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사님
나홈 2장 11절부터 13절까지 합독하시겠습니다.
(나 2:11-13)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오늘 원어중심 성경 강의 나훔 40번째, '아리' 사자, 두 번째 시간 마지막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라고 하면서,
나흠 선지자가 이제 비웃는 말을 했다고 했죠. 사자가 다른 짐승들을 억압하고 약탈했는데, 아수르가 이제 그러했던 것처럼 이웃 국가들을 그렇게 사자처럼 약탈하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는데 그 능력과 위세가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한다라고 이제 표면적으로 보이는 내용이 그러했다고. 그렇지만 이면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노략하고 죽이고 삼켜주시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는 거예요.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다'라고 해요.
수사자 '아리'고요, 암사자는 '라비'라고 하죠. 새끼 사자는 '구르 아비'라고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구르의 새끼.
에스겔서 32장 2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겔 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에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인자야', 인자는 '벤 아담'이죠, 그래서 사람의 아들, 주님을 가리키는 호칭이죠.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애굽의 바로 왕은 세상의 왕이고 율법이죠.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주님이고 우리를 가리키는 그런 호칭인 거예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해서 슬픈 노래를 불러', 슬픈 노래 '키나' '애가를 불러서', 부른다는 말은 '나사'라고 했죠. 십자가 들어올리듯이 들어올리고, 그래서 애가는 십자가의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라고 해요. 이 실상이라는 말 때문에 '너는 사자가 아니라 악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죠, 사자가 아니고 악어다. '실상'이라는 말이 나오면 앞에 말은 아니고 뒤에 말이다라는, 이게 참말이다라는 그런 의미가 되잖아요. 근데 이 '실상에 대해서'는 따로 히브리어가 없어요. 그러니까 '너는 사자고 바다 가운데 큰 악어다' 같은 의미인 거예요.
여기서 근데 악어는 '탄닌'이라고요. 이게 악어가 아니라 뱀이라고 하고 용이라고 하고 그리고 바닷 괴물이라고, 그런 의미로 쓰이는 단어예요. 성경에 이 악어라는 말이 우리 한글 성경에는 세 번 나와요, 세 번 나오는데
(레 11:30) 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라고 하는데,
이 악어는 '코아흐'라고 해요, 이거는 작은 파충류를 가리켜요. 그리고 에스겔서 29장 3절에는
(겔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지금 이 에스겔서와 같은 내용이죠. 에스겔서 32장 2절에 나오는 악어인데 이게 에스겔서에 나오는 두 번 나오는 것이 이게 '탄닌'이에요 전부. 그러니까 성경에는 악어가 없는 거예요, 원래 악어는 없어요. 그냥 파충류가 그나마 가깝죠. 작은 파충류 코어가 육지 악어 그러니까 한글 성경에 악어라는 말이 세 번 나오는데 하나는 코아흐 파충류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이 에스겔서에 나오는데 이건 탄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탄닌'은 뱀, 용, 바다 괴물 이런 의미로 쓰이는 단어죠. 창세기 1장 21절에 보면요,
(창 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창세를 하시던 그 장면이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이렇게 창조하세요. 이게 큰 바다 짐승, 이게 '탄닌'이란 말이죠.
예, 바다라는 것, 바다는 아랫물이죠, 위엣 물이 하늘이고 아랫물을 바다라고 한다고 했단 말이에요. 바다, 아랫물은 율법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율법 가운데에서 뛰어노는 바다 짐승이 우리를 가리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 가운데서 뛰어 논다라는 거는 우리가 율법으로 가득하다라고 하는 거고, 그리고 세상 자체가 또 율법이기도 하죠. 그러한 우리가 악어고 뱀이고 용이다라고 하는 거죠. 율법의 큰 짐승이 되는 거죠.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율법의 큰 짐승이니까 물을 휘저어요, 발로. '달라흐' '혼탁하게 하다, 흙탕물이 되게 하다' 이런 뜻이죠. 그리고 '그 강을 더럽혀요', '라파스' 밟아서 더럽혀요. 물은 말씀이란 말이죠, 근데 그걸 섞인 말씀으로 만드는 거죠. 혼탁하게 더러운 말씀, 율법이 되게 한다라고 하는 거죠. 요한계시록 12장 7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계 12:7)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세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하늘에 전쟁이 있다'라고 하는데 이게 내 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은 전부 내 안 이야기라는 걸 놓치면 안 되죠. 하늘에 전쟁이 있다라고 하는 거는 내 안에서 전쟁이 있는데, 내가 하늘이 되기 위해서 벌어지는 그러한 영적 전쟁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라고 하는 게 하늘에 전쟁이 있다라는 의미인 거예요.
전쟁은 히브리어로 '밀하마'라고 한다고 했죠, 그리고 밀하마의 의미는 말씀의 전쟁이라고 했죠. 양식의 전쟁, 말씀의 전쟁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나를 죽여서 살리시는 십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보느냐 아니면 보이는 대로 보면서 이 땅에 나를 살찌우기 위한 말씀으로 보느냐, 항상 우리는 그 갈림에 있잖아요. 그동안에는 대부분 내 뜻대로 봤잖아요, 두 마음으로 율법으로 봤죠.
