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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곱 대접 심판보다 선행하는 본 섹션(12-14장)은 하나님과 악의 세력들 간의 영적 전쟁이란 주제를 넘겨받아 발전시킨다. 물론 이 주제는 앞선 섹션에서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3:10; 6:9-11; 7:14; 11:7-10). 12장은 아이를 잉태한 여인을 삼키려는 용의 비유를 사용하여 사탄이 메시아를 생산한 교회공동체를 멸하려고 공격하지만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되는지를 묘사한다면, 13장은 동일한 메시지를 다루되 이번에는 용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두 짐승이 교회공동체를 어떻게 박해하는지를 다룬다. 14장은 어린양의 메시아 전쟁에 참여하는 144,000명이 어떻게 두 짐승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게 되며(1-5절) 또한 (추수 이미지를 동원하여) 최후심판이 어떻게 짐승 숭배자들에게 임할 것인지를(6-20절)을 묘사한다.
여인과 용의 전쟁
본문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서 있더라.
주석
본 섹션의 환상 장면은, 많은 주석가들이 인정하듯이, 계시록 전체의 중심 주제를 서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용과 그의 추종자들과 전쟁을 하고,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144,000명이 두 짐승과 싸우는 것은 계시록의 핵심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요한은 고대근동이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신화적 전설들을 끌어다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배후에 놓인 요한 자신의 목적은 사뭇 복음적이고 구원사적이다. 하나님과 사탄 간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은 실제 인류역사 가운데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Osborne, 2002: 454). 또한 요한은 신화적 환상 장면들을 동원하여 복음을 제시한 것은 그리스-로마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요한의 환상 언어는 구약적 배경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Beale, 1999: 624f). 이것은 여인과 용의 환상 장면 묘사가 고대근동이 아니라 구약의 세계관에 뿌리를 박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1-2] 요한은 아이를 잉태한 한 여자 환상을 보았는데, 그녀는 해를 옷 입고 발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쓴 여자였다. 요한은 이 환상을 “하늘에 큰 이적”으로 부른다. 한글성경은 ‘이적’이란 술어를 썼지만 그것은 본래 ‘표적’ 또는 ‘징조’(sign)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에서 표적은 어떤 실체를 나타내거나 알리는 역할을 하거나, 또는 사건이나 대상이 지닌 보다 깊은 영적 의미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면, 예수의 기적 행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표적이다. “하늘에 큰 표적”이란 표현은 신적인 출처를 지녔으며 아주 중대한 내용을 지닌 징조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표적의 첫 내용은 여자가 “해를 옷 입고” 있었고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다”는 것이다. 해, 달, 별이 모두 빛을 발하는 발광체이다. 이것은 여자가 찬란한 영광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들 세 발광체는 구약에서 언약백성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다(창 37:9; 단 12:3; 사 60:19-20).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여자가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표현이다. 면류관은 구약에서 승리, 영광, 통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열두 별의 면류관”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것 같다. 특별히 ‘열두 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지칭하는 전형적 표현이다. 하지만 ‘여자’의 정확한 정체는 논란거리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필자는 1절의 여자가 전체 하나님백성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본다(Lohmeyer, 1926: 96; Osborne, 2002: 457). 요한은 환상 중에 아이를 잉태한 여자를 보았는데, 그녀는 해산의 진통으로 아파서 부르짖고 있었다. 강조점은 해산의 고통에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백성의 고난은 흔히 메시아와 새 시대가 오기위한 전조적 진통으로 묘사되곤 했다(사 26:17; 66:7-8; 믹 4:10)(Johnson, 1982: 514; Osborne, 2002: 457). 본문은 예수를 낳기 위해 마리아가 진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백성 공동체가 겪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묘사해준다.
