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端宗)의 哀史
1) 비운의 왕자 홍위(弘暐)
문종이 승하한지 나흘 째 날인 1452년5월18일 세자 홍위(弘暐)가 경복궁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니 그가 열두 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선 제6대왕 단종이다. 불안한 공기가 대궐을 휘 덮고 있었다. 문종이 떠나던 날 <문종실록>은 “이때 사왕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의 상사 때보다 더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종의 상사 때보다 더했다는 신민의 슬픔이 무언가 불안한 조정의 분위기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미성년의 어린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으나 단종은 그럴 왕대비도 없었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렇다고 단종을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수렴청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종 즉위교서에 임시 체제에 대한규정이 들어간 것이다. “모든 사무를 대신에게 물어 한결 같이 열성(列聖-대대의 임금)의 헌장에 따라서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기 바란다.” 즉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단종을 보좌하는 비상 체제로 간다는 뜻이다. 이때의 분위기를 문신 이정형(李廷馨)은 <본조 선원보록-本朝璿原譜錄)에서 조정이 불안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계유년임금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고 대군들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
강성한 대군들이 불안의 실체였다. 열두 살의 단종이 즉위할 때 수양의 나이 36살이었고 7명의 대군들이 생존해 있었다. 이런 때에는 대비라도 있어 수렴청정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그래서 의정부는 대군들의 준동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단종즉위 교서에 집어넣었다. 바로 분경(奔競)금지 조항이다. 분경은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관직을 얻으려 하는 것을 뜻한다.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 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단종)를 나은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단종의모 현덕왕후는 딸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를 낳았으나 난산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두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하여 자신의 둘쩨 아들은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고 홍위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키웠다. 이렇게 자란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에 책봉한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등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곤 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세종이 젊은 학사들에게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바로 혈기 왕성한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조선 제5대왕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 )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2) 수양대군이 사은사를 자청한 까닭!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무엇보다 명나라의 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수양은, 단종 즉위년 (1452년) 9월에 스스로 謝恩使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이때 수양의 다리 역할을 한 인물도 도승지 강맹경 이었다.
“수양대군이 가기를 청하니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합니까?” 단종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묵연히 있었다. 반대의 뜻이었다. 단종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부마를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부마는 모두 병이 나서 갈수 없습니다.” 강맹경은 거듭 수양대군을 추천했고 단종은 할 수 없이 그를 낙점했다. 수양대군 측에서 쓴 <노산군일기>에는 이때의 사신의 길이 무척 위험한 행차인양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후일 거행할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사은사 행차가 성공적으로 끝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해 10월 수양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복동생 계양군 이증에게 “국가 안위가 이 한 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 그해 윤 9월 종친부의 웃어른인 양녕대군의 집에서 수양대군을 전별하며 여러 사람이 술에 취해 쓰러졌는데 수양대군이 쓰러지지 않자 양녕대군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 그해 10월에 양녕대군은 수양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양은 천명이 있는 사람이라” 왕조국가에서 국왕이외의 사람에게 천명이란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역모였다. <단종실록>의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는 양녕대군이 단종 즉위 초부터 수양의 쿠데타를 부추겼음을 뜻한다. 수양대군의 즉위가 피를 부른다는 사실을 모를 이 없을 양녕이 서로 골육상잔의 비극을 연출 하도록 어떤 연유에선가 단초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했다.
양녕, 효령과 도승지 강맹경,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이 안에서 긴밀하게 후사를 모의하는 중 수양대군은 사신 길에 올랐는데 영의정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데려갔다. 일종의 인질이었다.
이 무렵 명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명의 영종 주기진은 3년전 1449년(세종31년)8월 몽골과 전쟁에 나섰다가 현제의 하북성 회래현 부근 토목 보에서 대패해 대군이 궤멸되고 영종자신은 생포 되었다. 이것이 토목의 변인데 기세를 탄 몽골군은 북경까지 공격했다. 영종은 이듬해 몽골군이 풀어주어 귀국했으나 북경 남지자에 있는 남궁에 유폐되고, 영종의 동생인 대종(代宗) 주기옥이 즉위 했다. 전황제가 유폐된 상태니 정정 불안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수양이 사신으로 간 때가 바로 이때였다. 주변 민족들이 명을 우습게 볼 때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대종이 예부 낭중을 시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하자 얼른 일어났다.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 예부 낭중 웅장도 놀라 일어나며 감탄했다.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 조선 국왕의 숙부가 일개 낭중에게 통상 예법을 뛰어 넘어 과공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지지를 위해서였다. 수양은 이런 저 자세 외교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명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했다, 명의 지지를 확신한 수양은 쿠데타를 결심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3) 계획된 계유정난을 거행하다.
