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머문 사실이 구원사에 주는 의의
사도행전 9:43; 레위기 11장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세 가지 사건 가운데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사건인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욥바에 사는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게 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욥바의 시몬
여러분, 오늘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가 욥바의 무두장이 집에서 여러 날 머물면서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욥바의 교회 성도들을 심방하고 또 함께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쳐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관심을 두고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이 시몬의 집은 사도행전 10:6에 의하면 해변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욥바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거기에서도 시몬의 집은 안쪽으로 있지 않고 해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옥상이 있어서 베드로는 그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행 10:9).
먼저 시몬은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머물렀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아니었다면 베드로가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동안 머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바의 성도의 집에서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몬의 직업은 무두장이입니다. 무두장이란 죽은 짐승의 가죽을 가지고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런 무두장이의 집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은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어디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무두장이 직업과 율법
여러분, 가죽은 어느 시대나 매우 유용한 생활용품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죽 제조업자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무두장이를 ‘갖바치’라고 했고,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했습니다. 갖바치와 백정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 사회에서는 이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사람이라고 했지, 사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세계에서는 무두장이라는 직업은 유대 종교와 관련되어 있어서 더 천하게 여겼습니다. 가죽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깨끗지 못한 사람들로 지목되어 사람들은 그들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을 죽여야 하고, 항상 피를 손에 묻혀야 하고, 죽은 짐승의 사체와 가까이했기 때문에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짐승의 사체를 가까이하고 만지는 것은 불결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죽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아주 불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들을 가까이하면 자신들도 불결하게 된다고 생각하여서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제한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집에 머문 사건과 구속사
그런데 주님의 사도인 베드로가 바로 그런 무두장이의 집에 들어가서 여러 날을 머물고 그 집안사람들과 함께 지낸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유대인들이 무두장이들을 가까이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문 것입니다. 여러 날을 머물렀으니까 얼굴을 맞대었을 것이고 함께 음식도 먹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베드로 사도의 이런 행위는 율법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행위로서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이 사실을 모르고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 사도는 무두장이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한 절밖에 되지 않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초대 교회가 유대 사회에서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이제 이방 세계로 나가느냐 나가지 못하느냐 하는 그 시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이고 그런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가면 무슨 사건이 나옵니까? 이방 세계의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고넬료입니다. 그래서 이제 9장을 넘어서 10장에 가보면, 이방 세계를 대표하는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9:43을 뛰어넘지 않으면 10장의 사건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 종교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도가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 집에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이 사실은 베드로 사도가 상징하는 초대 교회가 유대 종교적인 편견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종교적인 편견을 뛰어넘어 무두장이의 집에 들어가 머물렀다는 것은 초대 교회가 율법과 유대주의 문화를 극복하고 그것을 뛰어넘어서 더 높은 문화의 세계로 옮겨가는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표준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율법을 따라서 살아야 했습니다. 세속적인 삶인가 거룩한 삶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척도가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표준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이 우리 삶이 표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제사 제도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고 율법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율법은 그들의 구원과 그들의 삶의 규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단번에 완성하셨습니다(마 5:17-18; 히 9:28; 벧전 3:1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더는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믿고 할례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가르침은 거짓 복음이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율법의 예언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도 믿고 율법이 명령하고 있는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플러스 행위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하는 주장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베드로 사도 개인을 놓고 말하면, 베드로 사도에게 율법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교회가 그렇게 전통적인 정결 개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서 정결 문제에 관해 새롭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이런 인식의 전환은 시간을 두고 더 발전해 가야 합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사도 베드로는 율법과 관련하여 외식하는 일이 있었고,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듣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베드로 사도가 아직도 율법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놓고 볼 때 아직은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깨달음과 확신이 있었기에 여러 날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작게는 베드로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서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크게는 수백 년간의 유대주의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행위로서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수님은 율법의 예언을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셨고, 율법의 예언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죽음을 통해서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깨달음과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는 교회가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전진하여 갈 때 취하여야 할 자세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에서 해석하는 일이 단번에 다 갖추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은 분명히 율법에 관한 지식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위는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발전된 대단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초대 교회가 극복하여야 할 시대적 또는 역사적 과제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복음 안에서 율법에 대해 사도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하여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초기 1세기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씩 극복하여야 할 것들을 극복하여 나갔고, 뛰어넘어야 할 것들을 뛰어넘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아왔습니다. 