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에서 ‘택시운전사’까지
하나.
지난 21대 총선은 민주주의와 극우냉전세력의 대결장이었다. 미래통합당은 낡아빠진 반공주의와 박정희 독재에 대한 향수를 무기로 정치공세를 펼쳤고 국민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민주당은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시킨 자유와 평등, 안보, 복지를 무기로 싸웠다. 국민들의 선택은 민주당이었다. 그것도 압승을 안겼다. 그동안 상당히 성장했다고 생각되었던 진보정당은 지리멸렬했다. 진보세력이 정확히 무엇을 꿈꾸는지, 어떻게 꿈을 실현할 것인지,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우리는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이만큼 변하는데 무려 30년이 걸렸다.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소신’이나 ‘비판’은 죄악시되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불평불만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반발하면 감옥행이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식 재판도 없이 사형 당했고 또 상당 수 인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 당했다. 그런 세상을 탈 없이 사는 방법은 입 닥치고 귀 막고 눈을 꼭 감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30여 년을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입을 꾹 닫고 살았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귀머거리가 정상인처럼 생각되었고, 벙어리가 아닌데도 벙어리처럼 사는 것이 정상처럼 착각하며 살았다. 정부가, 권력이 가리키는 곳만 바라봤고 하라는 대로만 했다. 선거로 뽑은 국회의원들이 국민들 위해 군림할 때도 손해 볼까봐 입단속 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경험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정부와 권력이 지목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선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광주민주항쟁과 6.10항쟁이 가져다준 깨달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은 너무 오랫동안 독재에 익숙해져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옳다고 생각한 대로 실천하는 데 미숙했다. 그러다보니 오랜 세월 개혁과 반개혁, 혁명과 반혁명의 파고를 넘나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했다가도 제도언론과 재벌, 극우세력에 휘둘려 이명박과 박근혜 같은 유신잔당들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내 한 표가 나의 삶과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가치관, 세계관 없이 국회의원을 뽑아 국회로 보냈다. 그래놓고도 금방 불평하고 욕하며 정치를 외면했다. 박근혜와 수구 냉전적 사고에 젖은 세력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땅을 치며 후회했다. 촛불을 들었다. 다시는 속지 않을 꺼라 다짐했다.
둘.
5.18 광주민주항쟁 40주년이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70년 넘게 친일잔채청산을 노래처럼 불렀어도 아직까지 속 시원히 청산하지 못했듯 광주민주항쟁도 군대투입명령자, 발포명령자, 헬기사격 명령자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국가를 지키는 국민의 군대에게 개죽음을 당하고 어디엔가 묻힌 열사들의 시체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보수언론, 수구 꼴통들은 합창을 하듯이 40년이나 지난 일을 자꾸 들춰 사회를 혼란을 야기한다며 지랄을 떨었다. 그들도 찔리는 것이 있거나 자기 자식이 죽지 않아서 그런 소리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때 가장 큰 특혜를 받았으니 그렇게 나올 만도 하다. 지 자식, 지 애비 에미가 죽었으면 그러지 못할 텐데.
다행히 촛불혁명 덕분에 정권이 바뀌었다. 광주항쟁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다는 대통령은 5.18기념식에서 철저한 진상조사와 ‘처벌 뒤에 용서’를 말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 말에 감격했다. 감동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눈물이 난다. 그만큼 한이 서렸다. 진실이 호도되고 죽은 자를 부관참시하고 찌른 곳을 다시 찌르는 일이 반복되면서 말랐던 눈물이 신기하게도 펑펑 쏟아졌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5.18기념으로 특집방송을 했다. 오래 전 ‘윤상원 열사’ 다큐를 할 때는 감격과 감동을 했다. 죽었던 형님이 다시 살아온 것 같은 감동이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강도는 조금 쎄졌지만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을 할 때는 정권 눈치 보느라 민주화운동 관련 방송물은 현저히 줄었다. 하기야 목숨 줄이 정권에 있으니, 아부 아니면 죽음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언론 아닌가? 정론직필(正論直筆)을 부르짖는 놈들이 아닌가? 최소한 그들 선배들처럼 ‘펜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부르짖지는 못할망정 언론인으로 기자로서 최소한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MBC에서 ‘김군’이라는 다큐 영화를 방영했다. 지난 해 개봉한 영화다. 가수 이은미는 작곡가 김형석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편곡해서 불렀다. 수익금은 전액 광주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부한다고 한다. 수많은 연예인들도 소신발언을 했다.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광주민주항쟁 40주년기념식에 참석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1980년대 5월 어느 날 광화문과 퇴계로 어느 골목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불렀던 그 노래를 삼천만이 시청하는 텔레비전 안에서 불렀다.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종북좌파 프레임을 씌우고 지랄을 떨던 거에 비하면 분명 달라진 풍속도다.