[3] 요한은 하늘에서 “큰 붉은 용”에 관한 또 다른 표적을 보았다. 큰 붉은 용은 나중에 9절에서 사탄 또는 마귀로 동일시된다. 붉은 용이 여기서 소개되는 것은 사탄을 여자의 대적자로 제시하기 위함이다. ‘용’은 구약에서 이집트나 이집트의 왕 바로를 상징하는 언어로 사용되곤 했는데(사 51:9; 겔 29:3), 12장에 등장하는 출애굽 모티브와 잘 어울린다(Beale, 1999: 632). 사탄이 “큰 붉은 용”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했던 것처럼 사탄이 용과 같이 파괴적인 큰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용이 ‘붉은’ 색을 띤 것은 사탄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흘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 같다. 여기서 용은 몇 가지 방식으로 묘사된다. 첫째로, 용은 “머리가 일곱”을 지닌 괴물이다. 어떤 학자들은 일곱 개의 머리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내려고 애쓰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곱 머리의 은유는 시편 74:13에서 끌어온 것으로 사탄이 하나님의 주권을 흉내 내어 땅의 주권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음을 함축할 수 있다(Osborne, 2002: 460). 둘째로, 용은 “열 뿔”을 갖고 있다. 고대에는 ‘뿔’은 권세와 능력을 상징한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어떻게 조합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사탄이 온갖 사악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주권자 행세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유사한 묘사가 13장과 17장에서도 등장한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도 일곱 머리 열 뿔을 지녔고(13:1), 음녀가 올라탄 짐승도 일곱 머리 열 뿔을 지녔다. 이것은 사탄과 짐승이 사악한 힘과 권세를 공유하고 땅의 거주자들에게 주권자 행세를 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하지만 계시록 5:6에 따르면 어린 양만이 “일곱 뿔”을 지닌 진정한 정복자로 묘사된다. 셋째로, 용은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을 쓰고 있었다. ‘왕관’은 통치자가 쓰는 관을 지칭한다. 때문에 사탄이 그리스도께서 쓰신 면류관을(19:12) 모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Osborne, 2002: 460). 신약에서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요 12: 31; 14:30),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신”(고후 4:4)으로 불린다. 하지만 마귀는 거짓 임금에 불과하다. 그의 통치는 잠시일 뿐이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성되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4] 용이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는” 괴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니엘 8:10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 구절의 ‘별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나 천사 중에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를 놓고 해석을 달리한다. 다니엘서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다니엘 12:3의 경우에 의인들이 하늘의 별들로 비유되는 것으로 보아 ‘별들’은 천사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뜻할 수도 있다(마 13:43). 이것은 하나님백성이 하늘에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Beale, 1999: 635, 1:20 주석 참조). 그렇다면 용이 하늘의 별들을 땅에 던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천사들의 타락사건을 가리키기보다 하나님백성이 사탄에게 박해를 당하는 사건을 가리킨다(Moffatt, 1970: 424). 하나님백성은 천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탄이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그들을 대변하는 천사들에 대한 공격을 뜻할 수도 있다. 4절에 함축된 박해의 시점은 메시아의 탄생 이전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본 절에서 메시아 탄생 이전에 하나님백성이 불경건한 나라나 통치자들에게 당한 박해와 꼬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별들의 ‘삼분의 일’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백성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참 하나님백성은 궁극적으로 보호를 받겠지만 그들도 사탄의 공격을 면할 수는 없다.
본 절 후반부는 언약백성 공동체가 메시아를 낳으면 그를 없애버리기 위해 응시하는 용의 모습을 묘사한다. 용의 공격 대상은 여자 자신이 아니라 여자가 낳을 아이였다. 용이 아이를 공격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과, 메시아가 태어나면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길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의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면들을 갖고 있다. 아이가 출생하기도 전에 용이 그를 공격하려고 했고,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11:4의 이야기도 공관복음서의 서술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메시아의 탄생과 승천만 서술할 뿐 그가 죽게 된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용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헤롯이 세 살 이하 유아들을 학살한 사건을 생각나게 만들고(눅 4:28-30),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5절)는 말은 예수의 승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탄의 공격 시점은 메시아 탄생 이전부터 그의 사역이 끝나는 지점까지 전 기간을 포괄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Beale, 1999: 637). 사탄은 메시아 예수가 태어날 때 헤롯을 동원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고, 공생애 초기에 광야에 나가 금식할 때 그를 유혹하려고 했으며, 나사렛의 군중들을 동원하여 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십자가는 아이를 집어삼키려는 용의 시도들 가운데 최종적인 목표였다. 사탄이 아이를 잉태한 여자 앞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교회공동체와 메시아를 통해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항상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후대 교회에 보여준다(Johnson, 1982: 515).