사실 교회의 의식은 어느 한순간에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와 당시 사회의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뛰어넘으면서 서서히 변화되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짐승을 만지거나 옮기는 것은 부정하다는 행위입니다. 신명기 14:8에는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 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시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레 11장)라고 해서 죽은 짐승의 사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은 짐승의 사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14:21에서는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 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라고 해서 이방인이나 객에게는 부정한 짐승을 팔거나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먹는 것은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먹지 말라고 하고 객과 거류하는 사람들은 먹어도 좋다고 하십니다. 이율배반적인 행위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여 지키도록 하신 것은 계시의 발전과 성취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직은 연약한 구약 백성들에게 이런 율법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로서 정결 곧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짐승의 사체를 만진다고 더러워지고 죄가 됩니까?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항상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을 혐오하고 부정하게 생각합니다. 죽음을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간에게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고 영생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왜 들어왔습니까? 죄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죽음이고, 죽음은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죽은 짐승이라는 실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심으로서 구체적인 데서부터 거룩한 삶에 대하여 하나씩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큰 거룩 곧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섬겨야 하는가를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신명기 14:8과 21절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은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방인들에게는 줄 수도 있고 팔아서 그들이 먹는 것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언약 백성들에게는 안 되고 이방인들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즉 자기 백성들에게는 부정하니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부정하게 되어도 괜찮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은 매우 이기적인 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사실은 죽은 짐승의 사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사람들이 혐오하는 죽은 짐들의 실물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짐승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면 이방인들에게도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먹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규례를 통하여 거룩함이라는 큰 정신을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짐승을 만지거나 먹지 않는 그러한 작은 일에서부터 거룩한 삶을 사는 법을 배워서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데까지 나아가 실제 삶 속에서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죽은 짐승의 사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하므로 만지지 말라고 하신 율법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결(聖潔)은 율법에서 말하는 죽은 짐승을 만지거나 가까이하지 않는 그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배워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라는 더 크고 새로운 성결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 아래서 죄 사함을 받아 정결하게 되고, 정결이라는 거룩한 사상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규례에 대하여 어떠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완성하셨는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의 율법 규례를 잘 지키면 거룩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열심히 구약의 율법을 지키면 스스로 정결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짐승을 만지지 말며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그 조항에 따라 만지지 않고 먹지 않기만 하면,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죽은 짐승을 만지지 않았다. 나는 죽은 짐을 먹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정결하다, 나는 거룩하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대로 부정한 짐승을 만나지거나 먹지 않음으로써 거룩한 행위를 하고, 그렇게 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룩이라는 정신을 배워서 그 거룩한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 풍성히 알아가고, 그래서 모든 일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기에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짐승을 가까이하지 말고 먹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은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고 율법 조항만 지키려고 하면 머지않아서 형식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식주의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차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정작 자신들이 그토록 오매불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큰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준칙(準則)으로 삼아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나는 좌우지간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순수하고 훌륭한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형식주의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해서 신선하고 풍성하게 깨달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서 하나님에 대해 신선하고 풍성하게 깨달아가지 못하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도에 머물거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정도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성해 가지 않는 신앙인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믿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계속해서 믿음이 자라가지 않으면 교만한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교회에서 어느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불만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교회 일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삶을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없고 형식만 쥐고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가 넘어야 할 큰 과제는 바로 이러한 유대 율법주의 혹은 계율주의였습니다. 계율주의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계율주의는 신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문자로만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지키면 자동적으로 믿음이 자라고 신령하게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그 정신을 따라서 살아갈 때 믿음이 자라고 신령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계율주의는 대개 윤리 문제, 즉 정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정태주의적(靜態主義的)인 윤리 태도를 가져옵니다. 