단종1년(1453년)10월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등을 집으로 불렀다. 수양은 그들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김종서가 먼저 알면 일(쿠데타)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이날 거사하겠다는 뜻이었다. 수양은 자신의 집 후원으로 그간 오늘의 거사를 위해 기른 무사 수십 명을 불러 모아놓고 고기와 술로 후대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수양대군이 후원에 나타나 무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김종서등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수양의 “대의“란 역심에 불과 했다. <단종실록>은 수양의 말을 듣고 북문 쪽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무사들의 싸늘한 반응에 다급해진 수양은 한명회에게 ”대다수 사람이 불가하게 여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한명회는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군사를 쓰는데 갈팡질팡 결행을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장애 이옵니다.”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수양은 무사 양정과 가동, 임어을운등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수양대군이 찾아 왔다고 하자 김종서는 마지못해 나왔으나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양은 의외의 부탁으로 “정승의 사모 뿔좀 빌립시다” 김종서는 자신의 사모뿔을 빼어 주며 약간은 안심하는 기색 이었다.
그 틈에 수양이 말했다. “여기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 보는 순간 수양의 신호를 받은 수행 무사들이 철퇴로 내려쳤다. 아들 승규가 몸으로 아버지를 덮어 방어 하려 하자 양정이 칼로 깊게 찔렀다. 이것이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소위 계유 정변이다.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수양은 대궐로 향했다.
“숙부는 나를 살려 주시오” 수양은 이처럼 두려워하는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부르는 명패(命牌)를 내렸다. 대신들을 부르러 사람들이 떠나자 수양은 각 문마다 역사들을 배치했다. <본조선원보록>은 이때의 정경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한명회가<생살부>를 들고 문 곁에 앉아 있다가 <사부-死簿>에 오른 대신들은 무사들에게 때려죽이게 했다.” 아무 관직도 없는 한명회가 대신들을 때려죽이는 권한을 쥐게 된 것이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조극관, 등이 명패를 받고 입궐하다 죽임을 당했다. 윤처공, 조번, 원구,등은 집으로 쳐들어온 역사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다음날 수양은 영의정 부사, 영경영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가 되었다. 혼자서 의정부와 이, 병조,를 모두 차지했으니 “왕“이란 말만 빠진 사실상의 임금이었다. 살육전은 계속되어 수양의 친동생 안평대군, 繕工副正 李命敏같은 왕족들과 허후 조수량 안완경 지정 이보인 이의산, 김정, 김말생등이 죽임을 당했다. 헌정질서에 따라 즉위한 왕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살해 된 것이다. 이런 시신들 위에서 축제가 벌어젔다. 쿠데타 5일후인 단종1년(1453년) 10월15일, 정인지, 한확, 한명회, 권람등 14명을 1등 공신에, 신숙주등 11명을 2등 공신으로 삼은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 되었다. 공신의 자손들은 죄를 범해도 영원히 용서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황보인 김종서등 아무 죄 없이 살해당한 사람들의 토지를 난신전이란 이름으로 나누어 가졌고 노비도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그들의 살어 남은 가족마저 죽였다. 쿠데타 초기에는 황보인, 김종서의 가족들은 변군의 관노로 삼았다. 약 10개월 후인 단종2년(1454년)8월15일 추석제를 지내고 환궁하다가 중량포의 주정소(晝停所)에서 그 가족들에 대한 대량 살육을 자행했다.
한날한시에 무려 39명을 살육 시킨 것인데 단종의 명을 빙자 했지만“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다.”는 기록은 수양이 이 살육전을 주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고 그 아들 정진을 수군으로 삼았으나 재위7년 판 나주 목사로, 상왕 시절인 세종1년(1418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까지 승진시켰다. 그러나 수양과 쿠데타 일당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 가족마저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여 나눠 가졌다.
