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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마르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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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13:09 ㅣNo.143442
2021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나의 의로움, 사랑이 구원의 가치없는 ‘헛것’임을 인정하는 그 자기부인(죽음)으로 하늘의 대속, 그 완전한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어 용서로 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가시적 사랑도 나오지 않게 된다. 곧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차별적(위선적)인 사랑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 하면서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6,45-52)
45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앞 절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율법, 육(죽음)의 빵을 예수님께서 받아 품으시고(대신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하늘의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으로 바꿔 주셨는데~ 모든 사람이 그 생명, 영의 양식이 아닌 육의 양식으로 먹었던 자리, 그 육의 신앙에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떠나보내신 것이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빵을 육의 빵으로 먹었을 때 일어날 고난의 일들을 경험하게, 그리고 가르치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과 방법으로 하시려고 기도 하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 제자들이 겪을 시련을 아셨을 텐데 혼자 뭍에 머무르셨다.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 호수(바다)는 삶의 시련, 고뇌의 풍랑이 이는 세상을 뜻한다. 그 삶에서 구하시려 하늘의 희망, 생명의 빵을 주셨던 것이다. 그 육, 세상의 풍랑을 예수님께서 밟으시고, 누르시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냥 지나가시려고 하신다. 물론 의미가 있다.
하느님을 보신 것이다.
(탈출12,23) 23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지나시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은 거르고 지나가시고 파괴자가 너희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 어린양의 피, 곧 예수그리스도의 피다. 그분의 죽음으로 파괴자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탈출34,6) 6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공동번역성서)
=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사랑과 진실(진리)이 그 풍랑의 바다를 밟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풍랑의 삶을 누르신다는 것이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 성경 말씀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피로 모든 죄를 씻어주신 자비와 은총의 그 십자가의 사랑,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인간들의 계명으로 받으면, 하느님은 유령 같은 무섭고 두려운 신이 되어 버린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탈출3,14)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있는 나’- ‘야훼’ 같은 의미다. 구원의 약속, 사랑, 자비, 의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물 위를 걸으실 때는 왜 멎지 않았을까?~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같은 뜻, 같은 의미라는 말씀이다. 빵의 기적에서 율법, 그 육(죽음)의 빵을 받아 드시고(죽으시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빵으로 그들을 살리셨듯이, 예수님께서 그들 대신 죽으시고 그들을 살리셨다는 말씀이신데, 예수님께서 그 당신의 구원의 표징을 요나의 표징으로 말씀 하셨었는데---
(요나1,11-12.15 2,1)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 풍랑으로 곧 죽어야 힐 배 안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졌던, 그리고 그 죽음의 물에 사흘 낮과 밤을 있었던 요나,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죽어야 할 니네베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어 살렸던 그 요나가 구원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땅속에 사흘 낮과 밤을 지내신 그 예수님의 사흗날의 죽음과 부활, 그 구원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배(교회)에 오르시자 풍랑이 멎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루가11,32)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요나보다 더 큰 이, 요나가 한 일의 실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그분의 대속의 사랑을, 구원의 진리로 믿고 간직하는 것, 그 진리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것, 그래서 너와 내가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1요한4,10-11. 16-17)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예수님의 대속, 그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하는 것, 사랑의 완성이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 인간의 사랑은 심판을 거르는 그 완성을 이룰 수가 없다. 하느님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심판을 이기는 완성된 사랑이며 예수님 처럼 사는 것이다. 본문 사랑 앞에 ‘그’를 붙여 그 사랑, 그 하느님의 사랑으로 묵상 하지 않고 그냥 사랑으로만 받는다면 자칫 인간의 사랑으로 받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義, 善)과 상관없는 구원이 없는 세상, 율법과 같아질 위험이 있다.
(마태5,20)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인간의 그 자기 의로움, 그 사랑으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인간의 사랑, 의로움- 중요하지만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 계명을 둘로 주신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그 중에 하늘의 것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신명30,19)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천주의 성령님! 닫혀있는 저희 모두의 눈과 귀를 여시어 살게 하소서. 의탁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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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글방 / 나는 천주교(天主敎)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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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07:37 ㅣNo.143438
도란도란 글방 2021. 1. 6.