선악의 두 마음으로 보는 거 그게 내가 왕 된 상태고 그 상태로 우리가 모든 것들을 보아왔는데, 근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침노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 있게끔 내 안에서 나를 죽여가 주시는 거죠. 그게 말씀의 전쟁이고 하늘에 전쟁이 있다라고 하는 요한계시록의 의미란 말이에요. 무슨 하늘에서 용이 나오고 막 사탄이 날아다니고 천사가 싸우고 이거는 영화 속 장면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성경은 전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세', 미가엘은 '하나님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이에요. '미가'가 '누구인가'잖아요, '엘'은 하나님이고. 그러니까 진리를 뜻하는 거예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엘'. 그리고 그의 사자들 '앙앙겔로스' '사자, 천사'인데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는 진리의 말씀인 거죠.
'그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세',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운다라고 하죠. 용이 '드라콘'인데, 이게 용이고 바다 괴물이잖아요. 바다 괴물 '탄닌'이란 말이에요. 드라콘이 70인역에서 탄닌의 역어로 주로 쓰여요. 그리고 용이 율법의 큰 자인 우리, 우리를 가리키는 그러한 존재란 말이죠. 무슨 사탄의 대장 뭐 이런 게 아니라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탄닌이란 말이에요, 바다괴물. 그거를 지금 드라콘이라고 하고 또 드라콘은 용이니까, 또 우리가 생각하는 그 용, 있지도 않은 그 용을 우리가 상상으로 막 그려놨었잖아요. 그게 이 하나님의 사자와 싸운다라고 막 머릿속으로 그린 거죠.
물론 영화에서도 이제 그런 것들이 많이 나오지만,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미가엘과 용의 전쟁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과 나의 전쟁이에요. 내 안의 율법과 진리의 전쟁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은 전부 우리 안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는 걸 놓치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거죠.
'이기지 못해서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늘이 되어야 하잖아요. 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잖아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하늘이 되어야 할 나와 땅에 머물고 있는 나를 창조했단 말이에요. 전부 나란 말이에요 천지가. 그 안에서 용이 쫓겨나는 거예요, 율법이 쫓겨나는 거. 이거는 당연한 거죠, 이게 하나님이 나를 이겨주시는 일인 거죠.
'큰 용이 내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율법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옛뱀, 뱀', 율법이잖아요. '마귀' 마찬가지, '사탄, 대적자' 마찬가지. '온 천하를 꾀는 자다', 나잖아요. 나를 완전히 미혹시키던 자다라고 하는 거예요. 천하는 나란 말이에요, 땅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하나님이 이기시는 그런 전쟁이라는 거죠.
우리가 용이란 말이에요. 용을 이기려면 어떻게 한대요? 용을 이기려면 두 마리를 붙여놓으면 이길 수 있답니다, 용용. 그래서 둘씩 짝 지어놓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가 용이잖아요. 죽으라고 제발 좀 죽으라고 둘이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싸우잖아요. 창세기 32장 23절부터 합독하겠습니다.
(창 32:23-25)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미가엘과 용이 싸우는 거예요. 지금 우리 이야기란 말이에요. 야곱이 하나님과 싸우잖아요. 우리가 우리 안의 그 율법이,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셨는데 진리가 내 안에 오셨는데 싸우고 있단 말이에요. 그걸 이제 교부재로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에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바드'라고 해요, '홀로, 분리'. 홀로, 다 떠나보내고 홀로 되는 걸 '바드'라고 하는데요.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대요. '이쉬'라고 해요, 이쉬는 남편이고 신랑이시죠, 말씀이 육신되신 주님을 가리키는 그런 말이에요.
'날이 새도록', '샤하르' 새벽이에요. 새벽이 '알라' '올라올 때까지'라고 해요, 새벽이. 그때까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해요. 이게 내용이 반전이 있어요. 제가 처음에 하나님과 용의 싸움이라고 했는데 그 양상을 이제 일차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속의 내용은 이제 좀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져요. 야곱을 이기지 못하죠? 그가 왜 이기지 못할까요? 왜 그가 야곱을 이기지 못할까요?
야곱이 아까 홀로 남았다고 했잖아요. 홀로 남은 게 '바드'라고요, '분리, 홀로'. 이게 파자하면 '베트'와 '달렛'이죠. '베트' 성전, '달렛' 구별된다라는 거에요. 성전으로 구별되는 게 분리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 떠나보내는 거죠.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고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했다'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다 떠나보냈어요, 그래서 가족들 소유 이런 거를 '아바르' 건너가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 이거 전부 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스토리상으로는 에서가 무서워서 먼저 건너가게 한 거지만, 성경은 그 일을 들어서 진리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전토를 건너가게 했다는 건 자기가 그것들을 떠나보냄으로써 건너간 자가 됐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 '이쉬',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주님이신데, 야곱이 밤새 싸웠잖아요. 그래서 창세기 32장 30절에 뭐라고 하냐면,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해요', 브니엘. 여기 브니엘이 파님이란 말하고 에이란 말이 합쳐진 거예요.