계유정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단종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단종은 수양 숙부가 왕위까지 빼앗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종은 재위2년 2월 수양대군에게 교지를 내려 “숙부는 과인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周公)으로 하여금 주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 했으나 끝까지 조카를 보좌해 공자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주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단종은 수양을 주공에 비유하는 글을 자주 내려 수양의 야심을 막으려 했으나 수양은 애당초 주공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당시의 왕실은 분열되어 있었다. <단종실록>단종3년(1455년)3월에 “이유(李瑜-금성대군)가 몰래 혜빈 양씨와 결탁했다.”라고 전한다. 금성대군과 혜빈양씨 등은 단종의 왕위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자초한 것이었다. 금성대군과 혜빈양씨의 기도는 곧 수양 측귀에 들어가고 수양은 단종3년 윤6월11일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양씨의 두 아들 한남군과 영풍군을 귀양 보냈다.
단종은 금성대군 등이 귀양 가는 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 했다”고 전하지만 <육신록>은 전혀 다르게 전하고 있다.
“밤에 수양이 철퇴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 왕위를 빼앗기로 결심한 수양이 철퇴를 들고 나타나자 공포에 질린 단종이 물러 났다는 것이다. <육신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수양이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즉위한 것에서도 알수있다.
생육신 남효은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은 그 때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 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이때 세조가 눈물을 흘렸다면 전형적인 악어의 눈물이었다. 이렇게 수양은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공 했다. 왕위를 차지했으니 공신을 책봉해야 했다. 수양은 즉위년 9월5일 한명회, 신숙주, 한확, 윤사로 등 7명을 1등 공신으로 하는 총 47명의 좌익공신을 책봉 했다. 공신에 책봉된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관작과 노비와 전답을 생각 했지만 단종의 왕위까지 빼앗은 것은 시대가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4) 운명을 결정지은 사육신사건
이날 아침 상왕 단종은 호조참의이자 외삼촌인 권자신(權自愼-현덕왕후의 남동생)의 절을 받았다. 상왕 단종은 뛰는 가슴으로 긴 칼을 내려 주었다. 이날이 거사 날이었기 때문이다. 궈자신의 모친, 즉 단종의 외할머니 최아지가 얼마 전에 충격적인 사실을 몰래 전해 주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같은 문신들과 유응부, 박쟁, 성승같은 무신들이 금상(세조)를 베고 상왕마마를 복위 시킨다고 합니다. 단종은 이 나라에 충신이 있음을 알았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다. 윤영손도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날은 상왕인 자신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에서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에게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책봉 한다 는 명 태종의 고명을 가지고온 데 대한 답례였다. 이날을 거사일로 잡은 이유는 성승, 유응부, 박쟁이 임금뒤에 칼을 들고 호위하는 별운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회 도중 세조와 세자를 벤 후 상왕을 다시 복위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전해 졌다.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 했다.
<별운검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세조는 신숙주를 광연전에 보내 다시 살펴보라고 명했다. 신숙주는 광연전에 갔는데 날은 덥고 장소는 협소했다. 신숙주는 별운검을 들이지 말자고 건의 했고 세조는 받아 들였다. 남효은은 <육신전>에서 이때의 상황을
<무신 유응부는 당일 거사를 주장했고 박팽년과 성삼문은 굳게 말였다. “지금 세자가 본궁(경복궁)에 있습니다. 공의 운검이 쓰이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여기(창덕궁)에서 거사를 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 한다면 일의 성패가 어찌될지 알 수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유응부는 반박했다.
“이런 일은 신속히 하는 것이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되오, 지금 세자는 비록 오지 않았지만 왕의 오른팔은 모두 이곳에 있으니 이들을 모두 주살하고 상왕을 호위 하면서 호령할 수 있는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요, 이런 기회를 노처서는 안 되오”
그러나 성삼문 박팽년은 끝내 반대했다. “만전을 기한 계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획은 연기 되었다. 상왕 단종은 이제나 저제나 거사가 일어나길 기다렸으나 연회가 파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연기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4-1) 밀고
여름같이 않게 음산한 날씨였다. 성균관 정4품 사예(司藝)김질은 장인인 의정부 종1품 우찬성 정창손과 함께 대궐로 달려갔다. 그들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달하는 내시)을 시켜 세조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이 밤중에 비밀리에 보자고 요청 했는지 궁금해 하면서 세조는 사정전으로 나갔다. 김질이 절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좌부승지 성삼문이 사람을 시켜 만나자고 청하기에 그 집엘 갔습니다.>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상왕 복위기도 사건이 발각되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성삼문은 신에게 ‘근일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장 문을 열고 금성대군의 옛집에 왕래 하시는데 이것은 분명히 한명회 등이 헌책(獻策)을 올리는 것 때문이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무슨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질은 성삼문의 답변을 대신 전했다.
