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은 한 명인데, 궁궐은 다섯 개?
조선의 수도 한성에는 총 다섯 개의 궁궐이 있습니다. 왕이 다섯 명도 아닌데 어떻게 궁궐이 다섯 개나 될까요? 물론 왕은 한 명입니다. 왕이 오직 한 분이니 사는 궁궐도 한 개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궁궐은 항상 두 개 이상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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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끝자락에 위치한 조선의 5대궁궐과 종묘사직
그래서 궁궐은 정궁과 보조 궁궐인 이궁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렇게 두 개 이상 존재하던 궁궐은 여러 이유로 새로운 궁궐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없어진 궁궐터에 다시 새로운 궁궐을 짓는 등 500년 세월 동안 조금씩 그 수가 늘어나 다섯 개의 궁궐이 되었습니다.
500년 역사 동안 궁궐이 어떻게 해서 다섯 개가 되었는지, 궁궐의 역사를 통해 5대 궁궐의 뒷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정책을 내세우며 1392년 세워졌습니다.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서울인 한양을 새 수도로 정하고 ‘한성’이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새로운 수도가 결정됨과 동시에 태조 이성계는 '신궁궐조성도감'(도감: 나라의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던 관청)을 설치를 명하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일등공신인 정도전의 주도 아래 풍수지리상 명당자리인 북악산 자락을 터로 경복궁을 지었습니다. 경복궁은 뒤로는 북악산이 있고, 앞으로는 청계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입니다.
경복궁의 경복이란 '길이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말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번창을 기원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1395년 태조가 경복궁에 입궐하면서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왕이 생활할 수 있고 신하들과 정사를 돌볼 수 있는 기본적인 건물만이 완성이 되었고, 그 뒤 아들인 세조 손자인 세종대로 가면서 경복궁은 정궁으로써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도성 안의 궁궐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이 존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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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태종임금은 1404년 '신도이궁조성도감'(새로운 도시의 이궁을 조성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이궁 공사를 명했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405년 새로운 이궁인 창덕궁을 완공했습니다. 물론 이때의 창덕궁 역시 초기 경복궁처럼 규모가 매우 작았고 제반 시설도 미약한 생태였지만 창덕궁도 경복궁처럼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건물이 늘어가고 시설들이 보완되었습니다.
태종 임금은 아버지가 이룩한 새 나라의 전반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 안정시켜갔으며 궁궐 건축 역시 한 나라의 궁궐다운 면모를 갖춰갔습니다. 1418년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경복궁 근정전에서 물려준 뒤 창덕궁 동쪽에 수강궁이란 작은 궁궐 건물을 짖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물론 왕위를 물려줬지만 군사권 등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 완전한 완전한 은퇴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자신의 거처를 경복궁에서 아버지 태종임금이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수강궁에서 가까운 창덕궁으로 옮긴 후 8년을 창덕궁에서 정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1484년, 세종의 증손자인 성종 임금이 왕위에 등극하면서 왕실식구들이 늘어나자 옛날 태종 임금이 거처하던 수강궁 자리, 즉 창덕궁의 동쪽 자리에 새로운 궁궐 건물을 지었고 그곳이 바로 지금의 창경궁입니다. 그 뒤 창경궁은 궁궐로서의 정전이나 편전 등의 기본 규모와 기능을 갖추었으나 주로 왕실사람들의 기거용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임진왜란 전까지 한성에는 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개의 궁궐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은 엄청난 피해를 안겨줬던 전쟁이었습니다. 모든 궁궐이 파괴된 상태에서 재정 역시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 임금은 일단 지금의 정동 근처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궁궐(이를 '행궁'이라 함)로 정해 거처하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빨리 경복궁을 짓자고 주청했지만 선조는 아직도 일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경복궁을 어떻게 짓겠느냐”라며 미루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으로 재정은 바닥이었고 경복궁은 그 규모가 다른 궁궐에 비해 컸기 때문에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의 궁궐은 어쩔 수 없이 정동의 행궁이 되었습니다. 물론 행궁을 중심으로 건물을 짓고 궁궐의 기능을 조금씩 갖추어나갔는데 이곳을 경운궁이라고 불렀고, 지금의 덕수궁이 되었습니다.
1607년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 조정에선 궁궐 건립을 위한 관청이 세워졌고 우선 창덕궁과 창경궁이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때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 하여 제외되었고, 창덕궁이 정궁으로 완공되면서 이궁은 서대문 근처에 경희궁(원래는 경모궁이였던 것을 영조 임금때 경희궁이라 바꿈)이란 이름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경희궁은 서쪽에 있다 해서 서궐이라 불렀고 청덕궁은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270년간 조선전기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빈터로 남게 되었고 창덕궁과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정궁과 이궁으로서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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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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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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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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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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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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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재 지킴이 쏭내관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고와 중앙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며, 영국 그리니치대학교 대학원에서 아트매니지먼트를 공부했다. 1999년부터 우리나라 궁궐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2002년부터는 세계적인 박물관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박물관 160여 곳을 기행한 뒤, 최근 우리나라 박물관 80여 곳을 직접 현장 답사한 뒤 집필한 <쏭내관의 재미있는 박물관 기행>을 펴냈다.
우리나라 궁궐과 박물관에서 ‘쏭내관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내시복을 입고 진행하는 현장 강의는 그야말로 인기 짱이다. 현재 ‘쏭내관의 재미있는 史교육 현장’을 운영하며 우리 문화재와 역사 지킴이로서 전국 방방곡곡의 학교와 도서관 등에서 강의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2005년도에는 우리의 궁궐 이야기를 재미있게 소개한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올해의 청소년 도서)을 펴낸 바 있다.
http://blog.naver.com/ssong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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