[5] 본 절은 여자가 낳게 될 아이의 전 생애, 즉 그의 출생, 왕이 될 미래 운명, 승천 등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우선 아이의 신분은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통해 표현된다. 2절에 언급된 ‘아이’는 5절에서 ‘아들’ 그리고 ‘남자’로 동일시된다. 이것은 남자 아이로 태어난 메시아 예수의 성적 정체성을 나타내준다. 둘째로, 아이의 정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는 표현을 통해 함축된다. 이것은 시편 2:7-9의 표현을 암시한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세상의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장차 온 땅의 통치자로 등극할 것을 예언한다. 본 절에서 메시아를 ‘남자 아들’로 명시한 것은 시편 2편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이것은 계시록 2:26-28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인자 되신 예수는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트리는 것과 같이 할” 권세를 가진 다윗 계통의 왕적인 메시야이며, 그는 이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셨다.” 이 표현은 메시아 예수의 승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올려갔다’(h`rpa,sqh)는 동사는 ‘갑자기 채가다’를 뜻하는 강한 술어이다(BAGD, 109). 그렇다면 사탄이 예수를 ‘삼키려고’ 하자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하늘로 ‘채가셨다’는 뜻이 된다. 예수를 삼키려는 사탄의 시도는 그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좌절된 셈이다(Beale, 1999: 639). 주목할 것은 아이가 “하나님 앞으로” 올려간 것만 아니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왕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계시록 22:1을 보면 ‘보좌’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언급된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 앉아 다스릴 보좌는 하나님 자신의 보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은 이제 승천하신 예수의 것이 될 것이다.
[6] 메시아 아이가 하늘로 올려가자 용의 공격 표적은 이제 그를 낳은 여자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13절 참조).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 것은 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14절). 어떤 학자들은 여자의 광야 도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초기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이 펠라로 피신한 사건을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광야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광야’란 술어는 출애굽 모티브를 반영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과 인도를 체험했다. 그들에게 광야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간 지역으로 현실적으로 매우 메마르고 척박한 환경 때문에 살아가기가 힘든 장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일 믿음의 투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곳이기도 했다. 계시록에서도 광야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성도들이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인 ‘세상’을 상징하는 술어이다. 세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에 거칠고 힘든 장소이다. 그곳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영역이면서도 동시에 믿음의 투쟁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이필찬, 2006: 538). 6절하는 광야를 하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기 위해 준비된 장소로 묘사한다. 하나님이 광야를 준비한 목적은 교회공동체를 양육하기 위함이다. ‘양육하다’ 술어는 복수 3인칭 동사이다. 즉 ‘그들이’ 양육했다는 뜻인데, 그들은 누구인가? 성도들을 양육하는 주체는 물론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양육하기 때문에 양육의 주체에 천사들을 포함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이필찬, 2006: 539). 그리고 여자로 상징되는 교회공동체가 광야에서 보호와 양육을 받는 기간은 1260일이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문자적인 해석을 선호하여 그것이 7년 대환란기 중에 특히 환란이 심한 후삼년 반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계시록에서 1260일은 종말론적 상징성을 가진 기간으로 초림부터 재림까지 전체 교회시대를 상징한다. 이 기간은 성전 바깥뜰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때이고(11:1-2) 두 증인이 예언사역을 감당하는 때이기도 하다(11:3-13). 전후문맥으로 볼 때 이 기간은 메시아 탄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초림 때부터 시작되는 교회시대 전 기간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7] 7-12절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미가엘과 용의 전쟁 장면을 다룬다. 이들 구절은 여자가 왜 용의 공격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부분(7-9절)은 하늘에서 미가엘 진영과 용의 진영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용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이야기를 다루고, 둘째 부분(10-12절)은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승리의 찬양을 다룬다. 천상의 전쟁에서 미가엘이 용을 패배시킨 것은 얼핏 보기에 여자가 메시아 아이를 낳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미가엘이 용을 패배시킨 사건이 창조 때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Osborne, 2002: 470).