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하남성여행기 2일차|답사기행일지(정주)
 
//

2013년 1/17 황하유람구, 소강절사당, 비간묘, 유리옥

아침에 황화유람구를 찾았다. 황하는 중국 대륙에서 장강에 이어 두 번째 긴 강으로 중화문명의 탄생지이다. 중국의 역사는 황하문명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 炎黃二帝象을 세웠는데 높이가 106미터로 미국 자유의 여신상보다 높다고 한다. 황하를 굽어보는 곳에 염황동상을 세워 이곳에서 중국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곳 광장에도 거대한 황제의 보정이 있었다. 우리는 염황이제상이 세워진 산을 올라가 전망하니 시계가 뿌연하고 강물이 적어 황화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신향시 휘현으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蕭門山과 百泉湖가 있는데 풍수가 보배로와 많은 풍류명사가 찾았다 한다. 이곳에 세워진 백천서원은 최초의 사립서원으로 태극서원으로도 불리운다. 邵雍(호 강절)이 이곳에 거쳐했고 주돈이와 정자 형제들이 이곳을 내왕해 理學의 先河로 이름난 곳이다. 소옹의 內聖外王의 학문은 이곳에서 형성되었다. 이곳에는 소강절 사당과 안락와가 있다. 安樂窩는 <주역> 계사전 ‘君子所居而安者易之序也 所樂而玩者爻之辭也 是故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 辭動則觀其變而玩其占 是以自天佑之 吉无不利 (군자가 머물러 편안한 것은 역의 질서(秩序)이다. 즐거이 완미(玩美)하는 것은 효(爻)의 사(辭)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머물 때는 그 상(象)을 살피고 그 사(辭)를 음미하고, 움직일 때는 그 변(變)을 살피고 그 점(占)을 음미한다. 이 때문에 하늘이 그것을 도와, 길(吉)하여 이롭지 않는 법이 없는 것이다.)’에서 安과 樂을 취한 것이라 한다. 잔잔한 백천호수를 거쳐 소강절사당에 들어갔는데 문앞 양 주련에 ‘辛亥年辛丑月同申 甲子日甲戌辰同甲’이라 써 있었다. 소옹이 신해년 신해월 갑자일 갑술시에 낳았다는 것이다. 소옹은 河南 사람으로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 ·천문(天文) ·역수(易數)를 배워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소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皇極經世書》를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觀物內外編》《擊壤集》등을 저술하였다. 동상을 모신 擊壤亭에는 ‘知機其神’ ‘駕風鞭霆’ 등을 편액하였다. 우리 일행은 읍으로 예를 표시하였는데 이에 앞서 여행에 동행한 나이가 가장 많으신 전교 어른신께서 버스안에서 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동작을 가르쳐 주셨다. 강절선생은 선천괘와 후천괘 문양이 있는 노란색 도포를 입고 좌우로 시종을 거느리고 서 계셨다. 여행단을 인솔하신 이천선생께서는 강절선생은 복희괘로 선천세계를 밝히신 대가이며 야산선생님은 문왕괘로 후천세계를 밝힌 대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당을 나와 소문산에 있는 안락와를 찾았다. 이곳은 일반 관람객은 잘 안 가는 곳으로 산에 난 오솔길을 통해 들어가야 나온다. 가는 길에 餓夫墓가 있었는데 묘의 주인공은 명나라 사람 彭子凡으로 청나라 군대가 入關한 후에 反淸復明을 외치다가 이곳에 처자를 이끌고 들어와 굶어 죽었다 한다. 앞에있는 큰 암석에 民族精神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안락와의 ‘窩’자는 달팽이가 몸을 웅크리고 거쳐할 정도의 작은동굴을 뜻한다. 이곳에 오니 산 속에 건물의 집터만 황량히 남아 있었다. 옆에는 重修百泉安樂窩碑記가 서 있었는데 글자가 마모되어 식별하기 어려웠다. 소옹이 학문을 닦은 안락와 터에서 잠시 눈을 감고 소문산의 정기가 내 몸에 감응하기를 기원하였다.