나는 천주교(天主敎)신자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1980년 8월에 로마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어언 40년이 넘어가네요.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지요. 신자로서 구역봉사자, 선교(레지오)활동, 사목위원 등~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 세상 나이 71세를 걷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코로나는 왜 이리 극성인지요. 몸조심 하세요.
엊그제 교리 신학원 출신인 형제분과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형제님은 올해 80세 이십니다. 저보다 9년 선배님이시지요. 문제는 성경에 대하여 나눔을 시도하면 손 사례부터 칩니다. 내가 옛날에 다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읽었고 성당에서는 주임신부님들도 자기보고는 회장님, 회장님 한답니다. 허기사 전에 꾸리아 단장에다 성당에서 주관하는 문체분과를 자가가 리포터를 작성하여 틀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랑입니다. ‘문체분과’란 토요일이 공휴일로 되다 보니까 밖으로 도는 신자들을 교회로 모으자는 의미에서 탁구회, 등산회, 당구회, 그림회, 서예회, 등등~세상 놀이들을 교우들의 동아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활성화 됐답니다. 참 훌륭하시지요?
성당이 왜 존재합니까? 성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파생된 종교입니다. 그걸 빼면 무속종교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접어두고 세상 놀이가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성경 동아리’ 좀 만들자고 건의하면 사제들부터 난감해 합니다. 왜요? 천주교는 전통과 교리가 우선되기 때문이지요? 성경 위에 교회(전통)가 있고 성모님이 있으니 예수님은 저 뒤로 제켜놓은 거 아닙니까? 그러니 성경을 파고들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미사나 교회(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아닌가요? 그러면 양다리 걸치자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상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굿뉴스에서 매일 사제님들의 글을 올리시는 교우님들, 그리고 직접 글 올리시는 신부님들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외면하시면 안됩니다.(일부이긴 하지만)
그렇게되면 우리가 믿고 다니는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 복이나 비는 ‘만사형통’을 기대한다면 굳이 성당 다닐 필요도 없지요. 왜 다녀요? 교무금,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 아깝지 않으세요?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은혜)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내는게 헌금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돈 내면 더 복받겠지? 하면서 내지는 않나요?
요즘 코로나가 심하니 이럴 때 내가 믿는 하느님에 관해서 좀더 공부해서 확고한 믿음을 쌓아야 합니다. 관념의 종교 행위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경고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성경을 통하여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고 하시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다 기록 되어 있습니다.(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고요. 그분이 왜 반드시 죽어야 했나요? 다들 아시지요? 정말로 아십니까? 관념으로 아시는 것은 아닌가요?
정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안다면 그까짓 종교행위가 뭐 대수겠습니까? 요한복음 17장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가 믿는 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 이라고요.
뭐 이따우 글을 올리냐고 하지 마시고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자고요. 지금까지 나는 어찌 했는가를~~저도 마찮 가지입니다. 죽을 때 까지 해도 다 못할 것 같네요. 다만 열심히 알도록 노력중입니다.
제가 여기 굿뉴스에 올리는 글들은 신부님, 목사님, 신학자들의 글들을 복사하거나 편집해서 올리고 있어요. 개신교측 것들은 전부 우리 천주교 성경으로 바꿔가면서 올리고 있어요. 이 작은 땅 덩어리에서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렇게 다른지, 서로 삿대질이나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서로 이단이래요. 뭐가 이단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편으로 만드는데 걸림돌들은 전부 이단이래요. 내편, 내가 만든 우상의 예수! 예수님이 하늘에서 가슴을 치시고 계실 것입니다.
‘나는 작아지고 예수님은 커져야 한다’고 세례자요한도 분명하게 말했지요? 누구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새겨들으시고 예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배워 가자고요. 이글 보시고 화내지 마시길 빕니다.