셋.
내 주변에는 5.18민주항쟁과 관련된 사람들이 여러 명이었다. 대학선배 장목사님은 당시 시민군이었다. 광주에서 재수를 할 때 광주민주항쟁에 참가했다. ‘형처럼 선한 사람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었어요’라고 물었더니, ‘그 상황에서 총을 들지 않았으면 선한 사람이 아니지’라고 대답한다. 형은 다친 사람을 구호하고 광주를 학살하러 한 발 한 발 조여 오는 계엄군에 맞섰다. 도청을 지키고 있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잠시 총을 내려놓고 담양 고향집에 다녀왔다. 그 사이에 전남도청이 진압 당했다. 어머니 덕분에 형은 살아남았지만 죽은 동지들에 대한 부채의식까지 내려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복판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교회 십자가를 붙들고 광주민주항쟁의 진상규명과 먼저 간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며 기도했다.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 효덕교회 이 목사님은 광주민주항쟁의 계엄군이었다. 입대한 현역병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군대가 그들이 지켜야할 국민들을 학살하러 광주로 갈 때 함께 갔다. 그의 총구에 몇 명이 스러졌는지 그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항쟁과정에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해마다 오월이면 그도 아팠다. 마음이 붕 떠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백했다. ‘내가 계엄군이었다’고, ‘내 손으로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죽였다’고, ‘할 수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나는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다. 신앙인이다.
이하사는 군대에서 내 쫄다구였다. 5.18당시 그도 광주에 있었다. 설마 국가가 아무런 죄도 없는 국민들을 죽일까 싶어 분위기가 뒤숭숭한데도 광주로 들어왔다. 시외버스에서 내리려는 순간 콩 볶듯이 총소리가 났다. 그의 앞에 내리던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튀어 오르는 유탄에 맞아 눈 앞에서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총은 들지 않았지만 그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입대를 했다. 그는 5월이 되면 그 상황을 틈날 때마다 말해주었다.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었다고, 간첩은 없었다고, 그들은 억울하다고. 1980년대 초반 군대에서 광주민주항쟁의 진상을 말했다가는 죽은 목숨인데도 그는 입을 닫지 못했다.
올 초 중국 아리랑로드 답사에서 만난 명숙누님은 광주민주항쟁의 증인이다. 나는 그가 누군지 정말 몰랐다. 푸스스한 옷매무새, 초점을 자주 잃는 눈동자, 종잡을 수 없는 말투는 분명 비호감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았다. 5.18당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공격을 받고 아까운 목숨들이 죽어가던 시간 군용 짚을 타고 광주시내는 돌며 가두방송을 했던 그 여성이었다. 그에게도 광주는 잊고 싶은 기억이었던 가보다. 말은 안 했지만 ‘계승’보다는 잊기 위해 몸부림친 듯해보였다. 그러다가 광주는 잊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밝히고 널리 알려야할 대상이라는 자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얼이 나갈 만큼 바쁘게 산다. 안동에 거주하면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광주를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말하고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화해와 상생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광주를 경험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진상을 말하려들지 않는다. 제주 4.3사건을 경험한 제주도민들이 수 십 년 동안 입 열기를 거부하고 아픔이 재현될 것이 두려워 선거 때마다 여당을 찍었듯이 광주 사람들도 할 수만 있다면 아픔을 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애써 태연한 척한다. 하지만 5월이 되면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날로 되돌려 진다. 용서를 구하는 자들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며 용서라도 해줬다면 가슴 한 복판의 응어리들이 풀어질 텐데 이놈의 핏빛 응어리는 시간만으로는 도저히 풀어지지 않는다.
