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는 동안
최 호 림
앞산이 점점 흐려지고
귀 기울이는 새소리가 멀어진다
계단을 오르다 쉬고
짐을 들면 다리가 투덜거린다
토끼들이 뛰어가는 거리에
거북이 등에 매달려 가는 굼벵이다
쏘가리처럼 쏘다니던 때 있었다
가슴앓이 사랑도 했고
만난 인연에 울기도 했다
주어진 것에 고마워하며
탈 없이 가계를 꾸려온
어스름 속에서 보면
아직도 아름다운 여자와 산다
나이테가 손등을 기어올랐다
가끔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린다
자식들 다 건강하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다
가난한 사람
기대는 그림자도 작다
위로가 사라진 세상
정 하나에도 울고 웃고
잠시 만나고 헤어져도
아쉽고 섭섭하여
오래토록 잊지 못 한다
늘 벌판 같이 쓸쓸해서
자주 속으로 울고
그리움과 기다림에 살며
손 한 번 잡은 따뜻함도
잊지 않고 기억에 둔다
바람처럼 스처 지난 인연도
소중히 간직할 줄 안다
밥 한그릇을 나누어도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늘 한쪽은 젖어 축축하다
시인으로 살다가
작고한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지만
모두 다 내 그리움 속에 살아 있다
시 한 편 남기려고 한 생을
희로애락 속을 헤매 다니던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잠 못 이루던 밤이 계속된다
이승에서 마지막 작별은
한 편의 시와 같았을까
시인들은 떠나고 없지만
남긴 크고작은 흔적들은
때마다 꽃과 새노래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울리고 웃기면서
더러 행복한 열매로 익어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
이목구비 없어도
이름을 달고
몸 하나로
세상을 보고
새소리를 듣는
모래는
땅에,
몸 하나로
어둠을 밝히고
이슬을 굴리는
별은
하늘에,
그 사이에
이목구비 반듯한 인간이
모래와 별을 품고 산다
短 詩
1
고향아,
나 떠나 살면 안면을 바꾸는가
2
높은 나무 우듬지에 둥지를 튼 까치를 굽어보며
고층에 사는 나여!
3
나무에게 붙박였다 하지 마라
인간도 찾아가 기대어 쉰다
공원에서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켜는 것이
부르는 손짓으로 보였던가
사방에서 비둘기들이 날아온다
일순 나는
비둘기 자식을 거느린 아비가 된다
귀가 밝아, 눈이 밝아
멀리 서도 듣고 보고 날아와서
늘 하던 대로 부리로
바닥을 부지런히 쪼아 대며
꽁지깃을 까딱거리고
애교를 뿜뿜 보내며 주위를 맴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가
한 줌 던져줄까 기다리다가
얻을 게 없다 느끼면 미련 없이
저쪽으로 날아 가버린다
부모 곁을 떠나는 자식 같이
먹이 앞에서는
인간이나 비둘기가 다르지 않다
기다림을 뿌리 뽑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림이 있어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면서 점차
둘 사이가 멀어져 갔다
그러다보니 내게
1도 관심이 없는 그대
남 주기엔 아까웠던가.
왜 여기까지 질질 끌어 온 것인가
몰랐으면 몰라도 알았으니
극단의 처방을 써야 했다
다시 만나지 않도록
기다림의 뿌리를 뽑고
생각의 그림자를 지웠다
상처는 아무리 깊어도
세월이 약이라고
서서히 아물어 갈 것이다
잘못 된 일이 많았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헤어짐의 이유
사랑하는 사이라면 하루에
5 분은 내어줄 수 있겠지
5 분이면 카톡 몇 줄이나
간단한 안부도 나눌 시간
하루에 단 5 분을
내게 쓰지 않고
사랑의 1순위라니요
무슨 일이 그리 바빠
5 분의 짬을 안 내면서
그대 바라기인 내게
올인 한다고, 천만에요
한 주일에 5분도 아까워
그냥 지나친 그대여!
