 토를 해도 명신으로 빠져나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되기까지는 흡을 하고 명신으로 빠져나가는 토를 해야 합니다.
흡을 하며 앞에 있는 것을 품듯 담듯 품을 수 있는 만큼 담을 수 있는 만큼 품거나 담습니다,
그리고는 또 담으려고 하거나 토를 할 때는 명신으로 내보내며 비워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흡을 하고 토를 하며 나가도록 하며 흡호흡을 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잘 되었을 때부터는
그냥 흡을 하며 담고 품어도 의식적으로 토를 하지 않아도 명신을 빠져나간답니다.
우리들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아도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 되는 것과 같이
흡만 하여도 토를 하지않고 토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명신으로 빠져나가게 된답니다.
이와 같이 될 때 흡을 하는 것이고 흡호흡은 흡이 원만하게 될 때까지 흡을 하여 담고 품되 명신으로 토를 하며 빠져나가도
록 하는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흡과 흡호흡은 차이가 있고 또 흡이나 흡호흡과 다르게 천돌호흡은 자등명 세게에서 자등명체를 키우는 호흡이되
높은 단계의 자등명체가 아니라 아래 단계의 자등명체의 형성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흡 흡호흡으로 배가 나오고 가슴이 부풀고 몸이 살찐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세계와 소통이 되어서 몸통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되는데
그거에 비해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고, 구업이 있으며 말을 하거나 생각할 때 여여하지 못하고
말하면 말하는 대로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업이 되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수행이 되면 자연스럽게 여여해져서 그런 말을 해도 걸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걸리고
위 세계와 소통이 돼서 호흡이 되어 들어오는데 보이지 않은 호흡문들이 열려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몸통으로 호흡이 아니라 장기에 극한된 호흡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쪄거나 상당합니다.
아래가 차고 가슴으로 나오려고 하고
몸통 보이지 않은 호흡문 등으로 나오려고 몸이 살찐 듯 부푸어 있다니
보이지 않는 호흡문들을 다시 한 번 더 열렸는지 열리지 않았는지 하나 하나 점검해 보시고
열리지 않은 곳이 있으면 하루 속히 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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