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골포와 진해 왜성을 만나 의미 있었던 남파랑길(#6-5)
2024.2.4 (일) 날씨 : 흐림 기온 : 섭씨 4~10도
거리 : 22.5km 6시간 동행 : 7명
제덕사거리-웅천읍성-흰돌메공원-황포돛대 노래비-진철교-청천마을-안골 무궁화공원
-진해신항초교-용원어시장-망산도-송정공원-공단지대-신호항
제덕사거리(6코스 종점)
제덕포구
천자봉(좌측)과 시루봉(우측)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받고 ‘논어’가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놀라운 업적이나 문장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다.
자기 이익을 넘어 세상을 위한 행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군자의 품격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셨으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셨다.”-논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철학에 따라 묵묵히 길을 가는 사람만 얻을 수 있는 공손과 온화함, 이것이 공자의 품격이다.(공무원 연금지 2024.2월호에서)
남파랑길 여정이 창원에서 부산으로 접어들었다.
오늘 걷는 6코스에는 진해 읍성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 이어 안골포 해전의 승리를 이끌었던 안골포를 지난다.
인근에 있는 안골왜성도 보게 되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을 지나며 50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상흔을 되새겨 볼 수 있다.
7명의 전사들은 씩씩하게 흰돌메공원 바닷길을 따라 안골포로 향하며 중간에 진해 읍성에서 치와 옹성 그리고 해자를 둘러보며 역사 공부를 했다.
읍성이지만 왜구들을 막으려는 빈틈없는 축성과 해자를 파 놓은 모습에 감탄했다.
성의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명문석을 보며 책임 있는 공사를 위한 철저함에도 놀랐다.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으로 왜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고 남해의 재해권을 잃었다.
전쟁 수행의 핵심은 물자 수송 통로인데 이것이 막힌 일본군들은 호남지방으로의 진입이 어렵게 되었고, 충무공 이순신의 22연승의 신화가 탄생하게 된다.
멀리 해남으로부터 시작된 발걸음이 어느덧 부산에 이르게 되니 오륙도에서 대망의 피날레가 기대된다.
비록 10여 명의 소수의 정예 인원이 끝자락에 함께하지만, 동행의 가치는 엄청나게 크다.
깊은 대화와 신뢰 그리고 서로 돕고 이심전심으로 협력하는 노정이 값지다.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추운 겨울바람도 이겨냈으니 국토를 걷는 참맛이 더 새롭다.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고 함께하지 못했지만, 팀을 이룬 남파랑길 여정은 끝까지 버텨낼 거라 확신한다.
어시장에서 팔딱거리는 도미 횟감이 신호항의 아담한 정취와 어우러져 즐거웠다.
웅천읍성
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석탄(石彈)이 발견된 웅천읍성
웅천읍성(경상남도 기념물 제 153호)은 북쪽의 봉동산과 자마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에 의해 가려진 분지 중앙에 있다.
남북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의 평지성이다.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단종 1년(1452년)에 원래의 성벽에 붙여 더 넓게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천읍성의 동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덧붙여 쌓은 동문지 아래에서 원래 성벽의 남쪽 외곽에 서쪽으로 굽어진 해자를 확인하였다.
단종 1년(1452년)에 원 성벽의 남쪽 해자를 메우고 동문지의 옹성 및 치성, 그리고 그 외곽의 새로운 해자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부속시설로서 동서남북 사방에는 반원형 옹성문을 두고 읍성 네 모서리와 동, 서문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활이나 창으로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구조물인 치를 총 6개 배치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외곽으로는 해자를 둘러 방어했다.
후대에 확장하여 덧붙인 성벽의 성 돌에서 창녕부, 진주부민 등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읍성 축조할 때 인근 군현의 읍민과 힘을 합하여 성을 쌓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문지 남쪽 해자 내에서 너비 4.6m의 석축 시설과 목제기둥이 2열로 4개 확인되었는데 평소 다리를 걸쳐 놓았다가 유사시에 들어 올리는 조교시설로 보고 있다.
성내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비롯한 일부 백자편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전인 15, 16세기 것으로 확인되며 자기 조각의 경우는 16~17세기 이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성벽 인근과 해자 내부에서 다양한 크기의 둥근 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돌로 알려져 있다.
태종 7년(1407)에 개항한 내이포는 일본과 무역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불법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나자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세종(1418~1450)대에 와서 웅천읍성을 지었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동문이 함락되어 소실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주둔하던 웅천왜성에 딸린 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웅천읍성은 세종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평면 모양이 정사각형에서 현재와 같이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읍성의 전체 둘레는 936m로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약 500m이며, 성벽의 폭은 4.5m, 높이는 4.4m이다.
성벽은 땅과 수직이 되도록 쌓았으며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들을 끼워 넣었다.
북쪽 성벽은 진해-부산 간 국도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고,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은 민가와 도로 등이 들어서면서 일부 훼손되어 동쪽 성벽만 출입문 터와 함께 온전히 남아 있다.
웅천읍성에는 4개의 대문이 존재했었는데 각각 동문은 견룡문(見龍門), 서문은 수호문(睡虎門),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북문은 공신문(拱宸門)이라 불렸다.
현재 남아있는 곳은 2011년 복원된 견룡문(見龍門)과 서벽·남벽은 일부만 있고, 도로 개설로 인해 북벽은 흔적도 없는 상태이다.
