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9
출애굽기 20장 17절
십계명의 아홉 번째 명령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않아야 하며, 또한 헐뜯거나 모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아야 하고, 오히려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마귀의 일로 알아 피함으로써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가 임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9계명을 통해 금하고 있는 바라면, 9계명의 통해 명하는 바는 법적인 송사에서와 다른 모든 일들에서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제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 대하여 살펴볼 것인데, 출애굽기 20장 17절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사실 우리는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출20:14)는 말씀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고 할 때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도 다루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9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오로지 간음과 또한 그와 같은 상스러운 죄만을 금하십니까? 우리 몸과 영혼이 모두 성령의 전이므로, 우리가 몸과 영혼을 순결하고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 몸짓, 말, 생각, 욕망, 그리고 그리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8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리문답 110문에서 8계명에서 금하는 바가 무엇인가 할 때 도둑질과 강도질 등 국가가 벌하는 것만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웃의 소유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사용하는 모든 악한 속임수와 계교들을 도둑질고 간주하신다고 하고, 또한 그가 베푸신 은사들을 남용하거나 낭비하는 일도 금하신다고 하면서 외적인 부분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 일반적인 법칙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할 때 십계명의 각 계명이 이성과 의지와 마음과 삶에서 내적이며 외적인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즉 외적으로 도둑질하지 말라고 할 때 내적으로 도둑질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것도 도둑질과 다를 다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굳이 열 번째 계명이 필요한가를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르시누스는 이 계명이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열 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이요 해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1559) 2권 8장 49항에서 열 번째 계명이 나머지 다른 계명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의도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심이 있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연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도 언급하자면 214문, 215문에서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214문) 목사: 만일 모든 율법이 네가 말한 대로 영적인 것이라면, 즉 다른 모든 계명들이 외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마음의 성향까지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왜 이 계명에서는 특별히 후자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가? 아이: 주님께서는 다른 계명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다스리시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떤 탐욕과 욕망을 품고 있기는 하나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율법을 부과하시기 원하십니다. (215문) 목사: 그대는 생각 속에서 신자에게 다가오는 아주 미세한 유혹까지도 죄라고 생각합니까? 비록 그가 이에 대해 저항하고 결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아이: 모든 악한 생각들은, 비록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육신의 결함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계명이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며 괴롭히는 탐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할 때 실제적인 도둑질뿐 아니라 도둑질하고자 하는 마음을 금하는 것이 8계명의 내용이라면, 이런 의지의 찬동 없는 탐심까지 금하는 것이 10계명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생각일지라도 거기에 탐심이 있다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꿈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꾸게 됩니다. 그러나 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다면 내 의도와 상관없지만 상관없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0계명 해석은 이렇습니다. 제80문. 제10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해 완전한 만족을 요구하며(히13:5, 딤전6:6),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사랑의 마음을 요구합니다(욥31:29,, 롬12:15, 딤전1:5, 고전13:4-7). 제81문. 제10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을 금하며(왕상21:4, 에5:13, 고전10:10), 우리 이웃의 좋은 일에 대한 시기와 슬픔(갈5:26, 약3:14,16) 및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한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롬7:7-8, 13:9, 신5:21)을 금합니다. 즉 10계명에서 탐심을 금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불만족하지 않고 완전한 만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아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10계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13문. 제10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게라도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작은 욕망이나 생각도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고,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또한 모든 의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시19:7-14, 139:23-24, 롬7:7-8).
분명한 것은 10계명의 목적과 의도가 내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 이웃과 그들의 재물 등 다른 모든 계명들에 포함되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욕망과 욕구에 대하여 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욕망과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잠을 자지 못하면 잠을 자고자 하는 욕구도 생기게 됩니다. 심지어 성경은 영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시편 84편 2절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러한 욕망과 욕구를 10계명이 금하고 있는 탐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먹고 마시는 문제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만 그것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이 채우기 위해 탐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고, 잠을 자야 될 사람으로 만드셨다면 그런 기본적인 욕구까지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성경이 금하고 있는 탐심은 무엇인가?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정욕이라고 부르는 탐심을 금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의 이웃과 관련된 기쁨이나 유익에 대해서 가지는 모든 불법적인 욕구를 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욕구들 가운데서 우리 이웃을 해하려는 모든 다른 욕망과 바람을 금한다는 것입니다. 우르시누스 역시 여기서 금하고 있는 극단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 정욕을 금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정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금하는 것들에게 이끌리는 성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두 번째 돌판 부분의 요약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쪽으로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에게 해로운 것들을 바라고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이요, 이 정욕을 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범을 벗어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 상태는 아담의 타락 이후 이런 마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여러분, 죄인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죄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죄의 결과 더럽다고 여길 만한 모습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러운 것을 보더라도 그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특히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 펠라기안주의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원죄를 인정합니다. 아담의 첫 범죄 이후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죄책을 인정하고 부패를 인정합니다. 부패의 결과로 항상 자범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펠라기안주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원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일 뿐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대표성의 원리,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요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의 대표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모방이라고 합니다.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에 좋은 환경, 좋은 모습만 보이면 죄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외부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이 마음의 정욕이 절제되길 원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10계명에 대한 해석으로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불만족하지 않고 완전한 만족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내용을 주목해야 하는데,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 13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 살핀 바 있습니다. 111문.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나, 해도 괜찮을 경우에는 어디서든 이웃의 유익을 증진시키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나도 남에게 그렇게 대하며, 가난한 자들의 형편을 도울 수 있도록 신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가난한 자들의 형편을 도울 수 있도록 신실하게 일하는 것까지 명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일차적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은 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이웃 사랑의 정신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럼 가난한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무조건 부한 사람의 도움만 받기를 바라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훈련에서 백이면 백 넘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은 언제나 자족이 아니라 불평과 불만을 토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누구의 도움을 받느냐?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자족할 수 있도록 도와달리고 구해야 합니다.