파님이 얼굴이잖아요, 겉으로 보는 거. 그 하나님의 얼굴이 되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얼굴을 봤는데 내가 그래도 살았어 지금 그 얘기처럼 보이잖아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만났는데 내가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았어. 이거는 이제 굉장히 이제 은혜를 많이 받은 그런 상황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하나님의 파님, 파님이라는 건 뭐예요? 껍데기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파님을 보았다는 거예요, 파님을. 파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브니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라고 하는데, 이 생명이 ‘네페쉬’에요. 이거는 이제 죽어야 할 육적 목숨이죠, ‘네 페쉬’. 그리고 보존되었다는 ‘나찰’이에요, ‘벗겨졌다, 빼앗겼다’라고 하는 거예요. 보존됐다가 아니라 벗겨졌다, 빼앗겼다. 그래서 이기지 못했다라는 의미가 그러한 내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되는, 야곱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이를 들어서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어긋났더라’. 이게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인 거죠. 허벅지 관절 이게 ‘야레크’라고 하고, 이 야레크라는 게 생명이 나오는 구실을 의미한단 말이에요. 그걸 이제 몸이라고 하고 거기서 또 자손이 나온다 막 이렇게도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성경에서. 그러니까 이게 지금 ‘생명이 나오는 곳을 죽였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주님이 죽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환도뼈를 위골시킴으로써 우리 안에 진리를 심어주는 거예요. 그걸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갈 6:17)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스티그마’라고 하잖아요. 그 ‘흔적’을 우리가 갖는 거란 말이에요, 가짐으로써 이긴 자가 되는 거죠.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는데, 이게 내가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니까, 예수를 만났고 내가 흔적을 내가 가졌으니까 ‘이제 나 건들지 마’, 이런 말처럼 들리잖아요. 이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라는 거는 ‘코포스’라고 해요, 코포스를 하지 말라. 이거는 이제 수고 고통이잖아요. 율법적인 수고를 하게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본문 12절로 가서요,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라고 해요.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찢고라는 말이 ‘타라프’라고 해요. 그리고 ‘먹이’를 ‘테레프’라고 해요, 찢은 것이죠. ‘테레프’, 먹이는 먹이인데 찢은 먹이가 테레프가 되는 거예요.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다’라고 하죠. 그러니까 찢은 것으로 구멍을 채웠다라고 하는데, 여기 찢은 것은 ‘테레파’라고 해요, 테레파. ‘찢긴 고기, 찢겨진 짐승’. 이 찢겨진 짐승이 ‘테레프’ 양식이 되는 거예요, ‘먹이, 양식’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 볼게요. 출애굽기 22장 10절부터 합독하시겠습니다.
(출 22:10-13) 10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11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12 만일 자기에게서 도둑 맞았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13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찍힌다’ 이게 ‘타라프’죠. 이 타라프라는 단어가 주로 사자가 먹이를 잡아서 죽일 때 쓰인 단어예요. ‘사자가 죽인다’라고 한다라는 건, 사자는 지난 시간에 율법이라고 했죠. 율법으로 오셔서 우리를 죽이는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지금, 이후 출애굽기 구절에서는 이웃 간에 가축을 맡겼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분쟁을 해결하는 그런 규례처럼 겉으로 보면 보이죠. 주석을 보면 ‘가축을 맡은 자가 자기가 맡은 가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도둑을 맡거나 이러면 가축을 맡은 자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배상을 해야 된다, 이런 규례가 있었단 말이죠.
근데 이걸 가지고 교훈을 어떤 식으로 삼았냐면, ‘주의 양을 기르는 목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나중에 심판 날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다’, 이런 식으로 어떤 교훈을 삼기도 했었어요.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말씀이긴 한데, 성경은 전부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는 거면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죠. 예 그러한 원칙들을 놓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전부 구원의 복음,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은혜를 가르쳐주고 있다면 그 은혜를 받아야 되는 거는 나잖아요. 하나님은 전부 나에게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천지 간에 나하고 하나님만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건 항상 나예요,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도 나고. 그래서 성경은 전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되는 거란 말이죠.
10절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맡겼다’예요. 사람이 ‘이쉬’예요, 역시 이쉬, 주님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이라고 하는데, 이게 나귀나 소나 양 그리고 ‘콜 베헤마’라고 해요. ‘콜’ 모든 짐승. 그러니까 이거나 이거나 이거나 혹은 다른 짐승 이런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나귀 소 양이 전부예요. 그리고 모든 짐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뭔 얘기냐면 성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성도를 가리키는데 성도를 나귀나 소나 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모든 짐승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언약을 받았잖아요. 근데 언약을 받았는데 진리를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걸 짐승이라고 한단 말이죠, 그러한 상태인 거죠 우리가.