사랑의 버팀목
어머니의 나이를 두 번 지나고
세 번이 가까워지는 동안
내게는 그리운 어머니였다가
딸이 였다가 손녀가 되어 간다
나이 먹지 않는 어머니 앞에
나는 늙어가는 아이
지금도 어머니를 부르면 눈물나고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움에 떤다
그래서일까
기 한 번 펴지 못하고
뒷북이나 치며
사랑을 모른채 키만 자라서
나 혼자는 똑똑하고
둘이면 어벙하고
셋이면 바보가 된다
사랑의 버팀목 없이
제 멋대로 뻗은 나무 같이
작은 사랑 노래
나비가 앉으면 바위도 꽃이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머물면 사막도 낙원이다
* 윌리암 데이비스의<본보기>를 읽고 |
인간 시대 2
전쟁으로 잃은 지아비를
자결로 뒤 따른 지어미나
끝까지 오랑케의 마수에서
절개를 지켜낸 여인에게
나라에서 내린 열녀비는
가문의 영광으로 빛났습니다.
아직도 그 하늘 아래 살건만
배우자를 두고도 딴 짓을 일삼는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열녀비가 세워진 자리에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드나들 때마다 바뀌는 짝이
1순위 애완동물이라 합니다
24.1.22
노을
앞질러 가는 강물을 보았는가.
천천히 걷는 도랑을 보았는가.
아무리 적막해도 사막은
별들과 이웃해 외롭지 않다
종은 운다고 하지
서산마루에 머물고 싶은 해가
끝내 두고 가는 그림자
24.1.18.
옹이
나무는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처럼 눈을 갖고 싶다고
그래서 신(神)이 없는 나무는
자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눈을 달게 해 달라고
간절함이 사무칠 때마다
가지와 잎들이 손을 들어 환영했고
굵은 가지에서 뻗어 가는 가지에
그루터기로 박힌 상처가 아물어
단단한 눈을 갖게 되었다
눈을 갖고도 어둡게 살며
감당할 수 없는 누명과 억울함
삶의 바닥에 버려진 실업의 고통이
화로 뭉친 덩어리가
셀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인간에겐 파내야 할 아픔을
몸 바꾸면 나무에겐
간절한 바람의 눈인 것이다
24.1.16.
행복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고
일용할 양식과 돌아가 쉴 곳이 있다면
부귀 권세 명예는
스스로 옭아매는 사슬
없어질까 잃을까 더럽혀질까
한시도 맘 놓을 수 없는 짐
가질 것 다 갖춘 행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림자가 아니라
디오게네스의 햇살처럼
욕심을 버려야 비로소 얻어지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24.1.13.
봄날
수심을 환히 밝히는
벚꽃 핀 강변을 따라 걸으며
강물에 발 담근 산 숲에서
새소리 바람소리를 꺼낸다
그림자가 짙어질 때까지
하늘은 해를 굴리고
앞산의 뻐꾸기는
천 년 메아리로 운다
23.1.12
땅
하늘은 영혼의 세계
땅은 육신의 세계
하늘의 소식을 눈비로 듣는다
구름처럼 살고 싶지만
나를 믿고 따르는
인간과 동식물들
앞을 분간 못하는 미물까지
일일이 보살피다 보면
밤낮이 모자라도록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나는 바닥으로 앉아
바닥치는 소리가 좋다
딛고 일어서는 힘이 되는
이 지구를 사랑한다
24.1.12.
폐가
복사꽃 피면 복사꽃 잎에
능금이 익으면 능금 알마다
기대고 싶은 지붕이
한사코 그 쪽으로 기울고 있다
턱밑까지 몰려든 잡초
온기 가신 몸에 골다공증이 왔는가
기둥 대들보 서까래 문틀을 받치고 선 관절이
조금씩 삐걱거리며 주저앉는
주인이 떠나고 풀 죽은 빈집
정신 줄을 놓지 말라고
앞산의 뻐꾸기도 힘을 보낸다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함께 해 온
해와 달과 별들, 새소리 바람소리,
풀을 풀 , 나무는 나무들끼리
잘 살았다고
서로 다독이며 잘 살고 있다고
옛 이야기에 그리움을 수놓으며
울타리처럼 곁을 지키고 있다
24.1.11.