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언급하는 10-12절이 용의 패배를 해설하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용의 패배와 축출이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 죽음, 부활과도 연관된다고 보기도 한다(Caird, 1966: 149f; Johnson, 1982: 516).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내가 하늘에서 번개처럼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 10:18)고 한 예수의 말씀도 창조 때 벌어진 사탄 패배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 절의 초점은 땅에서 성도들을 공격하는 사탄이 하늘에서 이미 패배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8-9] 본 절은 천상의 전쟁에서 미가엘이 승리한 결과로 용과 그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이야기를 다룬다. ‘땅’은 이제 패배한 용과 그 사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활동 영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지상의 상황이 어떤 것이든 간에 궁극적인 승리는 그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탄이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하겠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허망한 발악에 불과하다(12절).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려는 용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9절)로 불린다. 사탄을 ‘옛 뱀’으로 부른 것은 에덴동산에서 거짓말로 하와를 꼬였던 뱀을 생각나게 만든다(창 3:1,14). 용은 또한 ‘마귀’ 또는 ‘사탄’으로 불린다. 이 두 술어는 동격 표현이다. 히브리어의 ‘사탄’이 칠십인 경에서 ‘마귀’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마귀 또는 사탄의 본질은 “온 천하를 꾀는” 데 있다. 땅의 모든 거주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바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속이는 것이 마귀 사탄이 주로 하는 일이다(20:3). 마귀의 능력은 속임수에 있고 온 세상은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10-12] 본 단락은 천상에서 울린 찬양 내용을 다룬다. 시의 형태로 구성된 본 단락은 세 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7-9절)을 해석해준다. 첫째 행(10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권세와 함께 영광스럽게 도래한 사실을 노래하고, 둘째 행(11절)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그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용을 이겼다는 사실을 노래하며, 셋째 행(12절)은 성도들의 최종적 승리를 알리면서 용이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분노하여 그들에게 내려갔기 때문에 땅과 바다에 화가 임할 것을 말한다. 우선 첫째 행(10절)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노래한다. 그리스도께서 쟁취한 승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를 통해 나타났다. 이런 찬양의 내용은 11:15의 것과 유사하다. 다만 두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시점을 달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1:15은 일곱째 나팔을 분 후에 찬양이 등장하기 때문에 마지막 재림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면, 12:10은 문장 초엽에 ‘이제’(now)란 말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된 현재적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초림과 재림의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은 예수의 초림으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이필찬, 2006: 546f). 본 절에 언급된 ‘구원’은 신약에서 폭넓은 의미를 지닌 개념이지만, 근접문맥에서 그것은 악의 세력들을 쫓아내는 것과 연관된다(19:2).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난” 시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것의 실질적 성취는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만유를 다스릴 권세를 받으실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행 5:30-31). 10절상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 승천을 포괄적으로 함축한다. 그리스도의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사탄의 통치권은 도전을 받게 되었고 역사의 위기는 심화되었다(Johnson, 1982: 517). 사탄은 두 번의 패배를 당했다. 그는 하늘에서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땅으로 쫓겨났고(12:9),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12:10).
‘왜냐하면’(o[ti)이란 접속사는 한글성경에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10절하의 헬라어 본문에는 들어 있다. 그것은 10절하가 10절상의 내용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권을 넘겨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밤낮 참소하던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사탄이 하늘에 있을 때 주로 담당했던 역할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밤낮 “참소하는” 일이었다. 이 동사는 본래 ‘고발하다’(accuse)는 뜻을 가진 법정 술어이다. 사탄은 하늘법정에서 성도들의 죄를 고발하는 검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고, 하나님은 사탄의 고발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한 때 하늘법정에서 그의 활동을 허용하셨다. 하지만 성도들의 “고발자”로만 아니라 “온 천하를 꾀는”(9절) 자로 본색을 드러낸 사탄은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여 “하나님 앞에” 성도들의 변호자로 계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를 통해 만족되었고, 성도들을 향한 사탄의 고발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Johnson, 1982: 517).