‘이웃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그러면 이제 여호와께 맹세하고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렇게 말씀하는 것처럼 보이죠. ‘이웃에게’ 이웃은 ‘레아’예요. 레아도 주님을 가리키는 그런 단어죠. ‘레아’, ‘풀을 뜯기고 먹이를 주고 친구가 되는’ 그러한 존재, 친구라고도 하고 이웃이라고도 하는데, 그에게 맡겨요. ’맡긴다’라는 말은 ‘샤마르’라고 해요, ‘간직하다’라고 해요, ‘주었다’라고 합니다. ‘나탄’ ‘주었다, 맡겨 지키겠다’가 아니라 ‘지키겠다’는 말이 오히려 ‘샤마르’의 의미죠, 샤마르가 ‘지키다 간직하다’니까. 그러니까 샤마르에 레 전치사가 있어요, 그래서 부정사로 쓰는 거예요, 지키도록 ‘나탄’ 주었다’.
주었는데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다’라고 했죠. 죽거나는 ‘무트’ 진리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이죠. 그리고 상하거나 ‘샤바르’, ‘깨지다, 부수다, 깨뜨려 산산조각 내다’. 이게 우리를 부수어 주시는 거죠, 우리를 죽이고 부수는 거예요. 우리 안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끌려간다’, ‘샤바’라고 해요 ‘포로로 잡는다’. 이것도 ‘포로’로 니팔형이라서 ‘잡힌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짐승 이야기잖아요, 짐승인 내가 ‘무트’ 죽거나 ‘샤바르’ 완전히 박살이 나고 이게 옛 성전이 무너지는 거죠. 그리고 끌려간다 ‘샤바’ 잡혀간다는 거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잖아요. 우리 안의 그 탐심, 죄가 율법에 사로잡혀가는 거란 말이에요. 포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 이야기란 말이죠. 이게 언약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칠십, 칠십년에 언약의 완성으로 돌아오는 거죠.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이라고요. ‘아인라’라고 해요. 분사형이라서 ‘로에’라고 하는데, ‘본 사람이 없다’라고 해요. 왜 본 사람이 없을까요?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는데 본 사람이 없다고요. 왜 그럴까요? 아까 그 짐승을 성도라고 했죠? 성도예요. 그리고 우리 안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언약을 받았는데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짐승이라고 했죠.
근데 그 짐승이 만약에 진리를 깨달으면, 죽고 상하고 끌려가서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돼요? 진리를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짐승이 아니죠, 짐승이 아닌 게 되잖아요, 진리를 깨닫지 못할 때 짐승이니까. 진리를 깨달았단 말이에요. 죽고 상하고 끌려감으로써 진리를 깨달으면, 그러면 짐승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죠. 그래서 본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인’ ‘없다’라는 거죠, 결코 없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게 길게 번역했는데, ‘아인’이란 말이에요, ‘없음이 됐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없음이 되니까 짐승은 더 이상 없는 상태, 이게 없음이 되는 거예요, 아인. 에녹처럼 없음이 되는 거예요. 짐승이 아닌 상태, 그래서 ‘배상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거죠.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언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아니할지니라’ 짐승이 찢겼다는 말이에요, 짐승은 진리를 모르는 우리에요.
진리는 십자가라고 했죠. 성도가 진리를 깨달으면, 자기 부인의 십자가 죽음을 죽게 된단 말이죠. 자기 부인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거는 자기가 두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된 거죠, 이걸 십자가 죽음이라고 해요. 굉장히 거창하게 죽음이라고 하지만 두 마음으로, 선악의 판단을 하지 않는 거, 우리는 내가 왕 노릇할 때, 애굽의 왕, 바로일 때 계속 판단한단 말이에요.
내가 왕이어야 돼요, 그래서 계속 좋고, 나쁘고, 깨끗하고, 더럽고, 계속 내가 기준이 돼서 모든 걸 판단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생겨나죠, 좋은 것도 있지만 같은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걸 하지 않으면 기분 나쁘겠다는 거니까, 좋지 않은 거에 대해서 계속 속상해하고, 기분 나빠하고, 화내고, 비판하고, 이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화내는 것 자체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거라고 했죠.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을 모르는 상태가 화내는 상태란 말이에요. 그래서 화를 내기도 하고, 그 사랑을 모를 때 화를 낸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두 마음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거 이게 전부 율법이고, 이 율법의 상태가 짐승이라고 하는 거고, 그래서 그 짐승은 어떻게 돼야 되겠어요? 죽어야 되는 거죠. 그걸 찢긴다고 하는 거예요. 예, 찢겨서 죽는다라고, ‘타라프,타라프’라고 하는 거예요 ‘만일 찍혔으면’이라고 하는데, 이게 ‘타라프 타라프’ 타라프가 두 번 반복돼요. 무트 타무트처럼 정녕 찢겨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트타무트, 정녕 죽어야 된다라고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짐승을 찢고 찢어요. ‘타라프’ 하는 거는 누구라고 했어요? 사자라고 했죠, 사자가 주로 이런 식으로 찢는다고 했죠, 그렇게 무트 타무트의 죽음을 죽게 하는 게 바로 사자인 거고, 이렇게 찢어지는 거는 육의 찢어짐인 거고, 율법의 죽음인 거예요. 나의 율법의 죽음, 두 마음의 죽음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거죠. 그걸 ‘사자가 이루어준다’라고 하는 거예요.