자족 훈련과 관련해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이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창15:1).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은 가장 큰 상급이요,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분으로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길 원하십니다. 자족하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극힌 큰 상급, 가장 큰 상급, 최고 상급이 되신다는 것은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주어졌다 해도 그 모든 것과 하나님을 비교할 수 있는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은 주셔도 주신 자를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이고, 혹 주신 것을 거두시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거두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신 자가 아니라 주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거두신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원망 불평한다면 그러한 모습을 어떻게 하나님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심을 마음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성육신하여 우리 죄 짊을 대신 지시고 죽으시는 것을 통해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 놓으실 정도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길 원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만을 최고 상급으로 여기면서 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10계명과 관련해 앞서 말했던 부분을 재차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가톨릭 교리 가운데 현세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어떤 욕심이 생길 수 있지만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고의성이 없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성적인 것들은 죄가 아니다. 정욕은 본성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죄가 아니다. 그러나 정욕이 본성적이라고 말할지라도 타락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 타락 이후 우리 본성에 결합되었다면 타락의 결과 본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앞서 꿈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꿈은 우리 의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이 꿈을 꾸고자 한다고 해서 꾸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무엘 루터포더는 그의 요리문답에서 죄악된 꿈은 우리의 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꿈으로까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의성이 없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것들을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10계명 전체를 통해 누구도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차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요구하시는 바의 목적은 요리문답 113문이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게라도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작은 욕망이나 생각도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고,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또한 모든 의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누구도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물론, 율법 중 하나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첫 부분부터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1문에서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2문에서는 이 위로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3문은 그대의 비참함을 어디에서 아는가 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서 안다고 답합니다. 4문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관련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답합니다. 그리고 5문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절대로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편 인류에 대한 내용이라면 신자는 어떠한가? 그 질문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4문입니다.
114문. 하지만 하나님께로 회심한 자들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지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순종을 그저 약간 시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전7:20, 롬7:14-15, 고전13:9, 요일1:8-10). 그러나 그들은 순전한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 중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좇아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시1:1-2, 롬7:22-25, 빌3:12-16).
사람이 무죄의 상태일 때,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기 전에는 온전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에게는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엡2:24). 그러나 변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할 수도 있었지만, 불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했다고 증거 합니다. 무죄의 상태에서 죄의 상태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 부패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본성은 율법이 요구한 바를 이행할 능력이 전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순종을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의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창세기 8장에서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3장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또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그러나 방금 읽은 에베소서 2장은 죄의 상태에 있는 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은혜의 상태로 옮겨놓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2:4-7) 이들이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조금 뒤에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그러나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바 내적이며 외적인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43편 2절에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왜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히 순종할 수 없는가? 우리 안에 부패함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완전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함으로 죄를 짓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않은 자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두 부류 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중생한 자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십니다. 그 목적을 위해 죄를 짓지만 말씀으로 죄임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또한 그 말씀이 씨앗이 되어 참된 믿음의 증거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반면 중생하지 않은 자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가시적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집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비록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지만,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순종을 그저 약간 시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순전한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 중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좇아서 살기 시작합니다. ‘고르반’처럼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쳤다는 것으로 부모에게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전부를 순전한 뜻으로 좇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할 것이고, 그때는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죄가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도 없는데, 왜 율법을 주셨는가? 왜 엄격하게 가르치도록 하시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입니다.
115문. 이 세상의 삶에서는 누구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 계명들을 그렇게도 엄격하게 선포하십니까?
답. 첫째로, 평생토록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 더 알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며(시32:5, 롬3:19-26, 7:7,24-25, 요일1:9), 둘째로,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 그 완전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게끔 끊임없이 수고하고 또한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전9:24, 빌3:12-14, 요일3:1-3).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명하시는가? 평생토록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 더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본성의 결점과 불완전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낮아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참된 회심과 믿음에서 계속 진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명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진지하게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십니다.
또한 이 세상 삶이 끝난 후 완전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게끔 끊임없이 수고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율법은 신앙의 규범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규범이 되기도 합니다. 즉 완전히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명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덧붙여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이 세상 삶 가운데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게끔 끊임없이 수고하는 만큼 또한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시도록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살필 것입니다.
이 외 교회에서 율법을 해설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가 어떤 분이신지도 가르칩니다.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그 깨달음은 오직 교회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말은 교회만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모든 인류에게 주셨지만, 본성이 이미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누구도 도덕법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지만, 그들로부터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깨달음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