* 읍성 : 관청과 민가를 비롯한 고을 중심부를 둘러쌓은 성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했다.
* 해자 조교 : 해자를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해자(垓子)는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내부에는 물을 채울 때도 있고, 채우지 않을 때도 있다. 해자가 주로 발견되는 시설물은 성곽과 고분이다.
* 명문석 : 성벽을 쌓은 사람의 이름을 새긴 돌. 성벽에 있는 명문석을 통해 진주, 창녕, 청도, 합천으로 당시 웅천읍성을 쌓기 위해 경상도 전역의 백성들이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안에서 본 현룡문
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다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만든 성벽이다.
성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하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웅천읍성의 동문 옹성은 반원형으로 채성부(성벽의 몸체 부분)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확인된 옹성은 전체 직경 18m, 내벽 직경 약 13m이다. 옹성의 외벽 둘레는 52m, 내벽 둘레는 27m로, 남아 있는 부분의 최고 높이는 약 3.5m 정도이다.
옹성의 출입구는 북쪽을 향해 약 4m 폭으로 만들어졌다.
현룡문
주기철 목사 생가
대한민국의 장로교 목사.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3.1 운동에 참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대항하여 맞섰지만, 장기간의 투옥과 여러 차례의 고문을 겪으며 향년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를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주기용의 사촌 동생이다.
안골대교
흰돌메공원
예로부터 흰 돌이 많아 백석산이라 불리던 곳에 흰돌메 공원이 조성되었다.
흰돌메 공원은 남문 휴게소 인근에 리모델링을 통해 조성된 아름다운 숲속 공원으로 크기가 73만㎡에 달한다.
남문지역에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흰돌메공원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외국의 어느 도시의 밤 풍경을 방불케 한다.
공원 전망대에선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와 신항만 현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산신항 부두
흰돌메공원
황포돛대 노래비
황포돛대 노래비는 진해 흰돌메 공원에서 부산 방향으로 약 800m 떨어진 영길만 해안관광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노래 황포돛대는 이 고장 출신인 작사가 이일윤(필명 : 용일) 선생이 경기도 연천의 포 부대 근무 당시, 세모를 앞둔 12월 어느 눈 오는 날 밤 고향 바다인 영길만을 회상하며 노랫말을 만들었다.
군 제대 후인 1964년 백영호 작곡, 이미자의 노래로 발표하게 되어 국민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으며, 그 유래를 담아 이곳 영길만 도로변에 건립하게 되었다.
오래된 벚나무와 노래비
마을 입구 수호신상(사자상)
남파랑길 6코스
안골포
진철교
안골포
안골포항
안성마을
안골포
안골 해전 : 1592년(선조 25) 7월 8일에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기자카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멸한 후, 가덕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와기자카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일본 함선이 안골포로 왔다는 정보를 들었다.
연합함대는 이억기가 포구 바깥 바다인 가덕도 주변에 진을 치고 있다가 복병을 배치해놓고, 본대의 해전지로 와서 전투할 작전계획을 세워 10월 새벽에 출항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먼저 학익진 진형으로 진격하고, 원균의 함대도 그 뒤를 따라 안골포를 향해 출발했다.
안골포의 포구에는 일본 함선 42척이 있었는데, 대선 3척만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떠 있고 나머지 함선들은 정박하고 있었다.
포구의 지세는 배가 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으므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포구 밖으로 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한산도에서 유인작전에 당했던 생각을 하고, 이번에는 좀처럼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군은 번갈아 포구에 출입하면서 여러 총포를 쏘고 장편전 등으로 일본 함선을 불태우려 했다.
이때 이억기도 복병선을 배치해놓고 공격에 합세했다. 이 전투를 통해 일본 함선을 거의 격파했고 일본군 2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일본군은 육지로 도망갔다.
이 해전은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해전에 이어서 거둔 대승리였다.
안정공원(무궁화 공원)
안골 왜성
안골 왜성
안골 왜성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8년 5월 3일 사적 제53호 『안골리성』으로 지정되었지만,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 재평가로 1997년 1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고,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가 축성을 지휘하였으며,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씩 교대로 수비를 담당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안골 왜성
안골 지구 도시 계획 정지 사업
용원교
용원 어시장
용원어시장은 창원시 용원동에 위치한 수산 시장이다. 생선회와 조개 등 싱싱한 수산물을 살 수 있어 항상 사람들이 붐비고 활기가 넘치는 시장이다.
구입 후 포장해 갈 수도 있고, 주문 후 일정 상차림 비용을 내면 식당에서 바로 싱싱한 회를 먹을 수도 있다.
대구를 말리는 모습(70,000원)
망산도
망산도·유주암(望山島·維舟巖)은 문헌 기록이 전하는 기념지로, 확실한 문헌 기록이 전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게다가 망산도에는 조개껍데기와 통일 신라~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도질제 및 연질제 토기 조각이 확인되고 있다.
송정공원
어시장에서 구입한 도미와 광어
신호항
신호항은 서쪽으로는 녹산 국가 산업 단지가, 동쪽으로는 신호 일반 산업 단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매립지의 북쪽에서 이어지는 수로가 빠져나오는 입구 쪽에 조성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진우도와 백합도 등 낙동강 삼각주의 퇴적된 모래섬들이 있다. 신호항은 항만 남쪽에 있는 낙동강 퇴적 지형 등으로 다양한 어종과 수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신호항
첫댓글 기억을 더듬게 해주신 귀한 사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