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m 대작 산수화? 자세히 보니 ‘풍속화’였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022.06.20ㅣ주간경향 1482호
요 몇년 사이 제가 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작 가운데 눈에 띈 작품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2020년 11월 공개된 ‘세한도’(23.9×70.4㎝)였는데요. 따지고 보면 ‘세한도’는 ‘작품이 뛰어나다’는 의미의 ‘대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규모가 크다’는 뜻의 ‘대작’은 아니죠.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이 달아놓은 감상평, 즉 시쳇말로 댓글 덕분에 작품도, 규모도 엄청난 대작이 됐습니다. 댓글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15m(33.5×1469.5㎝)에 달하거든요.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의 ‘강산무진도’. 작품 길이가 8m가 넘는 두루마리 대작(가로 856㎝, 세로 43.8㎝)이다. 2m짜리 비단 5폭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사진은 ‘강산무진도’를 세쪽으로 나눈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실감콘텐츠로 8m 대작 산수화를…
순수 작품의 크기만 친다면 역시 그해(2020년 7월)에 전시된 ‘강산무진도’가 압도적이죠. 조선 후기의 대표화가인 이인문(1745~?)의 작품인데요. 작품 길이가 8m가 넘는 산수화(43.8×856㎝)입니다.
두 전시회 때 박물관 측에서 ‘세한도’와 ‘강산무진도’를 펼쳐 놓았는데요. 한컷의 사진으로 담기 어려워 애를 먹었고요. 더구나 한눈에 보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번 곱씹어 봤던 기억이 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두 작품 중 ‘강산무진도’를 5월 23일부터 디지털 실감영상관에서 특화된 실감콘텐츠(‘강산에 펼친 풍요로운 세상, 강산무진도’)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도, 단원 김홍도(1745~?)·혜원 신윤복(1758~?) 등의 풍속화도 아니지 않느냐, 조선시대 산수화라면서 그냥 중국의 이상향을 그린 무미건조한 ‘산수화’ 아니냐, 뭐 이런 회의감이 드시겠죠.
그렇습니다. ‘강(江)과 산(山)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無盡)’는 뜻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겉으로 보기엔 전통적인 산수화 같습니다. 2m짜리 비단 5폭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는데요. 그렇게 마련한 8m 화폭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의 표현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작 산수화가 맞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앉아 중국을 그린 이른바 관념산수화라는 낙인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의 이상향을 그렸나
아닌 게 아니라 이인문은 이 ‘강산무진도’를 스승인 현재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1768년작)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촉’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해당하는 지역이죠. 예부터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촉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낭떠러지 사이에 아슬아슬한 ‘잔도(棧道·하늘사다리길)’를 놓고 힘겹게 왕래했죠. 당나라 천재시인 이백(701~762)은 “촉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於靑天)”(‘촉도난·蜀道難’)고 읊었답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구성은 ‘촉잔도’와 그 모티브가 흡사합니다. 두 그림 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색감과 치밀한 구성으로 표현했고요. 후반부 잔잔한 평원으로 연결되는 구성도 비슷합니다. 관념산수화가 그렇죠.
도연명(365~427)이 꿈꿨던 이상향, 즉 무릉도원을 그리는 게 보통이었죠. ‘무릉도원’은 전란을 피해온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 철저히 분리된 채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원숭이도 오르지 못할 정도’라는 험준한 잔도를 지나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촉 땅처럼…. 만약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역시 ‘촉 땅으로 향하는 길’을 그렸다면 지금까지 본 관념산수화와 무엇이 다를 게 있습니까. 스승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다면 더구나 그렇죠.
겉은 산수화지만 속은 풍속화
이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속삭입니다. ‘강산무진도’를 찬찬히 뜯어보라고요.
2020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전’에 출품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당시 처음으로 8m가 넘는 대작을 펼쳐보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러면 겉으로는 관념산수화지만, 속으로는 김홍도와는 완전히 느낌이 다른 풍속화가 보인다는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겉은 산수화, 속은 풍속화라는 뜻에서 ‘겉산속풍’이라 해둘까요.