(주) 邵雍(1011年1月21日-1077年7月27日): 北宋哲学家、易学家,有内圣外王之誉。汉族,字尧夫,谥号康节,自号安乐先生、伊川翁,后人称百源先生。其先范阳(今河北涿县)人,幼随父迁共城(今河南辉县)。少有志,读书苏门山百源上。仁宗嘉祐及神宗熙宁中,先后被召授官,皆不赴。创“先天学”,以为万物皆由“太极”演化而成。著有《观物篇》、《先天图》、《伊川击壤集》、《皇极经世》等。

버스를 타고 가까이에 있는 비간묘를 찾아갔다. 비간은 상(商)의 28대 태정제(太丁帝) 문정(文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이름은 비(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비간(比干)이라고 불린다. 子(자)성 이므로 자비(子比)라고도 한다. 중국의 민간(民間)에서는 글과 재물(文財)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으로 숭배되어 문곡성군(文曲星君)으로 불리기도 하고, 중국의 10여명의 전설적 인물들과 함께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財神)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상(商)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은 총명하고 용맹하였으나 자신의 재능과 철학을 절대적으로 과신하여 형제와 신하들의 충고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여 듣지 않았다. 주왕(紂王)은 하남성 남부의 호족 유소(有蘇)씨을 토벌하고, 유소(有蘇) 가문의 딸 달기(妲己)를 얻었다.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는데, 달기(妲己)의 주색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점점 광폭해져 신하의 말을 무시하게 되었다. 주왕은 달기(妲己)을 멀리 하라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처형하면서, 충신들은 떠나고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이 중요 직책에 등용되었다. 비간(比干)은 주왕(紂王)에게 정치를 바로 잡을 것을 주장하다가 죽었다. 민간 설화에는 주왕(紂王)은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며 진짜 그런지 확인하겠다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상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회생불능 상태로 빠져 들고 기원전 1046년 주왕(紂王)은 주(周)나라 무왕(武王)과의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정의를 구했던 비간의 행동은 이후 '충신'의 한 본보기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 역사상 뛰어난 무장으로 알려진 충신은 많지만, 문관 출신으로 이 정도의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준 인물은 아주 드물었다. 말하자면, '세계는 넓고, 인간은 별만큼이나 무수하지만 비간만큼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정의를 구한 인물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우리들이 원하는 바도 반드시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국 이런 믿음들이 모여 비간은 신으로 승격된 것이다.

비간 동상 옆 안내판은 다음과 같이 비간을 소개하고 있었다. “비간(기원전1092~1029) : 殷商말년 沫邑人. 성은 子, 명은 干, 관직은 少師,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에 간언을 해서 심장을 도려냄을 당한 옛 충신이다. 당태종은 비간을 太師로 벼슬하고 시호를 충렬공이라 하였다. 비간은 역대 관리들의 모범이며 위대한 애국주의자이다. 비간은 ‘以德治國(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을 주장했다. 이는 중국 德禮文化의 선구가 된다. 주가 은을 이기자 무왕이 비간의 충렬에 감동하여 비간의 아들에게 林姓을 내리니 이로인해 비간은 중화 林氏의 太始祖가 된다. 민간에서는 그를 文財神으로 존칭한다.”