[11] 찬양시의 두 번째 행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성도들은 본문에서 “우리 형제들”로 언급되는데, 그들은 밤낮 사탄의 집요한 참소를 당하던(10절)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이 사탄을 이긴 두 수단이 본 절에서 언급된다. 하나는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죽기까지 “증거의 말씀”을 붙든 자들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게 된 근거는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피로서 이룬 십자가 구속에 토대한다. 사탄에 대한 그들의 승리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5:5-6)의 승리 때문에 가능해졌다. 또한 사탄에 대한 그들의 승리는 그들이 죽기까지 붙들었던 ‘증거의 말씀’으로 인해 쟁취된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증거의 말씀”은 계시록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증거”(1: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1:9),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6:9),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20:4)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사실 “증거의 말씀”의 중심 내용은 “어린양의 피”,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룬 십자가 구속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었던 근거는 두 가지다. 그들은 어린양이 이룬 피의 구속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고, 또한 십자가 구속의 선포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증거의 말씀”을 죽기까지 굳게 붙잡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본 절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처해 있었던 상황을 반영해준다. 황제숭배가 강요되는 1세기 상황에서 어린양의 십자가 구속을 증언하고 굳게 붙들 때 그들은 불가피하게 죽음을 불사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이렇게 죽음을 무릅쓸 때만 사탄의 어떠한 참조와 공격에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12] ‘그러므로’(dia. tou/to)란 접속사는 ‘왜냐하면’을 뜻하기보다 ‘그래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12절은 11절의 진술에 대한 결과를 소개한다고 볼 수 있다(Osborne, 2002: 471). 사탄이 패배하여 하늘에서 쫓겨났고 그의 공격을 당하던 성도들이 승리한 결과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모든 천상적 존재들을 포함하겠지만 수사적인 초점은 성도들에게 있다. 이것은 그들의 참 신분이 하늘 장막에 있다는 사실을 함축해준다(Beale, 1999: 666). 그들이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이 지금 어린양의 피의 구속으로 인해 구원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이 사탄에 대한 승리를 즐거워하는 반면, 화는 땅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화가 선언되는 이유는 사탄이 더 이상 하늘에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제 온 힘을 다 기울여 땅의 거주자들을 꼬이고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사탄은 이미 하늘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사탄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크게 분내어” 지상의 성도들과 싸우려고 땅으로 내려갔다. 사탄의 ‘큰 분노’는 성도들을 향한 분노임이 분명하다(11,13-17절). 사탄은 하늘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고, 그의 분노는 결국 땅을 혼란에 빠뜨리고 성도들을 공격하는 데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사탄의 분노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았기” 때문에 더 작열하게 되었다. 이 표현은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사탄의 최종적 패배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Beale, 1999: 667). 사탄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파괴적인 일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13-14] 여자가 용을 피해 광야로 도망한 후에(6절) 용이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 이야기가 본 절에서 재개된다. 용이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에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깨닫고(7-12절), 용은 곧바로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13-17절). 한글성경에서 ‘박해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술어는 본래 ‘쫓다, 추적하다’를 뜻한다. 여자가 남자 아이를 낳고 용의 공격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자 용은 여자를 죽이려고 쫓기 시작한 것이다. 이점에서 13절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내용을 요약하는 역할을 한다.
14절은 6절의 내용을 좀 다르게 부연설명을 한다.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갔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19:4과 신명기 32:11- 12의 말씀을 반영한다. 이들 구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구원을, 어미 독수리가 두 날개로 새끼들을 업고 날아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 사건으로 비유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광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분이시다. 다만 두 본문들 간에 다른 점이 있다. 출애굽기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독수리의 날개로 업고 날아간 것처럼 비유하지만, 계시록 본문은 여자에게 독수리의 두 날개를 주어 스스로 날아가게 한 것처럼 비유한다. 본문의 출애굽 모티브 사용은 교회공동체의 구속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요한의 의도와 맞물려 있다. 광야에서 여자가 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기간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반, 1260일)이다. 앞의 주해에서 밝힌 것처럼 이것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교회시대를 지칭하는 종말론적 표현이다. 하나님백성이 살아가는 세상의 환경은 광야처럼 척박하여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을 경험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구약에서도 광야는 피난처로나 하나님이 돌보는 장소로 묘사된다. 여자가 “뱀의 낯을 피하여” 도망했다는 것은 교회가 마귀의 궤계와 속임수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을 말해주고(Osborne, 2002: 483), 그녀가 도망한 ‘광야’는 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표현된다. 이곳에서 여자는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tre,fetai). 이 동사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사건을 생각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마귀의 공격과 궤계로부터 보호하고 신령한 말씀의 만나로 그들을 먹이는 분이시다.
