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宗宅(秋月寒水亭)
1. 位置:安東市 陶山面 土溪里(上溪)
도산면 도산파출소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6km를 들어가면 퇴계종택이 있는 상계(上溪)에 다다른다.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개천은 그 이름이 퇴계(退溪)이다. 개천은 본래 ‘토계(兎溪)’라 하던 것을 퇴계(退溪) 선생이 ‘토(兎)’자와 음(音)이 비슷한 ‘퇴(退)’자로 바꾸어 ‘퇴계(退溪)’로 바꾸어 선생의 아호로 삼았다한다. 후에 ‘토(兎)’자를 음이 같은 ‘토(土)’자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토계(土溪)’로 하였다한다.
퇴계 선생의 후손이 세거하는 토계(土溪)마을은 4개의 자연마을로 나누어진다. 퇴계종택을 중심으로 종파(宗派)가 사는 곳이 상계(上溪), 퇴계 선생의 셋째 손자인 영도(詠道)공이 정착한 그 아랫마을이 하계(下溪), 냇물(退溪) 건너 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계남(溪南), 상계, 하계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 넘어 있는 마을은 원촌(遠村)이다.
2. 堂號의 由來
이 집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종택(宗宅)으로 경내에는 본채인 ‘ㅁ’자집과 정자와 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이 가운데 당호가 시행되는 건물은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다. 이 정자는 원래 조선 후기의 학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공이 퇴계선생의 도학(道學)을 추모하여 창건한 것이다. 창설재는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5대손으로 시(詩), 서(書), 화(畫)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박학다식(博學多識)했으며, 퇴계선생의 언행을 기술한『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과 퇴계선생의 문인을 기록한『계문제자록(溪門諸子錄)』을 남긴 인물이다.
추월한수정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방과 마루방을 꾸민 구조로 되어있다. 마루 좌측의 방은 ‘완패당(玩佩堂)’이라고 하며 마루 우측의 방은 ‘이운재(理韻齋)’ 라하며 당(堂)과 재(齋)를 포함한 정자 전체를 통칭할 때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 한다. ‘추월한수(秋月寒水)’라는 말은 일찍이 송나라의 주자(朱子)가 ‘공경히 생각건대 천 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寒水)와 같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 라 하여 옛 성인(聖人)들의 마음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으며, 후에는 퇴계선생의 제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퇴계(退溪) 선생을 일러 ‘선생지심(先生之心), 여추월한수(如秋月寒水)’라 하여 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당과 재의 편액 아래에는 각기 그 유래를 찬(贊)한 글을 편액하였는데, 아쉽게도 편액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 글은 각각 4언8구(四言八句)로 다음과 같다.
(玩佩堂)
先生之佩 玉粹金精
何以得之 朱牘眞經
解賞無人 嘅焉永歎
願言吾儕 潛心寶玩
(理韻齋)
寶匣瑤琴 絃絶多年
先生遠紹 輟響再傳
黃卷梅窓 幾回春信
勖哉後生 尙理餘韻
현재 추월한수정에는 당호현판 외에도 퇴계선생과 관련된 여러 편액이 게판되어 있다. 당호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과 정자 대문에 걸린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란 글씨는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선생의 손자로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의 글씨이며, 마루 우측에 게첨된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은 현 종손의 셋째 삼촌인 이원태의 글씨이다. 그리고 마루의 정면 벽에 병열로 게첨된 ‘산남궐리(山南闕里), 해동고정(海東考亭)’은 근세 서예가로 대필서(大筆書)에 뛰어났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작품이다. 궐리(闕里)는 공자(孔子)의 유지(遺趾)로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성중(城中) 귀덕문(歸德門) 안에 있으며 공자는 여기서 교학(敎學)을 펴고 또한 여기서 몰(歿)하였다. 고정(考亭)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건현(福建縣)의 서남(西南)에 있는 지명으로 송(宋)의 주자(朱子)가 여기에 있으므로 후세에 이르러 주자의 호(號)가 되었다. ‘산남궐리 해동고정’이란 편액은 ‘바로 이곳이 공자의 궐리요, 주자의 고정과도 같은 곳이다’라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완패당(玩佩堂)과 이운재(理韻齋)의 편액은 삼척(三陟) 사람으로 해강 김규진의 제자인 홍낙섭의 글씨라 한다.
3. 建物의 構造와 配置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로 지정된 퇴계종택은 1907년(순조 1)에 옛 종택이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되어 사림(士林)에서 종택으로 세운 집으로 1929년에 퇴계선생의 13대손인 하정공(霞汀公, 忠鎬)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자리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건물의 배치는 본채인 ‘ㅁ’자형 집을 중심으로 그 우측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이 있으며 두 건물의 뒤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본채와 정자 앞에 각각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특히 본채의 솟을대문은 정려문(旌閭門)이다. 이 문은 퇴계선생의 장손인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공의 처(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정려문으로 문 위에는 ‘열녀통덕랑행사온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烈女通德郞行司醞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라고 적혀 있다.