11절에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라는 말 있죠. 이게 두 글자예요,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라고 필기 돼 있는데 ‘바인 셰나임’이랍니다, 바인 셰나임. ‘바인’이 ‘~사이’예요, 그리고 셰나임, ‘셰나임’이 ‘둘’이에요. 그러니까 둘 사이에요, 둘 사이. 둘이란 말이에요, 둘은 짝이라고 했죠, 짝은, 짝은 항상,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스도란 말이에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뭐가 있어요? 휘장이 있죠, 성소와 지성소, 예수와 그리스도, 같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 사이에서 휘장이 찢어지죠, 휘장은 그의 육체라고 했잖아요. 주님이, 하늘의 존재가 땅에 오셨단 말이에요, 가운데 계신 분이에요. 그 ‘사이에’, ‘바인’에 계신 분이란 말이에요. 그 몸이 말씀이 육신 되어서 오셨는데, 그 몸이 찢어진단 말이에요. 주님의 육체, 보이는 말씀으로 오신 육신이고, 우리가 보는 대로 보는 말씀인 거예요.
주님의 몸을 비롯한 모든 육체, 우리 안의 모든 율법은 이런 식으로 찢어진단 말이에요. 그 둘 사이에서, 둘 사이에서 반드시 찢기고, 살해돼야 된다, 이걸 휘장이 보여주는 거란 말이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라고 하죠. 이게 ‘셰바 예호아’다라고 하는거예요, 셰바 예호와, ‘셰바’가 ‘일곱’이에요.
근데 일곱인데, 이게 ‘맹세, 언약’이라는 거죠. ‘브엘 셰바’이러면은 ‘맹세의 우물’이라고 했잖아요. 일곱 개의 우물이 아니라, ‘맹세’의 의미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찢어지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찢어짐이 우리의 찢어짐과 같은 거란 말이에요. 몸은 다 이렇게 찢어져야 된다. 우리 안에 율법은 다 죽어야 된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담겨 있는 말씀인 거고, 우리에 대한 구속의 말씀인 거죠. 본문 13절로 가서요,
13a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만군의 여호와’, ‘예호와 차바’라고 해요. 차바, ‘차바’가 ‘군대, 전쟁’ 그리고 ‘무리’ 이런 뜻이 있어요. 말라기 3장 10절 합독하시겠습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 ‘예호와 차바’, ‘차바’는 ‘전쟁’이고 ‘군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는 거는 ‘전쟁하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쟁하는 하나님은 나와 전쟁 아시죠, 내 안에서 ‘밀하마’ 그 ‘말씀의 전쟁’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분이 이르세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테레프예요, 양식이 ‘테레프’
(시 76:4)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라고해요
이 ‘약탈한’ 이게 ‘테레프’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성전에 들이라고 하는 양식 요 테레프는 약탈한 거, 말씀의 전쟁으로 ‘찢고 약탈한 양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양식은 뭐라는 거예요, 예, 나죠, 내가 양식이란 말이죠. ‘테레프’, 약탈한 ‘양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사자로 오신 주님께 타라프로 찢긴 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고 이게, 십자가에서 갈갈이 찢겨서 죽는 나, 그러면 갈갈이 찍히는 건 내 안에 율법이니까 율법이 찢겨나가고 진리만 남는 거예요, 이게 양식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만 남은 나, 그게 ‘하늘의 창고’, ‘베트 하 오차르’ 그 보물의 성전이죠.
즉, 내 안 , 내가 그 보물,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담기는 보물인데, 그 보물이 담기는 성전인데, 그러니까 내 안에 담기는 참된 양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죽음을 죽은 나’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죽음을 죽은 나를, 그걸 성전에 들여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죽어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죽으면 성전 된다라고 하는 거죠, 타라프 타라프. 정녕 찢겨서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면, 그 테레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참된 양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그 일을 위해서 일상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일상에서 열심히 찢기셔야 되는 거죠. 사자, 그 말씀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서 ,자기라는 율법이 찢기고 찢겨나가는 거예요. 일상에서 그 일을 겪으시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겪고 있는 일이 그 일이에요. 그렇게 찢고 찢어서 하나님 나라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쉬지 않으시고 열심히 찢고 계신 중이란 말이에요. 그 성전 짓는 일이 우리에게 찢는 일로 이렇게 감지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십자가 죽음 그게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내 안에서,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거죠.
(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 나란 말이에요, 나고, ‘만물’, ‘콜 차바’ ‘모든 군대’,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진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군대로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에요. 내가 죽고, 하나님과의 전쟁에 의해서 내가 완전히 죽는 거, 그러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군대가 되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온전히 다 이루어지는 일인 거죠. ‘칼라’, ‘완성하다, 끝내다, 마치다’ 이게 ‘테텔레스타이’잖아요,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우리와 전쟁하시고 우리를 십자가에서 다 찢어 죽이심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거죠.