저와 대화를 나누던 형제님, 저와는 상종도 않을 자세입니다. 그분 그렇게 살다가 가시겠지요.
가서 정말 이면 어쩔 건데요. 그 때 아~~! 하며 가슴칠 건가요. 하느님의 심판대는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는 팻말을 기억하세요. 만일 아니라도 뭐 손해 볼 것 없쟌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하고 있는 이 사건을 꼭 믿으시고 확실한 하느님 백성이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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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기 (kcg1122) 22:30
찬미예수님! 김종업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평화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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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6,45-52)
http://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2&id=1997444&menu=4770
김종업 [rlawhddjq] 05:56 ㅣNo.143429
2021년 1월 6일 수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6,45-52)
제1독서<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화답송 시편 72(71),1-2.10-11.12-13(◎ 11 참조)
◎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복음<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마르6,45-52)
45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 공현 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4,11-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좇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8)
여기서 '두려움'으로 번역된 '포보스'(phobos)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큰 기적과 기적적인 일앞에 사람들이 보인 두려움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마르4,1; 루카2,9; 요한7,13).
또한 가까운 미래에 닥칠 고난과 환난으로 인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묵시18,10).
요한 1서 4장 18절은 후자의 의미로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두려움을 나타낸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하느님의 임재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진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영적 담대함을 가진 자는 심판 때 죄인들이 갖게 되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완전한'으로 번역된 '텔레이아'(telleia)의 원형 '텔레이오스'(telleios)는 '온전한','성숙한'이라는 뜻이다(1코린14,20; 콜로4,12; 야고3,2).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목표로 삼고 이루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삶속에 실현하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의 두려움조차 쫓아낸다.
한편 '쫓아냅니다'로 번역된 '엑소 발레이'(ekso ballei)는 '밖으로 내던지다'라는 뜻이다.
먼저 '내어'로 번역된 '엑소'(ekso)는 장소적 이동을 뜻하는 전치사로 '안에서 밖으로'라는 뜻이며, '좇아'로 번역된 '발레이'(ballei)의 원형 '발로'(ballo)는 '던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엑소 발레이'는 내부에 있는 어떤 것들을 밖으로 던져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완전한 사랑이 그 사람 내부에 있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생각과 마음 밖으로 던져 제거한다는 뜻이다.
참된 사랑안에 머무는 자에게는 궁극적인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그는 그것을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과 두려움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이 지배하는 자에게 두려움은 설 자리가 없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두려움은 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형벌이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지는 그분께 대한 합당한 존경의 감정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죄인들이 갖는 감정으로서 그곳에서는 반드시 합당한 형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 형벌을 인식함으로 인하여 더욱 더 두려워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 형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벌'로 번역된 '콜라신'(kollasin)의 원형 '콜라시스'(kollasis)는 신약에서 본절과 마태오 복음 25장 46절에 단 2회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이 단어를 최후의 심판의 날, 죄인들이 받게 될 영원한 벌을 가리킬 때 사용했다.
여기서도 '콜라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죄인들에게 내려질 영원한 지옥벌을 뜻한다.
한편 본절에서 사랑과 두려움을 대조하며 공존할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면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있어서 큰 장애물임을 시사하고 있다.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복음 (마르6,45-52)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1)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 11장 28~31절에 나오는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하고, 자신도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보는 순간 두려움으로 결국 물에 빠진 사건을 생략하고,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기사만을 묘사하더라도, 제자들의 불신앙과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적인 능력을 부각시키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르시니'에 해당하는 '아네베'(anebe; he climbed into; he went up)와 '멎었다'에 해당하는 '에코파센'(ekopasen; ceased; died down) 두 개의 부정 과거 동사가 접속사 '카이'(kai; and)에 의해 연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동사를 연결하고 있는 접속사 '카이'(kai)는 여기서 거의 동시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바로 바람이 멎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아드님 되심과 초자연적인 능력이 잘 드러나는 실례로서, 당신이 자연을 초월하며 주관하는 '자연의 주'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여기서 '놀라'에 해당하는 '엑시스탄토'(eksistanto; they were completely amazed)의 기본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두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가 결합된 형태로서 그 어원적 의미는 '어떤 물건을 밖에 두다'이다.