볼까요. 자세히 보면 ‘강산무진도’는 심사정의 ‘촉잔도’와 완전히 다르답니다. ‘촉잔도’에 표현되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세가 ‘강산무진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요. 잔도를 표현했다지만 길이 매우 잘 닦여 있고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들이 이동합니다. 이 마을 저 고을에도 사람들과 말, 나귀들로 북적대고요. 어떤 인물은 집안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멍을 때리고’ 있고요. 무엇보다 짐을 부지런히 나르는 일꾼들이 이채롭습니다. 나무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매달아 어깨로 나르거나 당나귀 혹은 수레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짐을 잠시 두고 마을 주막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어요.
강에는 커다란 배들이 떠다닙니다. 그 배들이 마을 포구에 도착하자 짐꾼들이 도착한 짐을 부지런히 나르죠. 도르래를 볼까요. 도르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아래에 마을이 있죠. 도르래 아래위에서 줄을 잡아당기고, 이용객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을은 당나귀로 열심히 물건을 나르고 있고요. 물자가 쌍방향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죠.
‘강산무진도’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의 ‘삶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산 중턱까지 집들이 있고, 멀리 산사가 보이며,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촌마을이 있고 나루터에 사람이 모여 있으며, 배가 자유로이 다니고, 물레방아까지 보이는…. 영락없는 풍속화의 모습이 아닐까요.
조선의 이상향 그린 풍속화 풍속화라면 어느 시대의 풍속화라는 말일까요. 18~19세기 흥청대는 서울, 그것도 한강 모습을 그린 ‘풍속화’라는 겁니다.
그때를 영·정조로 대표되는 조선의 중흥기라 하죠. 때는 바야흐로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16~18세기)에 따른 기상이변이 야기한 대기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 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혹은 베와 동전)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죠.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가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면서 물류량이 급증합니다.
또 조정이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발달했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 수공업도 활발해졌고요. 서울에는 다양한 물품과 재화가 넘쳐났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정조 임금도 그런 서울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인물들. ‘강산무진도’는 배경은 산수지만 주인공은 산수가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794년 규장각 검교직각 남공철(1760~1840)과의 대화에서 “과인의 정치가 요순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심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 “우리나라 사방 6000리에 산도, 바다도 있어 수레와 배로 요동이나 심양, 중국이나 왜국까지 갈 수 있다”고 은근슬쩍 자화자찬합니다.
그뿐이 아니고요. 1792년(정조 16) 한양(서울)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념으로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명을 내리죠. 이때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가 “놀고먹는 백성 없이 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인(仁)의 성(城)과, 의(義)의 시장에 나라를 세워 번성함과 화려함만 믿지 않는다”고 정조의 입맛에 꼭 맞는 시를 올렸는데요.
어떻습니까.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를 읽으니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떠오르지 않나요.
‘강산무진도’의 무대가 경제활성화 덕분에 성시를 이루던 한강포구 같죠? 그것이 약간 과장된 모습이라면 그 당시, 즉 18~19세기 정조가 추구한 조선의 이상향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또 모르죠. 정조가 총애하던 화원 이인문에게 조선의 이상향을 담은 일종의 ‘진경풍속화’를 그려보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시전도를 그리게 하고, 성시전도시를 짓게 했듯이 말입니다.
1745년생 동갑내기의 콜라보
괜한 억측 같다고요? 풍속도 하면 단원 김홍도가 있는데, 정조가 굳이 전문 산수화가였던 이인문에게 맡겼겠냐고요.
일본 덴리대(天理大) 소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이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꾼 무릉도원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무릉도원은 동진~남조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도연명(365~427)이 꾼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곳’이란 말로, 속세를 떠난 이상향을 뜻한다. 전통산수화는 보통 중국인의 이상향을 주제와 소재로 삼았다.