13b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병거’, ‘레케브’죠, 병거는 ‘말씀’이라고 했죠. 병거를 ‘아샨’, ‘연기’ 속에서 불살라서 연기가 된다고 했는데 이게 아샨이라는 말 앞에 ‘베’ 전치사가 있어요, 연기 속에서 ‘바아르’, ‘불태운다’라고 하는, 히필형이죠. 불태워서 소멸되게 하겠다라고 하는 거죠. 병거는,
(슥 6:1,5) 1 내가 또 눈을 들어본 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산이더라
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여러 번 공부한 거죠. ‘병거’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나의 두 산, 구리산, 선악이라는 율법의 산이죠. 그 말씀이 율법으로 나오는 거죠. 근데 원래는 ‘하늘의 네 바람이다’, 넷, 성전을 이루는 ‘바람’, ‘루아흐’, ‘성령’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했잖아요. ‘레케브’는 ‘라카브’라는 단어에서 온 거예요. ‘타다, 올라타다’는 거예요. 내가 뭘 타고 가느냔 말이죠, 하늘의 성령, 진리, 그 말씀을 타고 있느냐, 아니면은 율법을 타고 있느냐, 뭘 타고 가고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한다’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의 그 율법을 완전히 불태워서 소멸시키겠다라고 하시는 거죠.
(출 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에 크게 진동하며 라고 해요.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도 ‘아샨’ 연기가 자욱하죠. 이게 ‘연기가 자욱하다’는 말이 동사인데 ‘연기를 내다, 격노하다’ 이런 뜻이었어요. 그러니까 연기를 내는 걸 화를 낸다, 이렇게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 의미로 같이 쓰는 거죠. 근데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의미이기도 해요. 나훔도, 우리 나훔을 공부하고 있는데 나훔도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이 화를 내셨잖아요.
(나 1:1-4)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라고 이렇게 소개를 하자마자 화를 내잖아요.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이러면서 계속 진노하고 꾸짖고 막 이러신단 말이에요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에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분노하고 진노하고 이렇게 연기를 내시는데 그 이유가 뭐겠어요? 예, 우리 안의 그 율법을 불태워버리시는 거죠. 우리 안의 죄, 악, 요거를. 그게 전부 율법이란 말이죠. 그래서
(시 37:20)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악인들이 멸망되면 의인은 살고, 이렇게 오해하기도 했지만, 악인은 전부 내 안의 율법이란 말이에요.
내 안의 그 율법, ‘라샤’, ‘악’이 ‘아바드’,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 ‘나’란 말이에요. 내 안의 율법이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서 사라진다’라고, ‘연기 속에서’ 이것도 아샨 앞에 ‘베’전 지사가 있습니다.
연기 속에서, 그리고 ‘기름같이 연기가 되어서 없어진다’라고 하는데, 연기 속에서 ‘칼라’,‘완성된다’라고 하는거예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시는 진노 속에서, 진노를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칼라, 완성된다, 테텔레스타이죠, 역시. 그 보배로운 어린 양이 연기 속 희생 제사로 타서 죽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육이 멸해지면서, 그러면서 다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십자가 복음이 다 이루어지는 거죠.
주님이 보이신 그 본, 그게 바로 이 십자가 죽음인 거고, 우리도 그 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죽는 거죠. 이걸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십자가 죽음을 죽으면 그게 곧 부활인 거란 말이에요, 다 이룬 거라니까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다 이루세요. 이 땅에 육을 입고 온 자는 이 육을 멸하며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멸하면 그러면 부활이란 말이에요, 그게 부활하신 후에 테텔레스타이를 말씀하신 게 아니란 말이에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테텔레스타이를 말씀하신 거예요. 십자가의 죽음이 완성인 거예요, 그것으로. 우리 안에 그 율법, 율법이 완전히 멸해지고, 십자가에서 멸해지고 그것으로 완성이다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은 굉장히 무시무시한 심판의 말씀 같지만 알고 보면은 굉장히 은혜로운 구원의 말씀인 거죠.
네 젊은 사자들은 칼로 멸할 것이며
‘칼’이란 말이에요, 칼, ‘말씀’이란 말이죠. 말씀에 의해서 멸한다. ‘아칼’이에요 ‘먹는다’는 거예요. 칼이 먹는다는 거예요, 칼이 주어예요, 말씀이 먹는다는 거예요, 말씀이 율법을 먹는다. 진리가 율법을 먹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양식 삼으신 그 일인 거죠.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노략한 것’, ‘테레프’ 이게 ‘양식’이잖아요, 우리를 죽여서 만드는 양식, 그걸 ‘땅에서 끊는다’, ‘카라트’ 땅과 ‘끊어버리고’ 그러고 카라트, ‘언약을 맺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땅과 끊어버리는 게 언약을 맺는 일인 거죠.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파견자’, ‘말라크’예요, ‘사자, 사신’이에요, ‘말씀’인 거죠. 이거는 ‘용의 사자’인 거죠,‘네 파견자’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아니라 용의 사자인 거죠. 그러니까 율법의 말씀인 거죠, 율법인 거죠. ‘네 파견자의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는다’, ‘소리’, ‘콜’이에요, 말씀이 아니죠, 소리. 그러니까 진리가 온전하게 들리지 않는 걸, 콜이라고 한다고 했잖아요. 소리가, 말씀이 아닌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앗수르의 사자들이, 사신들이, 사극을 보면 강대국 사신이 약소국에 가 갖고 막 겁박하죠, 약소국의 왕을. 그것처럼 그런 식으로 앗수르의 사신들이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겁박하고, 그리고 조공을 바치게 하고 이랬는데, 그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된다라고 하는 그러한 표면적인 말씀이지만, 네 파견자는, 용의 사자, 율법 이야기하는 거고 그 소리가, 진리의 말씀이 아닌 ‘그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이거는 뭐예요? 심판하시는 굉장히 무시 무시한 말씀 같지만, 소리로 듣지 않고, 이제는 뭐예요? 진리로 듣게 하겠다라고 하시는 그러한 말씀인 거예요. 그 소리 듣지 않고, 율법의 소리 듣지 않고, 진리 들리게 하겠다라고 하는 은혜의 말씀인 거죠.