돈
내 손을 떠나면
내 돈이 아닙니다.
빌려주거나
은행에 저축해도
내 돈이 아닙니다.
내 손에 들어와야
비로소 내 돈입니다.
천재지변으로 모은 성금이 얼마인지
어떻게 쓰이는지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때 묻은 돈을 모아
내놓은 장학금이 제대로 쓰여 지는지
눈 먼 돈으로 둔갑하여
엉뚱한 주머니를 채우지 않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부 지원금도 마찬가지
돈이
인간 양심을 죽이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24.1.8.
이 시대를 살다.6
파리 죽이듯 사람을 죽인다.
심심해서 장난삼아 죽이고 강해 보이려 죽이고
거슬린다, 죽이고 닥치는 대로
묻지 마 폭행으로 죽인다.
헤어지자 해서 죽이고
스토킹하다 죽인다.
층간소음의 갈등으로 죽이고
보험을 노리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그릇된 자식 사랑에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까지
살인자가 되어도
몇 년 살고 나오면 그만이라는
죽은 자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나
뉴스 하나 뜨다가 지면 그뿐
위로가 사라진 세상
단지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살인자의 가족에게
연좌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24.1.8.
달밤
옛날 같은 밤에 고즈넉한 그리움 따라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전혀 헤어지기 싫었다. 그림자도 또렷해지는 적막의 수심을 딛
고 길 아닌 천리를 이대로 끝없이 가고 싶었다. 그냥 잠들기엔
너무 아쉽고 허전할 것 같아 가슴 벅차는 설렘으로 둘만이 오
롯이 남아 남루하고 가난해도 사랑의 넉넉한 품을 열어 주는 밤
서로 스며든 만큼 깨어나고 싶지 않는 깊어진 꿈속이었다.
24.1.8.
이 시대를 살다 5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서로 잘났다고 설치며
양보 없는 기싸움을 합니다
자기 자(尺)가 가장 정확하고
자기 말이 법이라는 듯
모자라거나 비틀린 이목구비는
다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신이 좋아하면 사기꾼도
살인자도 두둔하면서
피해자를 두 번 죽이기도 합니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잠을 자는데
사람은 배가 부를수록 눈에 불을 켜
남의 먼지까지 털어 난도질합니다
그런 잘난 사람들 속에서
못 난 사람 하나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습니다
24.1.6.
이 시대를 살다 4
끌려 가 죽기까지
거대한 공포의 용광로였다
지레 영과 육이 갈기갈기 찢기는
처절한 고통을 맛 보아야 했고
하늘에 사무치도록 억울해도
거부할 수 없었기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끝내 돌이 되어
허공에 박힌 눈
마루타였다*
* 마루타: 일본군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의 희생자들
24.1.5.
신 인간 시대 . 4
한 때는 오랜지족이 스포츠카를 몰고
거리마다 돈을 뿌리고 다니더니
근래 와서 백수로 주저앉은
캥거루족이 방콕에 살며
망상의 날개로 우주에 날아가
줄 사람이 없는 별을 따서
빈손으로 돌아온다 합니다
최근에는 견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개 냄새를 풍기며 다니는
무늬부부가 늘어나 각자도생 하며
지상에서 천국을 누린다니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4.1.4.
신 인간 시대 3
식구의 끼니는 몰라라 해도
반려동물의 먹이는 꼭 챙깁니다
배우자와 따로 자면서도
반려동물은 곁에 품고 잡니다
누가 반려동물을 건드리면
핏발 세워 고발 고소합니다
아기는 걷게 해도 유모차에
반려동물은 태우고 다닙니다
1 순위가 된 반려동물은
파렴치한에 거짓말을 일삼는
가치가 떨어진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2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