물론 단원은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였죠. 조희룡(1789~1866)은 “그림 한장을 낼 때마다 곧 임금(정조)의 눈에 들었다”(<호산외기>)고 증언했고, 문인·화가·평론가인 강세황(1713~1791)은 “속화를 그리면 사람들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쳤다”(<단원기>)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대 저명한 문인·서화가인 신위(1769 ~1845)는 “선왕(정조)을 모시던 묘수 화원 가운데 ‘단원’은 (죽어서) 보이지 않고 ‘도인’만 여전히 화실에 퍼질러 앉아 있다”(<경수당전고>)고 했습니다. 신위가 꼽은 ‘묘수 화원’ 두 사람 중 ‘단원’은 김홍도입니다. 그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며, 퍼질러 앉아 그림을 그린 ‘도인’은 바로 이인문을 가리킵니다.
김홍도와 이인문, 두분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이자 평생지기였답니다. 일찍이 두분은 궁중의 도화서에 들어간 뒤 같은 모임에 참여해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린 뒤 서로의 작품에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콜라보’라 할 수 있죠. 예컨대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라는 글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 있습니다. 또 두 분이 1791년(정조 15) 열린 시모임(‘송석원시사’)을 주제로 그린 그림 2점이 있습니다. 낮에 열린 시모임은 이인문(‘송석원시회도’)이, 밤에 열린 향연은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가 각각 그린 ‘콜라보’ 작품이죠.
또 두분이 글씨와 그림을 나눠 맡은 ‘송하한담도’(1805)도 있습니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글(오언율시)을 쓴 합작품이죠.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 담소를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 있습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단순한 관념산수화가 아니다. 아슬아슬하고 험준한 산악길을 통해 촉지방으로 피란가는 행렬도, 속세를 피한 은자들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삶의 터전에서 저마다의 임무에 전념하는 현실 속 이상향을 그렸다는 평을 듣는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보다 홀대받은 이유
정조 임금도 김홍도만큼이나 이인문을 끔찍하게 총애했습니다. 예컨대 이인문은 1796년(정조 20) 도화원 화가들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녹취재)에서 채점 관리들로부터 연달아 낮은 점수(7명 중 꼴찌·9명 중 5등)를 받았는데요.
채점표를 확인한 정조 임금이 굳이 재채점까지 해서 이인문의 등수를 거푸 1등으로 올렸습니다. 이인문의 성적표에 기재된 평가는 ‘격조(格調)’와 ‘사의(寫意·외형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을 표현)’, ‘초범(超凡·비범)’이었습니다. 당시 문체반정을 추구한 정조의 입맛에 꼭 맞는 화가였다는 뜻입니다.
김홍도에 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인문과 관련된 인물평이 눈에 띄는데요.
당대 시문과 서예에 능했던 유재건(1793~1880)은 <이향견문록>에서 “이인문은 어려서부터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한폭의 조각 종이일망정 깊고 먼 천리의 기세가 있어 찬탄을 자아낸다”면서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이라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서예가인 마성린(생몰년 미상)은 이인문의 ‘송석원시화도’에 “정선·심사정 이후 산수를 그리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인문의 호)의 그 이름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는 후기를 달았습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고”(성해응·1760 ~1839의 <연경재전집>), “올곧게 자신을 지켜 시정의 속된 무리를 소인배로 여기는 인물”(남공철·1760~1840의 <금릉집>)이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죠. 이것이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이인문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은 이유일 겁니다.
김홍도는 ‘보는 이들이 손뼉을 치며 열광할 만큼’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반면 이인문은 정통 산수화 분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평가에서 보듯 이인문이 18~19세기 조선 화단이 요구한 그림의 주제와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다만 ‘강산무진도’라는 대작에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속으로 녹여낸 것입니다. 정조 임금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그런 식으로 그려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빠져 있었죠. 이제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이인문의 ‘파노라마 산수풍속화’, 아니 뭐 ‘진경 풍속화’라 할까요, 새로운 장르의 산수풍속화에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