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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버드내 골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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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싸움에서 언제나 이겼던 아랫버드네 농기위에 꽂은 꿩장목이 당시
상황 증명해줘 아랫버드네 출신 이연의씨는 평택에서도 유명한
만능 예인이었다.
이(李)씨 최(崔)씨 한(韓)씨가 사는 동네
갑자기 불어 닥친 꽃샘추위에 내천2리 아랫버(머)드내 경로당은 노인들로 북적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인들은 생경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한다. 정중하게 방문목적을 말씀드렸더니 좌장 최창규(83)씨를 필두로 차태용(73), 한상웅(68), 최종열(73), 정영도(74)씨 등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
아랫버(머)드내는 전주 이(李)씨, 전주 최(崔)씨, 청주 한(韓)씨가 마을을 이루고 산다. 이 가운데 오래 세거한 성씨는 이씨와 최씨다. 전주 최씨는 입향 후 12대조인 이복신 때 마을에 자리 잡았고, 전주 이씨는 태조 이성계의 8남인 의안대군 방석의 후손이다. 방석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5남 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던 중 이숙번에게 피살된 인물이다.
청주 한씨는 질경공 한치형의 후손이다. 한치형은 세조 때의 공신 양절공 한확의 조카인데 성종2년 남이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좌리공신에 책봉되어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하지만 연산군의 거듭된 폭정을 견디지 못하여 충언하다가 갑자사화 때 추죄되어 부관참시(죽은 시체를 꺼내 칼로 베는 것)를 당했는데, 이 때 일가가 몰살당하는 큰 화를 입었다.
이 시기 화성시 남양(南陽)으로 이거(移去)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거한 마을에 수적(水賊)이 들끓었던가 보다. 그래서 한상웅(68)씨 고조부께서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들어온 곳이 내천리였다.
아랫버(머)드내는 주산(主山)인 밤나무동산을 중심으로 골말과 새터말, 벌말로 나눠진다. 이것은 백 여 년 전만 해도 마을의 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간척사업으로 점차 마을이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골말은 내수교회 아랫동내로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유래되었다. 새터말은 골말과 벌말의 중간으로 간척사업으로 농경지의 저지대 확산이 이뤄지면서 새로 생겨난 마을이다. 벌말은 마을회관이 있는 곳인데 벌판 쪽에 나 앉았다고 하여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윗버(머)드내와 함께 내천 변에 형성되었다. 내천(奈川)은 황구지리에서는 황구지천, 수원지역에서는 대천으로 불려진다. 통상적으로 이 같은 지명은 ‘마을 앞에 흐르는 하천’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은데 한상웅(68), 차태용(73)씨 등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옛날 마을 옆에 수원 용주사를 지나 한양으로 가는 큰 길이 지났는데 들판에 수해가 심하여 과객들이 건너지 못하자 ‘어찌 내를 건너리까?’라고 한탄하였던 데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주변의 지리적 환경을 고려할 때 그럴 듯하지만 실상은 내천(奈川)이라는 한자를 보고 작위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새까시, 나춘이, 허벌쩍?
내천리 일대는 황구지천을 통하여 바닷물이 유입되고 갯골이 형성되었던 마을이다. 이 같은 지형은 어패류가 풍부하여 신석기시대나 청동기 시대 사람살기에 적합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실제로 마을 주위에서는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나 유물이 심심찮게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내천리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아랫버(머)드내 앞 조산(助産)에 있었던 것으로 지름이 14~5m정도 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고인돌이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 닻줄을 묶었던 바위라고 하였다. 한상웅(68)씨에 따르면 상선들은 고인돌 아래에 있었던 뱃터에 정박한 뒤 바위 위에 소금을 수 백 가마씩 쌓아 놓고 소달구지로 날랐다고 하였다. 하지만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던 고인돌은 현재 없어졌다. 2002년 조산머리에 공장을 지을 때 묻혀버린 것이다. 뜻있는 주민들이 나서서 반대하였지만 사유지라는 이유로 평택시에서 허가를 내줬다고 한다. 주민들은 지금 생각해도 씁쓸한지 연신 입맛을 다셨다.
