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예수님
말씀 사도행전 22장 17-사도행전 22장 30절
요절 사도행전 22장 25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에 열심이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긍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받은 이방인 사도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들도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이방 땅으로 보내심)
17-18절을 보십시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사도행전 9장 2 갈라디아서 1장 17-19)라고 봅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 중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언해도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지 않을 테니 너는 예루살렘을 나가 멀리 이방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는 바울)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자신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스데판을 죽이는 것을 찬성하고 증인이 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반문하였습니다.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7:57-60).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습니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요한계시록 2장 13, 17장 6에서 처럼 순교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흠정역에서는 순교자(martyr)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이방인에게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차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예수님)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주님은 재차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을 반복하여 내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통하여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가 받은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전도는 바울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주신 예수님이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계만민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계 50억의 인구가 눈에 밟혔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이즘에서 벗어났고 헬라어를 잘하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없이하고자하는 유대인)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대인들은 격분하였습니다.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 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21:36). 그들은 바울을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렸습니다.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며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연속되는 세 개의 현재 분사형 떠들며,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리며는 격렬한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이 설치고 날뛰는 난폭한 군중들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표현은 극한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비통, 울분,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묘사됩니다(욥 2:12 삼하 16:13 계 18:19). 그들은 다만 즉각적인 분노를 표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대단하였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영접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강한 유대이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헛된 민족적 자부심이 강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보면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와 같습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고자 합니다. 이방인이 죽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으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세계 만민이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 선교를 영접지 못하자 하나님은 세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 전도를 하였지만 이방인 선교에 적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부 없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적격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쁨으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쓰셔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의 복음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는 자를 친히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넓은 마음으로 이방인 전도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좁은 유대이즘을 회개하고 넓은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해야합니다.
(바울을 채찍질하고자하는 천부장)
24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천부장은 히브리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메시지를 전했는지 몰랐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서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 아람어로 말했으므로, 천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군중들의 흥분으로 보아 바울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 끈에다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이 채찍질은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나 노예를 심문할 때 사용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채찍질을 가하여 심문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전도 활동 중에 매를 맞는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笞杖)을 세 번 당했고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합니다(고후 11:24, 25).
(로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바울)
25-26절을 보십시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바울은 자신을 치고자 가죽줄로 매자 로마 시민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때릴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게 핍박을 피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혐의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기둥이나 말뚝에 채짹질하기 좋은 위치와 자세로 묶었습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개 등짝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과 포르시안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았습니다. 로마인은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쥴리안 법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아무런 혐의도 없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한 채찍질을 가하려 한 데 대해 항의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을 통하여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빌립보 전도에는 그대로 채찍에 맞았지만 이번에는 채찍을 거부하였습니다.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로마 시민인데 어찌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행위였고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확인한 천부장)
27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
천부장이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묻자 그러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상당히 당황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례일텐데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에서 “네가” 의 위치가 강조적인 자리에 있는데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에 비해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단호합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라는 긴 겉옷을 걸침으로써 로마 시민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토가는 착용이 불편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등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예루살렘이었으므로 더더욱 토가 옷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인 바울)
28,29절을 보십시오.“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천부장은 많은 돈을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산 사람이나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특히 황제 글라우디오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치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인 것을 감안할 때(23:26)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의 생각에는 자기는 많은 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전혀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바울의 외양을 볼 때 어떻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의아하였습니다. 바울이 나면서 시민이라는 말은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문이 언제,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대체로 그 가능한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됩니다. B.C.171년경 다소가 헬라의 시(市)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바울의 선조도 그 엘리트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의 선조 중 누군가가 로마의 행정관이나 장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의 선조가 돈을 지불하고 취득하였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결박한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심문하려던 자들은 물론 심문을 명령했던 최고 책임자 천부장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천부장은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위 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습니다(사도행전 23장 26,27)
(공회 앞에 선 바울)
30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이튿날 천부장은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 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것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입니다. 천부장이 바울 사건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흥분된 군중에 의한 여론 재판을 피하여 유대 민족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습니다.
사실상 산헤드린은 바울을 적대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무리들이 가득한 반(反) 기독교 집단이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서의 심리(審理) 받는 것은 불리할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산헤드린에 서게됨으로써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23 장). 바울은 로마시민임을 이용하여 채찍을 피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이제 그는 공회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예수님)
사도 바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특히 우리에게 캠퍼스 지성인 복음화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학생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들을 인도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로마 시민된 자를 채찍질 하느냐
말씀 사도행전 22장 17-사도행전 22장 30절
요절 사도행전 22장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