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 김지명
단체로 산행하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높은 산마루를 정복하려고 이른 새벽어둠을 헤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관광버스는 이마에 현수막을 걸고 산악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는 사람이 없어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버스 안으로 올라서니 퇴직하기 전에 함께 산행했던 직장 동료가 보였다. 반가워서 악수하면서 함께 앉으려고 하는데 산행대장이 양해를 구한다. 묻지마 관광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즐거운 산행을 위하여 남녀를 동석시키겠다고 한다.
등산객은 모두가 좋아한다. 이런 자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어색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산행은 자주 하지만, 중년에 남녀가 단체로 등산하기는 처음이다. 사내들끼리 앉으면 발생하는 것은 졸음뿐이지만, 남녀가 함께 있으면 미소와 엔도르핀이 생성된다. 양극과 음극이 합쳐 전등불이 켜져 주위를 밝히는 것과 같다. 음인 체질과 양인 체질이 조화를 이루듯이 안전 산행을 위하여 반드시 남녀가 이인 일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양의 중요성은 이것 뿐만은 아니다. 거북이같이 천천히 산에 오르는 음인 체질은 주로 여성이지만, 토끼처럼 급하게 오르다 쉬는 양인 체질은 대다수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사내들이다. 산행대장은 이인 일조의 작전을 이용하여 자주 오라고 부탁하는 듯하다. 등산 코스와 시간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한다.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말동무를 옆자리에 앉혔으니 되돌아와 하차할 때까지 함께하라고 강조한다. 행복한 여행 즐거운 산행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버스 안은 훈훈한 분위기다. 관광버스는 산악인을 태우고 남해 고속도로로 시원하게 달려간다. 내 옆자리에도 중년의 아주머니가 앉았다. 처음 보는데도 고향 친구처럼 다정하게 말도 잘하면서 유머가 풍부하다. 이런 산행을 처음 하므로 수줍어서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할지 어리벙벙하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처음 보는 남자를 친구 대하듯 잠시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수다를 늘어놓는다. 미소를 날려보지만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의아하였다. 아주머니는 지천명이 훨씬 넘어서부터 산에 다닌다고 한다. 네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아무리 많게 보아도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인다고 했다.
동안이라서 그런지 십 년은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빙그레 웃는다. 아주머니는 애교스러운 언행으로 자신의 이름을 미숙이라고 밝힌다. 나도 맞장구를 쳐야하는 분위기라서 지명이라고 이름을 밝혔다. 미숙은 깔깔 웃으면서 뭐! 지명수배자, 오지명, 호지명, 아니면 땅이름을 말하는가요? 하면서 능청을 피운다. 미숙이라는 여인은 방정꾸러기 아니 빈 깡통 같아 보였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더니 자꾸만 말을 시킨다. 어디에 사는지, 산에는 자주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서 아양을 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여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미숙은 상당히 유머스런 여자다. 처음 만나는 사람답지 않게 여유만만하게 농으로 수다를 떤다. 탤런트 오지명 씨라고 했던가요? 다음 산행 함께하도록 부탁 한번 합시다, 하면서 농으로 이어간다. 다음에 만나면 맛 나는 것을 대접할 테니 산행할 때 배낭을 짊어질 수 있는지 묻는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배낭을 두 개 짊어지라는 게 아니고 여인의 배낭을 내 것과 합치자고 한다. 기어이 두 개를 합치자고 강조하지만, 절대로 그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숙에게 어리석은 사나이를 이해하라고 했다. 미숙은 내 배낭까지 메겠다고 기어이 합치자고 한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곁에 있고 싶다고 한다. 그제야 미숙의 마음을 알고 그렇게 하겠다고 미소를 지었다. 미숙을 처음 만났지만, 고향 친구처럼 만만하게 대하며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등산할 때 주의할 점을 알려주기도 했다. 지치지 않으려면 호흡에 걸음을 맞춰야 하며 보폭도 같아야 한다. 절대 처지지 말고 따라붙어야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깔딱 고개를 올라갈 때는 보폭에 호흡을 맞추어 천천히 올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산행 상식을 듣고 있던 미숙은 고개 돌려 바라본다.