넷.
1982년 봄, 어리버리 신입생을 데리고 선배는 영등포 당산동의 붉은 색 건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방에는 잔뜩 긴장한 젊은이들 열 댓 명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진보학자 이영희선생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처음 봤다. 첫 경험은 충격(衝擊)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을 잘 몰랐다.
광주를 경험한 선배에게서 처절했던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다. 하지만 간헐적인 목소리만으로는 진상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군대에서는 후임병사의 입을 통해 광주를 들었다. 강제징집당한 성균관대와 서울대 출신의 선배와 후배병사들도 광주를 말했다. 하지만 디테일이 떨어졌다. 누구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1986년 복학한 대학은 학생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었다. 진보적 이론들이 대학가를 춤췄다. 4월이 되면 시위가 시작되어 5월에는 하늘과 대지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운동권에서는 5월이면 어김없이 ‘광주비디오’를 상영했다. 비디오를 시청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였지만 나누는 대화는 자못 뜨거웠다. 비디오를 시청한 뒤에는 거리로 뛰어나가 주먹을 불끈 쥐고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 ‘광주학살, 독재원흉 전두환을 타도하자’와 같은 구호도 외쳤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정권이 무너졌다. 그 해 대선에서 노태우가 승리했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은 이전과 같은 폭압적 정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5월이 되면 광주 관련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윤상원’은 그 시기에 시청한 가장 뭉클했던 다큐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광주관련 다큐가 방영됐다. 최근에 본 것으로는 위대한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관련 타큐이다.
‘화려한 휴가’는 2007년 김지훈감독이 만든 광주관련 극영화다. 그 전에도 ‘꽃잎’이라던가 ‘박하사탕’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은유와 비유가 뒤섞여 본격적인 광주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화려한 휴가’는 1997년에 발표된 한태훈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가 상영되자 반응은 뜨거웠다. 유료관객만 685만 명을 동원했다고 하니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영화는 27년 뒤에 사는 사람들의 ‘광주’에 대한 시각과 해석을 담고 있다. 죽인 자들의 회개와 죽은 자들의 용서가 영화 속에는 담겨 있지 않다. 그만큼 아프다.
10년 뒤에 만든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이전 영화와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살바도르’라는 영화에서처럼 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힌츠페터 기자와 그를 태우고 광주까지 갔던 택시운전사의 이야기가 줄거리지만 그 속에는 투쟁을 만들어갔던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기자와 택시기사의 무용담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 심지어 힌츠페터임을 알고도 모른 척 보내줬던 계엄군 장교까지도 광주민주항쟁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광주민주항쟁의 지도부가 있었던 최후항쟁지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 망월동 묘지는 5.18민주항쟁의 성지다. 대학시절 5월이면 각 대학에서는 앞 다투어 망월동묘지 참배를 떠났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망월동묘지는 ‘국립묘지’로 탈바꿈했다. 5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는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러진다. 파리 코뮌의 최후 항쟁지이며 혁명에 참여한 민중들이 총살당한 페르라세즈 공동묘지가 시민들에게 기려지고 ‘인터내셔널가’가 불러지는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항쟁의 중심 구 전남도청은 도청(道廳)이 무안군으로 이사 간 뒤 오랫동안 ACC국립아시아 문화전당이라는 문화예술전시장으로 사용됐다. 이것을 2021~2022년 사이에 원형 복원하여 광주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역사적 장소로 사용한다고 한다.(202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