그러니까 계속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하시고 진노하시고 이러한 그 말씀을 겉으로 보면은 놀라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그 내용을 알고 나면은 다 구원의 복음이고, 은혜가 넘치는 사랑의 말씀이라는 걸 계속 확인하는 거죠. 그 다시,‘다시는’ 이란 말은 ‘오드’라고 해요, 오드는 ‘연속, 계속’의 의미인데 이게 ‘영단번’의 의미예요.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게 전부 ‘오드’예요, 다시는, 다시, ‘영단번’의 의미란 말이죠.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를 더하지 않는’ 아담이죠. ‘이는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는 아버지시죠. 그래서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대요. 그래서 다시는 멸하지 않는다, ‘나카’, 영 단번의 ‘죽음’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거죠. 십자가의 죽음을 죽일 때 나카라고 하잖아요. 그 이유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래요. 어려서부터 ‘나우르’라고해요, 나우르, ‘젊음, 청년기, 어린 시절’ 그런 시절이 다 있으셨죠? 돌아보면 어때요? 굉장히 아름다운 추억 같기도 한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세요? ‘악하다’라고 해요, ‘라’, ‘악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름답게 기억했던 것들이 어떻게 보면은 오해된 것들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아시는 거죠, 그래서 어려서부터 악하다. 어린애일수록 귀여운 것 같은데 그걸 성경은 악하다고 한단 말이에요.
‘나우르’ 그게 어디서 왔냐면 ‘나아르’에서 왔어요. ‘나아르’가 ‘으르렁거리다’, 으르렁거리는 게 젊은 시절이라는 거. 우리는 과거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용모도 뛰어나고 그런 시절이 젊은 시절인데, 그때는 전부 내 탐심으로 살았잖아요,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이것만 따지고 안 들면 질풍노도로 달려 나가고 그랬었잖아요, 그게 ‘나아르’, ‘으르렁거리는’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렘 51: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같이 소리 지르며 새끼 사자같이 [으르렁거리며]
으르렁거려요, 그때 쓰는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일이 뭐예요? 원망, 불평, 으르렁거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살아요, 40년 광야를.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 역시 40년 광야를 살고 있죠. 이스라엘이 한 일이 원망, 불평이고 으르렁이라면, 마찬가지죠 우리도.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는 거예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죠. 그 불만스럽고, 뭔가 기분 좋지 못하고, 또 왠지 온전한 평강에 이르지 못한 것 같고, 뭔가 가야 할 어떤 다른 상황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고, 계속 이런 식으로 우리가 뭔가 지금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많단 말이에요. 요게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으르렁거리는 일이에요.
하나님은 아버지잖아요, 전지전능하시고 좋으신 아버지,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처한 자리, 지금 처한 상황,
거기에 나를 지금 놓아두었다는 거는, 그건 바꿔서 이야기하면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니까 가장 좋은 자리에 두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으르렁거리는데 하나님은 계속 인도하고 계신 거예요.
으르렁 소리를 들으면서 그 불평 불만을 들으시면서, 가장 좋은 자리로 계속 인도하고 계시고, 그리고 계속, 가장 좋은 걸로 주고 계신 거란 말이죠. 그걸 성도는 이해하는 거예요, 그걸 이해하지 못할 때 ‘으르렁거린다’, ‘나아르’ 라고 하고, 그걸 ‘나우르’라고 한단 말이에요, ‘청년기’다 ‘어린 시절’이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으르렁거리고 있으면은 그거는 나우르에요. 장로가 돼야 되는데 장로가 아니라 아직 어린 나우르인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장로가 되면 그는 죽었잖아요, 십자가에서 죽은 자잖아요. 그래서 잠잠한 거예요. 불평 불만이 없어지는 거고, 다툼이 없어지는 거고, 용서, 이해, 사랑,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가만히 있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잠잠히 새기면서 가만히 있게 되는 거예요. 그 어리다라는 거는 불평 불만이 있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어서 큰 소리를 내고 다투고, 이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상태란 말이에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한 상태는 다 거치는 거예요. 그게 뭔지를 알려면 그걸 또 해봐야죠. 그래서 이게 평강에 이르지 못한 상태라는 걸 자꾸 자꾸 깨달아 가는 거예요. 그리고 평강에 이르지 못한 게 어떤 건지를 또 아는 거예요, 성도는.