본채인 ‘ㅁ’자형 집은 1m높이의 막돌쌓기 기단 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하여 세운 정면 6칸, 측면 5칸의 총 34칸 규모의 집으로 전면에는 사랑채를 만들고, 뒷면에는 안채를 두었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점은 건물의 전면에 중문을 내지 않고 우측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통하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중문을 건물의 전면에 바로 내지 않고 측면에 낸 것은 마치 반가(班家)에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치하는 내외벽(內外壁)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추월한수정은 별당형 정자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다듬돌 3벌대 기단 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하여 세웠으며, 주춧돌도 원주에는 원형의 주추를, 각주에는 장방형의 주추를 사용하여 조화를 꾀하였다. 보통 정자로의 출입은 본채의 솟을대문으로 들어가 정자로 통하는 협문인 사주문(四柱門)을 이용하며, 정자 앞의 대문은 평소에 개방하지 않는다. 또한 정자의 좌측 담에 협문을 하나 더 두어 제사나 행사시에 안채에서 정자로 음식이나 집기 등을 운반하기 쉽도록 하였다.
공간구성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방을 꾸몄다. 마루는 2칸을 통칸으로 하여 바닥은 우물마루를 놓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처리하였으며, 뒤 벽면은 머름을 드리고 판벽한 뒤에 넌출문으로 바라지창을 달았다. 그리고 좌우의 방과 접하는 벽면에는 불발기창이 있는 4분합문을 달았는데 여름에는 통풍을 위해 8개의 들쇠로 열어 들어 올리게끔 되어있다. 마루의 좌측에는 앞뒤로 1칸의 마루방과 2칸의 온돌방을 꾸몄다. 앞에 있는 마루방은 앞면과 좌측면의 외벽에 머름을 드리고 띠살문과 넌출문을 내었으며, 뒤에 있는 온돌방은 우측 외벽에 머름을 드리고 띠살문을 달았다. 마루 우측의 방은 2칸을 통칸으로 틔워서 4칸방을 만들고 방위에는 누상고를 만들었다. 마루 우측방의 앞뒤의 외벽은 머름을 드리고 띠살문을 달았으며, 고방으로 오르는 문을 전면에 내었다. 건물의 전면에 2칸은 퇴를 내고, 좌측 마루방의 전면과 건물의 좌측과 후면에 쪽마루를 달아 이동하기 편리하도록 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팔작기와집으로 내부에는 불천위인 퇴계선생의 신위를 비롯하여 4대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4. 關聯人物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조선중기의 대유학자(大儒學者)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다. 예안(禮安:지금의 도산) 온혜(溫惠)의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진사(進士) 식(埴)의 제7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춘천박씨(春川朴氏)가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하여 태실(胎室)이 있는 노송정의 큰 댁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했다.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 자랐다. 6세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2세 때는 숙부(叔父)인 송재(松齋,堣)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20세 무렵에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는데 침식(寢食)을 잊으며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528년 진사(進士)가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이어 박사(博士), 전적(典籍), 지평(持平)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충청도어사(忠淸道御使)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에는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르렀다. 이 때 낙향(落鄕)하려고 하였으나 윤허(允許)되지 않았다.
1546년 예안 하계(下溪)의 동암(東巖) 곁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토계(兎溪)의 지명을 퇴계(退溪)로 고치고 아호(雅號)로 삼았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형조(刑曹)․병조참의(兵曹參議), 부제학(副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568(선조 1)에는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고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이듬해 정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병으로 고사(固辭)하고 귀향(歸鄕)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관직에 무려 140여회나 임명되었으나 79회를 사임하였으며 높은 관직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外職)을 주로 봉행(奉行)하였다.
선생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성(誠)’을 기본으로 하고,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주자(朱子)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발전시키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였다. 선생은 계상서당(溪上書堂)과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건립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선생의 학풍은 뒤에 문하생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다. 이는 이이(李珥)의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사상적으로 대립된다. 후일 선생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직자로, 학자로, 교육자로 선생의 일생은 만세의 사표가 되었으며. 선생이 모신 중종, 명종, 선조로부터도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사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1576(선조 9)에 문순공(文純公; 道德博聞曰 文, 中正精粹曰 純)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문묘(文廟) 및 선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모셔졌다.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 성학십도(聖學十圖), 자성록(自省錄), 심경석의(心經釋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상례문답(喪禮問答), 사칠속편(四七續編)』외 많은 저술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時調)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