‘성삼문은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상왕을 좁은 곳에 두고 역사 한두 사람을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반역을 꾀함)한 깃을 도모하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시켜 상왕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었다. 김질은 당초 성삼문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동지였다. 성삼문이 김질을 끌어 들인 것은 김질의 장인 정창손의 동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 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를 맞이해 상왕을 다시 세우자고 창의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 성삼문이 정창손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실수였다. 그는 수양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 직후 수양에 의해 이조판서로 임명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세조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 크지 않았다.
김질의 고변은 계속 되었다.
“그대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성삼문은 이개. 하위지, 유응부도 알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세조는 즉시 호위 군사를 집합시키고 급하게 승지들을 불렀다. 도승지박원형을 비롯해 여러 승지들이 입시했는데 그중에 좌부승지 성삼문도 있었다. 세조는 내금위 조방림을 불러 명했다.
“성삼문을 끌어내어 꿇어 앉혀라.” 조방림은 얼른 성삼문을 꿇어 앉혔다.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성삼문은 한참 하늘을 우러러보고 말이 없었다. 성삼문이 “김질과 면질하고 나서 아뢰겠습니다.”
세조는 김질을 불렀다. “성삼문과 말한 것을 다시 말하라”
김질이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풀어 놓기 시작했다. 성삼문이 “다 말할것 없다.” 상왕 복위기도 사건이 무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심한 고문이 시작 되었다. 세조는 박팽년 등을 직접 신문 했다. 박팽년에게 함께한 당여(무리)를 물었다. 박팽년은 확신범이었으므로 무엇 하나 감추지 않았다.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 성승, 박쟁,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이었습니다.<세조실록 2년6월2일> 다시 당여를 묻자, 아버지까지도 숨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누군들 숨기겠습니까,” 라고 반박했다. <세조실록>은 박팽년이 자신을 일컬을 때 신(臣)이라고 했다고 하나, <육신전>에는 이때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박팽년은 “나는 상왕의 신하인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소? 충청감사로 1년간 있을 때도 신이라 일컬은 사실이 없소.” 세조가 사람을 시켜 충청감사때 계목을 을 조사해 보니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로 바꿔 써 있었던 것이다.
<육신전>은 성삼문도 세조를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으리는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소?” 수양은 조카의 왕좌를 찬탈한 역적 일뿐이란 말이었다. ‘내가 이렇게 할 수박에 없는 것은 하늘에 두해가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조 앞에 서 있는 신숙주도 꾸짖었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왕손(단종)을 안으시고 거닐며 다니시다가 여러 유신(유학을 한 신하)들에게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대들은 이 아이를 꼭 보살펴 달라’고 하신 말씀이 귀에 남아 있는데 너만이 이 말을 잊었느냐? 너의 나쁜 짓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육신록>은 신숙주와 김질을 꾸짖는 장면을 더욱 자세히 전하고 있다.
“나는 비록 오늘 죽으나 천만대에 빛나는 혼백이어서 옛 임금을 뵈어도 부끄러움이 없겠지만 너의 무리는 임금을 배반하고 세조를 도와 부귀양양하나 지하에 가서 어떤 면목으로 선왕을 뵈려 하느냐? 내 원귀가 되어 네고기를 먹으리라.” <육신록>은 세조가 김질과 신숙주를 용상 뒤로 숨으라고 했다고 전한다. <육신록>이 전하는 무신 유응부의 기세는 더욱 당당하다. 세조가 “어찌 모반했는가?”라고 묻자,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의 자리를 정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내 바로 들어가 베려 했더니 불행하게도 서생들의 말을 듣고 소인이 고변해서 일이 일어났으니 오직 죽을 따름인데, 괴롭게 묻지 말라”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생은 지나치게 의심이 많아서 큰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옳도다.