이 동사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정신을 잃다'는 의미가 되며, 성경에서는 '정신이 나가다','미치다'(2코린5,13), '놀라다'(사도8,13)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이 동사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정신이 나가 어안이 벙벙해하는 제자들의 상태가 어느 정도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6장 50절의 '겁에 질렸던 것이다'는 표현과 6장 52절의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사건을 믿음과 신뢰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제자들의 성숙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님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 마르 6,45-52 † 기적과 일상의 조화
2021.1.6. 복음묵상2
(마르 6,45-52)
45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그 기적의 장소를 떠나도록 재촉하십니다. 왜 그리셨을까요? (요즘 같으면 큰 성지가 됐을텐데 과연 지그의 성지가 올바른건지~) 결론은 5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 예수님은 왜 함께 가시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새벽녘에서야 그것도 물 위를 걸으시어 가셨을까요?
저녁, 밤(땅)에 존재들에게 아침, 빛(하늘)으로 다가가심입니다.
창세 1,(창조 이튿날)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 이튿날(욤 쉐니-짝) 예수님은 하늘의 물, 곧 생명수 그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늘 위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늘 위의 말씀(빛)이 아래, 땅의 말(어둠)을 밟고 오심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르는 땅의 물, 곧 영원한 생명수가 될 수 없는데도 거짓에 속아 그 땅의 물을 먹고 갈증에 허덕이는 그 사람의 말, 계명을 밟고 오심입니다.(티토1,14)
하늘의 덮으심, 대속의 말씀(물)을 땅의 선택으로 말해준 그 뱀의 거짓, 그 땅의 말(물)을 밟으심입니다.(창세3,15)
요한 4,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예수님의 물, 변하지도 마르지도 않는 영원히 솟아나는 살아있는 생수, 말씀입니다.
요한 7,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창세 2,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
= 네 줄기를 이루는 강하나 에덴, 하늘에서 내리는 네 줄기 물~~
구약의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신약의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 복음은 다 예수 그리스도 만을 말합니다. (루가 24,44 외 다수)
그 예수님께서 땅의 갈증을 해소 시키시려 오셨습니다. 땅의 물을 하늘의 물 인냥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묵시21,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땅의 죽음의 물을 살리시려, 그 죽은 물의 짝(욤 쉐니) 으로 오신, 윗물 그 예수님 이십니다. 곧 예수의 죽으심입니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아랫물의 짝으로 걸으심, 그 짝으로 오심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신기한 기적의 유령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모든 말씀 속에서 숨겨진 그 신의 죽음,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나다. -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탈출 3,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대속의 성자 하느님께만 죄인들의 용서-빛 , 생명,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 1요한 4,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가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내 십자가임을 깨닫고 믿고 의지했을 때 그 십자가의 사랑 그 예수님의 사랑이 짝으로 내 안에 들어와 예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 되는 것 우리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심판이 없어졌으니까요.
히브 10,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 졌습니다.
= 고해성사를 봐도 마음이 자유롭지 못함은 그리스도의 대속, 그 죽음, 그분의 피의 값, 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하시는 그 전지전능하신 사랑을 모르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의 행위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神)의 죽음으로 용서 받는 것입니다.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있는 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순종합니다.
히브 1,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오른쪽- 오른, 올바른 진리라는 뜻입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 기적에 묶이면 마음이 완고해 집니다.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난 그 기적을 본 이들이 마음이 완고해 져서 자신들의 짝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쟌아요? (요한11,53참조)
죽음과 부활은 짝입니다. 예수님(하늘)의 죽음과 부활이 죄인들의 생명이며 그 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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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글과 같이 "뉴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에 "김종업 로마노 형제님"이 올리시는 매일묵상 관련글 은
2021. 1. 9. 부터 '4.빛 뜨락' 2에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