정태주의(靜態主義)란 발전이 없이 정지해 있는 정신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윤리가 있고 윤리의식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 안에 나타날 때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주시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역사의 전체 과정으로 볼 때 어느 시대에는 완성이 되어서 그다음 시대에는 불필요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모세는 이혼할 때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하라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또 악한 유대인들은 자기가 이혼을 하고 싶으면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세 율법에 명한 이혼증서 법에 대한 본래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당시 사람들의 수준이 이혼하려고 할 때 이혼증서라도 써 주지 않으면 그 당시의 사회를 유지하고, 또 여자들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혼증서라도 써 주고 이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의 참 정신은 그런 장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번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런 법을 주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어떤 법은 그 시대의 수준에 의해 주어졌지만, 성숙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그 법의 참 정신이 드러나게 되면, 그 법 조항은 완성과 함께 불필요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결이나 거룩 또는 윤리라는 것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만큼 성숙한 사상과 정신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만큼 그 행동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규례만 붙들고 거기에 머물러 서서 그것만 붙들고 있고, 그렇게 하면 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율법의 주신 그 목적에 도달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발전적인 윤리의식이 아니라, 발전이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윤리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실행하는 위치에 앉아서 실제로는 자신도 그 규례가 요구하는 정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규례대로 행치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잘못되었다고 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독선주의도 나오고 외식주의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율법의 정결법과 같은 것들을 놓고 그 결례를 지키면서 무두장이들을 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느냐 할 때 바로 여기 베드로의 모습은 파격적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세리장인 삭개오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촌으로 들어가셔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교제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행위들은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죄인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느냐?’고 하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행위들을 통하여 은연중에 거룩의 참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무두장이의 집에 들어가 며칠을 지내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그러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뛰어넘어서 진정한 정결과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속사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9:43이 이해되지 않으면 복음의 확장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의 행위는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정죄를 받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유대주의적 인식과 사상을 벗어버리고 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하면, 단지 베드로 사도의 사상적 전환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초대 교회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행전 1:8 말씀을 따라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지도록 해서 교회의 보편성을 확대해 가기 위한 전제(前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단 한 절의 기록이지만 교회의 행진에 있어서, 복음의 확장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도들의 생각이 베드로처럼 변화되지 않았다면, 복음은 그냥 예루살렘과 유다에만 머물고 말았을 것이고, 무두장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복음을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다음에 가면 사도행전 10장에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련하여 모든 이방인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가이사랴의 백부장인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는 내용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0장부터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룻다와 욥바라는 곳을 초월하여 이방 세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 10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고 땅끝까지 전해지려고 하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알지 못하고, 율법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유대주의적 인식과 사상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베드로 사도가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게 된 것은 그만큼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일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일연의 과정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경영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거기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찾아오고, 교회가 잠시 평안을 누리게 되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룻다의 교회를 심방하며 머물고 있을 때 욥바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모셔가고, 욥바에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베드로 사도를 찾게 되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을 읽어가면서 아주 정교하게 짜졌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점차 의식을 눈떠가면서 세계적인 교회로 그 사상이나 영역이 발전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 영역에 있어서 세계로 퍼져나가고 이방인에게로 들어가면서 그 정신과 사상이 고귀한 데로 나가지 아니하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 영역이 이방 세계로 퍼져 세계로 나갔지만,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기부터 유대주의 종교를 극복하며 꾸준히 한 걸음씩 그 의식을 확대하여 가고 입장을 분명하게 취하면서 나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게 된 것은 초기 교회의 진행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교회의 성격이 표시된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자기 내부에서 이러한 의식적(意識的)인 발전이 없었다면 세계의 교회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세계 속에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그만한 고귀한 정신과 사상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행위라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하면 기독교를 설명하는 그 설명이 그만큼 고귀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초기 교회가 계율주의로 나가서 정태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서 혼자만 의로운 체하고 사실상 율법에서 명한 규례의 의식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면, 그러한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제 앞에 어떤 윤리적 해답을 줄 능력 있는 기독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의 진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 앞에,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이 세상의 모든 상황 앞에 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와 상황 앞에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감으로 성숙해가야 자기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답을 제공하고 어둠의 세상이 공의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그런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2013. 12. 18 수요 예배)
(2022. 11. 6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