창덕궁 잔치에 칼을 잡고 일어서려 하는데 굳이 잡고 말리더니 오늘 화를 만나니 꾀 없는 필부로다.“
세조가 다시 물으니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벅머리 아이가 알 테니 물어 보라, 나는 다시 할 말이 없다.” 유응부의 주장대로 거사 했으면 성공했을 가능서이 높았다. 이때만 해도 세조는 자신의 호위 무장들이 거사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집에 있던 유성원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개와 하위지도 혹형에 굴하지 않고 세조를 꾸짖다가 사형 당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 당한 인물은 사육신뿐 아니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성삼문의 형제 성삼고, 성삼성,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과 형제, 박대년, 박인년, 박기년, 등을 비롯해 김문기,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 윤영손등 25명이 사형에 처해 졌다. 나아가 세조는 역모에 참여 했던 가족 모두를 참형으로 몰살 시켰다.
조금이라도 사건과 관련이 있으면 다 죽였으나 여파는 가라않지 않고 있었다. 1년 후쯤인 세조 3년6월 21일에는 단종비 송씨의 부친 송현수(宋玹壽)와 그와 가까웠던 돈영부판관 권완(權完)이 또 역모하였다 고변되었다. 죽이고 또 죽여도 역모는 계속 되었든 것이다.
5) 금성대군의 역모
계유정난의 주역들 즉 세조와 쿠데타 세력들은 단종이 살아 있는 한 역모는 끈이지 않고 반복 되리라 생각했다. 단종의 존재 자체가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사태가 일변하면 사육신 등은 백성들의 눈물 속에 죽어 갔지만 자신들은 백성들의 환호 속에 죽어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
<육신록>은 단종의 영월거처에 대해서 "풀로 역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 울타리를 둘렀다.“ 라고 전하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지지했던 종친들을 모두 유폐시켰다.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 한남군은 함양, 화의군은 전라도 금산, 영풍군은 임실, 문종의 부마 정종은 관주에 안치하고 난간과 담장을 높이 쌓아 외간 사람과 교류를 금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굴하지 않았다.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음(李甫음)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세조3년(1457년)안동의 관노 이동이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보음도 마음을 바꾸어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한다고 함께 고변하고 나섰다. 금성대군이 거사도 하기 전에 군사들이 들이 닥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좌찬성 신숙주와 영의정 정인지는 노산군(단종)이 사러 있는 한 같은 사건은 반복 될 것이라고
세조에계 결단을 촉구했다.
세조는 단종을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대신과 종친들이 모두 요청함으로 할 수 없이 죽이는 광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과연 잠시 후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가 와서 신숙주와 함께 금성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주청했고 정인지가 다시 단종 문제를 꺼냈다.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한 바이니 편안히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조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파단해서 유보시켰다. 의정부 대신들과 육조뿐 아니라 종친들까지 모두 나서서 죽이라고 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종친 중에서는 이 역할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앞장서서 주장 했다. 세조3년(1457)10월16일 종친과 의정부, 충훈부, 육조에서 결단을 촉구 했다. “노산군이 종사에 죄를 지었는데 근일에 난언 하는 자들이 모두 노산군을 빙자하여 말합니다.”
이틀 후에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노산군과 이유(금성대군)등의 죄를 청했고 세조는 “오늘은 술이나 드십시요”라고 일단 거절했다. 그 다음날 양녕이 다시 세조에게 요청 했다.
“전일에 노산군과 이유의 죄를 청했으나 아직 유윤(허락)을 입지 못 했습니다. 청건데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
세조가 허락지 않자, 양녕이 다시 아뢰었다. “대역처럼 종사에 관계되는 일은 상량(商量-깊히 생각함)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의로써 결단 하소서.