[15-16] 본 절은 여자를 공격하려는 용의 시도가 어떻게 좌절하게 되는지를 묘사한다. 뱀은 여자의 뒤에서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15절) 했다. 구약에서 큰 ‘강물’은 원수의 파괴행위를 뜻하기도 하고(시 32: 6; 69:1-2; 나 1:8)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을 뜻하기도 한다(시 18:4). 사탄은 적대 세력들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공격하거나 그들에게 재앙들을 임하게도 한다. 사탄이 이렇게 입에서 큰 강물을 토하여 여자를 죽이려고 하지만,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킨다”(16절). 계시록에서 ‘큰 강물’이나 ‘바다’는 악의 세력들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뱀이 입으로 토하는 ‘큰 강물’은 마귀의 궤계나 속임수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땅이 입을 벌려 뱀이 토한 강물을 삼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의 궤계와 속임수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출하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함축한다(Osborne, 2002: 484). 그리고 땅이 입을 벌려 삼켰다는 이미지 표현은 땅이 입을 벌려 고라를 삼킨 사건을 묘사하는 민수기 16:30,32 신명기 11:16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땅이 고라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처럼, 그것은 또한 온갖 궤계로 교회공동체를 공격하는 사탄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17] 용이 여자를 공격하는데 실패하자 그의 공격 표적은 이제 “여자의 남은 자손”을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있는” 자들로 묘사된다. 용이 교회공동체 전체를 없애버리고 하다가 실패하자 교회공동체에 속한 개별 신자들을 공격 표적으로 삼는다. 용의 ‘분노’는 두 번에 걸쳐 표현된다. 용은 하늘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내쫓긴 것에 분노했고(12절), 그는 또한 여자를 삼키려는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분노했다(17절). 12절의 분노는 땅의 거주자들을 향한 것인 반면, 17절의 분노는 “여자의 남은 자손” 즉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다.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여자의 씨(후손)의 남은 자들”이다. ‘여자의 씨’는 창세기 3:15의 표현을 반영하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고, ‘남은 자’란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개별 신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용이 여자를 향한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그녀의 남은 자손들을 공격한다. 어떤 학자들은 여자나 그녀의 남은 후손도 모두 교회공동체를 뜻하기 때문에 둘은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이필찬, 2006: 558). 하지만 17절 본문이 둘을 구태여 구분한 것은 교회가 지닌 천상적이며 지상적인 이중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하늘에 기원을 둔 교회는 난공불락의 무적인 반면(12:1), 지상교회의 개별 성도들은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Beale, 1999: 679).
그들의 성격은 두 가지로 묘사된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이것은 11절의 표현과 유사하다. 두 현재분사들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예수를 증언하는 일을 지속하는 지상교회의 견인을 강조해준다(Osborne, 2002: 48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수에 관한 신실한 증거는 교회공동체가 말세에 사탄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두 비결이다. 둘째로, 그들은 지금 여자의 남은 후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자들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과 싸워 이길 수는 없지만, 그는 그들을 대적하는 전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여자로 상징되는 천상교회는 사탄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무적 공동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녀의 남은 자손들로 상징되는 지상교회는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취약한 공동체이기도 하다(Johnson, 1982: 519). 그들이 용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 장면은 요한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본 13장의 장면과 연관된다. 용은 하늘에 뿌리를 둔 여자와 메시아를 죽이려고 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지상교회의 성도들에게 분노를 쏟으려고 한다. 용이 바닷가에 선 것은 지상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하는 도구로 쓰일 바다짐승을 불러내기 위해서다(Ladd, 1972: 175).