평강, 안식이 하나님 나라라면, 평강에 이르지 못한 상태는 뭐라는 거예요? 내 나라잖아요, 천국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지옥을 살아보라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 육에다가 가둬두신 뜻이라니까요.
육에 가둬서 보내셨잖아요, 그거는 천국 아닌 상태를 살아보라는 거예요, 느껴보라는 거예요, 뭔지 알라는 거예요, 그래서 영을 소망하라는 거예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자 되어가는 거란 말이죠, 성도는. 이 육을 입혀서 이 율법 속에 가두어서 보내신 뜻을 이해하는 거란 말이죠, 성도는. 그렇게 성도는 십자가를 소망하는 자가 되는 거에요, 죽기를 원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의 죽음을 죽기를 소망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 일이 속히 일어나기를 원해서 ‘어서 오시 옵소서’라는 그런 탄식을 하는 자인 거예요. 계시록 5장 5절 합독하시겠습니다.
(계 5:5) 장로 중에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신 주님이 이기셨어요. 주님은 ‘테텔레스타이’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주셨죠. 그게 승리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이 승리인 거예요, 결국은. 예,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걸로 승리하는 거예요, 그 승리를 전가받아서 주님이 우리 안에서 거져주신 그 승리를 우리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주님이 사자가 되어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를 찢어버림으로써 다 이루어주시는 거죠. ‘다윗의 뿌리’라고 하는데, 이게 ‘리자’라고 해요 ‘뿌리’, 리자.
(왕하 19: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뿌리를 내리고’ 이게 ‘셰레쉬’라고 해요, ‘뿌리’ 이 뿌리가 땅 속으로, 땅의 감옥, 지옥까지 내려와서 그곳에서 괴로워하고 으르렁거리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거죠. 그래서 말씀을 주시니까 ‘위로’, ‘마알’, ‘위로, 하늘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죠. ‘열매 맺는다’, ‘아사페리’라고 해요, 아사페리, ‘열매로 일한다, 열매를 만든다’라고 하는 거죠.
(창 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라고 해요.
‘풀과 씨 맺는 채소’라고 하는데 이게 ‘데쉐 에세브’라고 해요, 이게 접속사가 없어요. 그래서 풀과 채소가 아니고 ‘채소 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붙어 있어요, 명사, 명사로. 그래서 ‘씨 맺는 채소 풀’, 풀과 씨 맺는 채소가 아니라, 씨 맺는 채소 풀이라고 하는 거예요. 풀은 우리 육체잖아요, 풀은 열매 맺을 수 없는 거, 씨를 가질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풀이에요. 그러니까 태초의 ‘혼돈’과 ‘공허’란 말이에요, ‘토후’와 ‘보후’,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의 상태, 고 상태에서 그러한 땅인 우리 안에 씨 맺는 채소 풀을 싹트게 하겠다라는 거예요, 씨를 주어서. 원래는 능력이 없는데, 씨의 능력으로 우리가 나올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 ‘열매 맺는 나무’, 나무도 ‘에츠페리’에요, 이것도 명사, 명사예요. 그러니까 ‘씨 맺는 채소 풀’과 ‘씨 있는 열매 맺는 열매 나무로 나오게 된다’라고 하는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보면은 풀과 씨 있는 채소와 뭐 이런 말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한글 성경으로 보면은 풀은 씨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죠. 그렇지만은 원문으로 보면은 전부 씨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들어온 자는 다 씨를 받는 거예요, 씨는 그리스도. 모두가 씨를 받게 되고 그리고, 열매 맺는 열매 나무로 나오게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 씨, 씨가 그리스도고 진리의 말씀이죠. 그게 또 빛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창조의 첫날에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빛, 그러니까 빛이 있으라고 하는 그 말씀을 받은 자는 다 씨 맺는 자가 되는 거예요. 씨를 갖고 씨 맺는 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자가 빛을 받은 자고, 씨 있는 자고, 해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는 거죠. ‘에츠페리 아사페리’라고 하는데 ‘열매를 만드는 열매 나무’, 요게 ‘십자가’인 거죠, 이게 생명나무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열매 만드는 열매 나무고, 생명을 맺는,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인 거란 말이죠.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이 십자가에서, 유다 지파 사자로 오신 주님이 박히는 그 십자가에서 그 나무, 그 생명나무에서, 자기가 먼저 찢기면서 다 이루어 주시는 거죠. 그러면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이렇게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떼시리라’, ‘일곱’, ‘셰바’죠. 그 언약이 다 이루어지는 거죠. 성도는 그 은혜 알고 찬송하는 자인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셔서 우리의 두 마음, 우리 안에 모든 율법을 찢어주시고 찢은 우리를 진리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성전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테텔레스타이로 완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일상을 공격하시고 찢어주시고 하늘로 열매 맺는 자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