‘林氏之家’ ‘財神之鄕’ ‘諫臣極則(간쟁하는 신하로 법칙을 다하였다.)’ ‘取義成仁’등의 편액을 지나 비간묘에 이르니 ‘古社柏猶存 孤忠心不死’란 주렴이 양쪽에 있었다. 릉 앞에는 宣聖眞筆이란 표시밑에 ‘殷比干莫(은 비간의 묘)’라 새겨진 글자가 있었는데 이는 공자의 유일한 친필이라 한다. 莫자는 밑부분이 깨져 墓자인지 莫자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는데 다른 글자크기와 비교해보면 막자가 분명하였다. 옆에는 孔子劍刻碑가 서 있는데 내용은 “춘추시기 공자가 제자를 거느리고 비간묘에 제사하고 친히 검을 사용해 ‘殷比干莫’ 4자를 새겼으니 目前에 발현된 공자의 유일한 眞迹이다. 청 건륭황제가 佐證한다.” 이다. 릉을 한 바퀴 빙둘러 보았는데 농구장보다 넓었다. 경내에는 죽은 회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開心柏이라 하였고 벌어진 두 가지 사이에 심장모양의 형상이 있었는데 이는 비간의 심장이라고 하였다. 萬源亭이란 현대 누각이 서 있었던데 이는 세계임씨종친회가 1996년 인민폐 100만원 모금을 기념하여 세운 정자이다. 비간이 죽임을 당한 후에 임심상태의 부인이 숲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후손은 임씨가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의 임씨성은 林八及을 都始祖로 삼으니 비간의 계통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淇縣시내에 당도하였다. 기현의 옛이름은 朝歌라고 하는데 상나라의 古都이다. 시내에 殷都朝歌란 패루가 서 있었다. 이곳은 학벽시에 속해있다. 먼저 시내에 위치한 유리성을 관람했는데 소개하는 안내판은 다음의 내용이었다. “유리성은 商周시기 문화유지이다. 이곳은 西伯(즉 문왕)이 유리에 구류되어 주역을 연역한 지방이다. 문왕의 성은 姬이고 이름은 昌이다. 그는 商末 周民族의 領袖이다. 그는 仁政을 널리 베풀었는데 은 주왕의 시기를 받아 유리에 갇혔다. 회창은 갇힌지 7년동안 복희의 8괘를 가지고 64괘를 推演하였고 주역을 저술하였다. 이로 인해 유리는 주역의 발상지가 되었다.” 문왕동상을 지나 서편에 演易臺가 있었는데 문왕이 주역을 연역한 곳이다. <주역>은 세 성인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복희는 劃易하였고 문왕은 演易하였고 공자는 贊易하였다.

날이 어두워졌다. 문왕릉에는 시초원이 있는데 시초는 주역 점칠 때 쓰는 댓가지이다. 시초는 세 곳에서만 자란다는데 복희묘, 공자묘와 이곳이라 하였다. 가이드에게 이곳 시초를 살 수 있는지 물어보니 음성적으로 거래가 되는데 한 묶음에 200원짜리와 300백원짜리가 있다고 한다. 몇 분이 시초를 구입하였다. 유리성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백읍고의 무덤이 있었는데 백읍고는 문왕의 큰 아들이다. 주왕이 문왕(당시 서백후)을 감금하고 그가 과연 성인인지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죽여 탕을 끓여 문왕에게 주었는데 문왕은 죽음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모르는 척 그 국을 마시고는 옆 동산에 토했는데 그곳이 바로 ‘吐兒冢’이었다. 묘는 자그마했고 옆에는 ‘伯邑考之墓’라 쓰여 있었다. 민간에 전하길 이곳에서 토끼가 튀어 나왔다 하는데 이곳사람들은 토끼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 한다. 사당 뒤에는 동서남북 팔방으로 미로의 담장을 팔괘의 형상으로 세워 놓은곳이 있었다. 文王演易亭에는 주역을 연역하는 문왕의 동상이 있었고 벽면에는 64괘의 괘사가 새겨져 있었다.

 
잔디검사(골프)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감 동 좋 은 글 중국하남성여행기 2일차|답사기행일지(정주)
지산 추천 0 조회 32 13.03.03 21:5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3.03.04 07:34

    첫댓글 조 위에 계신분이 포청천에서 뵌듯한 차림을 하고 계시네요...
    ]우째 지산님 사진은 없고..다른분들 사진만 잇으신가요?
    아함...지산님은 사진 찍으시는구나요? ㅋㅋ

  • 작성자 13.03.04 11:31

    맨 아래줄 좌에서 5번째가 지산인데 사진이 너무 쬐그만해서
    잘 보이지 않네요.

  • 13.03.04 20:29

    남들이 다가는 관광지보다 저런 이색적인 곳을 다니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작성자 13.03.04 22:10

    우리 모임에서 설정한 관광 코스입니다.
    꼭 필요한 곳만 골라서 다녀왔습니다.
    내년에 또 계획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시면 같이 (동방문화진흥회)가 보도록 하세요.

최신목록