그러면서 양녕대군은 노산군과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화의군등 세종의 여러 서 왕자들과 문종의 사위 단종의 장인을 함께 죽일 것을 청했다. 한마디로 양녕대군의 복수였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은 세종 일가가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연출하는 것으로 복수하는 것이었다. 세종이 대간들의 끈질긴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것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종 32년 2월 양녕의 아들인 이혜(李譿)에 대해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서산 윤(瑞山尹)은 이혜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자는 제서유위(制書有違)로 논죄하고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아뢰지 않는 자는 응주불주(應奏不奏)로 논죄하겠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이혜가 사랑하는 애첩을 아비인 양녕에게 빼앗겨 화병을 얻은 후 술을 마신 면 여러 차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자식의 애첩까지 빼앗은 양녕이 대의로 노산군을 죽이라고 청하는 자체가 참으로 희극이다.
세조3년(1457)10월21일 양녕과 영의정 정인지가 다시 나서 단종과 금성대군을 죽이라고 청했고, 세조는 마지못한 듯 금성대군을 사사 했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교수형에 처했다.
<병자록>에는 금성대군의 사약을 마시는 광경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하루는 안동 옥에 갇혀 있던 금성대군이 몰래 빠져나가서 간곳을 알지 못했다. 안동부사와 금부도사가 크게 놀라 백방으로 찾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한참 후에 금성대군이 박에서 들어오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수가 많지만 만일 내가 도망한다면 추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죽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편하다.” 한 사람이란 물론 금성대군을 뜻하는 말이다. 금성대군이 사약을 앞에 놓고 의관을 정제하고 걸상에 걸터앉아 금부도사가 말했다.
“전패(殿牌-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봉안 하던 목패)에 절을 해야 합니다.”도사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하게 했으나 금성대군은 거부했다.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금성대군이 북을 향하여 사배하고 통곡하고 죽음에 나가니 여러 사람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세종의 적자가 안평에 이어 다시비명에 간 것이다.
6)단종의 죽음에 대하여,
<세조실록>은 신숙주나 한명회 등이 편찬을 총괄했던 것이기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은 뺐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조실록>에는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부터 <세조실록>을 불신 했던 사람들은 <육신록>이나 <단종출손기-端宗黜遜記)같은 기록에 더 신빙성을 두었다. <육신록><병자록><단종출손기>등의 기록은 그해 10월 세조가 금부도사를 보내어 노산군을 죽이라고 하니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 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는 단종이 금부도사에게 시절을 한탄했다고 한다.
“내 선왕의 나라를 부탁하시는 말씀과 어루만져 위로하고 도와주신 은혜를 입어서 백성의 임자가 되었음으로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선왕의 성덕을 저버린바 없으며, 백성들 사이에 원한을 산일이 없이 3년을 지냈는데, 왕위를 빼앗고 나라를 탈취한자가 탕왕과 무왕을 표본으로 삼는구나.”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모두 주군을 내어 쫓고 나라를 빼앗은 임금들이다. 단종은 하늘을 우러러 말했다.
“이토록 푸르른 하늘이 이렇게도 앎이 없단 말인가.”
단종이 말을 마치며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금부도사가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상명(上命-임금의 명)이 내렸으니 전지(傳旨)를 들으시고 약그릇을 들으심이 옳으시나이다.” 단종이 도사를 크게 꾸짖었다.
“돗개무리(개 되지)가 어느 면목으로 일월 아래 다니느냐? 내 윗사람이 없으니, 누가 내게 전지를 내리며, 사약이란 것이 어디에서 났더냐? 나를 죽일 이 없고 나를 호령할 이 없으니 너는 빨리 돌아가 명을 전하라.” 사약이 내려지자 격분한 단종은 계속 호통을 쳤다.
“나는 선왕의 장손이고 왕실의 적파다. 선왕의 고명을 받아 한나라의 임자가 되었으니 수양은 종실에 신하일 뿐이다. 지친의 정을 두터이 하여 내 깊이 믿는바 였는데 어찌 차마 이에 이를 줄 알이요?”
“나에게 이렇게 함은 만고에 하나밖에 없는 일이다. 너 또한 사람의 마음이러니 능히 평안히 여기느냐? 지하에 가서 어느 면목으로 선조를 뵈려 하느냐?”
“이제 수양이죽인 여러 신하는 만고에 빛나는 것이 그치지 않겠지만 일시에는 불쌍하게 되었구나, 찬역지신(纂逆之臣)은 빨리 물러가라.”
단종이 말을 마치고 누각에 올라가니 금부도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 관가에 심부름을 하는 공생이 나섰다.