미숙은 산행친구를 원한다. 미숙은 강인한 체력으로 타의 모범이 되겠다며 산행에 자신감을 나타낸다. 나와 산행친구하자고 제의한다. 미숙이는 내가 등산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미숙은 나를 전문 산악인으로 판단하고 산행 친구가 되겠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함께 등산하려면 빙벽도, 암벽도 타야하고 자일에 매달려 양팔 힘으로 바위를 올라야 하는데 할 수 있으면 친구가 된다. 미숙은 특수산행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다니는 산에는 자신감 있다고 한다. 좋다고 했더니 황소 웃음 보인다.
수다쟁이가 귀를 즐겁게 한다. 말 많은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자꾸 말을 시켰다. 즐거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산행대장은 남강휴게소에서 십 분간 휴식시간이라고 한다. 미숙에 잠시 바람도 쐬고 내리자고 했다. 화장실 다녀오면서 직장 동료였던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재미없다고 자리를 바꾸자고 한다. 좋다고 하면서 내가 뒷좌석에 앉았다. 미숙은 절대로 안 된다며 함께 있어야 한다고 따라온다. 이제 다 왔으니 친구랑 할 말이 있다고 해도 나중에 하라며 기어이 원위치로 가자고 한다. 버스 안에서 밀고 당기니까 산행대장이 다가와 아기 달래듯 타이르며 정해준 자리에 앉아서 가자고 한다.
휴식을 마치고 출발하면서 산행대장은 낙오 없이 안전하게 산행하기를 대원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남해 고속도로로 달려가는 관광버스는 조용한 분위기며 스피커로 통해 경음악이 흘러나온다. 창가에 앉은 나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바라보았다. 들판은 짙은 녹색으로 펼쳐져 싱그러움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두 시간을 달려왔지만, 지루하기보다는 미숙의 애교스런 대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등산하는 재미보다는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미숙과 대화하는 시간이 더 즐거웠던 날이다.
집에 가려고 버스에 오른다. 산행 대장은 올 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버스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던 직장동료가 다가오더니 곁에 앉는다. 산행 대장이 언제 보았는지 곧장 다가와 제자리로 가라고 강력히 부탁한다. 직장동료가 떠나자 지미숙의 친구가 다가오더니 곁에 앉아도 되느냐고 묻는다. 기다렸다는 듯 ‘네 앉으세요,’ 하고 반갑게 반겨주었다. 고맙다며 서슴없이 곁에 앉아 말을 붙인다. 오찬을 함께할 때 아저씨가 가져온 찬이 가장 맛나더라고 한다. 아 그러세요? 고마워요.
뒤늦게 버스에 오른 미숙은 깜짝 놀란다. 미숙은 친구를 보더니 야! 여기서 무엇 하는가? 네 자리로 가라면서 감정적으로 말한다. 미숙이 오는 줄 알면서 왜 여기 앉았어, 친구를 나무란다. 친구는 자리를 바꾸자고 억지를 쓴다. 미숙은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면서 기어이 끌어낸다. 미숙의 친구가 다음에 뵈어요, 하고 자리를 떠난다. 곁에 앉은 미숙이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생긋이 웃는다. 미숙이 곁에 앉자 친구에게 심하게 하지 않았나 하고 물었다. 미숙이 깔깔거리더니 붙던 자리에 붙어야지요.
자리를 뺏은 미숙은 수다를 시작한다. 등산하는 모습을 보니 보통이 아니더라고 칭찬을 가미하여 말을 붙인다. 절벽에서 자일 잡고 올라갈 때 그토록 끌어달라고 부탁해도 그냥 가버리는 무정한 아저씨! 미숙이 마음에 안 들어요? 하고 구시렁거린다. 안전을 담당하는 회원이 미숙을 사랑하는 회원 같아서 그냥 왔는데 내가 실수를 했나요? 호지명 아니 오지명 씨는 여자를 싫어하나요? 아니면 미숙이 맘에 들지 않아요? 어쨌든 다음에 오겠다고 약속하면 오찬을 준비하겠습니다. 황송하여 미숙을 배낭에 담아 짊어지고 다니고 싶어요.
깔깔 웃던 미숙이 겉과 속이 다른 아저씨! 여자가 좋아하면 웃으며 반겨주시오. 묵비권을 주장하자 왜 말이 없어요, 하면서 수다가 이어진다. 게다가 지명 씨는 건강을 챙기지만, 미숙은 친구 간에 의리를 지키느라 연인도 놓칠 뻔했다고 한다. 연인이라니 부끄럽게 그런 말씀 하지 마소. 미숙이 시대에 맞게 살아야지요, 하면서 질문하다.
