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보' 라는 것은 '교만'
<죄> = <교만> = <욕심> = <마귀>
죄는 교만에서 오고, 교만은 욕심에서 오고, 욕심의 주인공은 마귀 > ] 위무위
[ moowee 17.04.19. 23:32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제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모든 걸 주관하시도록 >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이들의 좋고 나쁜 것들보다 자기 안의 것들을?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100% 내맡긴 이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모든 걸 주관하시도록> 이끌어주십니다.
100% 내맡기지 못한 이들은 아버지께서가 아니라
지가 <지 마음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일 뿐입니다.<루카 6>
"39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 13, 48)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100% 완죤~히 다 내맡겨드린 이들은
<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 >릴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랑하는 지혜의 하느님께서
< 좋은 것과 나쁜 것 >을 분별할 靈眼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외의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 100% >를 외쳐왔는지요?
100%가 바로 < 거룩한내맡김 >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
99%는 거룩한내맡김이 아니라 < 불순한 내맡김 >입니다.
단 < 1%의 불순물 >만 섞여도 그것은 < 不純한 것 >입니다.
하느님께 바쳐지는 그 어떤 것이든 단 1%의 불순물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순수(純粹) 그 자체이신 < 순도 100% >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순수1 純粹
1.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이 없음
2.마음속에 사사로운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이 없음 <다음사전>
* 1. 잡것 → 내뜻
* 2. 사사로운 욕심 → 내뜻, 불순한 생각 → 내뜻
100%100%100%100%100%100%100%100%100%100%
100%100%100%100%100%100%100%100%100%100%
100%100%100%100%100%100%100%100%100%100%
100%100%100%100%100%100%100%100%100%100% ]
[moowee 16.08.06. 09:44
<내가 변하는 길은 완전한 내맡김이지요>
<완전한 내맡김>이란,
지가 지금까지 그토록 이 독수리 손가락이 마르고 닳토록 두들겨 온,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를 다 내맡기는 것을 말하지요.
그렇게 내맡긴 영혼은
그때부터 <편견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지독한 편견에
날이 갈 수록 점점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나중에는 다른 한쪽을 도저히 그냥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마귀를 말입니다.
그리하여,
<매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눈을 갖자.>고
외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이미 완죤히 한쪽,
주님께 치우친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편견에 치우치십시오, 편견에, 거룩한 편견에
그리하면 매사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됩니다.
완전한 편견, 거룩한 편견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네 눈 에서 들보를 빼내 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 에서 티를 빼낼수 있을것이다."
(마태 7,5 ) 고 말씀 하신 것이다. >
여러분의 눈에 들보를 채우십시오, 하느님이라는 엄청난 들보를
그래야 세상을, 모든 일을 올바로 볼 수 있고,
그래서 형제의 눈에서 티만이 아니라
형제의 들보까지 빼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벌거벗은지금 3부
비이원적 사유가 아닌 것들
무소 17.12.21 15:22
비이원적 사유는
창조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역설과 모순과 함께 살고,
신비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리하여 많은 종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자비, 연민, 자애로운 친절, 인내, 용서, 겸손 등을
실천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수치스런 과거나 목가적인 미래로 끌려가지 않으면서
벌거벗은 지금을 살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중 종교 대부분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그 안에서 이와 정반대로 배우며 자랐다.
자기와 남들의 죄, 과오, 허물을 낱낱이 들춰내어 심판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들으려 하는 대신
움켜잡고 미워하고 제거하고 때로는 다른 곳에 투사한다.
그리하여 예수가 말했듯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마태7,3) 덤비는 것이다.
이는 많은 종교적 인물이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