“왕명을 받아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그가 활시위로 목을 조르니 (1457녀)10월24일 유시(酉時)였다. <육신록>과<단종출손기>는 이 공생이 문 박을 나가지 못하고 얼굴에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병자록>은 이날은 뇌우가 크게 일어 밤과 낮이 구분할 수가 없었다한다.
<아성잡설-鵝城雜說>이나<축수록-逐睡錄)에는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한 아전이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고 노모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관에 넣어 장사 지냈다고 전한다. <여남야언>은 그 아전의 이름이 영월현의 현리 엄흥도(嚴興道)라고 전한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에 장사 지내려하자 그 친척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 다투어 말렸다. 그러나 엄흥도는 단호했다.
“옳은 일을 하고서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육신록>은 “그 후 엄흥도의 자식들이 크게 되어 사대부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크나 큰 한을 품고 간 비운의 국왕이기에 이적(異蹟)이 잇따랐는데, 단종이 죽은 영월현의 사또가 거듭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육신록>은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영월의 고을 원이 연달아 여덟 명이 죽었다고 전하는데, 인조의 장인인 서원 부원군 한준겸이 쓴 <유천차기>에서는 죽은 군수가 일곱 명이라 전하고 있다. 영월군수가 잇따라 죽었다함은 사실일까? 비슷한 내용이 실록에도 등장한다. 단종이 죽은 지 84년 후인 <중종실록>36년(1541)7월26일자에 기록이다.
“영월군수가 7개월 사이에 3인이 잇따라 죽어서 관청의 사무가 형편 없이 어지러웠다. 최소한 3명의 군수가 잇따라 죽은 것은 사실임을 말해준다. 군수들의 잇단 횡사를 막은 인물이 박충원이다. 박충원은 5년 전인 중종 31년 정5품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청요직(淸要職)인 홍문관 교리까지 역임한 박충원이 왜 직급도 낮은 영월군수를 자임했을까? 그는 중종때의 권신 김안로의 당파였는데 중종32년 김안로가 사사당하면서 그의 당여로 몰려 이듬해 파직된 후 오랫동안 쓰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명종실록>즉위년 (1545)11월16일 기록은 이때의 영월군수를 박충원이라고 전하고 있다. 중종36년 3명의 영월군수가 죽은 지 4년 후에 박충원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것이다. 그 사이 몇 명의 군수가 더 죽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알 길이 없다.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첫날밤 꿈에 대궐에 들어갔다. 꿈속에 단종이 용상에 오르는데 활시위가 목에 둘려 있었고 그 아래에 육충신이 시위하고 있었다. 박충원이 네 번 절하자 단종이 말했다.
“내 시신을 엄흥도가 맡아서 처리했으나 지형이 아주 습하고 소나무뿌리가 침노하니 특별이 경등에게 개장(이장)하라고 나타났으나 이전의 여러 군수들이 정신이 굳세지 못해서 여럿이 기절했다. 내 오늘 다시 이르니 삼가 태만하지 말라.”
단종은 말을 마치고 환관들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박충원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영월현의 군관과 아전들은 또 군수가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장사준비를 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박충원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박충원이 정성을 다해 단종의 묘를 중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제사 후 박충원의 꿈에 사육신들이 나타나 말했다.
“우리 군신이 그대의 뜻을 기특하게 여겨 그대의 자손들이 창성케 하겠노라” 실제로 박충원은 명종과 선조때를 거처 크게 승차하여 형조 이조판서까지 올랐으니 단종의 음덕을 크게 보았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7) 수양의 찬시(纂弑-왕위를 빼앗고 죽임)는 朝鮮歷史의 갈길을 바꾸다.
수양의 주도로 文宗을 독살했음으로 단종의 죽음 역시 임이 계획된 수순일 뿐이었다. 수양의 찬시는 조선의 나아갈 길을 바꿈으로 역사의 성격 자체가 변해 버렸다. 즉 국왕의 맏아들이 원자가 되고 세자가 되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국왕 수업을 받는다. 다음 국왕까지 미리 결절해 놓은 것이기에 왕조가 안정되게 가는 것이다. 그것이 왕조의 헌정 질서다.
첫댓글 단종의 슬픈역사 잘 읽었습니다.
금년같이 폭염이 심했던 시기에 이같은 장문의 글을 올려주신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