“애인 있나요.”
“그럼요.”
“장애인 소리는 듣기 싫은가 보네”
“미숙과 비슷한 사람에게 잡혀있어요.”
설마 미숙의 친구는 아니겠지요, 하면서 깔깔거리더니 잡아야지요. 잡히기만 하면 기를 펴지 못한다고 한다. 아저씨! 애인 예뻐요? 한번 보고 싶으니 다음 산행 때 함께 오시면 한사람 회비는 절반으로 받겠습니다. 등산객을 잡는 사냥꾼과 대화하기가 귀찮아 눈을 감았다. 미숙은 깔깔거리더니 곁에서 대화하면 받아주어야지 눈을 감으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말하기가 부끄러워 수다쟁이 아주머니 앞에 눈을 감아야 입이 열린다.
미숙은 빙그레 웃는다. 보조개에 눈웃음을 가미한 미숙은 등산 친구 하자고 다시 강요한다. 오솔길에서 따로 걸으면서 무슨 입만 살아서 하면서 구시렁거렸다. 미숙은 등산하면서 함께하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한다. 맞아! 친구를 위해 함께하는 그 의리가 돋보인다. 연인이라면 미래에 그리움만 쌓일 것이다. 연인과 친구는 엄연히 다르다. 친구는 영원하지만, 연인은 아픈 상처만 키운다. 보기엔 아주 순박한 아저씨 그런 말 할 수 있나요? 친구를 낚아채려고 하는 바람둥이 아저씨라고 덧붙인다. 보소! 생각은 자유지만, 말은 함부로 하지 마시오.
만사가 귀찮은 듯 눈을 감았다. 친구로 지명했는데 미꾸라지 빠지듯 미숙을 외면하면 안 된다며 자꾸만 말을 시킨다. 게다가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산을 타니 자연인 같다고 덧붙인다. 미숙의 친구가 나를 노리고 있던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아하다고 했다. 좋은 물건이라도 하나만 가지면 참 좋겠다고 한다. 친구보다 예쁘지 않아? 마음이 착한 여자를 선택하련다. 친구와 말하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미숙이 무서우니 앞으로 모른 체하자고 했다. 깔깔거리며 쳐다보는 미숙이 아양을 떨면서 반드시 곁에 있게 할 거라고 자신을 가진다.
버스는 신나게 달려간다.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해님은 그림자를 길게 그리다가 한순간 사라지지만, 미숙의 수다는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다. 둥근 달처럼 환한 미소 보이며 이어지는 수다에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미숙은 아양으로 마음을 녹여 회원으로 가입시키려 한다. 친근감을 주려고 어디에 사는지 묻기도 한다. 자신을 밝히고 물으면 좋겠다. 높은 지대에서 고층 아파트에 산다고 한다. 흩어진 마을을 한곳에 모아 높이 쌓아 올렸으니 경관이 좋겠다. 미숙은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선녀처럼 산다고 덧붙인다.
친근감을 주는 이유를 말한다. 장거리 산행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비회원을 반드시 회원으로 가입시켜야 하는 딱한 심정이라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회원으로 가입하면 미숙에게 득이 생기나요? 미숙은 년 중 가장 많이 가입시킨 회원에게 회장 자리를 준다고 한다. 그 자리가 그토록 탐이 나나요? 그렇다면 다음에 다섯 명을 데리고 올 테니 회장 하세요, 하고 기분을 돋웠다. 미숙은 회장이 되면 회비가 면제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보조개가 유혹한다. 달걀같이 가름한 얼굴 양쪽엔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갖춘 여자다. 남자라면 다 탐을 내겠지만,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나와 균형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고개 돌리지 않는다. 미숙은 헤어지기 전에 술 한 잔 나누자고 한다. 술과 함께하는 사내 같은 미숙을 다시 볼 일이 없어 아쉽다. 미숙은 끝까지 다음 산행을 약속하는 끈질긴 여자다. 등산할 때 반드시 참석해 달라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
등산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애절한 부탁을 가미한 미숙의 수다가 더욱더 재미있었던 날이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한번 더 참석해보셔도 좋을듯합니다
요것은 갈 때고 2편은 돌아올 때 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