해설
본 장은 하나님의 진영과 사탄의 진영, 용과 여자, 용과 여인의 아들 또는 용과 그녀의 후손들 간의 전쟁에 대해 다룬다.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다. 하나님의 천사장인 미가엘과 사탄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사탄이 패배하여 그 사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밤낮 참소하던 천사였다. 성도들의 죄에 대한 사탄의 고발의 정당성은 하나님에 의해 인정을 받아 하늘법정에서 그의 활동은 용인을 받았으나 사탄이 미가엘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천사장과의 전쟁에서 패한 사탄은 그의 사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났다. 미가엘과 사탄 간에 벌어진 천상의 전쟁은 아마도 창조 때 벌어진 사건일 것이다. 용이 여인을 죽이려고 공격하는 사건은 천사장과 사탄 간에 벌어진 천상의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여자는 하늘에 기원을 둔 교회공동체를 상징한다. 찬란한 영광을 덧입은 이 여자는 메시아를 잉태하였는데, 사탄은 여자가 메시아를 낳으면 그를 삼키려고 기다렸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시편 2편의 예언대로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다윗 계통의 왕적인 메시아이다. 하지만 여자가 낳은 아들 메시아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오르셨고 이제 하나님에게서 우주적 통치권을 넘겨받게 되셨다.
메시아를 죽이려는 용의 계획이 무위로 끝나자 용은 이제 메시아를 낳은 여자, 즉 교회공동체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미 독수리가 새끼들을 날개로 업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처럼, 하나님은 교회공동체에게 두 날개를 주어 광야 즉 그가 예비한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1260일 동안 즉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교회시대 내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셨다. 광야는 매우 척박하고 메마른 장소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을 경험했던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교회공동체는 거칠고 힘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쉽지만 그럼에도 사탄의 온갖 궤계와 속임수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을 경험하기도 한다. 용은 메시아를 낳은 여자를 죽이려고 입에서 큰 강물을 토하여 떠내려가게 하고자 하지만,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이 토한 모든 강물을 삼켜버렸다. 구약에서 ‘큰 강물’은 원수들의 파괴나 큰 재난을 상징하는 비유적 언어이다. 용으로 상징되는 사탄은 큰 재난이나 원수들의 파괴공작을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땅이 입을 벌려 사탄의 모든 공격을 삼키게 함으로써 사탄의 궤계에 대한 심판을 행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했던 고라를 땅이 입을 벌려 삼킨 구약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땅이 입을 벌려 고라는 삼킨 것은 그를 징치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결국에 용은 여자를 죽이려고 공격하지만 이 공격도 무위로 끝나자 분노하여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을 공격 방향을 바꾼다. 여자나 여자 후손의 남은 자들이나 모두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표현이지만, 17절 본문이 둘을 구별한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 1절의 묘사에 따르면 여자는 하늘에 기원을 둔 교회공동체를 상징한다. 그녀는 사탄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천상적인 보편교회를 가리키는 반면, 여자 후손의 남은 자들은 광야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지상교회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회가 지닌 이중적 성격을 말해준다.
본 섹션은 사탄이 두 번에 걸쳐 패배한 존재로 묘사한다. 첫 번째 패배는 하늘전쟁에서 이었다. 하나님의 천사장인 미가엘과의 하늘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은 ‘분노하여’ 땅으로 내려왔다. 두 번째 패배는 사탄이 메시아를 낳은 여자 즉 교회공동체를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양육으로 인해 그의 공격이 또 무산되자 ‘분노하여’ 여자 후손의 남은 자들, 즉 지상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공격 표적을 또 바꾸게 된다. 용의 분노는 두 번에 걸친 패배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하늘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난 용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자와 그녀의 남은 후손들을 더욱 더 박해하지만 용의 모든 박해 공격은 다 수포로 돌아갈 운명을 지니고 있다. 사탄에 대한 여자의 승리는 하늘전쟁에서 천사장 이 승리한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고, 사탄에 대한 여자 후손의 남은 자들의 승리는 그들이 어린양의 십자가 구속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증거의 말씀’을 굳게 붙잡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이 두 사실은 그들이 어린양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토대요 수단이 된다. 결국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창조 때 하늘전쟁에서 이미 확보되었고 또한 그 승리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어린양 예수는 이제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만유를 다스리는 우주적 통치권자가 되셨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는 드디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 나타났다.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의 승리로 인해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찬양하며 즐거워할 것을 명령받는다. 사탄과 그 하수인들이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최후까지 발악하며 여자 후손의 남은 자들과 싸우겠지만, 최후승리는 이미 하나님에게 있고 그의 백성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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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시록은 얼핏 세상 정치나 역사에 관심이 많을 것 같지만 이야기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막간 이야기들 대다수는 교회 공동체에 주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백성에 지대한 관심이 많다는 뜻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