간척된 지역은 지명의 변화도 다양하다. 내천리에도 다양한 지명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닷가와 관련된 지명으로는 앞서 말했던 ‘뱃터’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 수챙이, 홈건너와 같은 지명도 바다와 관련된 지명인데 간척이 되면서 지금은 들판지명으로 불려지고 있다. ‘과거길’은 내천리에서 수원 용주사까지 연결된 큰 길이다. 용주사, 융건릉 터는 옛 수원도호부의 읍치(邑治)였고 이 곳을 지나면 과천을 지나 한양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과거길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마을 앞 들판은 20여만 평쯤 된다. 들판은 넓지만 수해, 염해가 심했던 이곳을 간척한 사람들은 민중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간척된 사연과 순서에 따라 다양한 지명이 붙여졌다. 그 가운데 미기들, 새까시, 밴등, 나춘이는 들판지명의 대표 격이다. 그 밖에도 참빛쟁이, 밭가래, 허벌쩍, 홈건너, 서바지기, 수챙이 같은 다양한 지명들이 있는데 주민들도 유래는 알지 못했다. 진구정은 마두리 가는 길 우측에 있는 곳으로 일본인 이름이 붙은 유일한 들판이다. 이곳은 일제 말 일본인 지주가 소유했었고, 그 옆들은 일본인 기업 중앙산업의 땅이었다. 마을 뒤 구릉지대에 있는 천수답은 가뭄이 심해서 두들겨야 모내기를 할 수 있다고 ‘오래두들기’다. 우물은 마을마다 하나씩 세 개나 있었지만 ‘행겨물’의 맛이 가장 좋았다. 이 우물은 팔 때 황금색 닭이 나왔다는 전설까지 전해오는데 물이 귀했던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근대교육의 산실 머드내 강습소
아랫버(머)드내의 주 산업은 논농사다. 옛날엔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도 많았지만 수해의 피해가 줄어들고 수리시설이 좋아지면서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내천리 일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해, 염해가 심했던 지역이었다. 내천(奈川)을 막은 제방(堤防)이 부실한 데다 장마가 지면 도도리(수월암 2리), 제기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들판에 고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병술년 장마(1946) 때는 들판이 바다처럼 변하고 벼들이 토사에 덮여 큰 피해를 봤다. 수해방지를 위한 노력은 일제 말부터 있었다. 일제는 소화14년(1939) 대가뭄 때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게와 삽으로 제방을 쌓았는데 해방이 되면서 완공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중단된 제방은 식량증산정책의 영향으로 제1, 3공화국 때 완성되었다. 이 때는 마을 앞에도 제방을 쌓았다. 차태용(73), 한상웅(68)씨에 따르면 주민들은 수수밥 먹고 지게로 흙을 날라다 둑을 쌓았다고 한다. 배골아가며 힘들게 쌓은 마을제방은 나중에 내천리-마두리 사이 간선도로가 되었다. 그래서 노인들은 제방만 보면 힘들었던 옛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내천리는 교육열이 남다르다. 이 지역의 교육열은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이 주도했지만 몇 몇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일제강점기 교육기관은 2㎞ 떨어진 서탄초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입학시험도 있었고 월사금도 비싸서 끼니를 잇기 힘들었던 빈농들은 다닐 엄두를 못 냈다. 이 같은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한범석씨는 일제 말 골말에 3년제 주간교육을 하는 ‘내천(머드내)강습소’를 개설하였다. 학교 건물은 초가 한 채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교실로 사용하는 널찍한 방 1칸, 교무실 격인 작은방, 제법 넓은 마당이 시설의 전부였다.
초창기에는 농촌지식인이랄 수 있는 한상길, 이규식, 최병선씨가 교수하였지만 전쟁 막바지로 가면서 점차 줄어 나중에는 최병선씨가 혼자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내천1, 2리와 심교리(수월암 3리), 화성군 병남면 제기리 아이들로 많을 때는 50여 명 적을 때는 3, 40 명이었다. 이 학교 출신인 차태용(73), 정영도(74)씨에 따르면 일제말의 교과목은 일본어를 중심으로 산수와 주판 등을 배웠다. 한글을 쓰면 서로 신고하게 하는 치졸한 방법은 없었지만 한글교습은 해방 후에나 가능하였다.
학비는 원칙적으로 무료였지만 가을이면 학부모들이나 지역유지들이 곡식을 거둬 지원하였다. 수업연한은 3년이었는데, 이곳에서 학습한 사람은 시험을 치르고 서탄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에 편입하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편입하기도 하였다. 근대교육의 산실이었던 강습소는 1947년 문을 닫았다. 시대상황도 변했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으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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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탄면 내천2리 아래머드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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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버(머)드내 두레는 장군두레
전통적 농업마을인 내천리에는 당제, 두레, 우물고사, 이동조합이 두루 발달하였다. 당제는 수원 나가는 길가에 서 있는 참나무 당목을 섬겼다. 이 당목은 윗버(머)드내, 아랫버(머)드내, 심교리 세 마을이 함께 섬겼는데 신격은 산신(山神)이었다. 당제는 윗버(머)드내 주도로 음력 10월쯤에 거행하였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에 중단되어 제의 절차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랫버(머)드내 두레는 장군두레였다. 장군두레는 형님두레 또는 양반두레라고도 하는데 농기(農旗) 위에 꽂은 꿩장목의 수로 사실을 증명하였다. 꿩장목은 농기 위에 꽂은 꿩의 깃털로 두레싸움에서 이긴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두레패에 참여했다는 차태용(73)씨는 아랫버(머)드내 두레의 농기에는 꿩장목이 꽉 차서 더 이상 꽂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하였다. 이 마을에는 전설적인 상쇠가 있었다. 이연의씨가 그 사람이다. 이 분은 쇠가락도 출중했지만 12발 상모도 잘 돌렸고 장고나 북에도 능한 만능 예인이어서 평택근동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는 안성의 전문 연희패에서 조차 스카웃 제의가 왔었다고 하니 분명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아랫버(머)드내 두레도, 상쇠 이연의씨도 만날 수 없었다. 두레는 1970년대 초에 중단되었고 이연의씨는 6, 7년 전 작고하였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옛 추억의 뒷자리에는 씁쓸한 여운만 남는다. 아무리 변했다지만 전통이 단절된 현재는 뿌리 없는 나무처럼 위태하기 때문이다. 아랫버(머)드내에서 당제와 두레, 우물고사가 중단된 빈자리에 교회가 자리 잡았다. 한상웅(68)씨에 따르면 30호 100여 명의 주민이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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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탄면 내천2리 아래머드내 경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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